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송연설서 지지 호소

이재명  “실천했고 실적으로 실력 증명…자신 있다”

윤석열 “내 사전에 민생은 있어도 정치보복은 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2일 인천시 남동구 로데오거리광장에서 열린 인천 집중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2일 “실천했고, 실적으로 실력을 증명했다고 자부한다. 자신 있다”며 국민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이 후보는 이날 첫 방송연설을 통해 “성남시민, 경기도민들이 그랬듯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을 때 내 삶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실적으로 체험시켜 드리겠다”며 국민이 보낸 질문에 답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 후보는 경기도의 어린이 건강 과일 지원 사업과 청년기본소득, 소액 극저 신용대출 사업 등을 언급하며 “성남시장 8년, 경기지사 3년 동안 제 모든 정책엔 가난하고 참혹했던 저의 삶, 평범하고 어려운 국민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 정치를 하는 이유도 제가 탈출했던 그 가난과 절망의 웅덩이 속에서 여전히 고통받는 분들에게 공정한 세상, 희망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어서”라고 덧붙였다.

 

이 후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가리켜 “저를 사회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고, 5·18 광주를 사회적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 강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난 일화를 언급하며 “‘하고 싶은 일을 용기 있게 해라, 변호사 내가 해보니까 절대로 안 굶는다’는 말이 제 가슴에 와 닿았다”며 인권변호사로 일하게 된 계기라고 덧붙였다. 또 성남에서 노동·인권변호사 시절 시립병원 설립 운동에 나섰다가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두 번째 수배가 떨어졌을 때가 “정치의 길로 들어선 운명의 시간”이라고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이 후보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엇나가지 않고 청소년기를 지날 수 있었나”라는 국민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어머니의 힘이 정말로 컸다”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를 “하늘”이라고 지칭하며 “제가 야근에, 철야에 늦게 퇴근하면 늦은 새벽까지 기다려줬다. 어머니와 손잡고 함께 걷던 새벽 골목길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후보가 되고 전국을 다니면서 어머니 생각이 더 많이 났다”며 “어머니처럼 평생 고단하게 산 분들이 제 손을 꼭 잡고 ‘이 후보, 우리 좀 잘 살게 해줘’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정말로 국민의 삶을 제대로 살피는 유능한 정치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덧붙였다. 이 후보는 “소년공 시절 기억에 남는 장면 세 가지”를 묻는 말에 “여덟 식구가 나란히 누워 함께 자던 단칸방 귀퉁이에서 작은 상을, 요만한 상을 펴놓고 앉아 일기를 쓰던 모습”, “공장의 프레스 기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부러워하던 모습”을 꼽았다.

 

다음은 연설문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기호 1번 이재명입니다. 오늘부터 방송 연설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저 이재명을 국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국민께서 보내주신 질문들에 답하는 방식으로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어린 시절, 이재명은 어떤 아이였나요? 한마디로 친구들과 잘 놀고 활발하고 씩씩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성적표에도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는 경북 안동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이라고 하는, 화전민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7남매 중에서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 집은 지금도 버스가 안 다닐 만큼 첩첩산중 오지입니다. 매일 15리 길을 두 시간 반을 꼬박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엄청 먼 길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3학년때 쯤 돈을 버시겠다고 먼저 고향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남은 다섯 남매를 키우시느라 남의 집 일을 해주시며, 정말 허리 펼 새도 없이 일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래도 어린 시절 저는 애교가 참 많았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엄마 이렇게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멀리 밭에서 김을 매시다가도 호미를 쥔 채 일어나셔서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저는 총알처럼 달려가 어머니 품에 덥석 안기곤 했습니다. 어머니 품은 늘 푸근했고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산골에서, 어머니의 큰 사랑을 듬뿍 받으며 구김살 없이 살아왔던 제 유년은 제게 가장 따뜻하고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다음 질문 이런 게 있군요. 열세살 어린 나이에 소년공이 됐는데, 소년공 시절 기억에 남는 장면 세 가지 어떤 걸 꼽을 수 있나요? 첫 번째 장면은 여덟 식구가 나란히 누워서 함께 자던 단칸방, 그리고 그 단칸방 귓퉁이에서 작은 상을 요만한 상을 펴놓고 앉아 일기를 쓰던 제 모습입니다. 소년공 시절의 일기를 보면 아프고 서럽던 일들이 정말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들 모두 성남으로 이사를 했는데요. 일기에는 ‘이사 오던 날, 비는 주룩주룩 한없이 내리고 나는 눈이 아파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상대원동 달동네 꼭대기 작은 월세 단칸방에서 살았는데, 생계를 위해서 온 가족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저도 중학교 대신 공장에 다녔습니다. 처음엔 목걸이 공장에서 끓어오르는 납증기를 들이마시면서 매일 12시간씩 납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월급을 더 준다 이런 곳이 있어서, 십리 길을 걸어서 목걸이 공장에 다녔습니다. 석 달치 월급을 채불한 사장이 야반도주를 하는 바람에 석 달치 월급을 모두 떼인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서러워서 어머니 품에 엎어져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 여러 공장을 다녔는데, 여러 상처 때문에 온몸엔 흉터가 많이 남았습니다.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장면은, 공장의 프레스 기계입니다. 열여섯 살에 야구 글러브와 스키 장갑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손재주를 인정받아 프레스 기능공이 됐습니다. 가죽을 자르는 프레스 기계를 다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프레스 기계에 팔이 물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성장판이 손상되었는데,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했습니다. 산업재해 보상조항 이런 거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은 저 자신만 탓했습니다. 사고를 당하고 고참들에게 폭행을 당하며 저는 절망했습니다. 어느날 저를 괴롭히는 그 대단한 공장관리자가 고졸임을, 검정고시로 고졸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공부가 유일한 살길로 보였습니다. 공장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학원으로 달려가고, 밤잠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해서 고입검정고시, 대입검정고시도 빠르게 합격했습니다. 절박하게 매달린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저는 소년공이었고, 관리자가 될 길도 없었고, 대학에 갈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쯤 일기에 적었던 글이 기억납니다. ‘어렵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한번 해볼까?’1980년 8월 20일 제 일기장입니다. 희박한 가능성 하나를 붙잡고 고된 하루하루를 견딘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세 번째 장면, 그건 아마도 교복 입은 학생들을 부러워하던 제 모습입니다. 우리 또래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갈 때 저는 작업복을 입고 그들을 거슬러서 공장에 다녔습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시장청소부 일을 하셨던 아버지를 도우러 나갔다가, 교복 입고 등교하는 여학생들을 피해 골목 구석으로 숨은 적도 많았습니다. 예민한 사춘기에 초라한 제 모습이 아마 보여주기가 부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성남시장 시절 시작됐던 무상교복 정책, 사실은 교복에 대한 절절한 저의 경험이 들어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엇나가지 않고 청소년기를 지날 수 있었나요? 입니다. 전적으로 가족의 힘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힘이 정말로 컸습니다. 제 어머니는 시장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고 사용료를 받는 일을 하셨습니다 여성으로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집에서 부업을 손에서 떼지 않으셨습니다. 남매들 중 가장 어린 나이에 공장에 다니는 저를 정말로 늘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출근하기 전에 항상 제 손을 잡고 공장에 바래다주셨습니다.

 

제가 야근에 철야에 늦게 퇴근하면, 그 늦은 새벽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손잡고 함께 걷던 새벽 골목길, 그 길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멥니다. 그때도 지금도, 어머니는 저에게 하늘입니다. 그 고단한 삶 속에서도 어머니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언제나 듬뿍 주셨습니다. 언제나 전적으로 믿어주셨고 제가 어떤 결정을 하든 100% 다 지지해 주셨습니다. 늘 “우리 넷째는 나중에 꼭 잘 될 거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제겐 신비의 명약이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을 가진 마법의 말씀이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는 많은 한을 남기시고 2년 전 이맘 때쯤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대통령 후보가 되고 전국을 다니면서 어머니 생각이 더 많이 났습니다. 제 어머니처럼 평생 고단하게 사셨던 분들이 제 손을 꼭 잡고 ‘이 후보, 우리 좀 잘 살게 해줘’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정말로 우리 국민의 삶을 제대로 살피는 유능한 정치인이 돼야겠다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네 번째 질문입니다. 가난은 이재명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가난이 자랑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가난 때문에 저는 더 빨리 자랐고, 더 빨리 더 많이 세상을 알게 됐습니다.

 

가난이 죄도 아닌데, 가난해서 겪어야 했던 그런 부당함들에 대해서는 제가 유난히 민감했던 것 같습니다. 지독했던 가난에서 탈출했지만 저는 그때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성남을 떠나지 않고 가난한 힘든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인터뷰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정치를 하는 이유도 제가 탈출했던 그 가난과 절망의 웅덩이 속에서 여전히 고통받는 모든 분들에게 공정한 세상, 희망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입니다.

 

다섯 번째 질문입니다. 대학생 이재명을 가장 크게 성장시킨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5.18 광주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법대생이 됐을 때, 저는 진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대학생이 됐고, 거기다가 학비면제와 생활비까지 월급의 3배를 받으면서 다니게 됐으니까요 개인적 영달을 꿈꾸며 희망에 들뜨던 82년 어느 봄날, 교정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사복 경찰에게 거칠게 잡혀가는 학우들을 보았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비디오를 봤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신문과 TV에서 ‘폭도’로 보도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전혀 다르다는 걸 그리고 내가 그들의 충견이 돼서 2차 가해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18은 저를 사회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고, 그래서 제가 5.18 광주를 사회적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제가 그 일 때문에 개인적 영달이 아니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다음 질문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꽃길을 마다하고 인권변호사가 됐는데 솔직히 내적 갈등은 없었습니까? 저라고 왜 마음 속에 출세욕이 없었겠습니까? 사법연수원 최종 성적이 판검사 임용권 안에 들다 보니까 사실 마음이 많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판검사가 되면 가장 좋아하실 제 어머니의 그 큰 기대를 저버리는 것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25살 초보 변호사로 과연 먹고 살 수 있을까 이런 걱정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인권변호사의 강연을 듣게 됐습니다. 바로 노무현 변호사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용기있게 해라, 변호사 내가 해보니까 절대로 안 굶는다”. 이 말씀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밥은 안 굶을 테니 제 욕심을 조금 덜어내면 억압받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 새파란 변호사가 소년공으로 자라왔던 성남에서 사무실을 열게 됐습니다. 원칙은 두 가지였습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변호한다”,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변호한다”. 지금까지 잘 지켜온 것 같습니다.

 

일곱 번째 질문은 정치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인데요. 성남에서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할 때, 성남 본시가지에 큰 병원 두 군데가 한꺼번에 폐업을 했습니다. 50만 시민들이 한밤중에 응급상황이 벌어져도 멀리 분당까지 가느라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립병원을 위해서 시민들이 나섰고, 저는 시민운동 대표로서 성남시립병원 설립추진위 공동대표가 됐습니다. 순식간에, 20만 명이 지지 서명을 할 만큼 시립의료원 설립은 절박한 일이었습니다. 2004년 3월, 주민발의 조례가 성남시의회에 상정됐는데, 그때 다수당이던 국민의힘 시의원들이 47초 만에 날치기로 폐기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방청했던 시민들과 제가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본회의장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게 특수공무집행방해죄가 되었습니다. 시의회에서 항의하며 운 사건으로 두 번째 수배가 떨어졌습니다. 수배 중이던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 교회 지하 기도실에서 수배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간입니다. 이제 시장이 돼서 직접 시립병원 우리 손으로 만들자고 다짐했습니다. 정치의 길로 들어선 제 운명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제가 성남시장이 돼서 준비를 거쳐 2013년 성남시의료원을 착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서른두 개의 음압 병상을 갖춘 성남시의료원이 문을 열었고, 지금은 코로나 상황에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재명의 정책에는 이재명의 삶이 녹아있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저는 “국민들이 체감하는 정책을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했고, 또 실제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남시장 8년, 경기도지사 3년 동안 제 모든 정책에는 가난하고 참혹했던 저의 삶, 평범하고 어려운 우리 국민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아버지가 시장에서 주워온 거의 상한 과일밖에 먹었던 저의 개인적 경험이 경기도의 어린이 건강과일 지원 사업 모태가 됐습니다. 검정고시 학원비 7천원이 없어서 공장에 다니며 산재장애인이 되어야 했던 제 개인적 경험이 청년기본소득의 뿌리가 됐습니다. 20만원이 없어서 일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 현실이 경기도의 소액 극저 신용대출 사업의 출발입니다. 누군가는 포퓰리즘이라 비난하지만, 성남시민과 경기도민들께서 크게 만족하셨고, 그 성과 때문에 저를 지금 이 자리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시절 공약이행률 평균 95%가 넘습니다. 실천했고, 실적으로 실력을 증명했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저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선택해 주시면, 성남시민, 경기도민들이 그러셨듯이,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을 때 내 삶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 실적으로 체험시켜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번 3월 9일. 저 이재명을 선택해 주신다면 위기에 강한 경제 대통령으로서 위기 극복을 넘어 기회가 넘치는 성장국가, 희망과 꿈이 가득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서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조윤영 기자

 

윤석열 “내 사전에 민생은 있어도 정치보복은 없다”

 

첫 TV 방송연설

“민주당 특권·반칙·부정부패…심판받아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2일 충남 홍성군 내포신도시에서 열린 ‘서해안시대는 새로운 100년의 중심 내포에서!’ 선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2일 “부정부패는 정치보복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민생의 문제”라며 “저 윤석열 사전에 민생은 있어도, 정치보복은 없다”고 밝혔다.

 

윤 후보는 이날 밤 9시55분 <티브이(TV)조선>에서 방송된 첫번째 텔레비전 방송연설에서 “지난 5년 동안 민주당은 특권과 반칙,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상식에서 벗어난 이념에 매달려 대한민국을 망치고 국민을 고통에 빠뜨렸다”며 이렇게 말했다.

 

윤 후보는 이어 “무능하고 부패한 민주당 정권을 교체하라고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이 자리에서 세워주셨다”면서 “국민을 속이는 민주당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심판 받아야만, 민주당의 양식 있는 정치인들이 힘을 얻는다. 변화된 민주당과 협치를 통해 제가 이 나라를 제대로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윤 후보는 이날 첫회를 시작으로 선거운동 기간동안 총 11회의 방송연설을 진행한다.

아래는 연설문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윤석열입니다.

저 윤석열 간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국민을 괴롭히는 사람을 상대로

평생 대한민국의 법을 집행해온 사람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정치를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주당 정권을 교체하라고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이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지난 5년 동안 민주당은

특권과 반칙,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상식에서 벗어난 이념에 매달려

대한민국을 망치고 국민을 고통에 빠뜨렸습니다.

말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무능과 부패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그리고 집 없는 서민들을

절망에 몰아넣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위대한 점은

잘못한 정권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거의 본질은 권력에 대한 심판입니다.

심판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합니다.

잘못된 정권을 심판하지 않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전 정부보다 무려 500조원을 더 썼지만,

양질의 진짜 일자리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민주당의 그간 행보는 국민들의 어려움은 무시한 채

세금은 늘리고, 이권사업에만 몰두해왔습니다.

이들의 공약이 진정성이 있습니까?

국민을 속이는 민주당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심판 받아야만,

민주당의 양식 있는 정치인들이 힘을 얻습니다.

 

변화된 민주당과 협치를 통해

제가 이 나라를 제대로 바꾸겠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역동적 혁신 성장을 이뤄내겠습니다.

정부의 역할은 민간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시장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이룩하며,

민간이 양질의 진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정부라면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는

막대한 정부 지출을 하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규제로 혁신의 발목을 잡지도 않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창의적인 교육과 자유로운 연구개발을 장려하고,

기업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경영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무한경쟁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혁신이 중요합니다.

규제를 합리화하고,

교육 역시 혁신해야 합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더 잘 살고,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고,

우리 기업이 해외로 떠나지 않는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실업 문제는 성장 없이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정부패한 사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부패는 정치보복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민생의 문제입니다.

 

저 윤석열의 사전에 민생은 있어도,

정치보복은 없습니다.

 

오는 3월 9일, 위대한 국민과 함께,

국민 승리의 날을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미나 기자

"윤석열 시력,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병역의혹 거듭 제기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

 

더불어민주당은 21일 대장동 녹취록에 등장하는 '그분'이 현직 대법관으로 드러났다면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장동 비리'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다고 역공했다.

민주당 윤호중 원내대표는 이날 당사에서 열린 중앙선대위회의에서 "야당이 주구장창 떠들던 대장동의 그분이 현직 대법관으로 드러났다"며 "공개된 녹취록을 종합하면 윤 후보는 대장동 비리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장동은 특수검사 게이트임에도 윤 후보는 자신들의 썩은 내를 이 후보에게 뒤집어씌워 왔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일보는 2021년 2월 4일자 김만배·정영학 녹취록을 분석한 결과, 김씨가 "저분은 재판에서 처장을 했었고, 처장이 재판부에 넣는 게 없거든, 그분이 다 해서 내가 원래 50억을 만들어서 빌라를 사드리겠습니다"라며 A 대법관을 거론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그분'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로 겨냥해온 국민의힘 측에 대한 반격 모드로 전환한 상태다.

 

최강욱 최고위원도 "윤 후보는 대장동 몸통이 이 후보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화천대유' 주인은 감옥행이라 큰소리쳤다"며 "그러나 대장동 사건 실체는 법조 카르텔이었고, 이 후보에 뒤집어씌우려던 것"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 선대위 강병원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김만배와 윤석열의 관계가 밝혀졌다"며 "국민의힘은 지금까지 이재명 후보에 누명을 씌운 것인가"라고 밝혔다.

윤 후보의 부동시(不同視) 병역 면제 의혹도 부각했다.

 

다이너마이트 청년선대위 권지웅 공동위원장은 선대위 회의에서 "윤 후보 시력은 마치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며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않는데 떳떳하면 병역면제 당시 시력 자료와 검사에 임용되며 낸 신체검사 자료, (검찰총장) 청문회 때 받은 진단서를 공개하라"고 했다.

 

제페토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한 38살 남성

온라인그루밍 처벌법 있지만, 사전단계엔 적용 어려워

한국과 캐나다 경찰 모두 신고했지만 대응 달라

제페토 운영하는 네이버는 즉각조치 하지 않아

 

 

‘김하은(가명·11)은 지금 이 시간 부로 ㄱ의 소유물이다.’ ‘김하은은 절대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하며 공부에만 전념한다.’ ‘김하은은 19세가 되면 ㄱ에게 시집을 간다.’

 

어머니와 캐나다에서 지내고 있는 초등학생 김하은양은 ㄱ씨의 강요로 통제적 유형의 폭력을 나열한 결혼서약서를 썼다. 30대 남성 ㄱ씨는 지난 1월 초부터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를 통해 김양에게 접근했다. 처음엔 ‘공주님·왕자님’ 놀이를 하자더니 시간이 지나 가상 연인관계를 유도했다. 입 벌린 사진, 뽀뽀 사진 등을 달라고 했고 집 주소,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차곡차곡 수집해갔다. 아이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제페토 아이템을 사주기도 했다. ㄱ씨가 피해 아동에게 보낸 메시지는 “숙녀로 보인다” “네가 존댓말 쓸 때면 흥분된다” “(사귀는 사이이니) 행동을 확실히 하라” 등이었다. 피해 아동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가스라이팅, 길들임에서 성 착취로 이어지는 온라인그루밍 성폭력 등의 전형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ㄱ씨와의 대화를 놀이로 여겼던 김양은 뒤늦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부모는 전했다.

 

메타버스를 매개로 한 아동·청소년 성착취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한겨레>는 김양의 부모가 피해 사실을 알게 된 뒤 겪은 일들을 통해 메타버스 성범죄 발생시 뒤따르는 문제들을 짚어 봤다.

 

■ 신고 : “현행법 적용이 어렵다”

 

김양의 아버지는 지난달 30일께 아이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돌아온 대답은 “현행법으로 적용하기엔 모호하다” 였다. 이달 4일에는 조서를 쓰러 경찰서까지 찾았지만 “비슷한 선례도 없을뿐더러 피의자가 외국에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지방청에 물어보겠다”며 김양의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ㄱ씨는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 채팅방에서 30대 남성 ㄱ씨가 초등학생 김하은(가명·11)양에게 결혼서약서를 쓰도록 요구하는 상황. 김양 아버지 제공

 

국내에는 온라인그루밍 처벌법이 있다. 지난해 9월24일부터 시행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 제15조의2는 19살 이상의 사람이 정보통신망을 통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온라인그루밍을 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그러나 김양이 겪은 사건은 이 법을 적용하기 어렵다. 청소년성보호법 제15조2는 온라인그루밍을 ‘온라인에서 아동·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 혐오감을 유발하는 대화를 지속적·반복적으로 하는 행위 △성적 행위를 하도록 유인·권유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예현)는 <한겨레>에 “본격적인 성착취가 일어나기 전인 사전단계에서는 이 법을 적용하기 힘들다. 성적인 대화를 하거나 그런 행동을 유도하는 등 더 직접적인 상황이 있어야 처벌하도록 돼 있다”고 했다.

 

ㄱ씨와 같은 행위가 심각한 아동 성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법안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양의 아버지는 <한겨레>에 “사전단계에서 막아야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지 않나. 아동 대상 성범죄에서만큼은 더 엄격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외에서는 성적 그루밍 행위를 모두 범죄로 보고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성범죄법’(Sexual Offence Act) 등에 따라 노골적으로 성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더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성적 만족감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대화 자체만으로 처벌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후 성적 행위를 참여시킬 목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 또는 선물이나 호의를 베푸는 행위 등도 범죄행위로 간주한다.

 

■ 수사 : 너무도 달랐던 한국·캐나다 경찰 대응

 

김양의 아버지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대응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피해자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요구하고, 절차 검토로 수사가 지연됐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캐나다 경찰은 달랐다. “한국 경찰과 (아이가 체류 중인) 캐나다 경찰에 같은 날 신고했다. 캐나다 경찰은 신고 당일 한국말이 가능한 직원과 함께 아이 엄마와 아이가 거주 중인 집에 출동했다. 그날 바로 포렌식을 하겠다며 아이의 휴대전화를 회수했고, 아이가 다니는 학원 등에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인계하지 말아달라’고 안내를 했다고 하더라.” 캐나다 경찰은 현재 ㄱ씨가 미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해 미국 경찰과의 공조 수사에 착수한 상황이다.

 

해당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일산동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과 관계자는 “피의자가 해외에 있어 관할 문제 등 검토할 문제가 있었다. 캐나다 경찰과 공조하기 위해 네이버 쪽에 압수수색 영장도 집행했다”고 해명했다.

 

김양과 연락이 닿지 않자 ㄱ씨가 보낸 채팅(왼쪽), 메타버스 공간에서 만난 김양과 ㄱ씨의 캐릭터. 사진 김양 아버지 제공

 

■ 플랫폼 대응 : 의무는 없으니 즉각 조치도 없다?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서도 책임이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페토의 운영사 네이버제트는 금칙어 설정, 사이버범죄 수사 의뢰 방법 공지 등을 통해 메타버스를 매개로 한 범죄에 대응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김양의 아버지도 “피해 사실을 인지한 당일 제페토 쪽에 조처를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즉각적인 답은 없었다. 법적 의무가 없으니까 조치도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에서는 지난달 18일 메타버스 등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의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예방 및 피해자 보호 책임을 강화하는 ‘청소년성보호법 일부개정안’(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됐다. 이 발의안에는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가 자신이 운영·관리하는 정보통신망에서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대화 등 관련 범죄를 인지한 경우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하도록 하는 신고의무조항이 담겼다.   박고은 기자

15살 때 후지코시 군수공장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 대법원 판결 기다리다

 

일제강점기 일본 노역현장에 강제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피해자 안희수 할머니가 21일 별세했다. 향년 93.

 

고인은 경남 마산(현 창원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44년 일본으로 강제동원된 뒤 일본 중서부지역인 도야마현에 있는 후지코시 군수공장에 배치됐다. “그때 일본인 교사로부터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건너갔지만, 포탄외피 등 무기부품 만드는 일을 해야만 했다. 상급학교 진학은커녕 급여조차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고 고인은 생전에 증언했다. 그처럼 후지코시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동원된 한국인은 여성 1090명, 남성 540명 등 1600여명에 이른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안희수 할머니.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 추진협의회 제공.

 

안 할머니 등 피해자들은 2003년 일본 현지 법원에서 후지코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최종 패소했다. 그러나 2013년 서울중앙지법에서 후지코시를 상대로 다시 소송을 제기해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그러나 안 할머니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기다리다 끝내 눈을 감았다. 소송을 제기할 때 원고는 피해당사자 13명과 유족 4명 등 17명이었으나, 안 할머니를 포함해 5명이 재판 도중 숨져, 현재 피해당사자는 8명만 남았다. 하지만 숨진 피해당사자의 유족들은 소송을 계속 진행할 각오다. 일본 등 국외로 강제동원됐던 여성 근로정신대 피해자는 대부분 숨지고, 생존자는 지난해 기준 131명에 불과하다.

 

빈소는 경남 창원 정다운요양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3일 아침 7시30분이다. 최상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