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파적 연합과 장기비전으로 아시아 유일 복음 토착화 성공

기독교 선교 130년… 언더우드·아펜젤러 발자취를 찾아 (상)

한국선교 130년을 맞아 9월초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발자취 답사단’이 130년 전 두 청년 선교사의 초심을 찾아 나섰다. 한국 개신교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 지향 정책과 선교 열정에 힘입어 전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주류 종교가 됐다. 그러나 선교·성장·성전 제일주의, 대형 교회 목사들의 타락과 비리, 추문 등 도덕성 위기, 근본주의 집착과 다양성 무시, 기득권화와 분단 갈등 조장 등으로 인해 반개신교 정서도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더욱이 통일 시대를 앞두고, 독일 통일에 결정적 구실을 한 교회의 소명을 다시금 되새길 때라는 성찰도 커지고 있다. 교세에 정체를 보이며 최대의 위기를 맞은 현재 한국 개신교가 말보다 실천과 봉사, 헌신으로 튼튼한 밀알을 심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에 따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 초교파적 연합·장기비전 복음토착화
답사단은 먼저 미국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찾았다.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회 가정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뒤 해외선교의 꿈을 키운 곳이다. 뉴저지주 주립대학교인 럿거스대와 인접한 이 학교는 미국이 독립전쟁에 승리한 1784년 유럽에서 벗어나 미국다운 신학을 위해 세워진 미국 최초의 신학교다. 뉴욕에서 자기 집안 노예를 풀어주고, 노예 해방에 앞장선 존 헨리 리빙스턴(1746~1825)이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설립했다. 학생 수는 200여명에 불과하지만, 세계 선교의 선봉장이 된 곳이다. 19세기부터 이 학교 졸업생의 15%가량이 해외로 나갔다고 한다.


이 학교의 센터 격인 중앙도서관엔 유일하게 언더우드의 흉상이 있다. 9년 전 연세대에서 기증한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 등과 함께 미국 신학계의 자존심인 뉴브런즈윅신학교는 최근 ‘졸업생 언더우드’를 높이 대접하고 있다. 언더우드학이 개설돼 영어 이외엔 최초로 한국어로 공부하는 프로그램이 9월에 개설됐다. 언더우드의 후손들이 이 학교에 기증한 언더우드의 비공개 서한들도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또 헨리루스재단이 기금을 지원해 앞으로 5년간 ‘언더우드 정신으로 어떻게 세계 기독교에 기여할 것인가’를 연구할 ‘언더우드 글로벌 기독교센터’가 이 학교에 마련됐다. 초대 센터장을 맡은 이 신학교 김진홍 교수는 “기독교 선교학으로 보자면 가톨릭 예수회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 18세기 말 인도로 간 윌리엄 케리와 버마로 간 저슨, 중국으로 간 허드슨 테일러 등이 손꼽히지만, 그들이 간 나라는 복음화되지 못한 반면 언더우드가 간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복음의 토착화에 성공했다”며 “특히 장기 비전을 가지고 초교파적 연합정신을 가지고, YMCA를 창립하고, 일반인들도 공부할 수 있는 연세대까지 만들며 장기 비전을 세웠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메노나이트 영향과 영적 회심을 체험
답사단은 이어 필라델피아주 랭커스터의 프랭클린 앤 마셜 대학과 인근 랭커스터제일감리교회를 찾았다. 아펜젤러가 감리교 신학의 본산 격인 드루대에 진학하기 전 다닌 곳이다. 개인적인 기도나 회심보다 공동체성을 강조한 스위스계 메노나이트였던 어머니의 영향 아래서 자란 아펜젤러는 대학 시절 한 부흥집회에서 영적 회심을 체험한 뒤 21살에 풀뿌리 민중들에게 접근해 복음을 전도하는 감리교인이 된다. 이 교회 담임목사 조 디파올로는 “아펜젤러는 이곳에서 평신도 설교자로 1년간 봉사하며 자신의 뜨거운 체험을 전하며 가슴으로 믿는 신앙을 설교했다”고 말했다. 이 교회는 7~8년 전 개축하면서 ‘아펜젤러 기념 채플’을 만들었다. 이 채플엔 아펜젤러가 건립한 정동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십자가가 걸려 있다. 최근 그가 세운 인천내리감리교회 교인 130명이 다녀가는 등 감리교인들의 답사지가 되어가고 있다.
< 뉴브런즈윅·랭커스터=조현 기자 >



화성에 물‥ 생명체 존재 가능성

● WORLD 2015. 10. 2. 16:58 Posted by SisaHan

NASA가 공개한 사진의 화성 표면에 보이는 검고 좁다란 띠는 100m가 넘는 길이로, 과학자들은 이것이 소금기가 있는 액체 상태의 물이 흐르는 개울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NASA발표
소금물 개천 형태, 강력증거 제시

화성에 액체 상태의 물이 ‘소금물 개천’ 형태로 지금도 흐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가 발표됐다.
이 발견은 화성에 외계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동시에 앞으로 인간이 화성에 살 수 있게 될 가능성도 보여 주는 것이어서 매우 주목된다.
이에 따라 2020년 화성 탐사선을 보내 화성 표면에 착륙시킨다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화성 2020 로버 미션’이 가시화 될 전망이다.
화성 표면에 흐르는 물이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는 점은 2000년에, 얼음 형태로 물이 존재한다는 점은 2008년에 각각 밝혀졌으나, 액체 상태의 물이 지금도 흐른다는 증거가 제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NASA는 28일 오전 워싱턴 D.C. 의 본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연구 결과를 설명했다.


화성 표면에서 상대적으로 따뜻한 일부 지역에서는 계절에 따라 어두운 경사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이런 지형을 RSL(Recurring Slope Lineae)이라고 하는데, 여름이 되면 나타났다가 겨울이 되면 사라진다. RSL은 폭이 5m 내외, 길이가 100m 내외인 가느다란 줄 형태이며 영하 23도 이상으로 온도가 올라가면 생겼다가 그 아래로 온도가 내려가면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RSL에 관해서는 염류를 포함한 물이 화성의 땅에서 새어 나오면서 이것이 흘러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었으나 그간 증거가 없었다.
연구자들은 “물은 우리가 아는 생명에 필수적”이라며 “오늘날 화성에 액체 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천체생물학적, 지질학적, 수리학적 함의가 있으며 미래의 인간 탐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1500자 칼럼] 역사 이야기

● 칼럼 2015. 10. 2. 16:52 Posted by SisaHan

나는 아직도 캐나다에 와서, 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본 시험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 와서 처음 본 시험이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면 보다 그 내용에 있어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시험은 고등학교 세계사 시험이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역사과목이 제일 좋았다. 이곳에 이민을 와서도 영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겁도 없이 세계사 과목을 택했다. 사실 이미 다 배운 것이었기에 수업을 따라가는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칠판에 적고 우리는 받아쓰기에 바빴던 한국과는 달리 거의 토론식으로 진행되거나,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흘러가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처음 시험을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였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지명을 외우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년도를 외웠다. 일곱 장 정도 되는 시험 문제지를 받고 처음부터 차분히 적어 나가는데, 문제가 의외로 쉬었다. 사지선다형이거나 한 단어를 적어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종이가 백지였다. 다음도, 그 다음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하며 다시 보니. 맨 위에 글씨가 몇 줄 적혀있는데, ‘로마가 왜 망했는지 분석하라’는 질문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에세이 문제였고 그 한 문제의 비중이 거의 50%를 넘고 있었다. 처음 대해 보는 문제에 가슴이 콱 막혀왔다. 그런 문제가 나오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문제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겨우 서너 줄 썼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운동장 같은 백지를 채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시험지를 돌려주며 해석해 줄 때, 선생은 최소한 12가지 이상의 이유를 들어 설명해 줄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국내외적인 상황, 경제적인, 사회적인…. 그 모든 이유가 합쳐져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그는 우리가 보는 관점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가지고 우리 나름대로 분석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다시 배웠지만 그 점이 역사에서는 중요했다. 역사관이랄까? 역사를 보는 눈…. 애초에 그렇게 분명히 배웠음에도 대학에 가서 역사를 공부하며 에세이를 썼을 때, 나는 “Where is your idea?”라는 지적을 자주 들었다. 나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왠지 학생에 불과한 내가 단정을 내리기에 자신이 없어 남이 한 말을 자주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한국에서 역사를 배울 때는 한가지 역사만을 배운 것 같다. 그리고 누가 한 말을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여기서 동양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역사가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서양에 알려진 우리 역사가 일본학자에 의해서인 경우가 많았고, 영어로 된 동양사 책은 일본학자가 쓴 것이 많고, 일본에서 공부한 서양학자가 많다는 점이다.


그는 당연히 일본학자가 쓴 책을 보고 공부했을 터이다. 문제는 그뿐 아니라 우리 학자라도 민족사관에 의해 역사를 보는 사람보다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 역사를 본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다고 치더라도,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역사를 바로 배우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역사를 보는 눈을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숫자와 이름을 외우는 것이 역사교육이 아니다. 관리들이 입었던 옷의 색깔을 외우는 것이 역사교육이 아니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스승이 한 말을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해 그대로 제자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료를 가지고 분석하는 태도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역사는 불변의 사실이라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경제학자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른 점으로 해석할 수가 있고, 민중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국정교과서로 주입식 역사교육을 받았지만,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은 제대로 역사교육을 받았으면 참 좋겠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