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River In The Pines -

지난 11월 2일, 로이 톰슨 홀에서 있었던 죤바에즈(Joan Baez) 콘서트를 구경 갔다. 80년 대 초반에 가고, 근 30년 만에 두 번째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다.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캐나다로 막 이민을 오기 전, 시를 쓴다는 여자를 그녀의 학교 앞 다방에서 기다릴 때였다. 약속 시간에 나오지 않아 만남이 늘 마지막 같을 때, ‘The River In The Pines’가 흘러나왔다. 영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 내용은 몰랐지만 슬픈 노래라 느꼈고 예감처럼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가슴 속에 슬픔처럼 강물이 흐르고……. 
이유 분명치 않고 명분 없던 이라크 전쟁 중에 그녀는 왜 노래도 없이 침묵을 지켰을까? 나이가 많아 은퇴를 했을까? 아니면 미국의 역사와 전통인 마녀사냥을 당했을까? 그녀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사코와 벤자티’, ‘사이공 신부’를 노래했고, 융단 폭격이라는 무차별한 폭격을 반대해 하노이에 가서 전쟁에 반대했다.
 
그녀는 살아 노래 부르고 있었다. 가로수의 낙엽은 떨어지고 늦가을인지 아니면 초겨울인지 애매한 2009년 밤 토론토의 메시 홀에서 공연한다는, 광고를 우연히 보았다. 70년 말, 20대 초반에 바다를 건넌 텅 빈 가슴을 달구었던 그녀의 노래는 슬픈 사랑보다 분노에 떨리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 기타소리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월남에 젊은 병사를 파병한, 반공이 국시인 우리의 군사정권 아래 대부분 금지곡이었다.    
겨울의 문턱, 남의 땅 걸을수록 키가 작아지는, 바람 불지 않아도 어깨 움츠리는 소시민이 되고, 60년대 월남에서 싸우던 미군은 먼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고, 젊은 병사들 죽어 영웅이 되어 자랑스러운 성조기에 덥혀 돌아오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의 피는 강물처럼 흘러도, 촛불을 들고 잠시 데모했을 뿐, 열기는 촛불처럼 이내 꺼지고 60년대의 뜨거운 반전운동은 없었다, 이제 먹고 살기 바쁘고 자유를 누리기에 바쁜 선진국 시민들은 먼 나라 일에 분노의 목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이년 전에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과 비싼 입장료를 생각했다. 전쟁이 전쟁을 끝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평화는 전쟁 사이의 휴식시간,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일까? 쳐들어간 이유가 잘못이라면 사과를 하고 나와야 하는데, 눌러 앉아 점령한 땅 나올 생각 하지 않는다. 미국식 민주주의 가 사막에서 꽃 피우기를 바라며…… 역사는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남의 나라 점령하여 주둔한 군대 영원히 머물 수 없다.
 
그녀는 이제 예전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고음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가끔 쉰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혼자서 거의 서서 1시간 30분이나 노래를 부른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노래 중간 중간에 말을 하여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We have to see this world in both eyes, not to left, not to right.”
 이번에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Occupy에 대해서 말했다. 
 “They are extraordinary people, and we are extraordinary people, too.” 
나는 이번이 그녀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갔지만,  그녀의 노래는 끝이 나지 않았다고 공연장을 나오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야 말로 죽을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뜻이 담긴 노래는  강물처럼 흐르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괴담으로 연명하는 정권?

● 칼럼 2011. 11. 21. 08:46 Posted by SisaHan
2008년 경제부 선임기자로 일하던 때다. 한가지 괴담이 떠돌고 있었다. ‘9월 위기설’이다. 경제가 다소 불안하기는 했다. 외국 자본 유출로 환율 오름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앞날을 내다볼 능력도 없거니와 개인적으로 괴담이나 음모론을 믿지 않는 까닭에 크게 무게를 두지는 않았다. 
8월31일 일요일.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신문에 ‘9월 위기설’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위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기사를 썼다. ‘9월’과 ‘위기’란 단어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금융시장이 열리자마자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했다. 이른바 금융위기의 시작이었다. ‘내 기사 때문인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기사와 상황은 잘 맞아떨어졌다. 하루 앞서 정확한 예측 기사를 썼으니 이보다 더한 특종이 있겠는가.
 
사실은 경제가 불안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만 전망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투자자들은 9월이 되자 혹시나 해서 자금을 뺐고, 위기를 경고하는 기사가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이 괴담의 진원지였던 셈이다. 투자자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해 실제 위기를 야기하는 데 일조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위기설이 없었다고 금융위기가 오지 않았을까? 그건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금융위기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괴담이 위기를 부른 게 아니라 위기의 전조로 괴담이 돌았다고 보는 게 맞다. 그것이 정확한가 여부는 둘째 문제다. 괴담은 사회가 불안하고 정부가 신뢰받지 못할 때 나타나는 하나의 사회현상일 뿐이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계기도 사실은 괴담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 와중에 한가지 소문이 돌았다. 70년 이상 존재해온 상인 비밀조직이 정부와 결탁해 고의로 기근을 유도하고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조직이 프랑스 전역에 침투했고, 공무원들을 모두 매수했다는 얘기가 더해졌다. 루이 15세가 1000만파운드를 챙겼다는 소문과 함께. 시민들은 격분해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왕정을 무너뜨렸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괴담을 믿고 낫과 창을 들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빵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 죄 없는 빵가게 주인이 몇 조각 빵을 숨겨놨다는 이유로 군중에 의해 처참하게 목이 잘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혁명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괴담이 아니었다 해도 역사적인 상황이 혁명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담은 사회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언제나 괴담이나 음모론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할 때 급속도로 퍼져간다는 점이다. 사건의 원인이 분명히 밝혀지고 문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괴담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사회가 괴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논란을 괴담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괴담을 단속하겠다고 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싸우겠다는 말과 같다. 그보다는 정부가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협정 체결 과정에서 얼마나 소통하고 여론을 반영했는지 돌아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사실 국회조차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정을 타결하지 않았던가. 
정부는 촛불시위 때 광우병 괴담, 금융위기 때 미네르바 괴담을 탓했다. 언제까지 괴담으로 연명할 것인가. 괴담을 부풀려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장본인은 정작 정부가 아닌지 묻고 싶다.

< 한겨레신문 정남기 경제부장 >


[한마당] 내가 믿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 칼럼 2011. 10. 29. 14:57 Posted by SisaHan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섬에는 군대를 두 번 갔다 온 청년이 있었다. 어렵게 의무복무를 끝내고 돌아왔는데, 또다시 징집영장이 나왔다. 입대 환송회까지 열어주었던 면사무소의 병사계가 그의 복무기록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섬의 권력자였던 한 유지의 아들을 대신해서 군대에 갔던 것이다. 청년의 집안에는 이 일을 해결할 만한 능력자가 없었고, 그 내막을 알고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을 바루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속절없이 군대를 다시 가야 했다. 그러나 몸은 튼튼해서 두 번째 복무도 무사히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으니,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또 하나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다행한 편에 속한다.
 
중학교를 다닐 때 우리 가족은 목포의 변두리 동네에서 살았다. 옆집 청년이 제대를 석 달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나는 그때 내 발이 세 개는 들어갈 군화를 처음 신어 보았다. 청년은 신실해 보였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군대를 제대하면 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귀대한 후 편지가 한 번 왔다. 시내의 큰 식당에 찾아가서,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던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달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편지를 내가 그 집 사람들에게 대신 읽어주었기에 그 내용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러나 청년은 제대 날짜를 넘기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다섯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청년의 어머니가 어렵사리 노자를 구해 전방부대를 찾아갔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청년이 탈영을 해서 자기들도 행방을 모른다며, 청년의 어머니를 도리어 죄인처럼 다루더란다. 아들이 무슨 일로 부대에서 사망했겠지만 탈영병으로 처리되는 바람에 보상을 받기는커녕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그 부모들도 지금은 저세상 사람이 되었겠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일들인데, 요즘은 잠자리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문득 그 사람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한숨을 뱉게 된다. 몸이 허해지면 옛날에 아프던 자리에 다시 통증이 온다더니 그 말이 틀린 것 같지 않다. 눈앞의 참혹한 광경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주볼 수 있다 해도, 옛날의 마음 아팠던 기억에는 손발이 묶여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내가 우선 나를 위로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고 혼자 말해보는 것뿐이다. 그러나 많이 달라지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사일구를, 유신시대를,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겠다. 
나는 이 나라가 진실로 억울한 사람들의 원을 풀어주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해 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더 나이가 들어, 제도 속에 들어가 어쭙잖게라도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들어섰기에, 그 책임을 어디에 전가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러서도, 젊은 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굳게 믿는다.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지배해온 사람들이 동상이나 기념관을 세워 추앙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밑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옛날과 많이 달라진’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가 그 하늘에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나라의 글자를 만든 임금이 있었고, 어떤 도를 실천하려는 선비들이 있었고, 인간답게 살기를 애쓰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얻었던 것과 같다.

<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칼럼] 유신헌법은 원천무효다

● 칼럼 2011. 10. 24. 18:55 Posted by SisaHan
지난 13일 헌법재판소에서는 대통령 박정희가 제2의 쿠데타에 의해 강압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가 위헌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고 한다. 박정희 통치 아래서 살아보지 않은 신세대나, 살았다 하더라도 그 매운맛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관심 밖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함께 노력해서 제대로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역사다. 
박 대통령은 1972년 10월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 비상국무회의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아니어서 입법권을 가질 수 없다.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 강화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한 것은 명백한 국헌문란으로 ‘유신쿠데타’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다. 유신헌법은 당시의 기존 헌법이 규정한 개헌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후예들은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9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확정됐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더구나 비상계엄령이 지속되고 군 탱크가 진주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언론의 비판도 금지된 상황이었다. 세계 정치사에 이런 선거나 투표가 있은 적이 없다. 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이른바 ‘95% 이상 찬성률 공작’이라는 지침을 행정부 공무원들과 관변단체, 그리고 군 간부들에게 강요했다. 
박정희는 여당 의원도 항명을 하면 중앙정보부를 시켜 붙잡아다 가혹하게 고문하고 수모를 주었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제정 때는 야당 인사와 대학생들까지 다수 불법 연행해다 모진 악행을 가했다. 1975년 2월28일치 신문들은 당시 신민당 의원들이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유신 때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자행한 고문 악행에 대해 밝힌 것을 보도했다. 이세규, 조연하, 김상현, 이종남, 강근호, 김녹영, 김경인, 최형우 등 수많은 야당 의원들이 인간 이하의 잔혹행위에 대해 증언했다. 몽둥이 구타, 잠 안 재우기, 물고문 등 이루 다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고문 기술이 동원됐다.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 경찰과 헌병대의 고문 기술에 결코 못지않은 야만행위였다.
 
그즈음 반독재 운동을 벌이던 학생 간부들도 자신들이 당한 고문피해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제대로 증언해야 한다. 박 정권은 1971년 10월15일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진주시켰다. 모두 1889명의 대학생을 연행해, 그중 학생 간부 177명을 학교에서 제적시키고 군대로 강제 입영시켰다. 이것이 다음해 터지는 유신체제의 정지작업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문리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대학 교정에서 체포돼 동대문경찰서 지하 취조실과 중앙정보부에서 7일 동안 불법감금을 당한 채 고문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서는 킥복싱과 같은 주먹질·발길질을, 중앙정보부에서는 몽둥이찜질과 구둣발로 짓이기기 등의 고문을 당했다. 군대 생활 내내 왼쪽 무릎의 관절통에 시달리다가 제대 후에야 썩어 들어가는 뼈를 깎아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학생운동 동료였던 수술 의사는 원인을 묻지도 않고 “이걸 여태까지 그대로 두고 왔나…”라며 안타까워했다. 
박 대통령이 최측근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총에 맞아 숨진 10.26도 다가온다. 유신체제는 10.26으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나는 유신체제의 불법성과 고문 악행에 대해 후대의 책임있고 역사의식을 가진 정부가 공식 사과하고 법적인 무효 선언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히틀러에 의한 나치 정권의 범죄행위들에 대해서도 후대의 독일 정부가 나서 공식 사과하고 청산법을 제정했다.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 체제를 어떻게 청산하는지에 따라 그 나라의 미래 국가위상이 좌우될 것이다. 박정희 권력과 유신체제가 저지른 비인간적 고문과 야만적 체제폭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한 발짝도 더 앞으로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김재홍 - 경기대 교수, 정치전문 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