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본 도쿄에서 대규모 원전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수습돼가고 있다는 정부 발표를 믿지 않고 있으며, 기존 원전정책 유지를 고집하는 정부 방침에 분노하고 있다. 
사고 당시 200~300㎞ 바깥의 도쿄 일대까지 피난 대상에 포함될지 모를 상황에서 간 나오토 전 총리는 “그렇게 되면 3000만명이 피난해야 하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립이 불가능해진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나중에 토로했다. “나라의 절반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되는 사고라면 100년에 한번뿐일지라도 그런 위험부담은 져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단 한번의 원전사고로 도쿄 등 수도권이 초토화되고 나라가 망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악몽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농작물과 수산물 방사능 오염 공포 때문에 지역경제가 주저앉을 지경이다. 여전히 방사성 물질을 내뿜는 원자로 냉각수로 다량의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가 생겨나 땅과 바다를 망치고 있다. 오염 토양 거죽을 5㎝ 두께로 1억㎥나 걷어낸다는 계획은 실행하기 쉽지 않다. 그곳 주민들은 생전에 다시 고향땅을 밟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앞으로 100만명 이상이 방사능 오염으로 숨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럼에도 후임 노다 요시히코 정권은 기존 원전정책 유지를 공언하고 있다. 원전 기득권을 누려온 원전마피아의 반격이 그만큼 거세다. 도쿄 시위는 이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기도 하다.
 
2022년까지 원전을 모두 폐기하기로 한 독일의 원전업체 지멘스가 원전 관련 사업 포기를 선언한 것은 ‘원전 르네상스’가 근거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 뒤 녹색·사민당으로 쏠린 민심은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련 정부가 최근 지방선거에서 7번 연속 패배하는 데 일조했다. 지멘스는 이런 상황에선 원전사업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탈원전 바람이 불고, 원전 전력생산 비용이 더 싸다는 신화는 무너졌다. 사고 뒤의 참상과 비용까지 고려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세계 최고의 첨단 원전을 개발하겠다며 거꾸로 가고 있다. 시민들마저 일본의 참화를 이미 지난 일로 여기는 듯하다. 동아시아 3국 중 원전사고에 가장 취약한 나라는 중간에 놓인 우리다. 사고는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로 인한 비극을 막으려면 우리도 하루빨리 탈원전 쪽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1500자 칼럼] 고통 나눔의 묘미

● 칼럼 2011. 9. 30. 15:05 Posted by SisaHan
삶의 나눔은 참 소중하다. 더욱이 고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더 소중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J씨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삶의 위기를 맞이했던 때가 내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1년 후였다.  장애인 큰 아들을 기르며 다져졌던 강한 의지와 씩씩했던 J씨 모습은 막내아들의 교통사고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아들이 차에 치어 혼수상태에 빠져있다는 전화는 큰아들이 뇌성마비 진단이 내려졌을 때 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는가 앞이 보이지 않더란 것이다.
생명엔 지장이 없었으나 심한 뇌진탕은 막내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쉴 새 없이 찾아드는 두통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없는 형벌이었다.
 
‘엄마가 강해져야 하는데…’  견디기 어려울 때 마다 근교 바닷가로 나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너머 세계 속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기를 소원했다.
왜 하필이면 우리 아들들이냐구요? 차라리 나를 넘어뜨리지 날 보고 어떻게 하라구요? 소리치며 절규하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아들이 너무 가엾어 너무 마음이 아파 가슴 쓰림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러나 J씨가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고 기다려주고 견디며 애정을 쏟아 붙은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단 말인가.    
J씨 막내는 한창 잘 나가는 30대 청년이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인정받는 엘리트 일꾼이었다. J씨 가정에 더할 수 없는 자랑스런 막내였다.  그런 그가 횡단보도를 걷다가 차에 부딛힌 것이다. 몇 날 동안 코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아들은 더 이상 총명한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고 이후 1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J씨와 나는 공원묘지를 소요하며 그간 하지 못했던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J씨는 고통을 통해 살아가는 이유를 설명하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죽고 싶도록 견딜 수 없는 절망가운데 처해 있었음에도 우리를 붇들어 주고 견딜 수 있었음은 사랑과 믿음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서로는 고백했다.

J씨나 나도 우리들의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한 참변을 당했을 때 제일 먼저 떠 올랐던 것이 죄책감이었고 후회스런 일로 점철 되었었다. 잘못해 준 일만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아니 심지어는 혹시 내 잘못 때문에 생긴 결과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슴을 치며 고통스러워했다. 
세상이 하얗게 뒤집어지는 절망의 구덩이에서 기어올라 J씨도 장애인 된 아들과 나도 남편과 더불어 살면서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생긴 것은 적어도 10여년의 세월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거기엔 끊임없는 인내와 수용력, 사랑만이 가능했음을 지나놓고 보니 그러했다. 이는 한시적인 간병인의 의무가 아니고 평생 간병인의 사명을 끝내해야 할 우리지만 J씨는 함께 일어나준 아들이 되어주어서 고맙고 나는 의연하게 당신의 갈무리를 깔끔히 하며 견뎌주는 남편이 늘 고맙기만 하다. 
불행의 경중이 결코 비교급은 될 수 없다 해도 J씨의 삶의 모습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모정의 한 표본임을 만날 적마다 피부에 와 닿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작업은 혼자서 됨이 아님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고통분담의 묘미는 나누면 나눌수록 적어져 간다는 것이다. 고통의 예술성이 여기에 있다.  불행은 누구에나 닥칠 수 있다. 선하게 산 사람이나 악하게 산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닥쳐온다. 그런데 이 불행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로소 우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겪고 난 후 부터였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문화방송이 <PD수첩> ‘광우병 편’을 문제삼아 사과방송과 사과광고를 낸 데 이어 이번에는 제작진을 인사위에 회부하고 징계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무죄를 받고도 사과문을 내는 황당한 조처를 한 데 대해 직원들에게 사죄를 해도 시원찮을 김재철 사장이 오히려 “징계가 불가피하다”고 했다니 문화방송 시계는 거꾸로 도는 모양이다.
대법원이 지난 2일 내린 최종판결은 형사는 무죄, 민사에서는 정부 협상 태도 등에 대한 비판은 의견표명에 해당돼 정정보도할 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 전부다. 대법에서 인정된 PD수첩의 허위보도는 한국인 유전자형 관련 보도뿐이다. 2심에서 허위사실이라고 판단했던 다우너소의 광우병 위험, 아레사 빈슨의 인간광우병으로 인한 사망 보도에 대해선 문화방송 제작진이 형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민사에서도 승소해 상고할 수 없었고, 따라서 대법에선 아예 다뤄지지도 않았다.
내용적으로 따져봐도 아레사 빈슨은 보도 이후에야 인간광우병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다우너소는 광우병 위험 때문에 미국에서 2009년 전면적인 도축 금지 조처가 내려진 점 등에 비춰 보면, 대법에서 본격 심리가 이뤄졌다면 어떤 판단이 내려졌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정보도가 확정된 한국인 유전자형 관련 보도 역시 “한국인의 94%가 광우병에 취약한 유전자형을 갖고 있으니 광우병 걸린 쇠고기를 먹으면 발병할 확률이 94%”라고 표현한 것으로 ‘착오’나 ‘과장’ 수준의 잘못으로 보여진다.

이처럼 표현상의 오류 등 일부 잘못은 있으나 법률적으로는 사실상 문화방송 쪽의 승리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경영진이 ‘대법원이 3가지 주요 내용을 허위로 결론내렸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실은 사과광고에 이어 징계까지 하려는 것은 정권에 대한 코드 맞추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치적 꿍꿍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 내용은 이명박 당선자와 현 정권 실세들이 미국과 협상도 하기 전인 2008년 1월 미국산 쇠고기 개방을 미국 쪽 인사들에게 약속해준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PD수첩은 당시 이런 약속에 맞추려 졸속으로 진행한 쇠고기 협상을 앞장서 파헤친 선구적인 심층보도였음이 다시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정부와 검찰, 수구언론이 장단을 맞춘 마녀사냥의 치부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문화방송 경영진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과 대선 가상대결에서 박 의원을 앞서는 여론조사 결과들이 나왔다. 또 안철수-박원순 단일화 이후 안 교수 지지층의 움직임이 궁금했는데 새로운 여론조사 보도를 보면 박 변호사로 옮겨가는 효과가 꽤 나타나고 있다. ‘안철수 바람’에 깃든 시민들의 여망이 무엇인지를 정치권이 제대로 살피는 게 더욱 긴요해지고 있다.
시민들이 안철수 바람을 통해 정치권의 철저한 각성과 변화를 주문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특히 안 교수가 보여준 공익에 대한 헌신적 자세와 희생정신, 겸손함 등을 시민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음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런 터에 대변인 등 한나라당 일부에선 안철수-박원순 단일화를 강남좌파의 야합쇼라고 깎아내리고 나섰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한 책임을 인정하고 자숙해도 부족한 마당에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야3당과 시민단체들은 서울시장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2단계 경선을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야권 각 주체는 후속 논의 과정에서 기득권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하며, 시민단체나 작은 정당 쪽도 능력 범위를 넘는 지나친 요구를 해선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 가뜩이나 깊게 자리잡은 정치불신 정서가 차제에 더욱 증폭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도 있다. 기성 정당들이 제구실에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정과 시정 난맥상의 원인 제공자인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전임 서울시장이 바로 ‘탈정치의 정치’와 ‘탈여의도 지도력’ ‘기업가형 지도력’을 자처했음도 잊어선 안 된다. 정책 개발과 실천을 담보하는 사회적 약속의 틀을 무시하고 인물 위주로만 흘러서는 정치를 제대로 바꾸기 어렵다. 가령 야권의 경우 통합이나 연대의 틀을 세워나가는 노력은 오히려 더욱 필요해졌다.
안철수 바람을 진보-보수의 세력대결 정치에 식상한 결과라거나, 심지어 정당들이 진보 선회(좌클릭)에 열중하다 닭 쫓던 개가 되었다는 일부 보수언론의 해석도 근거 없는 제 논에 물 대기 주장일 뿐이다. 민주당보다도 진보성향이 강한 박 변호사한테 안철수 바람의 상당 부분이 옮겨가는 것만 봐도 이 점은 분명하다. 만약 정치권이 보수언론의 주문처럼 복지 담론 등을 후퇴시킨다면 그것은 대표적으로 ‘안철수 민심’을 거꾸로 읽는 결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