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 전야제 상징물. 목련, 민들레, 코스모스, 진달래, 동백 등 다섯 가지 꽃과 나비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 희생당한 영령을 위로하는 의미다.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제공

 

전야제, 공연 위주 구성…참여행사 축소

 

올해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는 코로나19 여파 탓에 차분하게 치러질 전망이다.

2일 제41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의 말을 종합하면 ‘5·18 기념행사의 꽃’으로 불리는 전야제는 17일 저녁 8시부터 밤 10시까지 광주광역시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열린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됐던 전야제는 올해 규모를 줄여 진행한다. ‘연대의 장’, ‘항쟁의 장’, ‘계승의 장’ 등 3부로 나눠 각각 미얀마와 광주,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 공동체 정신에 대해 다룬다. 전야제는 오월풍물단의 길놀이와 함께 퓨전국악그룹 ‘​잠비나이’, ‘푸른연극마을’의 공연으로 문을 연다. 2부에는 2018 제8회 전국오월창작가요제 대상, 올해 제18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노래’ 부문을 수상한 가수 정밀아, ​놀이패 신명, ​광주노동자노래패연합이 출연해 민중가요 등을 선보인다. 3부에는 힙합가수 제리케이, 탐쓴, 전자음악그룹 이디오테잎 등이 무대에 올라 젊은 세대와 5·18을 경험한 세대들이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분수대 주변에는 ‘오월의 꿈’을 주제로 한 청년작가의 미술작품이 설치된다. 5·18이나 미얀마에 대해 응원하는 마음을 담은 영상, 손팻말 사진, 그림 등을 행사위 누리집에 올리면 특별 배지와 장바구니를 선물하는 행사도 진행된다.

 

다만 전야제의 주요 행사인 ‘민주평화대행진’은 취소됐다. 행사장에도 미리 초청받은 99명만 입장할 수 있다. 초청받지 못한 시민은 금남로에 설치된 전광판이나 온라인 생중계를 통해 보면 된다.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색적인 행사도 마련했다. 1일부터 31일까지 (사)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은 전 세계 아마추어 통신사 7천만명(한국 12만명)을 대상으로 5·18 홍보 방송을 하고 15∼18일에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통신장비 전시회도 연다. 비영리단체 ‘만렙백수 협동조합’은 장난감 레고로 5·18 관련 작품을 만들어보는 ‘레고로 만나는 5월 정신! 픽셀아트 인테리어키트’를 주관한다. 광주 금남로와 5·18사적지를 돌아보면서 퍼즐을 맞추는 ‘5·18민중항쟁 역사 바로알기 퍼즐투어’도 17∼18일 진행한다.

 

또 7일부터 7월31일 옛 전남도청 별관 2층에서는 5·18을 취재한 외신기자 노먼 소프 특별전이 열리고, 현재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상호 작가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 복제품이 15∼31일 5·18 광장에 설치된다.

 

민족미술인협회 광주지회는 올해 오월미술제(15일∼30일) 주제를 ‘오월 봄 혁명을 위하여’로 정하고 미얀마 민주화투쟁을 지지하는 작품을 전시한다.

그밖에 광주, 전남뿐 아니라 대구, 경북 안동, 경기 군포, 안양, 서울 노원구 등에서도 80년 5월을 기억하는 행사가 열린다. 김용희 기자

위선,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 

 

조형근 ㅣ 사회학자

 

2016년 미국 대선,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텔레비전 토론 때였다. 클린턴은 트럼프가 연방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았다며 공격했다. 트럼프는 적반하장이었다. “그래서 내가 똑똑한 거요.” 대통령 후보가 탈세를 자랑했으니 경악스럽다. 사실은 영악했다. 세금은 강도질이며, 노골적인 자기 이익 추구야말로 번영의 비결이라는 레이건 이래 우익의 신조를 저 한마디로 집약했던 것이다. 경제학자 이매뉴얼 사에즈와 게이브리얼 저크먼이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에서 내리는 평가다.

 

트럼프가 예시하듯 어떤 세계관은 이기적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좇는 게 옳다고 믿는다. 성공의 욕망, 부자가 되고픈 욕망, 타인을 이기고 지배하려는 욕망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며 발전과 풍요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이 솔직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정의로운 평등주의자들의 이중성이 폭로될 때다. 앞에서는 온갖 미사여구를 떠들던 이들이 뒤로는 탐욕을 추구했다니 사람들은 아득해진다. 선한 가면 뒤 탐욕의 민낯이라 더 추하다. 위선적인 도덕가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악당이 낫다고 여기게도 된다.

 

나도 저 역겨운 위선자 무리에 속하지 않을까? 대단한 고백도 못 되지만 내 삶은 내 글만큼 정의롭지 않다. 유독 글 쓸 때만 정의롭다. 글쓰기가 점점 힘든 이유다. 나에게 선함이랄 게 있다면 내면에서 우러나온 참된 원칙이라기보다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연기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대개 비슷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 규범을 지키는 이유는 남들도 지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남들이 지키지 않는다고 믿으면 나도 지키지 않는다. 도덕적 선호는 내면의 명령을 따르는 올곧은 준칙이 아니라, 타인의 행동에 대한 관찰과 예측에 좌우되는 조건적 선택이다. 철학자 크리스티나 비키에리의 통찰이다. 남들이 선하게 행동한다고 믿으면 나도 선(한 척)하게 된다. <불평등의 대가>에서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이 원리로 소련 붕괴 뒤 혼란의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일화를 회고한다. 그 나라 온실에는 대부분 유리가 하나도 없었다. 너도나도 유리를 훔쳐갔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훔칠 거라며 필요하지 않아도 훔쳤다. 선한 척할 필요가 사라진 세상의 모습이다.

 

그 무렵 러시아의 한 여론조사는 사람들이 기존 사회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야만적 자본주의 중에서 야만적 자본주의를 가장 선호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지지가 높았다. 당과 국가의 간섭은 물론이지만, 인간의 얼굴이라며 복지니 뭐니 하는 위선도 싫었다. 이리처럼 만인에 맞서 경쟁하고 싶었다.

 

1990년까지도 자본주의에 대해 신중하던 러시아의 여론은 1991년의 쿠데타와 고르바초프의 실각, 옐친의 권력 장악을 거치며 급변했다. 급진적인 시장화, 사유화를 동반한 충격요법이 지지를 얻었다. 인간의 얼굴을 앞세운 정당들은 패배했다. 사람들은 진보적인 조세제도로 혜택을 입기보다는 정글에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했다. 시장주의자들은 1995년까지 생산이 25~50% 증가하리라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3분의 1이 줄었다. 1990년대 동안 러시아인 90%의 실질소득이 절반 아래로 감소했다. 20년 뒤에도 1980년대 말의 실질소득을 회복하지 못했다. 기대수명도 급락했다.

소련 해체 뒤 이행기를 연구한 경제학자 블라디미르 포포프가 ‘여론의 수수께끼’라는 논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국가와 당이 붕괴한 상황에서 경제가 작동하려면 사회적 신뢰가 절실했지만, 야만의 시장에서 신뢰가 생산될 리 없었다.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솔직한 악덕계급이 정글을 장악했고, 소련 시절의 첨단 테크놀로지 대신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나라가 됐다.

 

현 정권의 ‘내로남불’, 위선에 대한 비판이 상당하다. 권력의 위선에 대한 비판은 늘 옳다. 어떤 세력은 이참에 아예 정직한 노동을 비웃으면서 부동산이며 코인이며 투기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채질한다. 그러나 위선으로 입은 상처를 솔직한 악덕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위선이야말로 선을 닮고 싶은 우리의 또 다른 본성을 증거한다. 위선이 “악이 선에 바치는 경배”인 이유다. 위선은 역겹지만 위선마저 사라진 세상은 야만이다. 냉소하기보다는 위선의 모순 속으로 걸어가야 할 까닭이다.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완전 비핵화 목표 ‘부분적 비핵화 하면 부분적 제재 완화’

오바마 ‘전략적 인내’ - 트럼프 ‘빅딜’ 사이 제3의 길 모색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4일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출범 100일 만에 대북정책의 얼개를 공개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버락 오바마 시절의 ‘전략적 인내’도, 도널드 트럼프 시절의 ‘전부 아니면 전무’도 아닌 실용적 접근법을 취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때맞춰 미 정부를 비난하는 논평들을 쏟아냈다. 북·미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30일 기자들에게 대북정책 검토가 완료됐다고 확인하면서 “우리의 목표는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4개 행정부의 노력들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며 “우리의 정책은 일괄타결(그랜드 바긴) 달성에 초점을 두지 않을 것이며, 전략적 인내에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의 정책은 북한과의 외교에 열려 있고 외교를 모색하는, 조정되고 실용적인 접근법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일본, 그리고 다른 동맹, 우방과 매 단계마다 협의를 해왔으며 앞으로 계속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으로부터 대북정책 검토 결과에 대해 보고받았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바이든 정부가 조만간 대북정책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공개할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사키 대변인이 밝힌 대북정책의 특징은 트럼프도 오바마도 아닌 ‘바이든 대북정책’으로 차별화했다는 점이다. 북한을 사실상 방치해 핵능력만 키워줬다는 비판을 들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나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모든 제재 해제를 통째로 맞바꾸려 한 트럼프의 ‘빅 딜’ 방식을 버리고 제3의 접근을 취하겠다는 얘기다. 미 정부의 한 관리는 “트럼프 정부가 ‘모든 것 대 모든 것’, 오바마 정부는 ‘전무 대 전무’였다면 이것은 그 중간쯤”이라고 <워싱턴 포스트>에 말했다. 미 관리는 “미국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 조정되고 실용적인 대북 외교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이는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유지하되, 부분적 비핵화와 부분적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단계적 접근법을 취하겠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미 정부 관리는 “특정 조처에 대해 (대북 제재) 완화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는, 조심스럽고 조절된 외교적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스몰 딜’(작은 합의)을 이어가면서 비핵화로 향해 가는 방식이다.

 

 

미 정부는 또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서명한 싱가포르 합의를 인정한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미 정부 고위 관리는 “우리의 접근법은 싱가포르 및 그 이전의 합의들에 기초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합의는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한반도의 지속적·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한국전 참전 유해 송환 등 4개 항으로 이뤄져 있다.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100% 따른다기보다 미국이 이미 해놓은 합의에 기초하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바이든 정부가 비현실적인 ‘시브이아이디’(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점, 단계적 접근법과 싱가포르 합의 존중을 시사한 점을 들어 “매우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접근법”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것으로 북-미 대화의 문이 조금은 열렸다고 볼 수 있다”며 “지금부터 노련한 외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관건은 북한의 반응이다. 북한은 2일(한국시각) 연쇄 담화를 통해, ‘외교와 단호한 억지력’을 강조한 바이든 대통령의 의회 연설과 북한 인권 상황을 비판한 국무부 대변인의 성명을 비판하며 상응한 대응을 하겠다고 반발했다. 미국이 어떤 대북정책을 내놓더라도 북한이 호응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프랭크 엄 미국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트위터 글에서 “북한에 대한 조정된 접근은 새로운 길이 아니다”라며 과거 6자회담 등에서 했던 것이라고 적었다. 이어 “북한이 테이블로 오면 작동할 수 있는데, 문제는 어떻게”라며 압박과 도발의 순환으로 하는 방법과, 새롭고 평화로운 북-미 관계 구축을 위한 포괄적·전략적 노력의 신호를 보내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나친 낙관을 경계했다. 김 교수는 “북한이 미국 발표를 보고 담화를 공개했다고 봐야 하고,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실패했으니 미국이 ‘새로운 셈법’으로 나와야 하는데, 북한 입장에서 큰 기대를 안 하기 때문에 말이 사납게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역할도 지켜볼 대목이다. 미·중이 무역·기술·군사 등 전방위에서 경쟁하는 가운데, 대북 경제 지원이라는 지렛대를 쥔 중국이 북-미 대화 분위기 조성에 협력할 것인지는 매우 큰 변수다. 바이든 정부는 대북정책 검토 결과를 한국, 일본 등 동맹과 미 의회에 설명하며 안팎으로 공감대 다지기에 나섰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길윤형 기자

 

문 대통령의 북핵해법, 바이든 설득에 성공한 듯

미 정부, 문 대통령 제시한 ‘싱가포르 합의’·‘단계적 해법’ 사실상 수용
2019년 ‘하노이 결렬’ 이후 북-미 직접대화 재개되려면 고비 넘어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마무리한 뒤 공동성명 서명식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연합뉴스

 

젠 사키 미 백악관 대변인이 30일 언급한 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재검토’ 결과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재가동을 희망해 온 한국 정부의 희망 사항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직 최종 결과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2018년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을 출발점으로 삼아 북-미가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을 상당 부분 반영한 모양새다.

 

문 대통령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힌 것은 지금까지 크게 두 차례였다.

첫번째는 지난 1월18일 진행된 신년 기자회견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이제 곧 출범할 바이든 행정부에게 “트럼프 정부에서 있었던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다. 싱가포르 선언에서 다시 시작해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이루는 그런 대화 협상을 해나간다면 좀 더 속도 있게 북-미 대화와 남북대화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미국의 ‘대북 정책 재검토’가 사실상 막바지에 이른 지난 21일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선 “미국과 북한이 서로 양보와 보상을 ‘동시적으로’ 주고받으면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30일 나온 사키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과 미 <워싱턴포스트>가 소개한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발언을 모아 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공동선언을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이뤄내자는 한국 정부의 구상을 상당 부분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키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브리핑에서 “우리 정책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의) 일괄타결(그랜드 바겐·빅딜) 달성에 초점을 두지 않을 것이며,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에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앞선 두 행정부의 접근법을 절충한 ‘스몰 딜’을 통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을 해 나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말이었다. 이어, 익명의 미 고위 당국자는 1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우리의 접근은 싱가포르 합의와 다른 이전의 합의들 위에 (성과를) 쌓아가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결과를 도출해 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바이든 정부는 싱가포르 합의가 트럼프 때 이뤄진 것이어서 애초 부정적 입장이었는데 정부가 (미국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에게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자신들이 부정해야 하는 전임 행정부의 유산이었다. 또 이 합의에 대해서는 2018년 6월 합의가 공개된 직후부터 미국이 너무 양보했다는 ‘매파’들의 공격이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이 합의를 폐기하면, 미국이 달성해야 하는 최종 목표인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북을 압박할 근거가 사라지게 되는 ‘외교적 리스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바이든 행정부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 세계 앞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한 이 성명을 받아들이는 현실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다음 난관은 단계적 접근이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지난 3월23일 브리핑에서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며, 트럼프 행정부 시절 대북 정책을 담당했던 당국자들은 물론 1990년대 이후 대북 외교에 관여했던 모든 인물들, 미 행정부 내 여러 부처들, 한·일 등 동맹들을 상대로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었다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 때처럼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 아래 북핵 문제를 방치할 수도, 트럼프 행정부 시절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실패했던 것처럼 ‘빅딜’을 통해 북핵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이 두개의 극단을 절충하는 단계적 접근일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과정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북한과 오랜 기간 협상했던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다고 밝혔다. 비건 전 부장관은 2019년 2월 말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주장해 온 단계적 해법을 수용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볼턴 전 보좌관 등의 막판 뒤집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이 재검토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 문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공개했다. 문 대통령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대북 정책 재검토의 최종안을 보고하기 직전인 지난 21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이 단계적 접근법을 택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 인터뷰가 실제 미국 정부의 의사 결정에 얼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최종 결론에 한국의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은 사실이다. .

 

하지만, 북-미 대화로 향해 가는 앞길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예상보다 유연한 대북 접근법을 택했지만, 의미 있는 대화가 시작될 여건이 성숙돼 있지 않다. 지난 2019년 2월 말 ‘하노이 실패’ 이후 북은 자력갱생을 외치며, 한-미 연합훈련 중지, 첨단 전략자산 도입 금지 등 ‘체제 보장’과 관련된 근본적 요구를 쏟아내는 중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 연합훈련은 계속 실시한다는 입장(3월22일 백악관 고위 당국자)이고, 한국 정부 역시 북한이 싫어하는 F-35 등 첨단 전략자산의 도입을 미룰 생각이 없다.

 

결국, 북한은 미국이 완전한 재검토 결과를 공개할 때까지 상황을 관망하면서, 당분간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자력갱생의 길을 갈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전략적 도발을 걸어올 가능성도 있다. 미 당국자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새 대북 전략이 “핵 도발에 대한 북한의 단기적 계산법(calculus)을 바꿀 것으로 보진 않는다”고 전망했다.길윤형 기자

 

북, 연쇄담화로 대미 불만 표출...급 낮춰 수위조절

적대시 정책 유지에 강한 실망  “상응한 조치 강구할 것” 밝혀
대통령 대신 ‘미국 집권자’ 표현 낮은수준 예우 “협상 여지” 평가

 

남쪽의 노동절에 해당하는 5·1절을 맞아 북한 각지에서 공연과 체육 경기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일 보도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 외무성이 2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 방향과 얼개를 비난하는 두건의 공식 담화를 발표했다.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 국가 중 하나”라 규정한 국무부 대변인의 ‘북한자유주간 성명’을 겨냥한 “대변인 담화”, 바이든 대통령의 첫 의회 연설을 겨냥한 “권정근 미국국장 담화”가 그것이다. 북한 당국이 바이든 정부를 상대로 관망 태도를 접고 본격적인 ‘밀당’에 나섰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우선 두 대목을 짚을 필요가 있다. 첫째, 북한 외무성의 연쇄 담화가 ‘대북정책 재검토가 끝났다’는 백악관 대변인의 기자회견(현지시각 4월30일) 직후 나왔다는 사실이다. 둘째, ‘미국국장 담화’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뒤 형식과 내용 모든 측면에서 ‘북한의 첫 공식 견해 표명’으로 간주된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담화(3월18일)나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기도 한 리병철 노동당 중앙위 비서 담화(3월27일)에 비해 ‘격’이 한참 떨어진다.

요컨대 북한 당국은 지금까지 드러난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에 ‘강력한 불만·실망’을 밝히되, 그 발언 주체를 ‘국장급 실무선’으로 낮춰 수위를 조절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당분간 북한이 미국에 우호적인 견해나 태도를 보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5월21일 미국에서 열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바이든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한미 양국의 대북 공조의 방향이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전략적 대미 군사 행동’의 가능성도 낮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북은 ‘미국국장 담화’에서 “미국 집권자가 취임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또다시 실언을 했다”며 “그의 발언에는 미국이 반세기 이상 추구해온 대조선적대시정책을 구태의연하게 추구하겠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짚었다. ‘북핵’은 “미국과 세계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외교와 단호한 억지”를 천명한 바이든 대통령의 4월28일(현지시각) 첫 의회 연설을 사실상 “대북적대시정책”으로 규정한 셈이다. 앞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당 8차 대회’(1월5~12일)에서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미국국장 담화’는 “우리는 그에 상응한 조치들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며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강대강, 선대선 원칙에서 미국을 상대할 것”이라는 김정은 총비서의 방침에 따라 일단 “강대강” 기조로 미국에 맞서겠다는 예고인 셈이다.

다만 ‘미국국장 담화’의 “미국 집권자”란 표현엔 북쪽의 복잡한 속내가 읽힌다고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가 짚었다. ‘대통령’이란 표현을 피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한편으로, 특유의 막말 대신 “집권자”란 표현으로 낮은 수준의 예우와 함께 협상의 여지를 뒀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외무성 대변인 담화’도 4월28일(현지시각) 미 국무부 대변인 성명을 “최고존엄 모독” “대조선적대시정책의 집중적인 표현”이라며 “상응한 조치들을 강구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고 밝혔다. ‘인권 문제’를 압박 수단으로 앞세우지 말라는 대미 ‘견제구’다.

외무성 연쇄 담화는 “북한에 집중하지 않는 바이든 정부의 주의를 환기하려는 것”이라고 다른 전직 고위관계자는 짚었다. ‘중국 견제’에 대외전략의 기조·초점을 맞춘데다 이란핵 협상으로 바쁜 바이든 정부가 ‘북한’의 존재를 잊을 위험을 차단하려는 선제 행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주장을 빌미로 문재인 정부를 비난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와 외무성의 대미 비난 담화의 연관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제훈 기자

 

김여정 ‘대북전단 비난 담화’ 속뜻은 “남쪽 때려 미국 움직이기”

 

지난 1월5~12일 열린 조선노동당 8차 대회 주석단에 앉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모습.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오른쪽 뒤로 서 있는 김여정 부부장이 보인다. <조선중앙텔레비전> 연합뉴스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이 일부 탈북자 단체의 일방적 대북전단 살포 주장을 빌미로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며 “상응한 행동 검토”를 2일 밝혔다.

김여정 부부장은 <노동신문> 2면에 실린 개인 담화에서 “얼마전 남조선에서 ‘탈북자’ 쓰레기들이 반공화국 삐라(전단)를 살포하는 용납 못할 도발 행위를 감행했다”며 “남조선 당국은 ‘탈북자’ 놈들의 무분별한 망동을 또다시 방치해두고 저지시키지 않았다. 우리도 이제는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김 부부장의 이런 주장은 사실관계와 명분 측면에서 섣부르고 과도해 보인다. 우선 자유북한운동연합은 4월25~29일 비무장지대(DMZ) 인근 경기·강원도 일대에서 전단 등을 북쪽으로 날려보냈다고 4월30일 주장했으나 ‘물증’은 내놓지 않았다. 더구나 통일부는 4월30일 “개정 남북관계발전법 입법 취지에 맞게 대처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전단 살포 사실이 확인되면 ‘접경지역 주민 생명·안전 보호’를 이유로 군사분계선 일대의 “전단 살포, 확성기 방송” 등에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규정한 개정 남북관계발전법 24·25조를 근거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통일부는 2일에도 “정부는 북한을 포함한 어떤 누구도 한반도에서 긴장을 조성하는 행위에 반대한다”고 전제한 뒤 “전단 살포 문제는 경찰 전담팀이 조사하는 만큼 ‘남북관계발전법’이 주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를 위한 취지에 부합되게 확실히 이행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사실 확인 뒤 처벌’ 방침을 재확인한 것이다. 다만 정부 당국자는 “아직은 전단 살포 주장만 있을 뿐 물증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에 비춰 북쪽이 이날 ‘김여정 담화’와 외무성의 대미 비난 담화를 동시 다발로 발표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북쪽은 ‘남쪽을 때려 미국을 움직인다’는 전략을 구사하려는 듯하다”며 “5월21일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쪽의 추가 대남 압박 조처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이제훈 기자

WTO 사무총장 선임보좌관에 외무성 전 간부 우야마 취임

 

우야마 도모치카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임보좌관. 주샌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관 누리집 갈무리

 

일본 외무성의 우야마 도모치카 전 심의관이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의 선임보좌관으로 2일 취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에서 세계무역기구 핵심 간부를 맡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일본 외무성은 지난 1일 자료를 내어 우야마 내각관방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정부대책본부’ 전 심의관을 세계무역기구 선임보좌관으로 파견한다고 밝혔다. 우야마 보좌관은 사무총장을 직접 보좌하면서 아시아 지역을 담당할 예정이라고 외무성이 설명했다.

 

선임보좌관은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자리로 임기는 2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우야마 보좌관은 외무성 국제무역과장과 경제국 담당 심의관 등을 역임했으며, 주한 일본대사관 경제공사로도 근무한 적이 있어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오콘조이웨알라

 

이번에 일본이 세계무역기구 선임보좌관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본 정부의 요청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일본 정부는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 중심으로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을 도울 인재를 파견할 의사가 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월 끝난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선출 과정에서 한국의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경쟁한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적극 지지해 조용히 실속을 챙긴 셈이다. 김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