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세계 80여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졌다. 9월17일 탐욕스런 금융자본에 항의해 미국 뉴욕 월가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지난 주말 서울시내 곳곳에서도 금융세계화와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양했지만 그들은 모두 ‘1 대 99 사회’에 분노했다. 
이번 시위는 ‘분노한 사람들’이 전지구적으로 한목소리를 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구호도 ‘월가를 점령하라’에서 ‘다 함께 점령하라’로 바뀌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로 전세계의 분노한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앞으로 금융세계화에 항의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데 전세계 시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들이 분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양극화 심화다. 한때 20 대 80 사회라고 불리던 게 이제는 1 대 99가 됐다고 주장한다. 1%가 99%의 사회적 자산을 독점하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일 뿐 아니라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특히 탐욕스런 거대 금융자본은 이런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온 거대 금융자본에 대한 적절한 규제를 더 미뤄서는 안 된다. 
‘다 함께 점령하라’ 시위에서는 금융자본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빈곤 철폐, 반원전, 비정규직 철폐 등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됐다. 한마디로 각 나라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경제체제를 전세계인들이 거부하고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 함께 점령하라’는 시위를 단지 사회불만세력의 일시적인 행동으로 보아넘겨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이번 시위가 바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지구적으로 일어난 시위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비조직적이고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 현행 체제를 단시간에 변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 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런 시위가 쉽게 잦아들 것 같지도 않다. 이제 전세계 지도자들은 이들의 분노를 억누르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의 분노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해결책 모색에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오랜만에 찾은 숲이다. 
어느새 가을인가, 햇살이 따갑고 바람은 쌀쌀하다. 후덥지근하던 공기에서 습기를 걷어내어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도 아직 여름을 버리지 못했는지 숲은 온통 농염한 초록이다. 숲 길 바로 곁에는 강물이 호위하듯 발걸음을 따라 흐른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제가 거기 있다고,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물소리가 큰 걸 보니 강물이 불었나 보네, 하며 강둑으로 올라서는 내게 남편이 등뒤에서 혼잣말하듯 한다.
“물이 깊으면 조용히 흐르겠지. 얕으니까 소리를 내는 거야.” 물이 깊으면 조용하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관심 받고 인정 받고 싶어 목소리를 높이는 게 생물의 특성이라면 강물은 무슨 연유로 그러는 것일까.
 
곁길에 들어서니 쓰러져 누운 나무가 눈에 띈다. 수령이 꽤 된 듯 힘겨운 삶의 껍데기를 벗어버린 몸이 공허하면서도 왠지 평온해 보인다. 한때 영혼을 가두었던, 그러나 이제는 빈 주머니에 불과한 몸체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가만, 나는 그 순간 숨을 들이킨 상태에서 내뱉지 못해 절절맨다. 검은 고목에 돋아난 새싹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주검을 뚫고 올라오는 새 생명이라니. 나는 생명의 그악스러움에 진저리를 치며 한 걸음 물러선다. 고목이 제 몸에 돋은 싹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푸르렀던 제 젊음을 다시 본 듯 반가울까. 죽은 듯한 고목에서 돋아난 새싹을 통해 육신의 빈 주머니를 내려놓고 맞게 되는 생의 부활이나 윤회를 설명하려는 것일까. 어쩌면 죽음이란, 삶에 대한 기억은 타인의 가슴에 남기고 영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꽃은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은 버려야 바다가 되고, 새는 둥지를 버려야 날 수 있다.”는 <법화경>의 구절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버림’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나는 죽음을 수용하고 생을 버렸기에 태어났을 새 생명에 자꾸 마음이 붙들린다. 죽음이란 완전한 종결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음산한 샛길을 나와 햇빛이 따가운 길로 접어든다. 가을이긴 가을이구나. 메뚜기 몇 마리가 정신 못 차리게 여기저기서 튀고 있다. 큰 것들은 꽤 멀리까지 날아간다. 부지런히 쫓아가 메뚜기 턱 밑에서 땅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건드려도 보고 깨끼발로 콩콩 울려서 날려보냈다가 따라잡고 다시 날려보내며 장난을 걸어본다. 어른에겐 이곳만큼 재미있는 놀이터도 없을 것 같다. 빨간 고추잠자리도 보인다.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역 땅에서 만나니 눈물이 핑그르르 돌만큼 반갑다.
 
잠자리 한 마리로 그리움에 울컥 가슴이 젖는다. 내일 모레가 추석인데, 우리만 빠지고 다들 한자리에 모이겠지. 전을 부치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코끝에 살아난다. 음식을 준비하느라 북적이는 집안에서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빈 방을 지키고 계실 팔순의 어머니는, 오지도 않을 맏이를 기다리며 종일 현관 문 언저리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시겠지. 자식이 모두 모이지 못하는 명절은 아무리 북적거려도 가슴 한 쪽은 텅 비게 마련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박혀있다. 
울적해진 기분에 도중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더 가면 또 뭘 하나 싶어서다. 남편도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아니면 남편 역시 고추잠자리를 통한 심리적 연상(聯想)이 나와 같았던 것일까. 왜냐고 묻지 않고 함께 돌아서준 게 고맙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쓸쓸한 정경(情景)에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본다.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다고는 하나, 오늘따라 어찌 저렇게 파랄 수가 있을까.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한마당] 왜 FTA진실을 감추는가

● 칼럼 2011. 10. 24. 15:43 Posted by SisaHan
기자는 글을 쓸 때 ‘술이부작’(述以不作)을 지침으로 삼는다.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적으라는 공자 말씀이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달만 하는 기자는 거의 없다. 보고 들은 것의 의미와 성격, 맥락 등을 파악해야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 현실에선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내막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정부가 객관적인 정보를 공개하기 꺼리는 사안일수록 더 그렇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대표적 사례다. 
2006년 3월6일 <한겨레>는 협상의 ‘4대 선결조건’을 처음으로 단독 보도했다. 미국이 협상의 선결조건으로 약값 적정화 방안과 자동차 환경기준 강화안의 보류, 국산영화 의무상영제(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등을 내세우자 우리 정부가 이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내용이었다. 보도 근거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를 담당하던 송창석 기자가 김종훈 당시 협상 수석대표를 직접 만나 들은 말이었다.
 
보도의 파장은 컸다.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퍼주기부터 하느냐는 비판이 들끓었다. 곧바로 외교부가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다. 한겨레가 허위보도를 했기 때문에 정정보도를 내도록 조정해달라는 취지였다. 언론중재위에는 김종훈 대표가 직접 나왔다. 그는 송창석 기자가 자신의 말을 날조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로서는 점잖게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송 기자가 김 대표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MP3 플레이어를 틀었다. 한겨레가 아닌 통상교섭본부의 허위·날조 신청이 명백해지자 김 대표는 송 기자의 녹취행위를 문제삼으려다 언론중재위원들에게 꾸중(?)만 듣고 돌아갔다. 
그 뒤에도 김종훈 대표는 4대 선결조건의 실체를 계속 부인했다. “4가지는 한-미 통상분쟁 현안이기 때문에 미국 쪽 얘기를 들어줬을 뿐이지 자유무역협정 협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4대 선결조건에 대한 진위공방은 한겨레 보도 뒤 6개월쯤 지나 청와대가 “4대 선결조건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발표하면서 결국 일단락됐다. 안타깝게도 4대 선결조건을 다 들어준 채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싼 한겨레와 외교부의 진실게임은 질기다. 협상 시작 전부터 불붙더니 국회 비준동의 절차를 앞둔 지금도 진행형이다. 최근 외교부는 한겨레 보도와 관련해 2건의 조정신청서를 언론중재위에 또 냈다. 하나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에 쌀시장 개방 추가협상을 약속했다는 보도이고, 다른 하나는 한-미 간에 협정의 법적 지위에서 심한 불균형이 있다는 보도다. 이에 대해 당장 언론중재위가 어떤 조정 결정을 내릴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돼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국민한테는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다. 미국과의 협정이 세계적 대세도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미국과 협정을 맺은 나라는 5개국뿐이다. 협정이 국가에 이익이 된다는 주장과 함께, 농민과 중소기업·중소상인들에게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다가올 것이라는 우려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맹목적 반대는 의미도 없고 국민 통합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맹목적 지지도 큰 해악이다. 그런데 국민 통합을 이끌어야 할 정부가 너무 맹목적 지지를 강요하는 듯하다. 협정 발효를 ‘절대적 과제’로 울타리를 쳐서 그것을 벗어난 사람들의 생각과 목소리는 뭉개려고 한다. 그러면서 협정 내용이 실제로 국가경제와 국민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진지하게 살펴보려는 언론 활동을 사실상 방해하고 있다. 요즘 술이부작의 가르침을 잠시 접고 이런 말을 내뱉고 싶을 때가 많다. 
야, 이 무도한 종미 사대주의자들아!

< 한겨레신문 박순빈  논설위원>

 
월 말~9월 초에 일어난 광주 조선대 해킹사건이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소속 간부들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엊그제 국정감사를 통해 확인됐다. 지난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 윤석양 이병의 폭로가 있은 뒤 기관 이름까지 바꾸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던 민간인 불법사찰이 지금도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방부는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해킹이 8월29일, 9월1일, 9월2일 3차례 이뤄진 사실을 확인하고, 이 가운데 9월2일 해킹에 대해서는 정확한 물증을 잡았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해킹 피해자인 조선대 ㄱ 교수의 신고로 사건을 수사해온 경찰로부터 지난달 중순 용의자의 신원 등을 넘겨받아 조사를 벌여왔다. 용의자들은 9월2일 광주의 한 피시방에서 ㄱ 교수의 논문 파일을 빼갔고, 앞서 두 번의 해킹 때는 서울 송파에서 그의 인명정보 파일을 해킹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그동안 “용의자들이 아이디를 도용당했다고 얘기한다”고 말해왔고, 당사자들이 혐의사실을 시인한 뒤에는 “지역 기무부대 요원들이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라며 발뺌했다.
 
그러나 2명 이상의 군 간부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특정 교수의 파일을 노리고 해킹을 계속 시도한 것을 단순히 ‘개인적인 일’로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오히려 이번 사건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조직적 사찰 활동의 냄새가 짙게 풍겨난다. 해킹당한 교수가 북한·러시아 전문가인데다 당시 임박한 이 대학 총장선거 후보의 핵심 참모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국방부는 지난달 중순까지의 경찰 수사만으로도 기무사 해킹 범죄의 전모를 충분히 밝힐 수 있는데도 사건 발생 한 달이 넘도록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의도적인 사건 은폐나 고의적 수사 지연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20년 전과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기무사, 이런 기무사의 일탈행위를 묵인방조하는 국방부의 모습이 참으로 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