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파괴 극단주의엔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민주주의 방어논리 약해지면 극우 언제든 부활
압도적 우세 보이지 못한 지선이 던지는 경고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제도적 인식 불충분
정권 획득 넘어 시민참여, 사회규범으로 다져야

 

2024년 12월 국회의사당 앞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집회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 
 

2026년 2월 독일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는 세계가 이미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자리였습니다. 올해 포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표현은 ‘under destruction(파괴되고 있는)’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80여 년간 유지되어 온 국제질서, 즉 국제연합(United Nations)을 중심으로 한 국제협력 체제와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근간으로 유지되어 온 국제규범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국제사회 지도자들의 입에서 공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Reuters, 2026.2.15 / Financial Times, 2026.2.16).

 

회의 전체를 지배한 분위기는 매우 냉혹했습니다. 협력의 시대는 빠르게 저물고 있었습니다. 규범과 질서, 타협과 협상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던 시대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1극 체제는 흔들리고 있었고, 국제사회는 각국이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우선하는 다극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세계는 이제 공존보다 거래가 우선되는 시대로, 협력보다 각자도생이 강조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 주요 국가의 외교·안보 책임자들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Politico Europe, 2026.2.15).

 

문제는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가 외교와 안보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제규범과 협력의 질서가 흔들릴수록 민주주의와 인권, 공동체 가치 역시 함께 위협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경제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심화될수록 극우세력은 빠르게 성장합니다. 미국의 MAGA 세력을 비롯해 유럽과 남미, 아시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닙니다. 극우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먹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차별과 혐오를 조직하고, 조롱과 음모론을 확산시키며 공동체의 규범과 공공성을 잠식합니다.

 

오늘날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국 극우는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New Right)’라는 이름 아래 전국적 조직체계를 갖춘 이후 보수·극우정권 형성의 핵심 기반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이들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시장근본주의, 강한 반공주의를 결합하며 기존 보수세력을 더욱 우경화시켰고, 이후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윤석열정부를 거치며 정치·언론·종교·온라인 플랫폼 영역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왔습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과 기무사가 주도한 댓글공작과 온라인 여론조작 구조는 오늘날 한국 극우 생태계 형성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극우세력은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 일부 종교세력과 결합하며 거대한 정치 생태계로 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MAGA 세력과 사실상 수직계열화되며 중국 혐오와 선거 음모론, 혐오정치를 본격적으로 유통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극우는 혐오와 음모론, 조롱과 공포를 플랫폼 알고리즘 안에서 끊임없이 증폭시키며 대중의 감정을 조직하는 새로운 정치기술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번 6·3 지방선거 역시 이러한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이 선거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과 부정선거 선동은 선거기간 내내 반복되었고, 혐오와 조롱은 정치적 동원 수단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 시민사회는 윤석열의 12·3 내란을 가까스로 저지했고, 이재명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현재 한국은 내란세력 청산과 민주공화정 회복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실제로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코스피 9000선 돌파와 사상 최대 무역수지 기록,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 성과와 실용 중심 정책을 바탕으로 전국 단위 국정지지율 60%를 상회하는 강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진영은 압도적 우위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를 근소한 차이로 내주었고, 경남지사 선거 역시 아쉽게 놓쳤습니다. 한때 앞서가던 대구시장 선거도 끝내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평택을 선거에서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협력 대신 상호 비방 속에 선거를 치르며 결과적으로 국민의힘 후보 당선을 허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왜 내란을 극복하고 높은 국정지지율과 경제성과를 확보한 정부 아래에서도 민주진영은 정치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극우는 반복해서 재조직되고 공론장을 잠식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민주공화정의 토대를 허물려는 극우세력으로부터 민주공화정의 가치와 제도를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 것일까요. 협력과 공존, 공동체 가치와 시민정신은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발전시켜온 정치적 자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도적으로 구현된 형태가 민주공화정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시민들이 서로를 시민으로 존중하며 공공성과 사회규범을 유지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혐오와 차별이 공동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공존 질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민주공화정이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안에서 근본적으로 도전받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공화정을 선언하는 일이 아닙니다. 극우의 공격으로부터 민주공화정의 가치와 제도를 실제 사회규범과 제도 속에 뿌리내리고, 시민의 힘으로 그것을 지켜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이 칼럼은 바로 그 문제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려는 시도입니다.

 

■ 왜 민주진영은 압도적 승리를 만들지 못했는가

 

이번 6·3 지방선거는 여러모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기묘한 선거였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민주진영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의 내용과 결과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장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는 매우 특수한 정치적 조건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한국 시민사회는 불과 1년 전 윤석열의 12·3 내란을 가까스로 저지했습니다. 내란세력 청산과 민주공화정 회복은 국민적 과제가 되었고, 시민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와 중요성을 다시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이후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안정적인 외교 성과와 실용 중심 정책, 경제 회복 흐름을 바탕으로 높은 국정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코스피 8000선 돌파와 사상 최대 무역수지 흑자 기록은 한국 경제가 다시 안정과 성장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한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최근 한국은 경제·외교·국방·문화 전반에서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요 외신들 역시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짧은 시간 안에 국가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복원해낸 한국 사회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한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정치위기를 제도적으로 흡수해낸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으며(Financial Times, 2026.5.18),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역시 한국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기술·문화 경쟁력을 드러내며 민주주의 회복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The Washington Post, 2026.5.22). 반면 국민의힘은 내란세력과 명확히 결별하지 못했습니다. 윤어게인 세력과의 모호한 공존 속에서 극우와 거리두기에 실패했고, 선거기간 내내 중국 음모론과 부정선거 프레임, 혐오정치에 의존하는 모습을 반복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민주진영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거 결과는 기대와 판이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민주개혁세력 내부의 이완된 분위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차기 권력을 둘러싼 경쟁과 계파적 이해관계, 몸 사리기식 선거 캠페인, 장기적 민주개혁 비전의 부재, 민주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연대 유지의 실패 등을 우려하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평택을 선거는 이러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시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내란 청산과 민주개혁의 연대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선거판은 민주진영 내부 경쟁과 상호 비방으로 흐르며 본래의 정치 의제를 약화시켰습니다. 타 지역에 비해 낮은 투표율 역시 이러한 시민들의 피로감과 실망을 반영합니다. 그 틈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국민의힘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선거전략 실패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한 지지율 문제가 아닙니다. 내란을 극복하고도, 높은 국정지지율과 경제성과를 확보하고도 민주진영이 압도적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공화정의 사회적·제도적 토대 자체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민주개혁세력이 오랜 시간 ‘생존 중심 정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합니다. 물론 민주당계 정치세력의 역사적 공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군부독재와 국가폭력, 지역주의와 색깔론, 검찰권력과 보수언론 카르텔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축적했습니다.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문재인정부를 거쳐 결국 이재명 정부까지 네 차례의 민주정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제도적 인식은 충분히 깊어지지 못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순히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주권과 권력 견제, 공공성과 사회규범, 시민참여와 숙의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제도화해가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특히 혐오와 차별, 극단주의와 권위주의가 공동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민주주의 스스로를 방어하는 구조까지 포함합니다. 민주공화정은 선거의 승리가 아니라 시민공동체의 자기방어 체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민주공화정은 종종 ‘정권 획득’의 문제로 축소되어왔습니다. 독재와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시민참여와 사회규범, 권력기관 개혁과 민주주의 자기방어 체계로 끝까지 제도화하는 데는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것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공론과 연대가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 역시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촛불혁명 이후였습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민적 성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수백만 시민이 광장을 지켰고,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시민 스스로 지켜냈습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복지 확대, 검찰개혁 논의의 본격화 등 일정한 역사적 성과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촛불혁명이 요구했던 구조개혁은 끝내 완결되지 못했습니다.

 

촛불은 광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권력기관 개혁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은 반복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권력기관 구조개혁 역시 부분적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국민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반민주 세력의 구조적 문제를 끝까지 도려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윤석열 검찰권력의 집권이라는 역설적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개혁은 멈췄습니다.

 

극우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극우세력은 조직을 재정비했습니다. 플랫폼 알고리즘과 혐오정치, 음모론과 감정동원을 결합하며 민주주의의 공론장 자체를 잠식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부 정치세력 내부에 존재했던 안이한 현실 인식이었습니다. 검찰과 사법권력, 보수언론과 극우세력을 구조개혁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수준 관리와 통제를 통해 공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은 권력기관의 자율적 절제를 기대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주권 아래 권력을 구조적으로 제한하고 감시하는 체제입니다. 그러한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실천 의지가 충분히 강고하지 못했던 결과가 결국 윤석열 검찰권력과 극우세력의 재등장을 허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 바로 천주교정의평화연대의 성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6·3 지방선거 직후 발표한 성명서 「민주당 지도부는 답하라 — 왜 내란 의혹 핵심 인물들을 기소하지 못하게 방치했는가」(천주교정의평화연대, 2026.6.4)에서 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다음과 같이 직격했습니다. “개혁은 느리면 실패한다. 정의는 지연되면 조롱당한다.”그리고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에게 시간을 주면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얼굴을 바꾸고, 다시 권력을 향해 돌아온다.”이 성명이 던지는 경고는 분명합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면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여러 차례 민주개혁의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은 반복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그 사이 극우세력은 다시 조직되었고, 민주주의는 내부에서 잠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역사는 반복되어왔습니다.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문재인 정부도 ‘국민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반민주 세력의 구조적 뿌리를 끝까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검찰권력과 극우정치, 보수언론 카르텔은 반복적으로 부활했고, 결국 윤석열 정권과 12·3 내란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공화정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권력의지는 정치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문제는 그 권력의지가 무엇을 지향하는가입니다.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제도적 실천 의지가 분명하다면, 권력의지는 시민주권 확대와 권력분산, 당원민주주의 강화와 참여민주주의 확대 방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특히 민주공화정에 대한 의지는 당원민주주의를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민과 당원의 참여를 확대하고 공론과 숙의를 강화하려는 노력 없이 민주공화정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권력의지가 시민주권 확대와 참여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질 때 그것은 민주공화정의 힘이 됩니다. 그러나 공적 가치보다 권력 재편 경쟁이 우선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계파정치와 붕당정치로 추락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파당정치가 강화될 경우 시민주권과 공공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복잡해질수록 민주공화정에 대한 더 투철한 인식과 제도화 노력이 요구됩니다.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경제 불안과 극우 포퓰리즘이 확산될수록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방어할 제도적 구조를 더욱 강하게 요구받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 역시 민주공화정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합니다. 민주공화정이 단순 다수결 체제가 아니라 공존과 숙의의 질서라면, 선거제도 역시 극단적 적대정치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승자독식 구조는 극단적 진영대결을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정치세력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지지층을 극단적으로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혐오와 공포, 음모론 정치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유럽 여러 국가들이 결선투표제를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선거의 경우 결선투표를 통해 과반의 사회적 동의를 확보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극단주의 세력의 일방적 집권을 억제하는 민주공화정의 안전장치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BBC, 2025.7.8 / Le Monde, 2025.7.9).

 

특히 프랑스에서는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 때마다 공화주의 연합이 결선투표 과정에서 형성되어 극단주의 확산을 억제해왔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순 승패의 체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존을 유지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결선투표제는 단순한 선거기술이 아닙니다. 연합정치와 타협, 공론과 사회적 합의를 제도적으로 촉진하는 민주공화정의 장치에 가깝습니다. 비례대표 확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 정치는 지나치게 거대 양당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청년과 노동, 지역과 환경, 시민사회와 소수자의 다양한 요구가 실제 정치 구조 안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들은 정치를 거대한 진영 싸움처럼 인식하게 되고, 그 틈을 극우 포퓰리즘이 파고들게 됩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2018)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2023)를 통해 민주주의 붕괴는 군사쿠데타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는 극단주의 세력을 정상 정치세력처럼 방치하고, 제도개혁을 지연시키며, 정치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내부로부터 서서히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는 단순한 정권 유지나 선거 승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민주공화정을 실질적 사회질서로 뿌리내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시민들이 서로를 시민으로 존중하며 공공성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다시 구축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방치될 때 가장 먼저 내부에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공론과 자기방어의 제도가 멈추는 순간 민주공화정 역시 언제든 다시 위기에 놓일 수 있습니다.

 

■ 민주공화정은 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가

 

— 뉴라이트, 인지전(認知戰), 그리고 전투적 민주주의의 시대

 

극우 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현실인식입니다.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시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민주화를 진척시켜왔음에도 민주공화정을 여전히 안정적으로 제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극우는 반복해서 부활하는 것일까요. 왜 시민들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혐오와 차별, 음모론과 역사왜곡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제질서 변화와 한국 사회 내부 변화의 유기적 흐름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 흐름은 한국 사회의 극우정치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냉전 시기 한국 극우의 핵심 기반은 반공주의였습니다. 군사독재와 국가주의, 반북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냉전이 붕괴하고 세계질서가 급격히 재편되면서 기존 극우세력 역시 새로운 언어와 전략이 필요해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극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극우는 시대의 언어를 바꾸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New Right)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뉴라이트는 스스로를 “합리적 보수”, “시장주의 개혁세력”, “선진화 세력”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여전히 냉전적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적 국가관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기존 극우가 노골적인 국가주의와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뉴라이트는 여기에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와 친재벌 정책, 식민지근대화론과 역사수정주의를 결합했습니다. 노동과 복지, 공공성의 가치는 비효율과 반시장 논리로 공격받았고, 시장 경쟁과 효율 중심 질서는 절대적 가치처럼 제시되었습니다.

 

협력과 규범의 국제질서가 흔들릴수록 민주주의와 공동체 가치 역시 함께 위협받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뉴라이트의 세계관은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가 축적해온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시민공동체보다 시장과 경쟁, 자본의 논리를 우위에 두려는 흐름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에게 시민은 공동체의 주권자라기보다 경쟁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개별 단위에 가까웠습니다. 연대보다 경쟁, 공공성보다 효율, 시민주권보다 시장질서가 우선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질서 속 하위 생산기지와 시장체계에 더욱 깊게 편입시키려는 방향과 결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기반 역시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단순한 학술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법통, 항일독립운동과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정당성 자체를 약화시키는 작업에 가까웠습니다. 5·18광주민주항쟁왜곡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극우세력은 민주주의 역사 자체를 흔들어야만 자신들의 권위주의 정치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이명박정부 시절을 거치며 훨씬 조직적 단계로 진입하게 됩니다.

 

특히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과 고 노무현대통령 서거 당시 폭발했던 시민사회의 집단적 애도와 분노는 보수권력 내부에 강한 위기의식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선거경쟁만으로는 시민사회의 민주주의 열망을 억누르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부터 극우정치는 본격적인 ‘인지전(認知戰·cognitive warfare)’ 단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인지전의 핵심은 정치 자체를 혐오와 조롱의 놀이문화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유튜브 플랫폼을 중심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희화화와 세월호 조롱, 여성혐오와 지역혐오, 중국혐오와 난민혐오 등이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는 토론과 숙의의 공간이 아니라 분노와 조롱, 혐오를 빠르게 소비하는 감정시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조롱과 혐오가 놀이가 되는 순간 시민은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아니라 제거하고 비웃어도 되는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공동체는 공존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의심하고 공격하는 생존경쟁 체제로 변해갑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흐름이 미국 극우정치와 매우 유사한 경로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미국 MAGA 정치가 보여준 음모론 정치와 문화전쟁 전략은 빠르게 한국 극우정치 안으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반PC주의와 부정선거 프레임, 언론 불신 선동 역시 같은 흐름 위에서 확산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이 시기부터 한국 극우세력이 미국 극우의 전략과 문법을 빠르게 학습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문화는 극우 개신교 세력과 뉴라이트 세력, 보수언론 일부와 결합하며 훨씬 거대한 정치생태계로 성장하게 됩니다. 국정교과서 논란은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그리고 윤석열정부 시기 이러한 흐름은 훨씬 노골적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극우는 더 이상 거리의 구호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교육과 역사, 플랫폼과 종교 영역 안으로 훨씬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리박스쿨 논란(2025)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리박스쿨은 뉴라이트 성향 역사교육 콘텐츠와 강연 등을 통해 청소년층에 극우 역사관을 조직적으로 확산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한겨레, 2025.8.12 / 경향신문, 2025.8.14). 단순한 역사교육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가권력과 연결된 장기적 ‘극우 진지전’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신호였습니다. 역사기관 장악 시도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었습니다. 윤석열 정부 시기 독립기념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등 역사 관련 기관 인사를 둘러싸고 뉴라이트 편중 논란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오마이뉴스, 2025.9.3 / 한겨레, 2025.9.5).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가 반복되었다는 비판 역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관과 국가관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정신 자체를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윤석열의 내란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극우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극우세력의 전면적 제도화 시도는 제동이 걸렸지만, 그들은 잠시 청와대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을 뿐입니다. 여전히 온라인과 종교, 플랫폼과 지역조직 속에 기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조직과 네트워크, 플랫폼과 자금, 종교적 기반과 국제적 연결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특히 한국 극우와 미국 MAGA 세력의 연결은 여전히 매우 강고합니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모스 탄(1958– )이 한국에 들어와 극우 집회와 선동 활동을 벌인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뉴스민, 2026.5.29 / 한겨레, 2026.5.31). 한국 극우는 더 이상 단순한 국내 정치세력이 아닙니다. 글로벌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된 국제적 정치현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승리감보다 훨씬 냉정한 현실인식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왜 일부 시민들이 이러한 극우적 감정정치에 쉽게 끌려가는가 하는 문제 역시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기화된 경제 불안과 청년세대의 좌절, 고립감과 경쟁 피로, 플랫폼 중독과 인정 욕망의 확대는 사람들을 점점 더 감정적 정치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혐오와 음모론, 단순한 적대 구도는 복잡한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감정적 해방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극우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현대사회 구조 위에서 함께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까지 무제한 허용해야 하는가. 혐오와 차별, 역사왜곡과 내란선동, 음모론과 극단주의를 방관하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20세기 유럽이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카를 뢰벤슈타인은 1930년대 나치의 집권 과정을 분석하며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해 무기력하게 방관할 경우 결국 스스로 붕괴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이를 ‘전투적 민주주의(wehrhafte Demokratie)’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념은 이후 독일 민주주의 질서의 핵심 원리가 됩니다.

 

독일은 나치 찬양과 홀로코스트 부정을 처벌하고, 극단주의 조직과 반헌법 세력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왔습니다. 혐오표현 제한과 반헌법 정당 해산 역시 민주주의 방어 원리로 제도화했습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공화주의는 단순한 다수결 체제가 아닙니다. 공화국의 가치와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려는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국가가 적극 개입할 수 있다는 인식 위에서 운영됩니다.

 

즉 민주공화정은 단순한 방관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는 체제입니다. 한국 역시 이제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방어할 제도적 원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도 무기력한 중립주의가 아닙니다.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방어하려는 전투적 민주주의(wehrhafte Demokratie)의 원리입니다. 극우의 세계관은 공동체의 공존과 협력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혐오와 배제, 음모론과 권력독점을 통해 공동체 규범 자체를 파괴합니다. 결국 그 끝에는 시민주권이 아니라 특정 세력의 권력독점과 전제정치가 자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우에 대한 대응은 단순한 정당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온 공동체적 가치와 민주공화정의 유산을 지키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개혁 과제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계산과 기득권 논리, 눈치보기와 안이한 타협 속에서 개혁이 반복적으로 미뤄져왔을 뿐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막연한 경계심이 아닙니다. 민주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방어할 제도적 개혁입니다. 시민적 감시와 공론, 그리고 민주주의 자기방어의 원리가 흔들리는 순간 극우는 언제든 다시 권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음의 마지막 글에서는 한국 민주공화정의 안착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개혁과제가 우리 눈 앞에 제시되고 있는지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 민들레 이병권 인문연구가 >

 

청와대 가는 길에 돌아보는 '사람이 온다는 건'

● COREA 2026. 6. 25. 03:3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공직에 한 사람을 임명하는 일도 그 사람의 이력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걸어온 과거의 궤적, 그가 남긴 말들, 그가 신봉해온 가치관이 한꺼번에 정부라는 공간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이어지는 보수 인사 기용을 바라보며 지지층이 느끼는 복잡한 심경은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선 '가치의 교체'였기 때문이다."

 

공직에 한 사람을 임명하는 일도 그가 걸어온 과거의 궤적, 그가 남긴 말들, 그가 신봉해 온 가치관이 한꺼번에 정부라는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인사가 만사다."

이 진리는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정책 역시도 사람이 만들고 집행하며 책임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권의 성패는 인사에서 시작해 인사로 끝난다. 그래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가장 먼저 대통령 주변 인물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된다. 그가 곁에 둔 사람들은 곧 그의 가치관과 철학을 투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에. 경영학에서는 흔히 'A급 리더 곁에는 A급 인재가 모이고, B급 리더 곁에는 C급 인재가 득세한다'고 말한다. 국가 또한 마찬가지라 본다. 지도자의 주변에 어떤 이들이 모이느냐가 국가의 품격과 역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실용주의'를 강조해 왔다. 진영을 넘어 유능한 실력파를 중용해 민생과 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다. 국가 운영에 능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실용주의가 모든 인사 성패의 가늠자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묻고 싶다. 실력은 출중하나 그가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가볍게 여기거나 권위주의적 사고에 매몰된 이라면 어떨까. 국가 운영에서 능력이 엔진이라면, 그 엔진이 끌고 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철학이다. 아무리 빠른 자동차라도 목적지가 잘못되면 결국 엉뚱한 곳에 도착할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국정 운영 동력의 바로미터'다. 지지율이 높을 때는 파격적 인사가 '통 큰 결단'으로 칭송받지만, 지지율이 흔들리면 같은 인사가 '정체성 상실'이라는 비판의 화살이 된다.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지지율이 뒷받침될 때는 똥도 금이 되지만, 무너지면 다이아도 돌멩이가 되는 것이 정치의 냉혹한 현실이다. 따라서 인사는 대통령의 의도보다 국민에게 읽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훨씬 중요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중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공직에 한 사람을 임명하는 일도 그 사람의 이력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걸어온 과거의 궤적, 그가 남긴 말들, 그가 신봉해온 가치관이 한꺼번에 정부라는 공간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이어지는 보수 인사 기용을 바라보며 지지층이 느끼는 복잡한 심경은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선 '가치의 교체'였기 때문이다.

 

정권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은 박수만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엄격한 잣대로 묻는다. 비판이 아닌 걱정이며, 반대가 아닌 기대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당신은 우리와 함께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들이 권력의 핵심에 선다면, 그 정권의 미래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홍순구 기자 > 

 

보건의료시민단체 등 "인준 중단" 한목소리
"윤 열심히 일했는데 야당 때문에" 대놓고 비호
탄핵·구속 반대 "전 대통령 불행 국가 위신이…"


"헌정 훼손과 국민 불행에 의원직 던지는 결단"
"29번 방북, 유진 벨재단 통해 인도 협력 평가"
시민단체 "공공성 퇴색, 어처구니 없는 인사"

 

대한적십자사는 22일 중앙위원회 의결을 통해 국민의힘 의원 출신인 인요한 전 연세대 국제진료센터 교수를 제32대 회장으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2026.6.22 대한적십자사 제공 연합
 

불법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전 대통령을 "가슴으로 이해한다"던 인요한 전 국민의힘 의원이 대한적십자사 제32대 회장에 선출돼 이재명 대통령의 인준을 앞두고 있다. 보건의료·시민사회단체들은 인 회장 인선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이 대통령이 인준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 단체연합,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참여연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 4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무상의료운동본부'는 23일 성명을 내 "인 전 의원을 적십자사 회장으로 선임하는 것은 분노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이재명 정부가 실용주의와 중도보수 확장을 지속하고 있으나 이제 선을 넘고 있다"며 "인 전 의원은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다 새 정부 출범 후 대세가 기울자 지난해 말 의원직을 사퇴한 기회주의적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친윤 인사일 뿐 아니라, 의료 민영화와 영리병원 도입을 주장한 친기업·시장주의자"라며 "이런 최악의 인사가 이재명 정부의 국정 철학에 부합하는가. 이재명 대통령은 인준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따로 성명을 발표해 "인 전 의원은 국민건강보험 공적 성격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민간 의료보험과 영리법원 도입 필요성을 언급해 의료 민영화 논란을 불러온 인물"이라며 "혈액 사업과 적십자병원, 재난구호를 책임지는 인도주의 보건의료기관인 적십자사 수장으로 적합한지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지역·필수·공공의료를 강화해야 할 시점에 공공의료 강화와 거리가 먼 인식과 이력을 가진 인물을 적십자사 회장으로 세우는 것은 잘못된 신호"라며 "정부가 이번 인선을 '통합'과 '실용'으로 설명한다 해도, 공공성 후퇴의 가림막이 될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적십자사는 이번 회장 선출 결정을 철회하고, 이 대통령 역시 인준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며 "적십자사는 통합 인사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 안전과 공공 의료 원칙 위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은 점잖게 주장했는데 인 전 의원은 "국민건강보험은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성경 말씀에서 이탈하면 에이즈에 걸린다"는 발언으로 전광훈 목사와 같은 부류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또 윤석열 전 대통령을 감싸는 발언도 앞의 발언만이 아니었다.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이 "회사 판매원처럼 일했다", "업적도 있다"며 대놓고 두둔하며 야당의 무리한 탄핵 시도 등에 책임을 돌리려 했다. 윤석열이 구속되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 것이 국가 위신에 도움이 되겠느냐"며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인요한 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월 10일 의원직 사퇴 의사를 표명한 뒤 승용차로 향하고 있다. 2026.1.10 연합
 

인 전 의원은 같은 날 "인도주의 사업은 130년간 저의 선조들이 걸어오신 길이자, 제가 평생 의사로 살아오면서 늘 헌신하고 싶었던 분야"라고 말했다. 그는 '대한적십자사 회장 선출에 대한 입장문'을 통해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낀다"며 "대한적십자사는 정치와 무관하게 순수한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기관이다. 회장은 혈액 사업을 통해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소외된 이웃을 보듬으며, 어려움에 처한 북한 동포 지원과 인도주의적 국제 협력을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세심하게 살피는 자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평범한 시민이자 의사인 저를 이 자리에 선출해 주신 것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우리 사회를 적십자 정신으로 더욱 따뜻하게 만들고 국민 통합에 기여하라는 소명으로 믿는다"며 "이 엄중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직무에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인 전 의원은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를 통해 자신이 적십자사 회장으로 발탁된 배경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서도 "의사로서 전문성과 오랜 인도주의 활동 경력"을 우선 꼽았다. 그는 정계 진출 전 북한을 29번 방문해 선조가 설립한 유진벨재단을 통해 결핵퇴치사업 등 인도주의 대북 협력을 펼쳤다. 그러면서 "일반적인 정치공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인사"라며 이재명 대통령의 통합인사라고 해석했다.

 

전날 적십자사는 중앙위원회를 열어 인 전 의원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민간위원 위주이긴 하지만 19명의 적십자사 중앙위원회에는 교육부와 행정안전부 등 정부 9개 부처 국무위원이 참여하고 있다. 적십자사 명예회장인 이재명 대통령이 인준하면 인 전 의원은 회장에 취임, 3년의 임기를 시작한다. 그가 국민의힘 의원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통합인사'로 해석됐다.

 

그러나 인 전 의원이 2024년 12월 두 차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표결에 불참하는 등 '친윤 인사'로서 이재명 정부의 적십자사 회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도 이날 입장문을 통해 "불법 계엄으로 초래된 헌정질서 훼손과 국민적 불행에 대해 천 가지 말 대신 '의원직 사퇴'라는 하나의 행동으로 소신을 실천했다"며 "지난해 12월, 국회의원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평범한 시민이자 본업인 의사로 돌아왔다. 12·3 불법 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가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고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내린 결단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오랜 기간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기에, 헌정질서를 무너뜨리는 잘못된 계엄이 얼마나 큰 국가적 불행을 초래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2024년 총선에서 국민의미래(국민의힘의 위성정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인 전 의원은 같은 해 12월 불법계엄 사태가 발생해 윤 전 대통령 탄핵 목소리가 커지자 이를 반대했다. 그는 당시 윤 전 대통령을 두고 "가슴으로 이해한다"고 발언해 커다란 구설에 올랐다. 광주민주화항쟁 와중에 시민군과 계엄군을 중재하며 평화로운 사태 해결을 도모하던 그가 윤 전 대통령과 내란 세력을 비호하는 모습에 적지 않은 이들이 크게 실망했다.  

 

윤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던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은 소셜미디어(SNS)에 글을 올려 "이런 인물을 임명하는 것이 이번 정부가 말하는 내란 청산이고 실용이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 의원은 2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재명 정부의 위선적 인선"이라며 "적십자사 회장은 누구보다도 높은 도덕성과 공공성, 그리고 국민 통합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의원은 "인 전 의원은 그 자리에 맞지 않는다.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인도주의를 실천하기에는 인 전 의원이 걸어온 길과 선택한 길이 너무나도 정치적이었다"며 "적십자사 회장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만일 그러기 어렵다면 최소한 국민께 분명한 사과를 해주셨으면 한다"며 "본인이 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는 이재명 정부가 책임지면 된다"고 덧붙였다.

 

인 전 의원이 윤 전 대통령 탄핵에 불참한 데 대해 "불법 계엄으로 초래된 헌정질서 훼손과 국민적 불행에 대해 천 가지 말 대신 '의원직 사퇴'라는 하나의 행동으로 소신을 실천했다"고 해명한 데 대해서는 "의원직 사퇴 이유가 정말 불법 계엄 때문이었나"라고 물었다.

 

경향신문도 사설을 통해 "엄중한 내란 단죄 민심을 업고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시민의 생명과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할 기관의 수장으로 내란 옹호자를 용인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국민이 납득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이어 "인 전 의원 인준은 이재명 정부의 존립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고, 반헌법 세력과 야합해 개혁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런 인사를 포용하는 건 이 대통령이 강조해온 통합의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정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릴 뿐이다. 이 대통령은 인 전 의원의 적십자사 회장 인준을 거부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지난 2016년 3월 중순 완공된 광주 남구 양림동 유진 벨 선교기념관 내부를 인요한 당시 연세대 가정의학과장, 최영호 남구청장이 같은 달 5일 미리 둘러보고 있다. 2016.3.5 연합
 

1959년 전북 전주 출생인 인 전 의원은 연세대 의대를 거쳐 고려대에서 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7년 서양인 최초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으며 이후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 등을 역임했다. 한국형 구급차 개발, 대북 의료지원 활동 등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특별귀화 1호' 대상자로 선정됐다.

 

19세기 미국에서 온 유진 벨 선교사의 증손자로 그의 가문은 4대째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교육·의료 활동을 해왔다. 광주 남구 양림동 양림미술관 안에 2016년 3월 유진 벨 선교기념관이 세워졌다.                                     < 임병선 기자 >

 
 

군사분계선 도보로 넘어와…군,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서 유도작전 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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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 DMZ [연합]

 

 합동참모본부는 지난 23일 밤 중부전선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온 북한군 1명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24일 밝혔다.

 

합참은 "관련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관계기관에서 조사 중"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군인은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귀순 북한군이 남하한 지역은 강원도 철원군 일대이며, 군은 MDL을 도보로 넘어온 해당 군인에 대해 전날 오후 10시께 비무장지대(DMZ) 남측 지역에서 유도 작전을 벌여 신병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군인은 남성이며 계급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북한군의 관련 특이 동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북한은 남북 '적대적 두 국가' 방침에 따라 MDL 이북 지역에서 불모지 작업, 전술도로 구축, 철조망 및 지뢰 설치 등 국경선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번 귀순이 발생한 지역에서도 MDL 이북에서 북측의 국경선화 작업이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귀순 사례는 이번이 네 번째이며, 군인 귀순은 두 번째다.

 

앞서 지난해 10월 북한군 1명이 중부전선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혔고, 군은 신병 확보 후 관계기관에 넘겼다.

 

이 밖에 남성 주민 1명이 지난해 7월 3일 중서부 전선 MDL을 넘어왔고, 같은 달 31일 또 다른 남성 주민 1명이 한강 중립 수역의 중간선 이남 지역에서 구조됐다.         

                                                                                               < 김효정 김철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