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달러' 5월물 WTI, 만기일에도 마이너스권
국제유가의 가파른 폭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수요가 사실상
실종되면서 수급 거래 자체가 붕괴한 모습이다.
21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6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오전 9시20분
현재 배럴당 29.6%(6.05달러) 내린 14.38달러를 나타내고 있다.
글로벌 벤치마크 유종인 브렌트유는 20달러 선이 깨졌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브렌트유는 22.96%(5.87달러) 하락한
19.7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유례없이 강한 매도세가 이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수요가 급감하고 공급이 넘쳐나면서, 유가 수준과는 무관하게
더는 원유를 저장할 공간이 없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정유업계나 항공업계의 실수요자는 아예 사라진 상황이다. 실수요자가
아닌 선물 트레이더들로서는 최대한 인수를 늦추면서 장기계약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6월물을 건너뛰고 곧바로 7월물로 갈아타는 움직임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6월물 만기(5월 19일)까지도 코로나19 사태 및 원유공급 과잉이 해소되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만기일(21일)을
맞은 5월물 WTI는 여전히 마이너스권이다.
비슷한 시각, 5월물
WTI는 배럴당 33달러가량 오른 -4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전날 '-37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준에서 종가를 형성한 바 있다.
인간 전쟁서 몸값 올린 석유, 바이러스와 전쟁에 무릎꿇다
양차대전으로 석유가 최고 전략자원으로 부상
현대 지정학적 격변에 석유가 배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석유 가치 하락
코로나19과의 새로운 전쟁이 석유 조락에 쇄기
현대의 최고 전략자원 석유의 운명이 역사적 변곡점에 들어섰다.
인류 역사상 최대 전쟁으로 석유 가치가 치솟았고, 인류
초유의 전쟁이 그 가치를 바닥으로 밀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는 세계대전으로 최고 전략자원으로 등극했으나, 코로나19와의 싸움으로 전략적 가치가 급감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유가의 기준인 서부텍사스중질유(WTI) 5월 인도분이 20일 거래에서 -37.63달러라는 석유 거래 사상 첫 마이너스 가격을
기록한 것은 조락하는 석유 운명을 상징한다. 물론 석유 저장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선물거래 5월 만기일(21일)이
겹쳐 벌어진 일시적인 상황이나, 수요가 급감하고 공급이 초과하는 최근의 석유 시장 상황을 그대로 드러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이동제한 및 경기침체로 인한 수요 급감이
근본 원인으로, 이런 추세가 달라질 요인은 단기적론 보이지 않는다.
석유가 현대에서 최고 전략자원으로 떠오른 결정적 계기는 영국이
1913년 주력 전함으로 제작한 ‘퀸 엘리자베스’ 호가
최초로 석유 동력 엔진을 장착하면서부터다. 퀸 엘리자베스는 기존의 석탄 동력 전함에 비해 월등한 기동력과
효율을 과시해, 영국 해군의 경쟁력을 배가했다. 퀸 엘리자베스가
가동될 때에 이미 미국에서는 텍사스 등지에서 유전이 개발됐다. 포드는 대중적 자동차인 포드-T를 출시해 1914년 50만대
이상을 판매했다. 군수와 민수 양 분야에서 석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곧 영국의 해군장관이 되는 윈스턴 처칠은 미래의 전략자원이 석유임을 간파했다. 그는 한창 유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던 중동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열렬한 마지막 ‘대영 제국주의자’가 됐다. 2차
대전의 승패를 가른 스탈린그라드 전투도 나치 독일이 당시 소련의 유전지대인 카스피해로 진출해, 중동까지
나아가려는 전략 때문에 벌어졌다. 나치 독일은 무리하게 이 전선에 집중하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대패하며, 몰락의 길로 갔다.
2차 대전 전승국 지도자들은
얄타 회담으로 전후 세계 분할을 논의했다. 얄타 회담 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귀국길에 병환의
몸을 이끌고 신생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이븐 사우드를 만난 것은 석유 때문이었다. 이란의 민족주의 성향
모하마드 모사데크 정부가 석유 국유화를 단행하자 미국이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전복시킨 것도 석유
때문이었다. 그 후 미국이 중동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 역시 모두 석유가 첫번째 동인이었다.
석유가 배후 요인이던 중동분쟁 와중에서 발발한 1973년
오일쇼크는 석유의 전략적 가치를 최고로 고조하며, 지정학적 격변도 불렀다. 자본주의 경제는 10년 이상의 장기불황에 돌입해, 서방 선진국들은 지식경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해 나갔다. 넘쳐나는
오일달러로 사우디 등 중동국가 내에서는 빈부격차와 성속갈등이 고조돼, 이슬람주의가 분출했다. 이란에서는 최초로 이슬람 혁명에 이은 이슬람공화국이 성립됐다. 이미 1960년대부터 중공업 경제가 정체됐던 소련은 석유값이 오르자 오히려 제3세계
분쟁에 더 개입하며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대표적 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들어 석유값이 폭락하자, 소련은 과잉전개된 국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갔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석유지정학의 절정이었다. 미국은 중동민주화라는 미명 하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중동 전체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질서를 만들려다가, 수렁에 빠졌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던 2008년에는 금융위기로, 석유값이 역사적인 저점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셰일 석유가 개발돼,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비용과 환경오염이 문제였지, 그 매장량은 미국의 한 셰일 유정에서만 100년 이상이나 쓸 수 있는 양으로 측정됐다. 비관적으로 보였던
전통적 유전이나 천연가스도 예상 이상으로 개발돼, 시장에 석유나 가스 등 화석연료 공급은 넘쳐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산업 동력과 친환경 개발 욕구에 바탕한 대체에너지 개발도 활발해졌다.
금융위기 이후 하향 안정화를 보이던 석유값은 지난 3월초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은 인류가 서로 떨어져야 하는 ‘이동제한’이어서, 석유 수요는 하루 3천만배럴이나
급감했다.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30%에 해당된다. 석유값이 배럴당 20달러를 맴돌자,
50달러 이상이어야 수지가 맞는 셰일 석유 기업이 파산위기에 몰리고, 전통적 석유 메이저들도
비틀거리고 있다.
핼리버튼의 위기가 석유의 위기를 대표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전쟁 용병들을 투입하고 이라크 석유 이권을 거의 독점했던 석유 장치 기업인 핼리버튼은 올해 1분기 10억달러의 적자를 봤다. 이라크 전쟁의 주역인 딕 체니 당시 미
부통령이 최고경영자였던 핼리버튼은 이라크 전쟁의 배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석유지정학이 만든 기업이었다.
이번 ‘마이너스 유가’ 사태는
원유저장 시설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물 투자자들이 일제히 5월물을
팔아치우고 6월물을 사들이면서 일시적으로 빚어졌다. 석유를
싸게 사서 쌓아둔 투자자들은 올 가을 이후 ‘대박’을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가 잦아들어도, 석유에 대한 욕구가 전처럼 회복될 전망은 어둡다. 공급이 넘쳐나는
데다, 코로나19가 제기한 환경위기와 새로운 삶의 양식이
그 수요를 반감하리란 전망이 우세하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이라는
인류에게는 초유의 전쟁이 석유의 가치를 극적으로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 정의길 기자 >
‘돈 줄테니 석유 가져가라’…첫 마이너스 유가 어디로 가나
서부텍사스중질유 5월분 가격 -37.63달러
저장 시설 꽉찬데다 선물만기 겹쳐
세계 저장능력 60% 소진…현재 유조선에 1억4100만배럴
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돈을 줄테니 석유를 가져가라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석유 수요가 줄어들자, 넘쳐나는 석유를 저장할 수 없어 벌어진 사태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20일 5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유(WTI)가 배럴당 -37.63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석유값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은 사상 처음이다. 석유 1배럴을 가져가면, 37.63달러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17일 종가 18.27달러에서 55.90달러, 약 305% 폭락한 수치다.
이날 서부텍사스유 5월분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코로나19 여파로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원유시장의 ‘선물 만기’가 겹쳤기 때문이다. 5월 인도분이 거래 만기일 21일을 하루 앞두고 팔리지 않고 남은데다, 기존 구매자도 이를 인수를 하기보다는 6월물로 앞다퉈 갈아타는 ‘롤오버’를 했기 때문이다.
석유 저장시설이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5월분 물량이 인수되지 않고 남아돌자 가격이 마이너스로 급격히 곤두박질했다. 팔리지않은 5월분을 저장하는데 돈이 더드는 상황이 되자, 석유를 가져가면 돈을 준다는 마이너스 가격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서부텍사스유는 내륙에서 생산되는 까닭에 저장 비용이 더 많이 든다.
현재 전 세계의 석유 저장 능력을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수요가 급감해 팔리지 않은 석유가 저장되면서, 68억배럴 상당의 전 세계 석유 저장 능력 중 60%가 소진된 상태라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3월말 현재 바다에 떠도는 유조선에는 약 1억900만배럴이 저장돼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석유 거래회사 를 인용해 전했다. 이는 지난 17일 1억4100만배럴로 늘었다.
특히, 미국의 상황이 심각하다. 선물시장에서 거래된 석유가 인도되는 오클라호마 쿠싱의 전략석유비축시설의 저장능력은 8천만배럴이다. 쿠싱에는 현재 2100만배럴의 여력이 있는데, 이는 미국 석유 생산량의 이틀치 분량 밖에 안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정부가 전략석유비축을 7500만배럴 더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의 전략석유비축은 6억3500만배럴이다. 문제는 석유를 비축하는데도 하루에 50만배럴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7500만배럴을 더 비축하면서 시장에서 석유를 거둬들이려해도, 5개월이나 걸린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석유값 회복은 연말이나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국제유가의 기준치인 브렌트유의 11월 인도분은 36.89달러, 서부텍사스중질유 11월분도 31.66달러였다.
이번 석유값 마이너스는 서부텍사스중질유 5월분에 한정된 일시적 현상이다. 서부텍사스유 6월 인도분도 18%가 떨어지는 했으나, 20.43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비록 마이너스 유가가 시장 상황이 왜곡되면서 일부 품종에 한정된 현상이기는 하나, 석유값이 역사적인 변곡점을 맞고 있음을 상징한다.
코로나19이 전 세계적으로 본격 확산된 3월 이후 전 세계 석유 수요는 하루 3천만배럴이나 급감했다. 약 1억배럴 내외인 전 세계 생산량의 30%에 해당하는 수요가 감축됐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오펙) 회원국과 비오펙 산유국으로 구성된 ‘오펙+’가 지난 12일 하루 970만배럴을 직접적으로 감산하고, 다른 산유국과 선진국들도 감산에 동참하기로 하며, 하루 최대 2천만배럴의 감산 효과를 내기로 한 바 있다. 이 합의가 지켜져도 여전히 1천만배럴이나 공급이 넘치는 상황이다.
이런 석유 공급 초과 현상은 200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새로운 유정이 예상 이상으로 개발되는데다, 셰일유 등 셰일에너지가 2010년 이후 시장에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예견됐다. 코로나19 위기가 잦아들어도, 공급 초과로 인한 저유가 현상이 해결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서 최대 산업 중 하나인 석유산업과 기업들의 위기도 심화되고 있다. 석유 관련 거대 장치 기업인 핼리버튼은 20일 올해 1분기 10억달러의 손실을 봤다고 보고했다. 핼리버튼은 지난해 동기에는 1억5200만달러의 흑자를 봤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전쟁 뒤 이라크 석유 개발 이권을 따낸 기업이다. 딕 체니 당시 부통령이 최고경영자로 재직한 회사로, 이라크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자 심지어 배후 조정을 했다는 의혹을 샀다.
석유값이 배럴당 20달러 이하로 조금 더 지속되면, 미국 텍사스의 수백개 중소 석유회사들은 80%가 파산하고, 25만명이 실직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석유업계 전문가를 인용해 전했다. 30달러대가 되면, 석유 산업을 살아남을 것이나 많은 석유기업들이 망할 것일고 신문은 전했다. 즉, 석유값이 30달러 이하면 산업 자체가 붕괴 위기가 된다는 것이다. < 정의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