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인터넷 허위사실 유포를 엄단하겠다며 전담팀까지 꾸려 상시 감시에 나섰다. 1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 도를 넘었다”고 말한 직후 급하게 정해진 일이다.
검찰이 하겠다는 일은 폐기돼 마땅한 과거 행태의 답습이다. 검찰은 포털사이트 등의 허위사실 유포를 감시해 피해자의 고소·고발이 없어도 직접 수사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최우선 수사 대상은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도 밝혔다. 이대로라면 인터넷에 공개된 모든 글이 잠재적인 수사와 감시 대상이 된다. 상시적 검열과 다를 바 없다. 대표적인 ‘공적 인물’인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글들이 당장 감시를 받고,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될 것이다. 이를 겁내 입을 다무는 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 위축이다. 긴급조치로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았던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바로 이랬다.
 
허위사실 유포를 앞세운 여론 봉쇄는 진작에 위헌으로 판정됐다. 허위사실 유포를 금지한 유신 시절 긴급조치 1호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모두 위헌 선고됐고, ‘미네르바 사건’ 등에서 인터넷을 통한 정부 정책 비판을 억누르는 데 악용됐던 옛 전기통신기본법도 헌재의 위헌 결정을 받았다. 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할 근거는 이미 모호해졌다. 명예훼손에 대해서도, 대법원과 헌재는 공직자나 국가기관의 업무에 관련된 의혹 제기 혹은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한 의혹 제기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권고했고, 상당수 선진국은 이를 범죄로 삼지 않는다. 이들 혐의가 권력자 비판을 탄압하는 데 악용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런 법률적 배경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소·고발이 있어야만 명예훼손 수사에 나섰던 일반적 사건처리 절차도 무시하겠다고 한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법리나 판례, 절차를 모두 내팽개친 꼴이다. 그렇게 졸속으로 강행하다 보니 검찰 스스로 무엇을 수사나 감시 대상으로 삼을지부터 우왕좌왕이다.
 
그 해악은 이미 가시화했다. 인터넷을 감시할 검찰 전담팀이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인터넷 이용자들의 ‘자기검열’이 번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걱정은 해외 사이트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으로 이어지고 있고, 포털 업계는 이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대통령과 검찰의 ‘시대착오’가 헌법상 표현의 자유는 물론 IT강국의 위상까지 위협하고 있는 꼴이다.


[칼럼] 정의구현사제단 40돌 맞이

● 칼럼 2014. 10. 7. 08:39 Posted by SisaHan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박정희 정권은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을 ‘민청학련’의 이름으로 잡아들이고, 혹독한 고문을 통해 반국가사범으로 조작했다. 체포망은 천주교의 지학순 주교에까지 다가왔다. 학생들에게 거사 자금을 건넸다는 혐의였다. 독재정권은 거칠 게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 주교의 구속에 항의하는 거센 물결이 30대의 청년 사제들을 중심으로 퍼져간 것이다. 당황한 정부는 지 주교를 잠시 석방하는 유화책을 썼다.
사제들은 기로에 섰다. 주교 석방의 주장이 이뤄졌으니, 이만 물러설 건가. 그러나 옥중에 있는 양들을 놓아둔 채 혼자 빠져나오는 목자는 있을 수 없는 일. 지 주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하고, 이번엔 아예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다. 주교의 양심을 앞세우고, 사제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였다.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결단한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사제단은 권력에 핍박받는 어려운 이웃과 늘 함께했다. 간첩 낙인이 찍혀 접촉조차 꺼리는 인혁당 가족들을 따뜻이 맞아들인 게 사제단이었다. 인혁당에 대한 사법살인을 규탄하고, 형사자(刑死者)의 시신을 안치하려 한 유일한 곳이 사제단이었다. 32년 뒤 인혁당에 대한 재심-무죄판결로 귀결되기까지 사제단은 늘 이 억울한 가족들과 함께했다.
지난 9월22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단 40주년 기념미사가 열렸다. 여러 피해자, 희생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양심수의 가족들. 의문사의 유가족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강정, 밀양에서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분들. 그리고 세월호 유족들! 이들이 바로 사제단의 역사다. 정부의 횡포와 여론의 매도에 초토화된 억울한 이들에게 사제단은 먼저 다가서고, 함께 돌팔매를 맞으며, 위로하고 연대했다. 절망 속에 희망을 피워내고, 어둠 속에 불을 밝혔다.
 
독재정권은 사제단 신부들을 감옥으로 위협했다. 1976년 3.1구국선언 사건에 가톨릭 신부들은 사실 관여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정권이 재야-개신교-가톨릭을 일망타진하듯 엮자, 사제들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십자가를 껴안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진범이 조작되었다’는 역사적 문건의 발표에 앞서 함세웅 신부는 김승훈 신부를 만났다. “이번 발표로 감옥에 갈지 모릅니다.” 김 신부는 “응, 알았어”로 간명하게 답했다. 이렇듯 사제들은 감옥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사제들에게 정권의 위협 따위는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 다름 아니었다.
사제단에 대한 음해와 낙인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다. “사제단을 해체하라”는 악성 파파라치는 사제단 활동을 위축시킬까. “사제단 해체의 소음이 높은 그때가, 사제단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라고 한 신부는 답했다. 탄압으로 해체될 조직이라면, 수십번도 더 해체되었을 것이다. 40년의 연륜은 불의한 권력의 필멸성과 훼방행위의 무익성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진짜로 사제단을 해체시킬 방법은 없을까. “정의”를 실제로 “구현”해버리면, 사제단의 존재 기반이 쇠퇴할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파쇼화, 신유신화, 비인간화하는 지금 같은 분위기는 사제단의 존재 근거를 되려 강화시켜준다.
 
부패한 세상에서 종교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금 역할을 하랬더니 소금장수 노릇만 하고, 각종 비리가 종교계를 좀먹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억울한 이웃을 위한 고난의 짐을 기꺼이 지는 성직자의 존재는 귀하고도 거룩하다. 그간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에게 먼저 다가가고, 우리 모두의 인간존엄성을 일깨우고, 정의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한 사제단에게 우리 사회는 많은 빚을 졌다. 그러기에, 가톨릭 신도가 아닌 나도, 정의구현사제단 40주년을 맞아 꽃 한송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 한인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평신도 글마당] 가을 빛

● 교회소식 2014. 10. 7. 08:32 Posted by SisaHan
가을빛은 다르다. 하늘이 파랗다 못해 투명하다. 나를 빤히 지켜 보시는 하나님의 맑은 눈동자인가 보다. 구름은 파란 하늘에서 마음껏 유영한다. 산도 그려보고,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를 그려 보이기도 한다. 저편 하늘에선 하이얀 솜사탕이 되어 두둥실 떠다니며 공짜(?)라며 맛 좀 보아 달란다. 
푸르다 못해 검푸르게 변했던 나무들이 조금씩 연해 지더니, 나무가지 끝에서부터 불그래 물들어가고 있다. 가녀린 나무 몇은 서둘러 여행이라도 떠나려는가… 붉게 단장하고 맵씨 좀 보아 달라한다. 
발코니에 심어 둔 고추가 빨갛게 익어 있다. 페이스북에 가을사진 몇장 올려 보았더니 날보고 ‘추남’이라고들 한다.
큰길 보다는 주택가 좁은 길을 택하여 운전을 하면 더 좋다. 정성껏 심어 둔 가을꽃들과 정원수의 단풍들이 아름답다. 올해는 단풍이 더 아름다울 것 같다. 여름내내 적당한 비가 내려 주어서, 지난 겨울 얼음폭풍을 맞았던 나무들을 열심히 살려 주었다. 그래서 일까, 더 푸르고 짙은 숲이 여름을 견디게 해 주었었다.
 
언젠가 이야기 하였지만, 여름에 나무가 잘 자라면 가을 단풍이 더욱 아름답다. 여명보다는 노을색상이 더 진하듯이, 새봄 여린 새순도 예쁘지만 가을의 농익은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설래게 한다. 
우리 인생도 나이가 들어 황혼이 될 때 쯤이면, 각자의 색상이 나타난다. 젊은 시절, 건강한 삶을 살았다면 늙어서 더욱 그 빛을 발한다. 마음을 한 곳에 두고 열심을 다 했던 사람들은 인격이 되어 얼굴에 나타난다. 늙음이 더 행복함은, 시간의 여유와 넉넉한 마음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권면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사랑’ 이다. 큰 사랑을 가슴에 품게 된다면, 세상이 행복해진다. 내가 행복하면 이웃도 행복해진다. 
진한 가을빛을 발하는 사람이고 싶다. 초록과 어우러진 노란 색이, 초록과 어우러진 빨간 단풍이 밖으로 나오라고 유혹한다. 나는 지금 어떤 빛을 발하고 있을까?
 
우리 모두는 지나 온 삶 만큼의 빛을 발하고 있다. 가끔은 장례식장에서 느끼는 아름다움도 있다. 연세도 적당히 드시고, 자녀들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평안한 모습의 고인을 뵈올 때 느끼는 감정이다. 늙음을 아쉬워해서는 않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여유가 있고, 더 사랑을 배풀고, 부부가 함께 여행도 즐기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웃에게 본이 되며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모습에서 우리들은 고운 ‘가을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전문 사진가는 아니지만, 사진을 자주 접하다 보니 약간의 요령(?)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침을 여는 여명의 아름다움과 저녁노을을 가장 많이 찍게 되었다.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비춰주는 노을을 볼 때마다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게 된다. 
오늘은 외출 하였다가 집에 들어오는 길에 가을빛을 사진기에 담아 보았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뒷 차를 먼저 지나가게 하면서 느긋한 가을빛에 취해 보았다. “주님! 저에게서도 저처럼 아름다운 색상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오늘을,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내가 되어 보자고 또 다짐해 본다. 
창문 밖에 비추인 가을빛이 방안에 들어 오더니, 나의 마음 한켠에 눌러 앉아 버린 오후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베들레헴 지역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그들이 살던 그곳에 큰 흉년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데리고, 지금의 요르단 지역인, 요단 강 동편 모압 지방에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남편 엘리멜렉은 죽고, 두 아들은 장성하여 그곳 여인들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두 며느리 이름은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안타깝게도 나오미의 두 아들도 그곳에서 죽게 되고, 이제 나오미와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들도 너희들의 살 길을 찾아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오미가 이렇게 한 이유는 그 당시 세 여자가 한 곳에서 생활을 유지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법에는 여인들은 남편으로부터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떠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기로 작정 합니다. 이제 룻은 함께 하기로 한 시 어머니인 나오미와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난하고 궁핍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룻기 2장 23절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 하니라.” 
그 당시 남편을 잃어 버린 과부 룻이 살아 남은 방법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그것으로 시 어머니와 연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어떤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두 여인이 굶지않고 먹을 만큼, 즉 그들이 원하는 만큼 가져올 수 있는 이삭들이 늘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나눔의 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3장 22절에서 이렇게 이웃들과의 나눔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한, 신명기 24장 19절부터 21절에서도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추수할 곡식의 일부를, 나에게 주신 물질의 일부를, 더 구체적으로 내 삶의 일부를 나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우리가 나누고 섬기고 돌보아야 할 우리의 이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감사의 계절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너의 땅 안에 너의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저의 손을 펴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나누는 손과 나누는 발과 나누는 삶의 모습이 있을 때, 우리를 통해 이 땅에는 더 큰 감사의 찬양과 함성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을 맞이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한 톨도 남김 없이 다 우리들의 곡간에 넣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또한 이 땅의 우리들의 이웃들이 그것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주신 일부를 남겨 두는 풍성한 감사의 계절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 이충익 목사 - 시냇가에 심은 초대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