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에녹대학 추석잔치에서 학생들이 ‘독도는 우리땅’ 플래시 몹을 시연하고 있다.


서부장로교회(담임 박헌승 목사) 캐나다 에녹대학은 민족의 전통명절인 한가위 추석잔치를 ‘나라사랑/독도는 우리 땅!” 이라는 주제로 지난 9월22일 흥겹게 열었다. 4부로 나누어 1부는 박헌승 목사가 인도한 ‘나라사랑, 민족사랑’, 2부는 김경예 전도사가 ‘독도의 역사와 문학’에 대해, 3부는 이정례 전도사가 ‘우리가락 민요잔치’를 진행하고 4부는 홍할라 선생 지도로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 몹이 펼쳐졌다. 학생들은 풍성한 오찬과 떡으로 추석정취를 나눴다.


< 문의: 416-993-3134 >



노여움은 인간을 극도로 어리석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과 같은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노여움의 코에 고리를 끼고 그 턱에 재갈을 먹일 필요가 있다.(삼상20:33) 극도의 노여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노한 마음을 가지고 멸시하는 말을 아무 말없이 겸손히 받아 들인다는 것은 자기를 매우 낮추는 지혜로운 <겸손>이다. “네가 혐의를 받았을 때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이 있다. 교회를 치리 하고자하는 자는 먼저 그 자신이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악한 죄를 지어 성령을 슬프게 하고 이를 막아 버리면 성령은 그 사람을 떠나고, 그를 위해 애써 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부리신(일하는)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한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사악한 생각을 하거나 사악한 길로 계속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자신을 기만하는데 불과하다는 점을 유의하자. 죄에 대해 진정으로 슬픔을 표시하지 않고 죄에 대한 진정한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금식이 아니고 가장된 신앙인의 거짓 금식기도가 되지 않을 까요?


신앙인의 과시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신앙의 본질>없이는 어떠한 기도도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 가족과 친족이 몰락하는 데도 돌아보지 아니하면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다.(딤전5:8) 우리는 불쌍한 청원자가 우리를 찾을 때 그를 회피하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또한 자비와 동정의 대상이 나타날 때 딴전을 피워서도 안된다. 그들은 우리의 살중의 살 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랑의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잔악한 일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자비로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 베풀어 주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는 일을 우리 자신의 규범으로 정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 하는 것” 일 줄 믿는다. 참된 지혜는 그 행하는 일로써 알려진다. 즉 <선행>은 전 인격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참된 지혜는 영혼과 성격이 온유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야고보서3:13) 다른 사람의 노함을 끈기있게 참고 견디는 것은 지혜가 있음의 훌륭한 증거가 된다. <지혜는 온유함을 낳고 온유함은 지혜를 더해준다> 사역자들의 사역이 실패로 끝나면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아니라, 교우들 모두의 실패가 되고 그 손실은 교인들에게 돌아 갈 것이다.


주님! 우리는 죄악에 있어서는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어야 되지만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는 성인으로 성장하여야 하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지나고 청년과 같은 상태를 벗어나 성인이 된 상태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로 인해 주어진 생명을 유지해 주는 음식이며 자양분이다. 우리는 새로 태어난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젖을 사모하며 자라도록 해야 될 줄 믿는다. 사역자들을 위한 기도는 우리 교인들이 목회자들에게 해야하는 또 하나의 의무이다. 사역자들은 교인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교인들이 사역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할수록 교인들은 그들의 사역에서 얻는 유익이 많아 질 것이다. 교인들은 자신들을 가르쳐 주는 사역자들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도하여 가르쳐 주시겠지만, 우리는 그들로 용기있고, 현명하며, 열성적이고, 사역에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또한 사역자들이 유혹받을 때에 물리칠 수 있는 강한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된다. 그렇게 함으로 사역자들은 모든 일을 정직하고, 신실하게 선한 양심으로 양들을 위하여 치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큰 목자요 사역자들은 주님께 예속된 목자들인 것이다.


“신앙은 인간들에게 가장 진실한 예의와 훌륭한 교양을 가르쳐 준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경 말씀 속에서 자족의 의무를 권고받고 있다.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여 세상의 부를 모으려하는 지나친 욕망의 <죄>, 즉 <탐욕>의 죄를 제압하고 내 마음속에서 왼전히 뿌리를 뽑아 버린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 될까! 또한 우리는 현재의 환경에 만족할 줄 알고 현재의 형편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 일까! 환경이 향상되면 인간의 욕망도 역시 높아지기 때문에 탐욕의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환경과 욕망을 억제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제단이 되시며, 제물도 되신 주님 앞에 늘 깨어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주 하나님의 자비에 내 자신을 맡기는 신앙생활을 하자! 이 세상에서 나의 모습은 마치 바다에 떠있는 배와 같아서 이리 저리로 흔들리며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위기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나의 영혼은 <배>와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튼튼하고 견고한 <닻>을 필요로 한다. 바로 <복음>이 주는 소망이 나와 우리의 <닻>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주는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하며, 확실하고, 변함이 없으며,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 아름다운 소망이 되는 것이다.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만큼 견고하고, 이 소망은 영원한 반석이신 주 예수님 에게서 내려진 <닻>이다. 왕중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신자들의 예표요 첫 열매이시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늘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신다. 그 분은 지병으로 돌아가실 때 자신이 들어갈 관을 준비하시고 그 위에 아내를 통하여 이렇게 글을 써 주길 당부하셨다. ‘십자가지도’(十字架之道). 사모님은 흰 무명천에다 빨간 글씨를 정성을 다해 쓰신 뒤 목사님께 보여주셨다. 목사님께서는 그것을 보시며 껄껄 웃으시며 “이제 다 되었네.. 내가 주님 부르실 날만 기다리면 되겠네.” 하셨다.


평생 믿음의 외길로만 가셨던 그 목사님께서 준엄하게 가르쳐 주셨던 당부의 말씀이 목회를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조금씩 지쳐갈 때마다, 교인들이 진심을 이해를 해 주지 못하고 종종 변해가는 마음을 느낄 때마다 나는 목사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자고로 목회자는 진실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십자가지도’를 평생 잊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삶이 퍽퍽하고 유혹이 밀려오고 삶에 고통이 밀려올 때 정직하게 십자가를 놓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도를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가 변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정직하고 진실되게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속고 속여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보다 십자가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었다. 나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놓치고 살았던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지도’ 이다.


세상이 급변하면 할수록 교회도 빠르게 세상 발걸음에 장단 맞추어가는 것이 마치 트렌드인양 그렇게 적용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도 적용할 수도 없다. 이제 거슬러 조금 느리고 더딜 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환상이나 이적 기적과 같은 현상적인 상황에만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히는 그 자리에서 바르게 각성하고 깨달아 우리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십자가지도’ 앞에서 되돌아 보아야 한다.
‘십자가’, 나에게 십자가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길을 너무나 잊어버리고 살았다. 아니 알면서도 이제 고난의 십자가는 더 이상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지 않고, 능력의 십자가만 필요할 뿐이라고 우리는 외쳐야 한다. 깊이 반성해야 한다. 능력의 십자가는 없다. 다만 죽음의 십자가 밖에 없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의 능력이 있을 뿐이다.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되찾아야 한다”라고 외칠 때마다 허공을 향하여 던져지는 공허한 울림 같고 예전에 가졌던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며 나아가겠다는 그 결연한 의지가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삶의 현실이 너무 찌들려 도리어 이상적인 것을 너머 신비적인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목회자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십자가가 어찌 부적이 될 수 있고, 기적이 되었단 말인가? 세상으로부터의 철저한 버림의 상징이다. 버림을 받을 때 택함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한 가지는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지도’이다. 의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하고 눈물이 필요하다. 이는 무엇보다 목사와 교인들 모두가 사회보다 훨씬 높은 도덕성과 정직성을 요구하는 것이 ‘십자가지도’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 어찌 거짓이 있을 수 있겠으며, 부정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여! 다시금 회개하고 돌아오라! 진실로 자신의 거짓과 탐욕과 부정과 어리석음과 야망과 기복에서 돌이켜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붙들라.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노라! 정직과 진실함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교회가 살 길이다.

< 박세종 목사 - 토론토 예닮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