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헌법재판소에서는 대통령 박정희가 제2의 쿠데타에 의해 강압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가 위헌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고 한다. 박정희 통치 아래서 살아보지 않은 신세대나, 살았다 하더라도 그 매운맛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관심 밖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함께 노력해서 제대로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역사다.
박 대통령은 1972년 10월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1인독재 헌법을 만들어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 비상국무회의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아니어서 입법권을 가질 수 없다. 대통령이 자기의 권력 강화안을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회의에 부쳐 의결했으니 이런 희대의 정치 코미디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한 것은 명백한 국헌문란으로 ‘유신쿠데타’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다. 유신헌법은 당시의 기존 헌법이 규정한 개헌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헌 행위의 산물이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집권자가 자의로 만든 ‘사문서’나 다름없으며 법적으로 ‘원천 무효’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후예들은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9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확정됐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헌법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더구나 비상계엄령이 지속되고 군 탱크가 진주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언론의 비판도 금지된 상황이었다. 세계 정치사에 이런 선거나 투표가 있은 적이 없다. 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이른바 ‘95% 이상 찬성률 공작’이라는 지침을 행정부 공무원들과 관변단체, 그리고 군 간부들에게 강요했다.
박정희는 여당 의원도 항명을 하면 중앙정보부를 시켜 붙잡아다 가혹하게 고문하고 수모를 주었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제정 때는 야당 인사와 대학생들까지 다수 불법 연행해다 모진 악행을 가했다. 1975년 2월28일치 신문들은 당시 신민당 의원들이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유신 때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자행한 고문 악행에 대해 밝힌 것을 보도했다. 이세규, 조연하, 김상현, 이종남, 강근호, 김녹영, 김경인, 최형우 등 수많은 야당 의원들이 인간 이하의 잔혹행위에 대해 증언했다. 몽둥이 구타, 잠 안 재우기, 물고문 등 이루 다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고문 기술이 동원됐다.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 경찰과 헌병대의 고문 기술에 결코 못지않은 야만행위였다.
그즈음 반독재 운동을 벌이던 학생 간부들도 자신들이 당한 고문피해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제대로 증언해야 한다. 박 정권은 1971년 10월15일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진주시켰다. 모두 1889명의 대학생을 연행해, 그중 학생 간부 177명을 학교에서 제적시키고 군대로 강제 입영시켰다. 이것이 다음해 터지는 유신체제의 정지작업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문리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대학 교정에서 체포돼 동대문경찰서 지하 취조실과 중앙정보부에서 7일 동안 불법감금을 당한 채 고문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서는 킥복싱과 같은 주먹질·발길질을, 중앙정보부에서는 몽둥이찜질과 구둣발로 짓이기기 등의 고문을 당했다. 군대 생활 내내 왼쪽 무릎의 관절통에 시달리다가 제대 후에야 썩어 들어가는 뼈를 깎아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학생운동 동료였던 수술 의사는 원인을 묻지도 않고 “이걸 여태까지 그대로 두고 왔나…”라며 안타까워했다.
박 대통령이 최측근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총에 맞아 숨진 10.26도 다가온다. 유신체제는 10.26으로 청산되기는커녕 그 후 전두환 등의 내란으로 더 잔혹한 복고반동의 회오리를 몰아왔다. 나는 유신체제의 불법성과 고문 악행에 대해 후대의 책임있고 역사의식을 가진 정부가 공식 사과하고 법적인 무효 선언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히틀러에 의한 나치 정권의 범죄행위들에 대해서도 후대의 독일 정부가 나서 공식 사과하고 청산법을 제정했다.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 체제를 어떻게 청산하는지에 따라 그 나라의 미래 국가위상이 좌우될 것이다. 박정희 권력과 유신체제가 저지른 비인간적 고문과 야만적 체제폭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한 발짝도 더 앞으로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