7월 1일 캐나다 데이(Canada Day)때 토론토의 중심지에 있는 던다스 스퀘어에서 열린 기념행사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사실 행사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념공연이었다. 높은 사람이 나와서 길게 하는 지루한 연설은 없었고, 춤을 추는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댄스로 행사가 시작됐고, 우크라이나, 필리핀으로 이어졌는데 나는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념공연에서 나는 아주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처음에 사회자가 캐나다가 특히 토론토가 다민족 사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토론토는 162개의 언어를 말하는 도시다.”

현재 유엔 가입국이 몇 나라인데 162개의 언어라는 말인가? 물론 언어는 한 나라에서도 여러 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로 여러 나라에서도, 다시 말해 영국, 미국, 캐나다처럼 영어를, 중남미의 대부분의 나라처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니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한편으로 놀라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또 한사람이 들어와 163개의 언어를 말 할지 모른다.’ 그 만큼 세계가 토론토로 오고 있다는 말도 된다. 또 특이한 점은 다른 민족들이 주최하는 행사가 여름이면 토론토의 거리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나는 올해 처음 서아시아 인들이 하는 행사를 구경 갔다. 규모도 작고 별로 볼거리도 없었지만 자기 나라의 고유의 의상을 입고 걸어 다니는 여인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행사가 그 민족들만의 행사가 아닌 토론토 시민 전체의 행사로 자리 잡고 있음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얼마 전에 길을 지나가는데 한 흑인이 차에 국기를 달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나라 국기였다. 토론토에 오래 살면 다른 나라 국기에 익숙해진다. 그날 저녁 TV를 보면서 새로 생긴 수단에서 분리한 남수단의 국기라는 것을 알았다. 차에 국기 달기는 월드컵 축구 때면 더욱 심하다. 한 때 다운타운의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아파트에 산 적이 있었다. 축구시합의 결과를 알기는 쉬웠다. 밖이 시끄러워 내다보면 어느 국기를 달고 또는 흔들며 지나가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한 때 캐나다가 월드컵 예선 경기를 할 때, 토론토를 피한다고 했다. 홈경기의 이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이민자들이 더 많이 와서 응원하기 때문에 Away Game이 되버린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이민자들을 피해서 에드몬튼이나 밴쿠버 부근의 버나비에서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축구 전용경기장이 있고 TORONTO FC라는 프로 축구팀이 있어 어느 정도 축구 팬이 형성되어 있는 탓인지 토론토에서 한다고 한다. 어찌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데, 돈은 벌어야 하기에 토론토에서 하는지 모른다.

나는 종종 올림픽을 토론토에서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늘 관중석이 메어져 사람들이 목이 메어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며칠 전 포드 토론토 시장이 올림픽 유치를 포기한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35년의 이민생활을 하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이 사회의 변화를 보았다.
이민사회를 말할 때, 부정적인 의미지만 Discrimination(차별)을 말하다가, Difference(차이)를 말하다가, 이제는 Diversity(다양성)을 말한다. 내가 사는 토론토가 다양한 사회로 변하는 것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토론토뿐만 아니라 캐나다가 나아가서는 온 세계가 다양해지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사회가 됐으면 참 좋겠다.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1500자 칼럼] 아바(ABBA)의 존재

● 칼럼 2011. 8. 14. 14:11 Posted by Zig
책꽂이에서 몇 년 동안 잠자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영 낯설어 선듯 읽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책이다. 홍성사란 출판사와 믿음의 글들 130 131편으로 나왔다는 소개로 사두었던 책이다.  
정진호 교수는 토론토에도 다녀간 분이다. 연변과기대교수요 평양과기대 부총장 되고 난 후인가 설립 모금 차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뵙던 분이다. 나와 친분이 전혀 없는 그가 작가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문영을 2권 저자로 쓴 수수께끼 같은 의구가 문영이 곧 그분의 아들 이름인 것을 알게 되자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2권 끝말에 문영이 정진호라 밝혔다.  한번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니 놓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 강형수의 처절한 삶과 그의 고뇌와 저항의식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형틀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2권 합하여 600쪽 가까이 되는 이 소설을 일주일 동안 씹어가며 읽었다. 이제나 저제나 믿음의 글로 올라와있는 진의를 파악하기 까지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답답하리 만치 강형수의 방황과 욕망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감은 지독했다. 강형수가 완전히 파멸되고 더 밑바닥까지 내려 갈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이르자 비로소 ‘아바’의 존재를 찾는다.
 
‘아바’란 보화를 만나기 위해 소설의 3/2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 과정을 거쳐가야 했던가. 완전한 실패자, 모든 것을 상실한 그가 아바를 만나는 그 길목에서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과정은 처절한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실낱같은 빛 미세한 아바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다. 
주인공 강형수는 서울공대 금속학과 출신이며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 정진호 역시 서울공대 재료공학과 출신이며 MIT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자전적 구도소설이라 밝혔지만 어디까지가 실화요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 최문선과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이 소설에선 다만 첫 번 결혼한 아내 민희와 아들 윤석이 이야기가 극적인 효과를 내며 펼쳐지고 있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아내와의 이별이 강형수로 하여금 영적인 wake up call에 결정적인 역활을 해주고 있다.
주인공을 의도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설정은 처음부터 없는 듯 싶었다. 아니 고백적인 이야기가 철저하게 진솔하다. 강형수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예수쟁이’에 대한 거부감이 내 속에서도 꿈틀거리고 있다는 자각에 나도 놀랐다. 그러면서도 위선과 교만이 묘하게 크리스천이란 명패로 포장되었다는 자신을 보며 아연해지는 것이다. 믿음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요 떠드는 것이 아니라는 이 간단한 이치를 여기서도 발견하게 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서울 대학교 입학식 날 만났던 이 구절이 강형수를 황홀하게 해주었지만 그 참 뜻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가 완전히 부서지고 난 다음이었다.

친구 박병훈의 입을 빌어 고백하고 있는 저자의 말에 눈이 고정되었다. 
“세상은 수많은 지혜서와 철학서와 종교의 경전들이 있어 왔지만 ,성경은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지혜서들이 모두 한결같이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지혜로운 자들을 위해서만 열려있는데 반하여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닫혀있으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절대 무능을 인정하고 두 손 들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그 놀라운 신비의 문을 조금씩 열어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2권 236쪽)
강형수씨가 만난 예수라는 그 생명의 강을 체험하지 않는 한 그가 비록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참 진리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신비가 이 책 속에 있다는 거다.   저자 정진호와 나는 20년 차이다. 38년생인 나와 58년생인 그와 이 소설 속에서 만남이 신기로울 만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스스로 놀라고 있다. 
평양과기대가 도마 위에 올라와 있다. 철저하게 북한의 정치꾼의 이용물로 전락되었다는 위기에 달하고 있다했다. 잘나가는 공학도가 모든 영화를 뒤로하고 그 험난한 길을 택한 것이 예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이 소설은 간접적으로 저자를 대변해 주고 있다.
(필자 주: 아바는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며 이 작품에서는 ‘아빠’로의 의미도 있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교육과학기술부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별 개정 교육과정 각론을 제시했다. 2009년의 총론에 따라 교과서별 개편 지침을 내놓은 것이다. 
각론 개발이 지난 3월부터였으니 불과 4개월 만이다. 출판사에는 내년 3월까지 교과서를 만들라고 하니 새 교과서는 1년 만에 만들어진다. 이건 과욕도 오만도 아니다.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직전 교육과정 개정은 2007년 이뤄졌다. 그에 따라 각론이 제시되고, 교과서 제작이 이뤄져 이제야 일선 학교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정권은 임기 안에 이명박표 교과서를 새로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애꿎게도 출판사들은 2007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교과서를 제작하자마자 폐기하게 됐으니, 참으로 나쁜 정권이다. 
교과서 개정은 5년 단위로 이루어진다. 교과서는 지식 전달과 함께 아이들에게 세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며 평가하는 틀을 제시한다. 따라서 오로지 사실만을, 관점이나 시각에 따라 치우침이 없이 전달해야 한다.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총론 마련에 1년, 총론에 따른 각론(교과목별 개편 지침) 개발에 2년, 그리고 출판사들의 교과서 제작에 2년 등 5년의 기간을 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런 최소한의 준칙마저 짓밟는 이유는 정치적 고려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이 정권과 정권을 떠받치는 족벌언론, 재벌, 기득권 세력 등은 집권하자마자 친일·냉전·신자유주의 시각에 따른 교과서 개편을 집요하게 압박했다. 이들의 의도는 이미 제시된 사회과정 개편 시안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 지배와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정당화하고, 인간을 상품화하고, 국가를 시장에 예속시키는 등 자신의 치부는 합리화하고, 권력과 부의 유지·확대를 제도화하는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도덕 교과서 지침은 충효와 복종을 강조하던 유신 시절로 돌아갔다. 학생을 정권 이념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낮추면서 세계 경제·금융 질서가 격변을 맞고 있다.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를 지탱해온 달러 기축통화 체제가 큰 손상을 입었음을 뜻한다. 그런 만큼 실질적·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거셀지 가늠하기 어렵다.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선 차분하면서도 효용성 있는 대응이 각별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S&P의 결정이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이 재정적자 탓에 지출을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경기가 침체하는 이중고에 빠져 있다는 데 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는 최근 어렵사리 정부 부채한도 증액에 합의했지만, 증세를 확정하지 못해 재정적자 해소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완만한 회복세로 인식돼온 미국 경제의 침체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더블딥’(일시적인 경기회복 뒤 재침체) 가능성마저 거론되고 있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미국 경제의 더블딥을 기정사실화하며 미국 주가의 추가급락을 예고한 상태다. 미국 정부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책적 한계상황에 빠져 있는 셈이다. 
유럽에선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재정위기가 확산돼 국제 금융시장의 또다른 악재가 되고 있다.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 등은 대외변수에 취약한 우리 경제에 심각한 위협요소다.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던 지난 2~5일 코스피는 10.5%나 하락했는데, 이는 아시아 주요국 증시에서 가장 큰 낙폭이다. 지난 6월 말 국내 주식시장의 외국인 비중은 31%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또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도를 나타내는 정부 발행 5년 만기 외국환평형기금 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 프리미엄도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융당국은 외환 유동성 확보에 유의하면서 국내 자본시장이 대외 위험도에 휘둘리지 않도록 안전성 강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달러화와 미국 국채를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여겨온 외환 관리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전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 비중은 지난 3월 말 60.7%인 데 반해 우리는 그 비중이 지난해 말 63.7%로 상대적으로 높다. 정부는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와 미 국채 투자 비중을 줄이는 등 다변화를 검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