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독도를 잘 지키는 법

● 칼럼 2012. 8. 27. 15:53 Posted by SisaHan
일본 정부가 어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공동 제소하자는 외교서한을 우리 정부에 보내왔다. 일본 쪽은 1965년 한일협정 때 맺은 분쟁해결 조약에 따른 조정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독도는 국제법·지리·역사적으로 우리 고유 영토이므로 영토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일본의 제안을 일축했다. 여기까진 마치 태권도의 약속 대련처럼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공방이다.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한쪽 당사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없는 외교공세다. 법리적으로도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양국 정부는 별도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이면서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제3국에 의한 조정에 의해 그 해결을 도모한다’는 65년 분쟁해결조약과 모순된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별도로 규정이 있는 경우’라고 우길 순 있겠지만 제소든 조정이든 우리 쪽이 거부하면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홍보전밖에 없다.

그렇다고 일본 쪽의 공세가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일본이 50년 동안 잠자고 있던 국제사법재판소 카드를 꺼내들고 총력 공세를 하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노다 총리는 어제 관계장관회의에서 독도 문제에 대한 대외 발신의 강화, 영토 문제에 대한 체제 강화, 추가 대항조처 검토를 지시함으로써 독도를 장기적으로 집요하게 국제분쟁지화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본 쪽이 그동안 거론했던 통화스와프협정 연장 중단이나 차관급 이상 교류 중단 같은 강경책은 당장 들고나오지 않았지만, 긴장을 늦출 상황은 아니다. 총선을 앞두고 낮은 인기로 고전하고 있는 노다 정권에 이 대통령 독도 방문과 일왕 발언은 울고 싶었던 차에 뺨을 때려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93년 고노 담화가 명백히 인정하고 있는데도 ‘한국 쪽이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이 강제연행했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한 것과 같이, 국내 여론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의 역사 망언이 잇따를 가능성이 크다.

커다란 국익이 걸린 사안일수록 감정과 애국주의에 기댄 접근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우리 쪽이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독도 같은 사안은 더욱 그렇다. 정부는 이제라도 일본의 무차별 공세에 휘말리지 말고 실효지배의 이점을 살리면서 법·논리적으로 당당하게 대응해야 한다. 아울러 전략도 준비도 없는 돌출행동이 어떤 부작용을 낳았는지도 뼈저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170일간의 장기파업을 풀고 지난달 18일 노조원들이 업무에 복귀한 문화방송(MBC)에서 살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모양이다. 엊그제 나온 노조 특보를 보면, 회사 쪽이 5~7월에 보도국 12대, 시사제작국 4대 등 모두 16대의 HD CCTV를 설치해 구성원들이 감시의 공포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 CCTV는 16배 줌인 기능까지 갖추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신문의 어느 면 기사를 읽는지, 인터넷으로 뭘 검색하는지 포착할 수 있다”고 노조는 주장한다.
노조 설명대로라면 CCTV는 기자·피디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도구일 가능성이 크다. 회사 쪽이 주장하는 도난 방지를 위해서라면 이처럼 성능 좋은 CCTV가 대규모로, 그것도 파업 기간에 설치될 이유가 없다. 하루 24시간 내내 머리 위에서 CCTV가 작동하는 문화방송 사무실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인권탄압을 감시·고발해야 할 공영방송 구성원들이 거꾸로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는 셈이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뿐이 아니다. 회사 쪽은 파업 참여를 이유로 1개월의 정직·대기발령을 받았던 노조원 20명에 대해 추가로 11월까지 3개월의 교육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징계가 끝난 뒤에도 파업 참가자들을 업무에 복귀시키지 않겠다는 ‘2차 보복인사’나 다름없다. 문화방송은 또 간판 시사프로그램인 ‘PD수첩’의 작가 6명을 일방적으로 계약해지하는 등 파업 뒤에도 치졸한 탄압을 그치지 않고 있다.
언론 자유를 스스로 옥죄는 것이나 진배없는 문화방송의 조처는 개별 방송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공영방송을 쥐락펴락하고픈 이명박 정부가 김재철 사장을 ‘낙하산’으로 앉히고, 김 사장은 공정성을 외면한 채 권력 입맛 맞추기에만 열을 올리다 빚어진 일이다.
 
한국언론재단이 지난 6~7월 기자 667명을 상대로 실시한 ‘2012 기자 의식조사’는 이런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언론 자유를 옥죄는 주요 요인으로 ‘정부와 정치권력’을 꼽은 사람이 65.2%나 됐다. 이 비율은 2007년 23.3%였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뒤 2009년 56.7%, 올해 65.2%로 크게 높아졌다.
문화방송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오는 27일 이사장 선임과 함께 최우선으로 문화방송 내부의 언론자유 탄압과 김재철 사장 퇴진 문제를 다뤄야 한다. 19대 국회 개원협상 때 ‘문방위에서 언론 청문회를 개최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한 여야도 조속히 약속 이행에 나서기 바란다.


필자는 박근혜 의원을 주저 없이 ‘독재자의 딸’이라고 부른다. 사실 ‘독재자의 딸’만큼 역사성이 오롯이 담겨 있고, 박 의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호칭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꼭 박 의원을 비난할 목적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그의 정치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정치적 부상이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가 만약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떤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를 추론하는 분석틀로서 ‘독재자의 딸’이란 호칭만큼 적절한 용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딸’이란 용어는 박근혜의 정치세계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웅변한다. 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12월11일, 그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대위 고문으로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60~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바라보고 아버님 생각이 나서 목이 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처음부터 아버지 박정희를 거론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다”는 발언에선 이번 대선의 복지공약도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것임을 엿보게 한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영광스런 업적’을 재현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함을 알 수 있다.
 
5.16 쿠데타에 대한 평가에선 이런 인식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지난 7월16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아버지로서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1989년 5월19일, 10.26 박정희 시해사건 뒤 처음으로 언론에 나와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말한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문화방송> ‘박경재의 시사토론’) 특히 5.16 당시의 피폐해진 생활상과 불안한 안보상황을 거론하며 5.16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논리 구조는 23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치도 변함이 없다. 이는 그의 역사인식이 아버지 박정희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영락없는 ‘독재자의 딸’이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딸’인 그가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한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이는 박정희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반독재 슬로건’이 적어도 현실정치에서는 거의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아무리 비난해봤자 박근혜 지지자들이 돌아설 리 없고, 구경꾼들도 지금 시대에 무슨 연좌제냐며 시큰둥할 것이다. ‘박정희 향수’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켰을 수도 있고, 먼 과거인 박정희 독재보다 현재의 박 의원의 정치적 비전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선거전략상으로만 보면 민주진영의 ‘독재자의 딸’ 딱지붙이기는 박근혜를 깎아내려 선거에서 표를 더 얻기 위한 수단으로는 효력을 상실했다.
 
만약 ‘독재자의 딸’인 박 의원이 대세론을 유지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우리 사회는 ‘박정희 독재 18년’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이는 또 박정희 정권에 뿌리를 둔 수구·냉전적인 원조 보수기득권층이 변신에 성공해 화려하게 부활함을 의미한다. 설사 박근혜의 당선이 ‘독재자의 딸’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비전 때문이라 해도 이런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지지자들은 유신 독재에 대한 세탁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의원은 어제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됨으로써 정치 입문 15년 만에 대권에 가장 근접한 집권여당 대선 후보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 사후 범보수정권의 맥을 이었던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 등과는 달리 ‘박정희 영웅신화’에 젖어 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과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퇴행이 불가피할 것이다. 12월19일 국민의 선택이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실장 >


▶영원한 투사: 광복군 장교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시안에서 미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김준엽 전 고대 총장(가운데), 노능서 선생.


영원한 독립군 장준하 선생…되살아 난 ‘실족사’의혹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이 숨진 뒤 37년 동안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장 선생이 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맞섰던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언론인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박 전 대통령과는 팽팽한 대척점에 섰다. 일제강점기인 20대 중반 젊은 시절 장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박 전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다. 장 선생은 언젠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준 일도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 장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 선생이 숨진 직후부터 실족사로 처리된 사인을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 37년간 이어진 장준하 타살 의혹
장 선생 사망 당시 경찰은 장 선생이 1975년 8월17일 산악회원 40여명과 함께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인 경기도 포천시(당시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489m)에 올랐다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가 산행에 합류한 ‘김용환’이라는 인물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김용환은 장 선생이 출마한 총선 때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으나 산행 이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일행이 약사봉 샘물터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장 선생과 김용환이 따로 산길을 올랐다가 다시 일행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비탈에서 실족했다는 것이 당시 경찰의 발표 내용이었다.
하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떨어졌는데도 체중 73㎏이던 장 선생의 신체에 큰 외상이 없었고,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이 단순 추락 때문에 생긴 상처로 보기 어려웠다는 점 때문에 당시부터 의문사 논란이 일었다.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4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 선생 혼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했다’(<동아일보> 75년 8월19일치)는 기사가, 장 선생 사망 이틀 뒤에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던진 기사를 쓴 내외신 기자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가 곤욕을 치르거나 한국에서 추방됐다.
장 선생 타살 의혹은 1970~80년대 군사정부 시절에는 입소문으로 나돌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뒤 민주당이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다시 공론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의혹으로 머물러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뒤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으나, 목격자 김용환이 장 선생 사망 뒤 갑자기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한 사실, 그의 일관성 없는 진술, 장 선생 주검에서 추락 흔적이 거의 없는 점 등을 들어 “과거 수사 결과는 대단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 독립투사·반독재투사 장준하
장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으나 일본군을 탈출했다. 그의 저서 <돌베개>를 보면, 고향을 떠나면서 아내 김희숙씨에게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는 성서 구절을 남겼다. 편지에 이 구절이 적혀 있으면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는 귀띔도 남겼다. 그는 44년 7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뒤 중국군을 거쳐 그해 11월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김구 산하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일본의 항복 뒤인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귀국해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50년대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며 당시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잡지로 이끌었다. <사상계>는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한 한-일 수교 협상이나 베트남 국군 파병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선생은 특히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연사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70여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협상 주도 세력을 비판했다. 베트남 국군 파병과 관련해선 1966년 방한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을 두고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다. 
장 선생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나라 밖에서도 업적을 인정받았다.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으로 옥중당선됐다. 72년 10월 유신 이후엔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장 선생이 숨진 뒤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영결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 박기용·권혁철 기자 >


법의학자들 타살의혹 제기
장준하 선생 유골 사진 공개 “추락으로 볼 수 없어”

37년 만에 장준하 선생의 유골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망 원인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복수의 법의학자들이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서 주목된다. 의혹의 핵심은 머리뼈에 지름 6㎝ 크기로 선명하게 나타난 원형 골절 부위다. 거의 완벽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머리뼈 골절은 언뜻 보기에 망치와 같은 둔기로 맞은 흔적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다시 한번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법의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히는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교실)는 “추락이 아니라 가격(에 의한 골절)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사건, 만삭 의사부인 사망 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등에 법의학자로 참여했던 이정빈 명예교수는 “넘어졌을 때 하필이면 지름 6~7㎝짜리 망치 같은 것에 부딪힌 게 아니라면, (추락했다는) 산에 그런 (원형 골절을 입힐) 물체가 있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추락으로 인한 골절상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유골 사진을 살펴본 이 교수는 “(장 선생의) 머리뼈 골절 흔적은 망치처럼 모서리가 있는 물체가 아주 정통으로 수직으로 (머리에) 부딪혀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