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일본에 간 버락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에 가 보려 한 모양이다. 갓 취임한 그해 4월 체코 프라하에서 ‘핵 없는 세계’를 역설한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한 기대가 일본에도 있었다. “여기 와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세요.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 지난 7월 87살에 세상을 떠난 누마타 스즈코는 그렇게 소망했다.
1945년 8월6일, 21살이었던 스즈코는 히로시마 체신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날 거기서 1㎞ 남짓 떨어진 곳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왼쪽 다리를 허벅지까지 잘라냈고, 약혼자는 전사했다. 스즈코는 1980년대부터 히로시마 피폭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증언자로 나섰다. 가해자로서의 일본 책임도 얘기하고 사죄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히로시마에 가지 않았다. 며칠 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문서에는 당시 일본 외무성 야부나카 미토지 차관이 주일 미국대사에게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시기상조’라며 말렸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시기상조라니? <아사히신문>은 오바마가 히로시마에 갔다면 원폭 투하가 정당했다는 미국 보수세력이 반발했을지 모르고, 또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전쟁책임 논란이 새로 불거졌을 수도 있다며, 어느 쪽이든 일본 정부는 피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사설에 썼다. 아사히는 그러면서 히로시마를 둘러싼 미-일 간의 대립은 양국 관계의 심층부를 찔러대는 ‘역사의 가시’라며, 그때 그 방문이 실현돼 양국이 그 문제에 좀더 정면으로 맞섰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과거사에 참으로 집요하다. 그 자체는 좋다. 문제는 그게 주로 ‘피해자 일본’ 쪽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흘 전 일본 외무성 스기야마 신스케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와 관련해 “청구권 문제는 이미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매뉴얼을 또 읽었다. 예컨대 아사히가 이런 자세를 문제 삼으면서 정면대응으로 한-일 간의 역사적 가시를 뽑아버리자고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 사람도 히로시마에서 수만명이 죽고 세대를 이어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할린으로 동원당한 수만명의 조선 사람들을 일본은 버려둔 채 자국민들만 데려갔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선 지금도 성노예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울고 있다.
일본 ‘천황’이나 총리가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가서 스즈코의 소망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아보고 정면대처하라고 일본 언론은 쓴 적이 있나? 저 을미사변의 야만과 우금치 등 조선 천지를 피로 물들이고 만주와 중국의 조선 사람들까지 무차별 살육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강제연행하고 무책임하게 내버린 제국 일본의 만행을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 가서 확인해보라고 한 적이 있나? 히로시마는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스기야마 국장의 얘기는 거짓이다.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도쿄 전범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조선침탈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미-일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일본이 근대 이후 한반도에서 자행한 범죄행각에 대한 단죄는 완전히 누락됐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남북한이 배제되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미·일이 공모한 합작품이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는 식민지배 뒤 분단당했고 미국의 냉전전략에 몰입한 이승만과 친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면서 이승만을 건국의 영웅으로 세우려는 자들의 소망대로 미국이 각본을 쓰고 일본이 공모한 한반도 분단체제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게 역사상 최고의 근대화 성공 사례라고 그들은 자화자찬하고 있다.
<한승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