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센터 참사로 숙연함 흐르는 성탄절
교인 2명 잃은 교회 간소한 성탄예배
“불우아동 돕던 두 분 뜻 이어가자”
장레식장에선 희생자 5명 영결식 엄수

25일 오전 충북 제천시 감리시온성교회에서 신자들이 성탄예배를 하고 있다.

“오늘 슬픔과 비통에 잠긴 제천시민에게 오시옵소서. 아멘.”

숙연한 적막이 흐르는 성탄절이었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로 29명의 주민이 세상을 떠난 가운데, 충북 제천시에서는 25일 성탄절에도 추모 분위기가 이어졌다. 교인을 떠나보낸 교회에서는 추모의 의미를 담은 성탄예배가 이루어졌고, 제천서울병원 등 장례식장에서는 희생자 5명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교인 두 명을 참사로 잃은 충북 제천 시온성교회는 평소와 달리 간소하게 성탄예배를 가졌다. 시온성교회는 이번 참사로 이항자(57) 명예장로와 김태현(57) 권사를 갑작스레 떠나보냈다. 전날에도 성탄 전야제 예배를 취소하고 오후 위로예배만 지냈던 교회는 오늘도 오후 행사를 취소하고 오전 성탄예배만 치뤘다.

예배 내내 성탄절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두 교인의 빈 자리를 실감하게 하는 숙연한 적막이 흘렀다. 성탄예배를 진행한 시온성교회의 박정민 목사는 “오늘은 울지 않겠다는 어제의 약속을 오늘도 못 지키겠다”며 흐느꼈다. 박 목사는 “오늘 예배가 슬픔에 잠기기보다는 두 분의 뜻을 이어가는 자리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군데군데 눈물을 훔치는 교인들도 보였다.

시온성교회의 교인이었던 이항자씨와 김태현씨는 사고 당일에도 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반찬을 만든 후 피로를 풀기 위해 사우나에 갔다가 참사를 당했다. 두 교인은 매주 목요일마다 교회를 찾아 제천의 불우아동을 위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 목사는 “예수님처럼 두 분도 소외된 곳에 먼저 달려가서 위로했었다”며 “성탄절의 의미를 실천하신 분들이 먼저 가셨다”고 한탄했다. 이날 예배에 참석한 교인 김아무개(49)씨도 “제일 활동도 많이 하고 베푸셨던 분들이 이렇게 갑자기 가시니까 경황이 없다. 원래 성탄절에는 이웃을 위한 행사도 하고 축하잔치도 하는데,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각자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날 오전에는 희생자 5명의 영결식도 엄수됐다. 오전 8시 제천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는 희생자 안익현(58)씨의 발인식이 열렸다. 안씨의 아들이 영정을 들고 나오고, 관이 차에 실리자 장례식장에는 “저걸 어째”,“아이고”하는 탄식이 이어졌다. 유족뿐 아니라 친구와 친지들도 눈시울을 붉히거나 안타까운 한숨을 쏟아내며 갑작스럽게 떠난 안씨를 비탄 속에 떠나보냈다.

코레일에서 기관사로 일했던 안씨는 사고가 난 당일에는 등산을 마치고 사우나에 몸을 씻으러 갔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결식에 참석한 안씨의 지인 김아무개(56)씨는 “삼남매를 알뜰히 키운 성실한 아버지였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보낼 줄 누가 알았겠냐”며 눈물을 훔쳤다.

안씨의 유족은 안씨가 화재 후 인명구조가 한참 진행 중인 밤 8시 1분께 여동생이 건 전화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씨의 아들은 지난 23일, 사고 당일 8시 1분에 안씨가 전화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통화내역을 공개한 바 있다. 영결식에 참석한 이아무개(48)씨는 “8시에 전화를 받았다면 오랫동안 살아있다는 뜻일 텐데, 경찰에서 조사를 통해 명확하게 해명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5일에는 참사희생자 안익현씨 외에도 최숙자씨, 채인숙씨 등 5명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26일에는 박한주, 정희경씨 등 희생자 4명의 영결식이 열릴 예정이다.

<제천/임재우 기자>


리스트 8명 중 두 사람만 기소
2년여 재판 끝에 무죄 확정

홍 “보수우파 중심 전력 다하겠다”
이, 내년 지방선거 등 출마 관측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오른쪽)가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대법원이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자 신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 데 대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웃으며 대표실로 가고 있다. 왼쪽은 김대식 여의도연구원장. 강창광 기자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기소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22일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완구 전 국무총리도 무죄가 확정되면서, 2015년 4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 출신인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남겼던 ‘성완종 리스트’ 등장인물 중 처벌받은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게 됐다. 걸림돌을 제거한 홍 대표는 “보수우파의 중심으로 전력을 다하겠다”며 기세를 올렸고, 이 전 총리도 내년 6·13 지방선거 출마 등 정치적 재기를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 3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이날 오후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원심의 판단은 옳다”며 1심(징역 1년6월, 추징금 1억원) 유죄 판결을 뒤집어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홍 대표는 한나라당 대표 경선을 앞둔 2011년 6월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성 전 회장의 측근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2015년 7월 재판에 넘겨졌었다.

홍 대표는 무죄 확정 뒤 기자회견을 열어 “음해와 질곡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 한국 보수우파의 중심으로 자유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검찰을 “정권의 개”라고 비난해온 홍 대표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증거를 조작한 검사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했다. 당시 성완종 리스트 사건 특별수사팀장은 현 문무일 검찰총장이다. 다만 홍 대표는 “문 총장은 조작에 가담했다고 믿지 않는다”고 했다.

이완구 전 총리 재판을 맡은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도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직전 <경향신문>과 한 전화통화 녹음과 돈을 줬다는 정치인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유죄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 전 총리는 2013년 4월 보궐선거 때 충남 부여 선거사무소를 찾아온 성 전 회장에게서 현금 3천만원이 든 쇼핑백을 받은 혐의로 홍 대표와 함께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3천만원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이 전 총리는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당시에 결백을 말하며)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었다. 국무총리를 사퇴하며 인고의 세월을 겪었다”며 “검찰이 증거자료를 재판이 끝나기 전에 조작하고 폐기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 총리가 내년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홍 대표는 “이 전 총리가 명예회복을 원하면 당에서 돕겠다”고 밝혔다.

성완종 리스트에는 김기춘·이병기·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 자유한국당 홍문종 의원, 유정복 인천시장, 서병수 부산시장 등 친박 실세 등 8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검찰은 홍·이 두 사람만 재판에 넘겼었다.

이날 대법원에는 국회의원과 정치인 7명의 선고가 몰렸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윤종오 민중당 의원(울산 북구)은 벌금 300만원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윤 의원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마을 주민 공동체 사무소를 만들어 유사 선거사무소로 사용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이날 유일하게 의원직을 잃은 윤 의원은 “박근혜 정권의 정치검찰이 표적수사하고, 이명박 정권이 임명한 정치판사가 유죄 판결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자유한국당 이철규·김한표, 더불어민주당 김철민·이재정 의원은 무죄가 확정됐다.

<김남일 기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20일 “당 대표직을 모두 걸고, 바른정당 통합에 관한 전당원 의견을 묻고자 한다. 통합 찬반으로 당 대표의 재신임도 묻겠다”고 제안했다.

안 대표는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이 밝혔다. 안 대표는 “당의 혼란을 조속히 정리하고 마음을 모아야 할 때”라며 “통합 찬성이 나오면 단호하고 신속하게 절차를 밟겠다”며 “반대로 확인되면 당 대표직을 사퇴하는 것은 물론, 그 어떤 것이라도 하겠다. 전 당원 투표로 확인된 표심은 구성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송호진 김규남 기자 >


작년 7월 처가쪽 특혜로 첫 수사 대상…수뇌부 연루 밝혀질까 ‘적당수사’ 소문
박영수 특검 11개 혐의 영장, 검찰 특수본 2기 8개혐의 영장 모두 기각

불구속 재판서 우병우 “난 정치 희생양”, 세번째 영장심사서 결정적 진술 나와
국정원 사찰문건 나오면서 ‘외통수’… 혐의 줄었지만 ‘무조건 모르쇠’ 힘들듯

우병우 전 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직권남용 혐의에 관한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15일 새벽 구속수감되면서, 검찰과 우 전 수석 사이에 이어졌던 질긴 ‘악연’이 일단락됐다.

검찰 출신으로서 한때 검찰 인사와 수사 등을 주무르며 막강한 ‘실세’로 꼽혔던 그였지만,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검찰에 우 전 수석은 뼈아픈 존재가 됐다. ‘법꾸라지’라는 별명이 회자될 정도로 우 전 수석은 번번이 검찰 수사를 빠져나갔다. 지난해 우 전 수석이 팔짱을 낀 채 조사받는 사진이 보도되고,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될 때 우 전 수석이 당시 김수남 검찰총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 등과 통화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검찰에 대한 신뢰는 곤두박질쳤다.

그 사이 검찰 수뇌부가 모두 교체되고 새 수사팀의 거듭된 추가 수사 끝에 결국 우 전 수석이 구속되면서, 검찰은 그동안 제기됐던 ‘부실 수사, 봐주기 수사’ 논란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잇따른 구속영장 기각으로 주춤했던 수사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예고됐던 두 번의 수사 실패


우 전 수석이 첫 수사 대상에 오른 건 지난해 7월 처가의 넥슨 부동산 특혜매매 의혹이 보도되면서다. 지난해 8월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의 수사의뢰로 검찰 특별수사팀(팀장 윤갑근)이 꾸려졌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우 전 수석의 자택은 물론 휴대전화와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의경인 아들이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도록 경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지만 수사가 끝날 때까지 통화내역조차 조회하지 않았다. 당시 검찰 안팎에선 수뇌부가 우 전 수석과 긴밀히 연결된 게 드러날까 봐 검찰이 압수수색을 꺼렸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었다.

잘못 끼운 첫 단추는 이후 우 전 수석 수사 때마다 ‘발목’을 잡았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꾸려진 뒤에도 우 전 수석 수사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일부 검사들의 의지로 수사에 착수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당시 특검은 미르·케이스포츠재단의 불법을 알고도 묵인한 혐의(직무유기)와 가족기업 정강의 불법 행위를 감찰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을 해임시킨 혐의(특별감찰관법 위반) 등 11개 범죄사실을 적용해 그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지난 2월22일 이를 기각했다. 이후 특검에서 자료를 넘겨받은 검찰 특수본 2기가 다시 8개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올해 4월12일 이마저도 기각됐다. 우 전 수석은 국정농단 수사의 큰 벽으로 자리잡았다.


이번에는 혐의 부인 힘들 듯

결국 검찰은 영장이 기각된 지 닷새 만에 우 전 수석을 불구속 기소하며 재판에 넘겼다. 우 전 수석은 재판에서 관련 혐의를 줄곧 부인하고 있다. 지난 6월 열린 첫 재판에서 자신을 ‘정치적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며 “제 공소사실은 역대 모든 민정수석 및 민정비서관들이 해오던 일”이라며 관련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우 전 수석이 예전과 같은 전면 부인 전략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 전 수석은 지난 14일 열린 세 번째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예상치 못한 핵심 측근들의 ‘결정적 진술’에 크게 당황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우 전 수석의 불법사찰 지시가 담긴 국정원 문건이 확보되면서, 무작정 부인으로 일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엔 자신을 감찰하던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의 개인 성향은 물론 감찰반 감찰 방향까지 사찰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민정수석의 업무”라던 우 전 수석의 기존 주장도 설득력을 잃게 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왕수석’으로 통했던 그는 2009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 때 대검 중수1과장으로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3년 4월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자 검찰을 떠났다가, 2014년 5월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우 전 수석은 세월호 침몰 사고와 정윤회 문건 유출 등 정부에 불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를 잘 대처한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2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승진’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이후 정치권과 여론의 사퇴 압박을 받았지만 버티기로 일관했고, 당시 민정수석으로서 청와대의 ‘모르쇠’ 대응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보수 몰락에 그가 끼친 영향이 결코 작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 서영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