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을 지나면서 살아온 날들을 감사함으로 돌아보고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자리를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지난 주일은 24절기 가운데 한로였습니다. 이제 겨울 채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이민 와서 살면서 저는 습관처럼 24절기를 의식하며 삽니다.
절기라는 말은 ‘마디 절 節’과 ‘기운 혹은 숨 氣’가 결합된 말입니다.
옛 어른들은 유장하게 흐르는 자연의 순환과 숨결을 나름대로 구획지어 놓고 철에 따라 사셨습니다. 그 숨결을 거스르지 않으니 삶이 여유로웠고 푼푼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맘 때가 되면 나뭇잎도 떨어지고 고니는 끼룩거리며 높이 납니다. 월동준비는 바삐 서두르지 않으면 추운 겨울을 더 춥게 보낼 수 밖에 없었지요. 여성들은 무와 배추로 김장을 담그고, 남자들은 독이나 바탱이 항아리를 짚으로 감싸 땅에 깊이 묻었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참 많았습니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뚫어놓은 창호문도 새로 해야 했고, 쥐구멍도 막아야 했습니다. 소나 돼지가 사는 외양간에는 떼적을 쳐주고, 땔 나무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린 지금,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낙엽이 이렇게 서럽게 지는데도 도무지 그리운 게 하나 없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움이 없다면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세상만사에 다 심드렁해지면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그리운 것도 없고, 쓸쓸하기만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제시하자면 아주 처절하게 고독해 보십시오.”라고 쓴 어느 분의 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혼자 길을 떠나 며칠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순례’입니다.
순례란 물론 종교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될 만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뜻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찾아가는 먼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라 하여 패키지로 몰려다니는 순례 말고, 정말 철저히 고독한 순례를 해보고 싶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는 갈릴리나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걸으셨던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걷고 싶어 합니다. 순례란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종교라는 말은 어원인 ‘religare’는 우리를 근원과 다시 연결시킨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인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차례, 유월절(Pascha), 칠칠절(Shavuot), 초막절(Sukkot)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절기들은 원래는 농사력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들 역사적 경험과 결부시켰습니다.
니산월(우리의 경우 3-4월)에 있는 유월절은 보리와 아마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였는데 나중에는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른 무화과와 포도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인 칠칠절은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의미가 덧입혀졌습니다. 대추야자와 여름 무화과를 수확한 후에 즐기는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경험과 결부되었습니다. 각각의 절기마다 자연의 리듬을 배경음으로 깔고, 역사적 경험을 주선율로 연주했던 것입니다.
저는 순례의 축제를 가진 나라를 부러워합니다. 시편 기자는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시89:15) 이라고 노래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오고, 종려나무 가지와 갯버들 나무를 꺾어들고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을 통해 그들은 더 깊이 하나로 엮여집니다. 김현승 선생님의 시 <감사하는 마음>의 마지막 연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다. 그렇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가을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사의 마음을 되찾는 행복을 맛보시기를 기원합니다.
<박피득 목사 - 임마누엘 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