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에 최종심, 대법원승계작업이재용 뇌물 등 인정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비선실세였던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형량이 징역 18, 벌금 200억원, 추징금 63억여원으로 확정됐다. 지난 201611월 구속기소된 뒤 4년 동안 다섯 번의 재판 끝에 나온 결과다.

대법원 2(주심 안철상 대법관)11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 등의 혐의로 기소된 최씨의 형량을 원심대로 확정했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도 징역 4년에 벌금 6천만원형이 확정됐다.

최씨는 박 전 대통령, 안 전 수석과 공모해 50여개 대기업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그룹 현안 해결등을 대가로 미르·케이(K)스포츠 재단 설립 출연금 774억원을 요구한 혐의 등으로 201611월 재판에 넘겨졌다. 또 승계 작업을 돕는 대가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서 딸 정유라씨의 승마 훈련용 말 3마리를 지원받고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금 200억여원을 받은 혐의(뇌물죄)도 샀다.

최씨는 1·2심에서 모두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지만 지난해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뇌물죄는 인정하면서도 최씨가 전경련과 대기업에 미르·케이(K)스포츠재단 출연을 강요한 행위는 무죄로 판단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지난 214일 파기환송심은 형량이 2년 줄어든 징역 18년과 벌금 200억원을 선고했고 대법원 재상고심은 이를 확정했다.

한편, 지난 9일 옥중에서 회고록(<나는 누구인가>)을 발간한 최씨는 검찰과 특검의 강압 수사를 비판하며 언젠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날이 오면 재심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 장필수 기자 >


교류협력법 위반 남북정상 합의 위반 접경지 주민 생명안전 위험

                        

통일부는 10일 북한이탈주민단체(탈북민)인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큰샘’(대표 박정오)이 전단·패트병을 북쪽에 보낸 행위를 남북교류협력법을 위반한 미승인 반출로 판단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고발)하고, 법인 허가 취소 절차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대북전단과 관련한 정부 대응의 무게중심을 기존의 처벌 없는 단속에서 처벌을 통한 원천 차단으로 옮기겠다는 선언이다.

북한 당국이 남북 사이 모든 직통 연락선을 차단하며 대남 강경 기조로 돌아선 직접 원인인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원천 차단해 남북관계의 추가 악화를 막고, 반전의 계기로 삼으려는 정책으로 풀이된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오후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한 대북전단·패트병 살포 관련 정부 입장을 통해 정부는 오늘(10)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을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고발하고, 법인 설립 취소 절차에 착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상기 대변인은 두 단체가 대북전단 및 패트병 살포 활동을 통해 교류협력법의 반출 승인 규정을 위반했으며 남북 정상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해, 남북 간 긴장을 조성하고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안전에 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등 공익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경찰력을 동원해 대북전단 살포를 단속한 사례가 있지만,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교류협력법 위반으로 판단해 사법적 처벌 절차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현행 교류협력법은 물품 등을 북쪽으로 반출하려면 사전에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13), ‘미승인 반출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271). 역대 정부도 경찰관직무집행법(51) 등을 근거로 대북전단 살포를 단속했지만, 처벌 조항이 없어 원천 차단에 한계가 있었다.

통일부는 대북전단 살포 단속에 이전과 달리 교류협력법을 적용하기로 판단한 핵심 이유로 20184·27 판문점선언에 따른 사정 변경을 들었다. 4·27 판문점선언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 중지”(21)를 명시하고 있다.

앞서 20162월 대법원은 대북전단 살포 행위가 접경지역 국민의 생명·신체에 급박하고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킨다국가는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제지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대북전단 처벌 통한 원천차단남북관계 경색에 강경 전환

통일부가 10일 전단과 페트병을 북쪽에 보내온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 두 북한이탈주민(탈북민) 단체를 실정법 위반으로 고발하고 법인 취소 절차를 밟겠다고 밝힌 건, 정부의 대북전단 대응 기조 전환 선언이다. ‘처벌 없는 단속에서 단속과 처벌, 원천 차단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방침을 천명한 것이다.

통일부가 대북전단 살포 행위 처벌의 근거로 내세운 법률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교류협력법)이다. 교류협력법은 131항에서 물품 대북 반출은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하며, 27조에서 미승인 반출은 징역(3년 이하) 또는 벌금(3천만원 이하)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정부는 물론 문재인 정부에서도 대북전단에 교류협력법을 적용하지는 않았다. 사정이 있다. “전단 살포는 북한의 불특정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 교역에 해당하지 않아 통일부 장관의 승인 대상이 아니다라는 이명박 정부의 유권해석이 있었다. 통일부가 그동안 교류협력법으로 대북전단 살포를 단속·처벌하려는 의원입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배경이다.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를 교류협력법을 위반한 미승인 반출로 판단해 처벌을 추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통일부의 10일 발표를 두고 미래통합당 등 보수 야당과 보수 언론의 비판이 예상되는 이유다.

이를 의식한 듯 통일부는 대북전단 살포 단속·처벌에 교류협력법을 적용하겠다고 법률 유권해석을 바꾼 사정 변경사유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통일부 당국자들이 밝힌 사정 변경사유는 전단을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 중지를 명시한 4·27 판문점 선언 접경지 국민의 생명·신체에 대한 급박하고 심각한 위험을 이유로 국가(정부)의 대북전단 살포 제지가 적법하다고 한 대법원 판결(2016225) 대북전단을 매개로 한 남북 사이 전염병 전파 우려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느낀다는 접경지역 주민들의 민원 라디오·달러·유에스비(USB)·쌀까지 담아 보내는 전단 살포 방식의 다양화·대규모화 등이 그것이다.

사실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교류협력법 위반으로 단속·처벌해야 한다는 법률가들의 지적은 전부터 있었다. 예컨대 김하중 국회 입법조사처장은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던 201410월 언론 기고문에서 대북전단 살포는 교류협력법상 통일부 장관 승인 사항이라며, 미승인 살포 행위를 단속·처벌하지 않으면 오히려 직무유기죄(형법 122)에 해당한다고 짚었다. 대북전단은 교류협력법에 따라 반출 때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광고물 또는 인쇄물에 해당(통일부 고시 2012-2호 등)한다는 것이다.

통일부는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의 법인 허가 취소 절차에 착수하겠다고 밝혀, 대북전단 살포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정책 의지를 드러냈다. 두 단체는 통일부에 등록된 비영리법인이다. 민법은 특정 비영리법인이 공익을 해치거나 설립 목적 밖의 활동을 하거나 허가 조건을 어겼을 때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자유북한운동연합은 정부의 통일정책 추진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의 활동을, 큰샘은 탈북청소년 지원을 내세워 설립 허가를 받았다두 단체가 이를 어겨 허가 취소 절차를 밟기로 했다고 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와 박정오 큰샘 대표는 친형제 사이인 탈북민이다.

통일부의 이런 정책 기조 전환엔 정부와 접경지역 지자체·주민의 제지·반발에도 한국전쟁 70돌인 26일 대북전단 100만장을 살포하겠다고 공언해온 자유북한운동연합의 막무가내식 태도와 북한 당국의 반발 등이 두루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통일부의 10일 발표는 청와대 등 관계부처의 조율을 거쳐 이뤄졌다. 범정부 차원의 기조 전환인 셈이다. 대북전단 살포 단속·처벌 방침을 둘러싼 국내 논란의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더라도 4·27 판문점 선언 이행 의지를 강조해 남북관계의 추가 악화를 막고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반전의 계기로 삼겠다는 포석이다.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아 연일 항의 군중집회 등을 조직하고 이를 <노동신문>에 닷새째 대대적으로 보도해온 북한 당국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주목된다.

경찰은 대북전단 살포를 막으려 해당 탈북민 단체의 주요 이동 지점인 경기도 파주·연천지역 36곳에 5개 중대(400), 강화에 2개 제대(60) 등을 배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 이제훈 기자 >

 


정세현 민주평통 부의장, 회고록 출판 기념회서 밝혀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1945616만주국 싼장성 자무쓰시’(현 중국 헤이룽장성 자무쓰시)에서 태어났다.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지 두달 만에 광복을 맞아 아버지의 고향 전라북도 장수로 귀향했다. 일제강점기의 끄트머리에 세상에 나와 한국전쟁과 오랜 분단의 세월을 헤쳐온 그의 삶은 곡절 많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그는 서른셋의 서울대 외교학과 박사학위 과정 학생이던 197711월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공산권연구관실 보좌관(4)으로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 “북한 자료도 맘껏 보고 월급도 챙길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첫 걸음이다. 하지만 그는 그뒤로 40년이 넘도록 끝도 시작도 없는 통일의 미로를 헤매고 있다. 운명이다.

북한과 마주한그 긴 세월 속에서 가장 슬픈 기억과 기쁜 기억을 물었다. 10일 오전 서울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된 그의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북한과 마주한 40>(대담자 박인규·창비)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다.

“1994725~27일로 예정된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199478)으로 무산됐을 때가 가장 실망스러웠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 여기까지인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통일비서관으로 잠도 자지 않고 회담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때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쪽의 경제적 어려움을 풀어주며 군사적 도발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를 관리할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다. “김영삼 대통령한테 입력한 개념은 분단 한반도에서 군사적으로 조마조마하게 사는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북쪽이 군사적으로 대남 적대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경제가 어려운 북쪽의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06·15 공동선언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큰 기쁨의 다른 얼굴이다. 삶의 역설이다. 그가 가장 희망적인 날로 기억하는 건, 2000410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613~15일 평양) 발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기회를 잃고 우리한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나하고 한탄을 했는데, 6년이 지나지 않아 그날이 왔다.” 그는 이 대목에서 환하게 웃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그는 다양한 자리에서 북한을 상대했다. 남북관계가 대결로 점철된 냉전기에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이후 탈냉전기를 관통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땐 통일부 장관으로 남북을 잇는 길을 맨 앞에서 열어갔다.

687쪽에 이르는 벽돌책인 회고록은 정세현 특유의 입담과 통찰력이 잘 버무려진 생생한 사례와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의 부친은 해방된 조국에서 한의원을 개업했고, 그 덕에 어려서부터 한학에 익숙했다. 70년 분단 사상 최대 인적교류의 장이던 금강산관광사업의 별칭인 햇볕정책의 옥동자는 그의 작명이다. 그는 통일부 장·차관 시절 숱한 출입기자들의 아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미국의 간섭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압박으로 다가왔다고 그는 회고록 서문에 적었다. 한국 외교의 전제처럼 인식되는 한미공조라는 개념의 탄생과 관련한 그의 전언은 서늘하다. “김영삼 정부 때 핵문제로 미국과 엇박자가 심했다. 그때 미국이 한국을 묶어놓으려고 꺼낸 게 한미공조라는 말이다. 공조를 이유로 사사건건 쥐어박으니 그 기가 센 김영삼 대통령도 결국 미국 하자는 데로 끌려가더라. 1994년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 실행됐으면 한반도가 어찌 됐겠나?”

그가 새삼스레 한미공조라는 개념의 본질을 상기시킨 건, 20189·19 남북군사합의 뒤 미국이 꺼내든 한미 워킹그룹한국 외교부가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받아들인데 대한 짙은 아쉬움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한미워킹그룹은 제재를 빌미로 남북의 자율적 협력을 가로막는 미국의 덫이다.

출판사 창비는 정세현의 회고록을 학자의 머리, 행정가의 눈, 시민의 가슴으로 북한을 바라본 평생의 기록이라 표현했다. 과장은 없다. 그는 40년 넘게 북한과 마주한 고위공직자일뿐더러, <모택동의 대외관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전문가이자 국제정치학자다. 그는 기대를 거는 것은 국민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 이제훈 기자 >

남영동 옛 대공분실서 6.10항쟁 33주년 기념식 열려

문 대통령 가정·직장·경제서 삶 속에 스며드는 민주주의를

 

10일 정부가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포함한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사진은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자들. (윗줄 왼쪽부터) 고 이소선, 고 박형규, 고 조영래, 고 지학순, 고 조철현, 고 박정기, (아랫줄 왼쪽부터) 배은심, 고 성유보, 고 김진균, 고 김찬국, 고 권종대, 고 황인철. 행정안전부 제공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0일 열린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구심이었던 종교계·학계·시민사회 인사들에게도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됐다. 훈장은 고인이 된 이들을 대신해 가족들이 받았다.

박형규 목사는 군사독재에 맞선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평가된다. 교회 갱신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2016년 타계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1986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변론하며 국가 권력의 야만성을 폭로했고 한강물 역류로 수해를 입은 서울 망원동 주민 2400가구를 대리해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등 약자 변론에 앞장섰다. <전태일 평전>을 썼다.

지학순 주교는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구국선언 등을 주도했다. 1974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문을 발표해 구속됐고, 이 사건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의 기폭제가 됐다. 1993년 타계했다.

10일 정부가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포함한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사진은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자들. (윗줄 왼쪽부터) 고 이소선, 고 박형규, 고 조영래, 고 지학순, 고 조철현, 고 박정기, (아랫줄 왼쪽부터) 배은심, 고 성유보, 고 김진균, 고 김찬국, 고 권종대, 고 황인철.

조비오 신부는 1980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맞서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9년 열린 5·18 진상규명 국회 청문회에 나와 신군부의 학살 행위를 증언했으며, 2016년 타계했다.

성유보 전 <한겨레> 편집위원장은 1974<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언론 자유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 등을 거쳐 1988<한겨레> 창간에 참여해 편집위원장 등을 지냈다. 2014년 별세했다.

김진균 전 서울대 교수는 진보사회과학계의 거목으로 1980년 서울대에서 강제 해직된 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의장 등을 지내며 한국의 민주화와 진보적 개혁을 위해 힘쓰다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김찬국 전 상지대 총장은 진보적 신학자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2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강제 해직 뒤 재야운동에 헌신했으며, 복직해 연세대 부총장과 상지대 총장을 역임했다. 2009년 별세했다.

권종대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농민운동에서 시작해 통일운동까지 헌신했다. 1978년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한 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을 결성해 초대 의장 등을 지냈고 2004년 별세했다.

황인철 변호사는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1979년 김재규 사건, 1989년 임수경 방북 사건 등 시국사건 때마다 약자 편에 서서 변론을 했다. 이돈명·조준희·홍성우와 함께 인권 변호사 4인방으로 불렸으며, 1993년 타계했다. < 송경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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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꿈 이어받아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부모들

올해 33돌을 맞은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모란장이 수여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1929~2011)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1928~2018),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80)씨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들이다. 세 사람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중심으로 함께 활동하며 동지애를 키웠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20056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제16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제에서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소선 여사는 197011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 등 노동자 권리 보장을 외치며 분신해 숨지자, 아들이 꿈꾼 세상을 만드는 데 투신했다. 아들의 친구들과 함께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설립한 게 시작이었다. 이씨는 1978~1979년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YH)무역 노동자 투쟁에 나섰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땐 진상규명 투쟁에도 나섰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민가협) 설립을 주도했고,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1998~1999년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장기간 농성을 했고,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 등의 노동 현장도 계속 지켰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4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소선 여사가 별세한 20119월 정부에 훈장 추서를 건의했으나 기각됐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개인 활동 업적보다는 전태일 열사 어머니로서의 의미가 더 크기에 다른 사람과 업적을 비교하기 곤란해 훈장을 추서하지 않기로 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1990822일 서울 홍제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아들의 고문치사 및 범인 은폐조작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판결에 항의하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고 박정기씨는 19871월 막내아들 박종철 열사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숨지자 6월 민주항쟁의 선봉에 서게 됐다. 1988년과 1998년 장기 농성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 제정을 이끌었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치사사건 때는 법정소란죄로 석달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20183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박정기씨를 찾아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 피해자에게 사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넉달 뒤 그는 고인이 되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최루탄부상자전국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던 1989510일 국회 앞에서 최루탄 사용 금지를 위해 여야가 노력할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7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어머니 배은심씨는 한열이의 이름으로유가협과 함께 전국의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정권 차원의 사과와 인권보호 대책 마련에 목소리를 높였다. 군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리,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슬퍼하는 자리엔 어김없이 찾아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배씨는 이날 기념식에서 서른세번째 610일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며 다시는 민주주의를 위해 삶을 희생하고 고통받는 가족들이 생기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 간절한 소망을 표현했다. < 성연철 송경화 기자 >

남영동 그곳에서문재인 대통령 일상 민주주의 이루자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 붉은 꽃이 걸렸다. ‘살인기계’ ‘고문공장으로 불렸던 곳. 김근태와 박종철 등 숱한 민주 인사들의 몸과 영혼을 파괴한 곳. 꽃은 33년 전 박종철이 물고문 끝에 숨진 509호 조사실, 고문받는 자들의 투신을 막으려고 검은 벽돌 외벽에 좁고 길게 낸 창문 위에 붉게 피었다. 그 꽃 아래서 대통령은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자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에서 열린 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주의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포용과 상생, 연대와 협력으로 민주주의를 우리 삶에 스며들게 하자고 말했다. 행사가 열린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는 과거 치안본부 대공분실 자리다. 문 대통령은 2년 전 기념사에서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6월 항쟁으로 세운 민주주의가 촛불 혁명과 코로나19 극복을 이끌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시민과 노동자 등 6월 항쟁의 주인공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가정의 민주주의를 뿌리내렸다는 평가였다.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촛불을 들었고, 코로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연대와 협력의 민주주의를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였다. 그는 민주주의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때도 정치,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가정, 직장,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속가능 사회를 향한 상생과 협력의 중요성도 거듭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마음껏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남의 몫을 빼앗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지속가능하고 평등한 경제가 우리가 지향할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전날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다고 말한 것의 연장이다.

코로나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협력과 통합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문 대통령은 갈등과 합의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갈등 속에서 상생의 방법을 찾고 불편함 속에서 편함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에 관해서는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민주주의로 이뤄야 한다고 간략히 언급했다. 최근 북한이 남한과의 연락선을 끊은 데 대한 곤혹스러움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조영래 변호사, 지학순 주교 등 민주화 운동 유공자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청와대는 민주화 공로를 독립과 호국과 동등한 차원에서 예우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 숨진 509호실 창문에 붉은 꽃문 대통령 기적 같다

배은심씨 ‘33번째 6·10에 보내는 편지낭독 경찰청장 국가폭력사과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아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 외벽에 꽃이 달려 있다.

10일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린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 마당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단체 대표와 유공자 등이 자리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기념식 이후 3년 만에 행사에 다시 나왔다. 오랫동안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린 이곳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 건축계 거장 김수근의 설계로 탄생했다. 애초 5층이던 건물은 1983년 전두환 정권 때 7층으로 증축됐다. 이곳에서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22일 동안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19871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씨가 509호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2년 전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문 대통령은 기적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 불행한 공간을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은 마치 마술 같은 위대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엄혹한 시절을 이겨내고 끝내 어둠의 공간을 희망과 미래의 공간으로 바꿔낸 우리 국민과 민주 인사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날 훈장을 받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세상을 떠난 이소선 여사와 박정기씨에게 ‘33번째 610일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해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는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이 옆에 가 계시고, 종철 아버지도 아들하고 같이 있어서 나 혼자 오늘 이렇게 훈장을 받습니다. 나 혼자 이래도 되는 건가 싶네요. 종철이 아버지도 이런 날 보고 거서 뭐 하고 있는 거요라고 하실 거 같아요라고 했다.

기념식을 마친 문 대통령은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 조사실을 찾아 헌화하고 묵념했다. 문 대통령은 조사실에 설치된 고문용 욕조를 보며 “(보는 순간) 공포감이 온다. 철저한 고립감 속에서 (저항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했다. 김 여사는 6월 항쟁 당시 시민들이 거리에서 건넸던 장미와 카네이션, 안개꽃, 손수건을 박종철 열사 영정에 올렸다. 행사에는 민갑룡 경찰청장도 참석했다.

병상의 백기완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유월항쟁은 이 참도 내 가슴 속에 불타오르네-백기완

올들어 5개월째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인 백기완 선생.

6월항쟁을 이끌었던 투사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0일 서울대병원 병상에서 ‘6월항쟁 33돌 기념 말씀을 친필로 써보냈다. ‘유월항쟁은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유월항쟁은 이 참도 내 가슴 속에 불타오르네’, 두 개의 글이다.

지난해 심혈관 수술에서 회복해 잠시 대외 활동을 했던 백 소장은 지난 1월말 폐렴 증상으로 입원한 이래 지금껏 투병중이다. 통일문제연구소의 채원희씨는 젊은 시절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으신데 지난해 수술 후유증으로 체력이 약화되자 재활성화해서 중환자실도 몇차례 오갈 정도로 위험한 고비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백 소장은 19875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으로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해 호헌철폐 투쟁을 비롯 6·10 시민 항쟁의 선봉에서 싸웠다. < 김경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