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코레아노와 에니켕

● 칼럼 2016. 3. 18. 20:16 Posted by SisaHan

여행의 즐거움이란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감동을 얻는 일에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고 인상 깊은 사람을 만나며 마음 훈훈한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뛰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번 나의 쿠바 여행은 만족스럽다. 때마침 같은 호텔에 머문 큰빛교회 시니어팀의 선교활동을 잠시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난 11년 전부터 쿠바에 선교의 씨를 뿌리고 정성껏 가꾸어 온 Y님의 특별한 배려로 가능했다. 기실 80-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정으로 그곳까지 온 크리스천들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뜨거운 감동이 아닌가. 아울러 안이한 내 신앙생활에 도전을 안겨주는 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선교팀을 따라 맨 처음 방문한 곳이 바로 마탄자스(Matanzas)에서 4km 떨어진 외딴 마을 엘 보우(El Bow)였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잡초만 무성한 벌판에서 그 시대를 대변하듯 외롭게 서있는 <한인 기념비>를 만났다.


 ‘여기 엘보로에 1921년 이민으로 온 대부분이 쿠바 유일의 전통한민촌을 이루어 살면서 에니켕 수확에 힘쓰는 한편 고국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는 한국학교를 세우고 교회와 한인회를 설립하여 우리의 전통문화 계몽을 의해 노력했다. 이들 후예들이 이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으며,…’
가슴이 울컥하며 목젖이 뜨거워졌다. 이곳이 쿠바 한인선조들의 첫 정착지인 에니켕(henequen) 농장이었다. 지금은 오직 돌같이 딱딱한 몇 그루가 남아 기념비의 수문장인양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잠시 사진을 찍다가 부주의로 그 줄기 끝 뾰족한 부분에 내 왼쪽 다리를 찔렸는데 엄청 아팠다. 금세 피멍이 들 정도로 단단한 줄기를 온종일 뙤약볕에서 잘라야 했다니 얼마나 심한 중노동이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 쿠바에 한인들이 정착했을까? 1905년에 한국인 1천 33명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있는 에니켕농장 노동자로 집단이주를 했다. 그들의 고용계약을 끝났을 때는 이미 한국과 일본이 합병(1910년)되어 돌아갈 나라를 잃고 그 땅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1921년에 이르러 그들 중 274명이 멕시코 ‘에니켕 지옥’으로부터 사탕수수밭을 찾아 쿠바로 정착지를 옮긴다. 바로 이들이 쿠바한인(코레아노) 1세다. 그러나 쿠바에서도 설탕값 폭락으로 인한 여파로 사탕수수밭 대신 에니켕 농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용설란이라 부르는 선인장 에니켕은 ‘해먹’이나 배의 닻줄을 만드는 천연섬유로 칼로 잘라내기 힘들만큼 억세고 날카로운 가시가 많아 몸에 상처내기 십상이라 현지인이 가장 꺼리는 노동에 속했다.


세찬 바다 바람과 열대지방의 이글거리는 태양빛 밑에서 자라는 대형선인장의 특성이지 싶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망국의 한과 설움을 달래며 한인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한인회를 조직하여 우리문화 계승에 힘썼다 한다. 조국애를 발휘하여 매일 식구수대로 쌀 한 숟가락씩을 따로 모아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까지 보냈다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애국심이 아닌가. 나도 이민 1세인지라 문화와 언어가 다른 낯선 땅에서 그들이 겪었을 외로움과 고달픔이 아픔으로 전해온다. 더군다나 노예 같은 밑바닥 삶에 인종차별까지 당했다니 어찌 자유국가로 이민 온 우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쿠바혁명 이후부터 사회주의 국가로 변하면서 교육과 의료부분의 불평등은 사라졌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근래에는 전문직을 가진 코레아노들이 있다고 하나, 아직까지도 대를 잇는 가난에서 전혀 헤어나지 못한 실정이라 들었다.


코레아노 후예들이 참석하는 현지 교회들을 방문했을 때다. 비록 우리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그들이지만 서로 얼굴을 비비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니 한국인의 따사한 숨결이 느껴졌다.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쓴 코레아노 3세 노인이 기타를 치며 우리말로 ‘만남’과 ‘애국가’를 2절까지 불렀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얼굴을 적시고 말았다. 모국을 그리는 절절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을 흔들었던 것이다. 아마 이들이야말로 모국으로부터 철저하게 잊혀진 해외동포들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경제대국을 이룬 오늘의 한국이 서둘러 이들에게 조국방문의 기회와 풍부한 물자를 지원해 줄 수는 없을까.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인지라 그 길이 용이하진 않으리라. 단지 내 어린 시절 교회 선교사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들에게도 깊은 관심과 온정의 손길이 하루빨리 펼쳐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아직까지도 코레아노와 에니켕이 내 마음 속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 풍요를 누리면서도 상대적 빈곤을 느껴온 내 자신이 사뭇 부끄럽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요즘 4.13 총선을 앞둔 한국 각 정당의 후보자 공천을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것이 과연 시민 민주주의이고 대의(代議) 민주주의 인지, 직접 선거에 의해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인지 의문일 뿐더러, 한국정치의 앞날에 대해서도 암울한 전망 밖에 들지 않는다.


국민의 대표로 의정활동에 임할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인데, 후보자를 국민 뜻과는 별 상관없이 정당의 유력자 몇 명이서 추려내고 잘라 내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지역구에 내리 꽂는다. 선거구민들은 당에서 그렇게 결정한 후보들을 놓고 선택의 여지없이 가부만을 표시해야 할 판이다. 그것은 여도 야도 마찬가지다. 비례대표는 그런대로 정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할 전문인들을 택한다고 볼 때 당에서 어느 정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친다하자. 그러나 지역구 국회의원은 그 해당 지역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할 인물을 택해 국회로 보내는 것이 대의정치의 기본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뜻은 겨우 몇% 반영한다는 시늉만 낼 뿐, 당의 권력을 쥔 세력이 맘대로 후보자를 재단하고, 자기들 기준에 따라 인물을 평가하고 분별해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내려 보내 투표하라 한다. 이른바 전략공천이니 험지공천, 자객공천 운운 희한한 행태와 용어가 난무한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정치 후진국의 생생한 실상이다.


대통령이 사적 감정을 가진 인물을 배제하고, 국회를 거수기로 만들어 의회권력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절대 충성파를 중용한다. 말썽과 파문의 주인공이나 지탄받은 인물들도 충성도에 따라 무조건 발탁하고, 의정활동이 아무리 뛰어나도 파가 다르고 성향이 달라서 퇴출시킨다. 퇴임 후 보신(保身)과 수렴청정까지 계산해 자기 사람 만들기 미래 보장형 공천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집권여당은 정말 꼴불견이다. 오죽하면 자당의 대표를 두고 “XX 죽여버려”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을까. 안중에 티끌만큼도 없는 민의 외면과 국민 무시의 방자함이 하늘을 찌른다. 무엇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기초를 짓밟는 오만무례한 권력의 횡포다. 유신시절 권력자가 뽑아 내리꽂기 국회의원을 만든 유정회와 얼마나 다른가. 마치 전두환 정권 말기 퇴임 이후를 위해 ‘일해재단’이니 뭐니 온갖 머리를 굴리던 때와는 뭐가 다른가.


여당의 독재적 국정운영과 의회무시, 불통 등을 비판해 온 야당은 어떤가. 야당은 자신들의 정의감 만큼이나 민주주의에 충실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이 비난해 온 집권세력이 그러하고 정치판이 원래 그러니 따라 해도 그만인 것인지, 그들 또한 오십보 백보요, 더 가관이다.
국민과 지역민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한 두명의 권력자가 전권을 휘두르며 “너는 안돼, 너는 괜찮아!” 하고 멀쩡한 인물의 목을 치고 명예를 난도질하는 끔찍한 칼질·학살 공천과 일그러진 선거의 악습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러고도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삼권분립 원칙이 확고히 구현되며 수준높은 의정과 국정이 이뤄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민의(民意)의 정치제도다. 국민의사에 따라 국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국민 모두가 너나없이 직접 정치에 나설 수는 없으니 대표를 뽑아 위임하는 형식을 취한다. 곧 대의 민주주의, 대의정치다.


선거는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고 대변할 정치인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가장 중요한 행사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축제라 한다. 그런데 민의가 아닌 권력에 의해 후보자가 정해지고 유권자는 택일만을 강요 당한다면, 자연히 국민들의 정치흥미와 참여 열기는 떨어지고 혐오가 일 것이다. 기권과 불참으로 투표율이 낮아지면 민의와 상관없이 소수의 지지로 선출된 정치인들의 의회는 보나 마나다. 당연히 민생보다 권력을 맴도는 그들만의 리그로, 집권자들의 ‘권력놀이 공원’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저 민주주의의 흉내를 내는 의회정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게 뻔하다. 그동안 보아 온 한국정치의 고질병 증상 가운데 하나다.


한국의 집권층이 존숭해 마지않는 미국에서 왜 진정한 민주주의는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미국은 주요 공직 후보자가 소속 정당에서 예비 선거를 통해서 선정되고 지명된다. 각 정당과 주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예비 선거에 참가하는 수천에서 수백만의 당원들에 의해 후보가 결정된다. 간부 당원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코커스’(caucus)가 있고, 일반 당원에 비당원까지도 참여할 수 있는 ‘프라이머리’(primaries)로 구분될 뿐이다. 결코 후보 지명을 당의 수뇌부가 독단적으로 내리꽂거나 칼질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당 수뇌들은 하루아침에 매장되고 말 것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총선의 시대정신

● 칼럼 2016. 3. 18. 20:11 Posted by SisaHan

정치세력, 정당의 입장에서 선거란 무엇일까? 선거란 대중의 삶을 관통하는 감각과 생각을 포착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시대정신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얻는 정치적 의례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들의 비전과 가치들은 서로 경합하고, 대중의 선택과 만나고 엇갈린다. 그리고 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4·13 총선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경선과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난무한데 정당들이 어떤 시대정신으로 대중의 마음을 읽고 얻으려 하는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깜깜이 선거다.


약간의 비례대표를 제외하면 지역대표를 뽑는 게 총선이라 지역의제에 관심이 쏠리는 건 인지상정이다. 대선과 달리 시대정신이 부각되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다. 게다가 여당 쪽은 굳이 새로운 의제를 내세울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길 가능성이 높은 선거라고 볼 텐데 판을 깔아줄 이유가 없다. 야권은 다르다. 구조적 열세, 위기상황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통해 판을 흔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분열한 야권은 각자도생 모양새다. 시대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정치공학만 나부낀다. 그 결과는 기득세력의 확대재생산이고, 서민의 고통 지속일 것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변화의 열망이 뜨거웠다. 복지국가가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다. 2012년 새해 사회정책 전문가 31명을 대상으로 한겨레가 실시한 조사 결과다. 그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공정과 정의, 평등으로 응답했고,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과감하게 끌어안았다. 51.6%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2007년과 2008년, 대선과 총선의 시대정신은 성공이었다. 이명박 후보가 물 만난 고기처럼 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시대 대중의 삶을 관통하는 감각과 의식은 무엇일까? ‘불안’이다. 삶 전체를 옥죄는 총체적이며 전방위적인 불안. 불안의 기저에는 경제위기에 대한 실감이 있다. 한국갤럽의 신년조사에 의하면 올해 한국 경제 상황이 지난해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응답이 52.2%였다. “올해 우리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와 비슷한 위기일 것이라는 주장”에 58.6%가 공감했다는 결과도 있다.(미디어리서치 신년조사) 불안은 과거와 비교해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가 2040세대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67.4%가 자신의 삶이 불안하다고 응답했다. 4년 전에는 58%였다.
불안도 불평등하다. 경제적 지위, 학력 등 자신을 지켜낼 자원이 적은 집단을 집중적으로 위협한다. 같은 30대지만 빈곤층은 96%가 불안감을 느낀다. 중상층 이상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13%에 불과하다. 40대도 다르지 않다. 빈곤층은 90%가 불안을 토로한 반면, 중상층 이상에서는 9.5%만 불안하다.


안보불안(73.9%)보다 경제불안(94.7%)과 외교불안(76%)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보수성향층일수록 불안이 공포를 자극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새로운 불안으로 기존의 불안을 틀어막는 박근혜 정부의 ‘불안의 정치화’ 전략은 이런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거나 말거나 안보불안으로 경제불안을 틀어막는다는 전략의 효과는 변변찮다.
4·13 총선은 세월호 참사 2주기 즈음에 치러진다. 이 사건 이후 국가가 불안을 막아주기는커녕 불안의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퍼졌다. 이 불안의 시대에 각 정치세력은 어떤 시대정신으로 응답할 것인가?
< 한귀영 -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