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이민자의 양심은 두개?

● 칼럼 2013. 7. 1. 13:12 Posted by SisaHan
초기 이민자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은 언어장벽과 함께 문화적인 이질감이다. 비싼 세금에 꼬박꼬박 팁을 더해 음식값의 4분의 1이 넘는 부담이라든가, 생활화 된 더치 페이, 어린 자식과도 분명히 선을 긋는 재산문제. 자기들이 알아서 해치우는 결혼식, 너무 편하고 쉽게 치르는 장례, 거기에 선거문화와 내각제 정치체제의 유연성 등등, 과거 살아 온 고향 나라 관행이나 습속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생활문화의 차이가 한 둘이 아니다.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적응되어 있고,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어색함이 편함으로 바뀐 것들이 많아진다. 수십년 만에 모국을 다녀 온 이들의 입에서는 이제 여기가 더 편하고 살기좋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오는 걸 본다. 오랜만에 가보니 어색하더라는 것부터, 모든 게 번잡하고 정신이 없더라, 너무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더라, 왜 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며 사는지 모르겠다는 탄식까지… 상황판단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무리 세월이 가도 변치않는 고정관념이 있으니, 바로 모국 정치에 대한 감정적 판단이다.
 

최근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사건을 ‘국기문란, 민주주의 파괴범죄’로 규정한 시민단체와 대학생, 종교인들의 시위가 번지면서 미국의 한인동포들이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다. ‘워터게이트’의 본고장에 사는 까닭에 ‘국정원 게이트’를 보는 시각이 남다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선 먼 산의 불처럼, “또 웬 시비냐”는 비뚤어진 애국심의 발로들도 접한다. 국가기관이 위법적인 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뜻인지, 원래 정보기관이 그런 짓을 해오지 않았느냐는 무뎌진 인식 때문인지, 아니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 듣기 싫다는 것인지, 도통 납득이 안되는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호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워터게이트 보다 한 술 더 떠 엄연히 국가기관이 해선 안되는 민의 왜곡과 선거에 영향을 줄 불법 범죄혐의를 검찰이 밝혀냈는데도 말이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유명한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에는 주인공 걸리버 보다 작거나 크고, 사람을 말이 지배하는 등 상상 이상의 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인들의 나라에 간 걸리버는 고국 영국에서 일어나는 집회라든가 변호사들, 전쟁 등에 대해 설명했다가 왕에게서 “그대의 민족은 세상 표면에 기어다니게 된 생물들 가운데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라는 비참한 평가를 듣는다. 하늘을 나는 섬나라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학설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그 일에 중독되게 만드는 허풍나라를 경험한다. 또 마지막엔 사람들을 마치 종처럼 부리고 사는 말들의 세계를 간다. 그 곳에서 인간은 냄새나고 거칠며 포악한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들에 증오감과 자책감을 가졌던 걸리버는 고국에 돌아와선 가족과도 식사와 대화조차 못하는 병증으로 고통을 겪는다. 이질감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허상과 실상 사이의 동질감을 비꼬는 작가의 신랄한 감정 표현일 것이다. 물론 풍자 소설일 뿐이며 경우는 다르지만, 이민자들 처지에서 고국과 이민지에서 접하는, 다른 상황과 관습 속의 이성적인 가치평가, 더 넓게는 사회정의 판단 등의 일관성 측면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 없지않다.
 
오래 산 이민자들은 거의 모국과 이민 삶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 비단 혼례나 장례문화의 그 것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여러 문제들의 좋고 나쁨, 정의와 불의, 선함과 악함의 정도와 수준에 대한 판단들은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실제에 있어 우리들 주변을 보면 이중적인 이질감의 세계에 살고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걸리버와 같은 고뇌조차도 없이-. 쉽게 말하면 이민 땅에서의 정의와 모국에 대한 정의 개념, 그 잣대와 평가 기준이 너무 다름에 놀라는 것이다. 일례로 사상적인 트라우마나, 지역·혈연에 대한 유대 혹은 소원함, 독재에 대한 무딘 감정 등의 불변 혹은 고착개념이 바로 그 것이다. 
이민자는 정의가 두 종류고 양심도 둘일까? 마치 걸리버가 여행한 거인국에 우리가 살고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김종천 편집인 >


지금의 국가정보원은 한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요, 흉기를 들고 설치는 위험한 망나니와 같다. 국민 통제라는 마구간을 뛰쳐나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풀밭을 마구 짓밟았다. 국가 기밀사항을 꺼내들고 칼춤을 추어 나라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런 국정원을 과연 이대로 두어도 좋을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에 묻고 싶다.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자기네 대통령이 참석한 정상회담에서 은밀히 오간 대화를 ‘2급 비밀’로 분류한다는 말인가. 국제 정보기관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될 이야기요, 우리 정보기관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으로 기록될 일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그 비밀분류마저 해제해 ‘일반문서’로 강등시켜 버렸다. 기밀이 무엇이고 정보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인식도 돼 있지 않은 엉터리 조직이다. 이제 국정원은 비밀이고 보안이고 하는 따위의 말을 꺼낼 자격조차 없다.
 
국정원의 판단 능력과 정신 상태는 참으로 위험한 수준이다. 국정원은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이유에 대해 “현시점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며 “회담 내용 진위 여부에 대한 국론분열이 심화하고 국가안보에 악영향이 초래됨을 우려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대화록 공개 이후 벌어진 분열과 갈등 상황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다.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어떤 정치·사회적 파장을 불러올지 예견하지 못했다면 국정원의 판단 능력에 심각한 이상이 있는 것이요, 이런 국론분열 현상을 예상하고서도 공개를 강행했다면 천인공노할 행동이다.
국가안보 역시 마찬가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 내용이 마구잡이로 유출된 것에 북한이 기뻐서 손뼉을 칠 리도 만무하고, 이번 사건이 남북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국익이며 안보 등에 대해 거꾸로 말한다. 이런 국정원에 남북관계며 안보를 맡길 수는 없다.
국정원한테 결국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조직의 이해관계요 정권의 안위였다. 북한 이슈로 불을 지른 것부터가 조직 보호를 위한 국정원의 자작극이었다. 정상회담 발언록 내용을 비밀리에 흘려놓고 “내용이 공개돼 비밀 가치가 없다”는 따위로 둘러댔다. 심지어 남재준 국정원장은 어제 국회에서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공개했다”는 답변까지 했다. 스스로 불법행위를 저질러놓고 ‘명예’ 운운한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국가 이익이나 법질서보다 국정원의 명예를 앞세우는 발상도 놀라울 뿐이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조직의 탄생 시절부터 디엔에이에 깊이 각인돼 있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이 서둘러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목적도 이른바 ‘반혁명세력’의 저지에 있었다. 잠재해 있던 이 나쁜 본성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완전히 되살아났다. 그리고 ‘남재준 국정원’은 ‘원세훈 국정원’보다 한술 더 뜨고 있다. 국가 정보기관은 결국 대통령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부리느냐에 달려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가진 철학은 국민의 여망과는 동떨어져 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단호히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정권보위 세력으로서 국정원을 활용하고 나선 형국이다. 이대로 가면 국정원이 얼마나 더 위험한 짓을 저지를지 예측하기 힘들다. 
결국 고삐 풀린 망아지에게 고삐를 단단히 채우는 일은 국민의 몫이 됐다. 이 어려운 일에 대한 국민적 지혜를 짜내는 첫걸음은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다. 야당의 어깨가 막중하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양적완화 축소 계획’ 발표가 단기적으로는 시장에 충격을 주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만큼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지나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풀었던 정책을 거둬들인다는 것은 경기가 살아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가 살아나면 우리에게도 득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버냉키의 양적완화 축소 발언은 앞으로 세계 금융시장의 큰 흐름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돈 풀기로 경기부양을 하는 시대는 끝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 변화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또 그럴 경우 세계 경제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에 대해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어제 열린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정부가 원론적인 대응책만 내놓은 것은 이런 불안감을 더한다. 정부는 앞으로의 상황 변화에 대비해 더욱 정교하고 현실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 정부 이후 지속되고 있는 경기 부진이다. ‘747’ 공약을 내걸고 출범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의 연평균 성장률은 2.9%였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그 추이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계속된 경기 침체로 중견기업들이 잇달아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하강세가 더 가팔라지고 있다. 이런데도 ‘버냉키 충격’은 일시적이니 큰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안이한 인식을 갖고 있다면 문제다. 지금 우리 경제는 “기초체력 양호” 운운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칼럼] 이명박보다도 못한…

● 칼럼 2013. 7. 1. 12:30 Posted by SisaHan
‘이명박근혜’란 말이 있다. 박근혜가 아무리 이명박과의 차별성을 내세워도 결국 한몸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이렇게 일찍, 이렇게 철저히 무너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정은 민주주의 훼손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되는 ‘헌법 제1조’라는 노래가 이명박 정부 초기 촛불시위 때 유난히 즐겨 불렸던 건 당시의 민주주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방증한다.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한 국기문란 범죄다.
더 큰 문제는 이에 대처하는 박 대통령의 자세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그 실체가 불분명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국정원 여성 인권” 발언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검찰은 최근 ‘국정원이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조직적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한 사건’이라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이쯤 됐으면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발언을 사과하고, 수사가 미진한 부분에 대한 국정조사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태도는 어떤가.
 
그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공개되자마자 국정원은 기다렸다는 듯 ‘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본격적인 물타기에 나선 것이다. 국정원이 ‘법대로’ 알아서 했다는 말은 그만하자.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대통령 승인 없이 대화록을 공개했다면 그건 대통령이 직무를 포기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국가권력기구를 사조직처럼 운영했던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자행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며 국정원 국기문란 사건을 물타기 하려 하고 있다. 민주주의 훼손이란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보다 더 사악한 정권이다. 촛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건 당연하다.
남북관계는 또 어떤가.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남북관계를 파탄 일보 직전까지 끌고 왔다. 그래도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했다. 천안함 사태가 일어난 와중에도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대북 원칙을 내세우며 북한을 압박했다. 그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든 ‘적당히 양보하고 타협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북한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개성공단은 사실상 폐쇄됐고, 모처럼 성사될 것처럼 보였던 남북 당국자 회담도 격이 맞느니 어쩌니 하는 곁다리를 가지고 실랑이하다 무산됐다. 앞으로 박 대통령이 북한의 변화를 얼마나 이끌어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까지는 남북관계를 파탄 낸 대통령으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라살림 꾸려가는 것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친기업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고환율, 감세 등 기업 지원에 온 힘을 쏟았다.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단순 논리를 앞세웠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성장률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아냥댔던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훨씬 못한 2.9%에 그쳤다. ‘1 대 99’ 논쟁에서 보듯 사회 양극화는 극에 달했다.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를 내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이명박 정부보다 한 단계 진전된 것이긴 하다. 문제는 실천 여부다. 한쪽으로는 경제민주화를 외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입법 속도를 조절하고 기업들 사기를 꺾지 말라고 을러댄다. ‘국정원 물타기’로 국회가 공전하면 경제민주화 입법 무산이라는 어부지리를 덤으로 챙길지도 모르겠다. 창조경제도 그 의미를 놓고 갑론을박하면서 배가 산으로 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줏대 없는 경제관료들은 그들 선배가 실패한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며 권력 눈치보기에 바쁘다.
박근혜 정부 출범 넉 달이 됐다. 겨우 넉 달 만에 ‘이명박근혜’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명박 정부 5년의 실정을 거의 완벽하게 재연했다. 그것도 훨씬 더 악화된 모습으로.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