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샌더스 돌풍과 지도자론

● 칼럼 2016. 2. 12. 21:21 Posted by SisaHan

지구촌이 주목하는 미국 대선레이스에서 초반 돌풍의 주역 가운데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후보가 단연 돋보인다. 지지율 0%의 무명인사에서 단숨에 50% 이상까지 뛰어 올라 거물 힐러리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놀라운 파워맨이 됐다.
샌더스 후보가 얼마나 부러웠으면 한국의 야권에서도 다투어 ‘샌더스 마케팅’에 나설까. 더불어민주당은 새로 영입된 김종인 비대위원장을 경제민주화 소신을 들어 샌더스 같다고 비유했다. 이에 질세라, 당을 뛰쳐나가 국민의당을 만든 안철수 대표도 샌더스처럼 주먹 쥔 팔을 뻗으며 자신이 바로 ‘한국의 샌더스’라고 연설했다. 이에 한 정치평론 교수는 “언제 샌더스가 힐러리 물러나라고 외치다 민주당을 탈당했는가. 우클릭해 새누리당과 발을 맞추면서 진보적인 샌더스와 같을 수 있는가. 지지율 0%에서 50%로 올라가는 샌더스와 50%에서 0%로 내려가는 상황이 같은가”라고 조목조목 반박하며 ‘개그’라고 비아냥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수준 낮은 한국정치의 희극들이다.


유력 주자인 힐러리 여사를 위협하며 일약 세계적 인물이 된 샌더스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고 마침내 백악관의 주인으로까지 승승장구 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세계최강국 미국의 정치권을 뒤흔든 것 만으로도 그는 성공한 정치인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거부감을 가져 온 미국사회에서 당당한 사회주의자로 인기를 얻고있는 것 또한 기적같은 일이다.
그는 ‘가진 자들만의 세상’으로 질주하는 기성 정치와 사회·경제적 폐해들을 낱낱이 들춰내 혁신적인 비전으로 고단하고 지친 미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동시에 그는 국제사회에도 ‘미국식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맹목적인 추종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샌더스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1986년 버몬트 주의 벌링턴시장 선거에 도전해 겨우 10표 차로 힘겹게 당선되며 정치인이 됐다. 그리고 4선 시장을 역임하면서 폐촌이 되어가던 벌렁턴시를 협동조합과 재생에너지 등으로 유명한 자연친화적 모델도시로 만들어 전국각지 공무원들의 견학이 끊이지않는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버몬트 주의원으로 2006년 상원에 진출, 본격적인 ‘사회 민주주의자’로서의 활약을 벌인다.


그를 널리 알린 것은 2012년 12월10일 의회단상에 올라 무려 8시간37분에 걸친 필리버스터 연설이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감세 연장’법안을 공화당과 합의하자 이에 대한 반대논리를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 반박하는 연설을 장장 8시간이 넘게 계속한 것이다.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세금혜택을 주어 이미 심각한 지경인 국가부채를 악화시키는 일이 제게는 비양심적인, 너무도 비양심적인 일”이라고 시작한 그의 연설은 모두 자리를 떠 텅빈 의사당에서 홀로 외친 절규였다. 가난한 서민들의 편지 열 두 사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쓸쓸히 마친 그의 연설은 그러나 2년 뒤 부자감세법 폐지의 결실을 맺었고, 수많은 지지자를 불러 모으며 오늘의 대선후보 반열에 올려놓은 일대 전기가 됐다.
미국이 역시 선진국인 것은,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선거 시스템과 검증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진짜 보석같은 인물을 배출한다는 점이다. 한국처럼 포장술에 능한 보좌진과 어용 친위언론에 가리워 위선적인 불량지도자를 걸러내지 못하는 현실과는 다르다. 오죽하면 써준 원고가 없으면 버벅거리고, 기자회견 한번 제대로 못하는 지도자를 뽑을까. 미국 정치에 신선하고 파격적인 바람을 몰고 온 샌더스가 부상한 것도 훌륭한 시스템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샌더스는 사실 그만한 내공을 쌓아 온 인물이었다.
우선 샌더스는 시골의 시장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지녀 온 서민과 빈민층 위주의 정책소신, 즉 1%가 아닌 99%를 위해 일한다는 초심과 열정을 잃지않은 정치인이다. 그 것은 부유한 자와 가진 자들의 반대편에서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긍휼과 측은지심을 지닌 따뜻한 사람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는 또한 가식이 없이 솔직하다. 그 자신 서민으로 살며 어울려 살아왔다.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애용하는 그의 사진들은 그가 외양만을 내세우는 ‘바리새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의 살아온 삶과 이력을 통해 소신과 철학을 입증해 주었고, 미국이라는 거대 자본사회의 온갖 추하고 그늘진 현상에 메스를 가하며 변혁을 선도할 지도자로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샌더스의 도전은 한낱 도전으로 멈출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선국면의 미국 정치 한복판에 몰아친 75세 노정객 샌더스 돌풍은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지도자를 어떻게, 어떤 인물을 고르고 택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타산지석이 되고도 남을 것 같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사드 논란의 미래

● 칼럼 2016. 2. 12. 21:20 Posted by SisaHan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공론화 단계에 들어서는 모양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기 위한 방어책의 일환으로 사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가 정부 안팎에서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드’라는 나무만 보는 사이 ‘미사일방어’(MD) 체계라는 숲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리고 ‘사드 이후의 한국’을 아무도 상상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MD 체계는 적의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복합 네트워크다. 탐지부터 요격, 반격까지 지상과 해상 그리고 해저와 우주에서 입체적으로 구성된 미국 패권의 아이콘이다. MD는 ‘적의 미사일을 요격해야 한다’는 신념체계를 구현하기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진화하고 확대되는 유기체다. 이 유기체는 인공위성과 각종 레이더로 구성된 탐지체계라는 촉수가 촘촘한 그물로 구성된다. 사드는 패트리엇 PAC3, 이지스 미사일방어체계, 전방센서, 지휘통제전투관리통신(C2BMC)과 연동되는 미사일방어체계의 핵심 요소다. 즉, 사드는 MD의 구성요소이지, 독립된 무기체계가 아니다. 사드는 곧 MD다.


한·미·일 군사협력의 핵심이 ‘미사일방어체계 구축’이라고 믿는 미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북한을 협상으로 이끌기 위한 제재보다는 북한을 끝내려는 제재를 중국에 압박한다. 동시에 한국에 사드 배치를 내밀었다. 사드 배치는 한국을 미·일 동맹에 편입시킬 수 있는 고리다. 미국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방기한 북한의 핵능력은 동북아에서 MD망을 확대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리 영토의 사드는 일본의 MD망과 연계되어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이 연동되는 한·미·일 3국 군사협력의 연결고리다. 한국이 MD에 참여하면 한·미·일 동맹이 중국 견제용 동맹 네트워크로 전환되는 것이다. 결국 사드 배치는 방기된 북한 핵을 구실로 중국을 포위하는 반중국 동맹의 일원으로 한국을 끌어들이는 미국의 동아시아 균형 전략의 완성이다.


중국은 미국의 항모전단이 중국 근해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들로 항모 킬러 미사일 등을 활용한다. 이를 반접근 거부 전략(A2/AD: Anti-Access, Area Denial)이라고 한다. 중국에게 한국의 사드 배치는 미국 MD의 핵심 촉수가 베이징 턱밑까지 전개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우리가 아무리 “북한의 핵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고 외쳐도, “동아시아 재균형 전략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미국의 주장처럼 허튼소리로 들릴 것이다. 중국에게 한국의 사드 배치는 미국의 공세적 대중국 봉쇄 전략으로 보일 뿐이다.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실효적 정책보다는 북한의 4차 핵실험을 MD 확대로 활용하는 미국과 협력하는 한국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사드가 북한만 겨냥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공학과 안보학 그리고 국제정치학적 사실이다. 그 사드는 중국도 겨냥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안보 날라리’들은 사드 배치를 동맹의 이름으로 지지한다. 그들은 사드 배치가 한국을 미·중 초강대국 국제정치의 서슬 퍼런 작두 위에 올라서게 할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 작두 위에는 북한의 평화적 비핵화라는 국익도, 통일이라는 갈망도 없다.


사드, 도입하려면 하라. 그러나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포기하고 6자회담도 폐기하라. 앞으로 중국과의 외교적 협력도 중단하라. 우리 아이들에게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과 중국이 제공하는 경제사회적 기회를 꿈도 꾸지 말라고 하라. 주변국 협력 외교보다 군사동맹의 중요성만 국정 교과서에 기술하라. 이것이 사드 이후 한국의 모습이 될 것이다.
< 최종건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교수 >



빌라델비아장로교회 유아·유치부 어린이들의 세배에 바울회 어른들이 기뻐하는 모습.


고운 한복을 입고 교회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염광교회 어린이들.


설날을 하루 앞둔 2월7일 주일 각 교회에서는 설맞이 전통행사로 성도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염광교회(담임 이요환 목사: 905-415-9115)는 전통민속 체험행사로 각종 민속놀이를 즐겼고, 빌라델비아장로교회(담임 김경진 목사: 416-444-1716)는 유아·유치부어린이들이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드려 흐뭇하게 했다.



만약 내가 나의 발걸음을 전속력으로 주 하나님의 증거(복음)에로 돌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목적으로 나의 행실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 세상 창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전능하심은 나타나셨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1:10)” 이처럼 태초에 주님께서 세상을 지으셨기 때문에 즉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또, 만물이 그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골1:17). 또한 주 하나님의 본성 안에 인자하심의 근원이 있음을 알자!. 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주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자비 하시며”,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그를 찾고 그에게 호소하는 모든 자들에게 “인자 하심이 크시도다”.(시145:8).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주시려고 하시며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용서해 주시려고 하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향하여 모든 성도들이 영원한 할렐루야가 찬송될 것이다. 내평생 사는동안 하나의 자비가 끝나는 것이 다른 자비의 시작인 것과 같이 하나의 감사가 끝나면 그것이 다른 감사의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쉼쉬고 있는 동안 나의 입이 하나님의 감사와 영예를 끝까지 말하고 살아가자! 호흡이 있기 때문에 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우리 호흡의 향기가 된다. 또한 우리는 은혜의 시대 아래 살고 있기때문에 더 큰 유익을 얻고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나아져야만 한다. 어떻게 살면 삶의 최상이 되는 복음에 입각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복음>은 천박하거나, 헛되거나, 가혹한 것이 개재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성서와 정직한 사역자들의 설교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다니엘 7:1-8), 그리고 사역자들은 그들의 설교에서 기록된 사건들의 대략(요지-要旨)을 진술해야 한다.


세상은 흉흉한 바다이고 흉흉한 바람은 거대한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지구상에는 네개의 바람이 패전을 다투고 있다. 미래에 어떤 폭동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것이 바람속의 전투처럼 난폭하게 싸우고 있는 세상, 열왕들의 전쟁이라 아니 할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은 사탄들 (즉 세상 통치자 및 위정자들)의 교만한 야심들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이 본 네 짐승(사자, 곰, 표범, 로마제국-천주교)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추호도 믿지 않는 세상 권세들 (유럽, 북미, 러시아)과 랍비(유태인)들이 손을 잡고 세상 부(富)만을 목표로 삼고있다. 결국 네번째 짐승의 죽음에서 우리는 “오, 주여! 주님의 모든 적들은 멸망 될 것이며, 주님 앞에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아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교만하고 잔인한 적들은 분명히 멀지않아 심판을 받아 낮아지게 될 것이다.


<복음>의 선포에 의해서 이 세상 안에 세워진 <메시아>의 나라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으로 오시며, 그의 성령으로 통치 하시기 위해서 또한 그분의 모든 성도들은 “주 하나님을 위해서 왕과 제사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유의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감추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사역자와 목회자들은 주 하나님의 일들을 자기 마음에 쌓아두고 그것을 잘 소화 하는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필요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입으로 즉시 표현하려면 <복음>을 우리 마음에 항상 갖추어 두어야 한다. 항상 부요함을 쌓아 올리는 사람들은 누가 그 부(富)를 거둘는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낸 부가 누구의 것이 될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자비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자기 죄를 먼저 통회자복, 회개 해야만 할 것이다.


재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귀를 열어, 그들의 죄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훈계와 명령을 듣게 하신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그 진리의 능력과 권위에 복종 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잘못된 길로부터 되돌아 올 것이다. 재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속박 하시는데도 부르짖지 아니하는 자들은 죄에서 떠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 곳곳에 재난과 재난이 계속되는 현세대에 <우리가 녹지 아니 했기때문에 여호와 께서는 우리를 계속 풀무불에 가두고 그 풀무를 살피셨으니, 풀무를 더욱 뜨겁게 하기 위해서 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깊은 생각(숙고)의 부족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행한 봉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들을 수 있음에 대해 주 하나님께 감사하자! <재난>은 마치 풀무불 속에 있는 은이 불순물에서 정제되는 것처럼, 저들을 시험한다. <재난>은 마치 헛간 속에있는 밀이 키질되어 까불러지는 것처럼 그들을 깨끗하게 만든다. 또 <재난>은 마치 더러운 옷이 세탁공에 의해서 깨끗해지는 것처럼 저들과 그들을 희게 만들 것이다. “진리는 위대하며,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