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 갈등, ‘환경 불평등’ 문제다
“감 따랴 싸우랴 아주 정신없제. 그래도 ‘언제 암에 걸리노’ 걱정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 아입니꺼.”
주홍빛 감이 곱게 영글어가는 경북 청도군 삼평1리 주민들은 요즘 눈코 뜰 새가 없다. 지역 특산물인 ‘청도반시’를 만드느라 바쁜 와중에 매일같이 마을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50㎡ 남짓한 움막을 찾는다. 주민들이 한국전력공사(한전)의 송전탑 건설 공사를 막으려고 지난해 9월 만든 곳이다.
한전은 청도 일대에 345㎸(킬로볼트) 송전탑 40개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했는데, 39개는 이미 완공했다. 나머지 1개가 들어설 삼평1리의 주민 20여명은 송전선로 지중화를 요구하며 지난해 8월부터 공사를 막고 있다. 낮에는 할머니 대여섯이, 밤에는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움막을 지키며 ‘불시에 이뤄질지 모를’ 송전탑 설치를 감시한다. 빈기수(49) 주민대책위원장은 “송전탑이 마을 바로 앞에 생기는데다, 송전선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아예 짓지 말라는 게 아니고, 마을을 통과하는 720m만 땅에 묻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을걷이로 바쁜 강원 삼척시 원덕읍 옥원1리 주민 7명은 지난 11일 오전 일손을 놓고 차로 1시간여를 달려 삼척시청을 항의방문했다. 마을에 들어설 154㎸ 송전탑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한전은 석탄화력발전을 하는 삼척그린파워발전소가 완공되면 수도권 등지로 송전을 해야 한다며 옥원1리 등 삼척 일대에 송전탑 51개를 더 설치하려 하고 있다. 주민들은 한전이 설명회도 제대로 열지 않고 ‘보상협의 요청서’부터 보내왔다고 반발하고 있다. 9살 때부터 이곳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한숙(64)씨는 “한전에서 보상금을 찾아가라고, 찾아가지 않으면 강제로 공사를 시작한다는 공문을 3번이나 보냈다”고 말했다.
전국 곳곳에는 ‘또다른 밀양’들이 있다. 밀양 4개 면을 포함해 20곳에 이르는 마을 단위에서 주민들이 직접 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등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경기 지역 4곳(이천·여주·광주·양평)처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한전에 변전소·송전탑 설치 반대 의견을 전달하고 협의 중인 곳까지 포함하면 해당 지역은 더 늘어난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일각에서 ‘왜 다른 곳은 다 조용히 송전탑을 짓는데 밀양만 난리냐’는 시선이 있는데, 밀양이 더 많이 알려졌을 뿐 이전부터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은 곳곳에서 있었다”고 말했다.
환경·건강 우려시설 ‘힘없는 지방마을’ 떠넘겨 논란 자초
고령화된 시골마을 송전탑 집중, 건설 설명회 않거나 의견 안받아
‘밀어붙이기 집행’ 곳곳 갈등 빚어
“비민주적 송전설비 건설과정 등 사회적 논의 거쳐 개선책 세워야”
갈등 지역은 읍·면·동·리 단위의 시골마을이 대부분이다. 환경오염 피해에 더 취약한 고령층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미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껴온 주민들은, 송전시설 설치 문제를 겪으며 정부를 향한 분노와 박탈감이 증폭됐다고 말한다. ‘가장 힘없는 마을에, 가장 손쉽게, 가장 적은 비용 들여서 공사하려고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고 여기는 것이다. “평생 못 먹고 못 쓰고 살았는데 왜 또 빈털터리가 되고 짓밟혀야 되노. 일제 경찰 식으로 우리 동네에 (송전탑을) 밀어붙이고 있으니, 너무 억울하데이.” 청도군 삼평1리에서 30여년을 살아온 이차연(75)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마을을 둘러보면, 송전탑 반대 주민들의 목소리를 ‘지역 이기주의’나 ‘높은 보상비를 노리는 떼쓰기’로 치부할 게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다가온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환경 불평등’ 상황을 직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갈등 지역 주민들을 비난할 게 아니라, 갈등을 발생시키는 송전탑 문제의 근본 원인인 △중앙집중형 전력공급체계 △송전설비 건설 과정의 비민주성 △집행 과정의 국가폭력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벌여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전력은 충남·울진·고리 등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 단지에서 상당 부분이 생산되는데, 소비는 주로 서울·경기 등 수도권과 남부 해안가의 대형 공장 밀집지역에서 이뤄진다. 엄은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송전탑 건설 반대 목소리는 한국에서 전력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가 갖는 지리적인 환경 불평등에 대한 자각과 문제제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도 “송전선로 건설 반대운동은 대도시권과 다른 지역 간 전력 배분의 편익과 위험 부담에 내재한 불평등의 해결을 촉구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추진 과정에서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의견도 반영되지 않는 점을 가장 답답해한다. 청도에서 7년째 복숭아 농사를 짓는 이은주(46)씨는 “2009년 처음 송전탑이 들어오는 걸 알고 한전에 정보공개를 신청해도 ‘비공개’라면서 안 줬다. 나중에 한전이 2006년 다른 지역 주민설명회 때 내준 자료를 구해 보니까 원래 선로가 우리 마을이 아니더라. 한전은 원래 선로가 지나는 산에 어느 문중의 산소가 있어 유교사상을 고려해 피했다고 하던데, 산 사람을 무시하는 건 이치에 맞나”라고 말했다. 옆에서 추호남(73)씨가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 얼른 죽어뿌라 이 말이지. 무덤에 있는 사람만도 못한 거 보이.”
반대운동이 좌절된 곳도 있다. 지난 10여년간 한전을 상대로 송전탑 반대운동을 하다 올해 9월 공사 재개에 합의한 경기 포천시 일동면의 사례는 ‘강요된 합의’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5년 전까지 주민대책위원장으로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김인철(56)씨는 “한전이랑 싸우다 지치고 지쳐 이젠 다 끝난 일이다. 주민들은 동네에 리조트 하나 들어온다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그 바로 앞에 송전탑이 세워지게 됐으니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민단체 ‘포천의제21’ 임종석 활동가는 “한전은 주민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국가 기간시설이라고 하면서 밀어붙이면 뜻대로 된다는 ‘자신감’이 있더라. 포천을 송전탑 건설 합의의 긍정적 롤모델로 삼겠다고 했다는데, 이곳은 한전이 밀어붙이기로 해서 형식적으로 합의한 나쁜 예”라고 말했다.
< 김효실 기자, 청도 삼척 이천 포천/이재욱 김미향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