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풍구 올라선 사람들 탓이라고?

● COREA 2014. 10. 21. 14:21 Posted by SisaHan

경기소방본부 소방관들이 17일 밤 주변을 통제한 채 손전등으로 판교 테크노밸리 공연장 환풍구 붕괴 사고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공공디자인’ 관점에서 알려주마

‘판교 공연장에 있었다면, 당신도 혹시…’
“그러게 뭐하러 올라가?” 판교 사망자 비판이 놓치고 있는 것들
‘행동유도성’ 염두한 공공 구조물 디자인의 사회적 공론화 필요

경기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추락사고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와 포털의 기사 댓글을 중심으로 개인의 과실 책임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애초 사람이 올라가는 곳이 아닌 곳에 무분별하게 올라가 공연을 관람한 사람의 책임이 크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20일 한 커뮤니티에는 “시설파괴비용을 물어내도 모자랄 판에 보상금, 치료비, 장례비 지원하려고 하고 있으니 기막히고 한심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은 곧바로 ‘최다 댓글’ 게시물이 되면서 뜨거운 논쟁 대상이 됐다. 같은 날 오후 2시 기준 네이버 주요기사의 댓글엔 “사망자들의 과실도 만만치 않다”, “보상이 아니라 벌금을 먹여야”, “세월호는 선장과 선원이 나가라고 하지 않아 희생된 거지만 이 사건은 올라가지 말라고 해도 올라가서 떨어진 거다” 등의 댓글이 추천 수 상위에 올랐다.
이런 온라인 ‘악성 댓글’은 사고 피해자들에게 상처가 되고 있다. 부상자 가족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들 부주의로 당한 사고라고 비판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조심스럽다”고 말을 아끼기도 했다. 사고 4일 만에 보상 관련 협상이 마무리된 것도 여론 악화에 기인한바 크다.
현재 인터넷 여론은 한쪽에선 올라간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선 안전요원 하나 두지 않은 주최 쪽과 환풍구 시설 규정을 철저히 하지 않은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고를 두고 어느 한쪽만의 책임을 묻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부 누리꾼의 냉소적 반응은 사고 뒤 언론들이 일제히 ‘안전불감증’ 관련 기사를 쏟아낸 것과 맞닿아 있다. “환풍구 높이가 규정대로 지어지든 말든 환풍구 위로 올라가지 말아야 하는 것은 기본 상식”, “올라가지 말아야 할 곳에 올라간 사람에게 네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상식”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합리적인 개인’을 대상으로 둔 책임론이다. 부적절한 공연 관람 문화도 문제로 지적됐다. 공공장소에서 공중도덕이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안전선 밖으로 나가는 ‘밉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번 사고를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환풍구 사고의 경우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 ‘안전 통제를 따라야 한다’는 합리적인 상식만으로 책임을 개인에게 한정 지을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떤 물건이나 구조물이 공공 환경에 놓일 때는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된다. 예를 들면, 문의 손잡이는 어떻게 열어야 할지(돌리거나, 밀어서)를 지시하는 형태로 디자인된다. 전등 스위치는 누르기 쉬운 위치에 누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게끔 디자인된다. 구멍이 있다면 뭐가 있나 들여다보고 싶어지고, 적당한 높이의 구조물은 위에 앉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복슬복슬하고 귀여운 인형이 있다면 쓰다듬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어떤 사물의 생김새가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유발하는 것을 디자인 용어로 ‘행동유도성’(affordance, 도널드 노먼)이라고 부른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이 사용했던 자동소총은 자주 고장이 났다. 이 자동소총은 탄창이 방석처럼 평평하게 생겼다. 군인들은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종종 깔고 앉았다가 소총을 고장냈다. 여객기가 처음 도입됐던 당시엔 에어컨 구멍이 우체통 구멍과 비슷해 자꾸 편지를 집어넣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Designing for People, 1955) 유명 관광지의 동상 등을 보면 튀어나온 코 같은 부분은 손을 타서 반짝거린다. 이런 심리가 이미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동상을 만지지 않는 개인이 합리적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만지지 마시오’ 라는 경고문이 붙게 된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볼 때, 해당 환풍구는 화단과 연결돼 있었고, 허리 높이여서 원한다면 언제든 올라설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평소라면 이 정도 높이만으로도 사람들이 잘 올라갈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만, 공연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잘 볼 수 있는 높은 장소가 있다면 올라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들게 된다. 한두 명이 먼저 올라가서 문제없이 공연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면, 그 뒤로는 군중심리가 작용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된다. “나라도 회사 앞에서 공연하면 어디라도 올라가서 구경하고 싶었을 것”(@LG_g****)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이유다.
더욱이 한국인들은 인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하철 환풍구 위를 통행해 온 경험이 지배적이다. 지하철 환풍구는 안전 하중을 계산하기 때문에, 건물 주차장 배기구보다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경험적으로 큰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면 경계심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사고 현장에는 제지하는 안전요원이 아무도 없었지만, 설사 안전요원이 존재했더라도 사람들이 올라섰을 가능성이 큰 것도 이같은 경험적 판단으로 위험성 여부를 재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안전요원이 내려오라고 해도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ddae****, 네이트)는 비판도 마찬가지 맥락에서다.


반면 ‘건물 배기구로 쓰이는 환풍구는 지하철 환풍구와 달라 붕괴 위험이 크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면, 사람들은 올라가기 좋게 되어 있어도 올라서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에게 구체적인 피해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그 행위를 굳이 선택하지 않는다. 벤치에 ‘페인트 주의’라고 쓰여 있는 것이 ‘앉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는 것보다 효과가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공공디자인 측면에선 아직 어떤 사물에 대한 경험적 인식이 널리 퍼지지 않은 상태라면, 첫눈에 봐도 올라갈 마음이 들만한 ‘행동유도성’ 단서를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비슷한 구조물에 문제없이 올라 본 경험이 있을수록, 디자인 면에서 차이는 더욱 선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올라갈 수 없는 5m의 높이의 환풍구나, 구부러진 형태의 환풍구, 아예 올라갈 수 없는 유리벽으로 된 외국의 환풍구 사례 등이 주목받고 있다. 20일 조원철 연세대 교수는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전화 인터뷰에서 “아예 5m로 높이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번 사고에선 건물주의 책임만을 따지기도 어렵다. 상식적으로 1.2~1.5m 높이의 환풍구 위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올라가게 될 것을 가정한 설계란, 이번 사고 이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공연 주최 쪽에서 무대 앞이 아닌 뒤에 환풍구가 위치하게끔 무대를 배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주최 쪽도 환풍구 위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몰릴 것을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소 격한 누리꾼들의 반응에는 해당 행사 실무 담당자인 오아무개(37)씨가 SNS에 마지막 글을 남긴 채 행사 주최의 책임을 혼자 지고 목숨을 끊은 데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도 존재한다.

환풍구에는 사람이 올라서도 되는가? 올라설 수 있다면, 왜 안전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올라설 수 없다면, 왜 아무도 올라가지 못하도록 그 위험성을 널리 알리지 않았을까? 참사 다음에 우선 뒤따라야할 질문은 이러한 구조에 대한 의문과 사회적 공론화 아닐까. 하지만 ‘합리적 개인의 판단’만이 생명을 구하는 사회, 스스로 안전을 알아서 찾아야 하는 사회는 사회의 역할보다 개인에게 지워진 ‘자기방어의 책임’만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사회보단 조금 합리성이 미숙한 개인이라도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가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정유경 기자>

 

남북, 판문점서 군사실무회담

● Hot 뉴스 2014. 10. 17. 20:01 Posted by SisaHan

비공개로… 김정은은 40일만에 지팡이 짚고 등장

남북이 15일 판문점에서 군사실무회담을 비공개로 개최했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이날 “남북이 오늘 오전 판문점에서 남북 군사실무회담을 개최하고 있다”면서 “상대쪽(북한)에서 공개를 원치않기 때문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도 “오늘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남북 실무회담이 열린다고 한다”며 “NLL(북방한계선), 전단살포 등의 의제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이날 판문점에서 남북 접촉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외에는 회담 성격과 일정 등에 대해 일절 밝히지 않았다.
 
남북은 지난 7일 서해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 우리 측 함정 간의 사격전이 발생한 직후 북측이 보내온 전화통지문을 계기로 회담을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에서는 NLL 일대에서 군사적 긴장완화와 대북전단 살포 문제 등이 우선적으로 협의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난 10일 경기도 연천지역에서 우리 측 민간단체가 날린 대북 전단이 담긴 대형 풍선을 향해 고사총을 수백발을 발사했다.
남북군사회담은 2011년 2월 실무회담 개최 이후 3년 8개월만에 열린 것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양측이 조심스럽게 만나는 것을 준비해 왔다”면서 “모두 부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한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모습을 감춘 지 40일만에 공개 석상에 나타났다. 왼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을 보여, 다리를 치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쪽 관영 매체인 <노동신문>은 14일 김 제1비서가 최근 평양에 새로 준공한 위성과학자주택지구를 시찰하는 기사와 사진을 1, 2, 3면에 보도했다. 사진을 찍은 시점은 분명치 않지만, 당 창건 69돌 기념일이었던 이달 10일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 제1비서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달 3일 모란봉악단의 신작 음악회 관람 이후 40일 만이다. 
김 제1비서가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어 다리 치료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부당국은 여전히 통풍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한 소식통은 “김정은 일가는 심근경색 가족력이 있는데, 만약 통풍이라면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최현준 기자 >


[한마당] 공감이 사람을 살린다

● 칼럼 2014. 10. 14. 10:26 Posted by SisaHan
수류탄 파편처럼 글자 하나하나가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말들이 있다. 얼마 전 안산 시내에서 그런 글을 봤다. 
아이의 엄마 아빠가 실명으로 가로등 기둥에 매단 작은 현수막이었다. ‘지겹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자식이 어떻게 지겨울 수 있습니까?’ 이제 막 글을 배우는 사람처럼 한자 한자 읽었다.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엄마들이 하는 얘기의 시작은 우리 아이가 마지막에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다. 한시도 그 생각이 나지 않는 적 없다며 눈물이 차오른다. 
봄소풍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오기로 한 날은 4월18일이었다. 아직도 엄마들 마음속에선 그날이 되면 아이들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4월16일이 지나가지 않는다. 4월18일이 돼야 아이들이 돌아오는데 16일에서 단 하루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부모들이 100번째의 ‘4월16일’, 175번째의 ‘4월16일’이라고 날짜를 세는 이유는 그래서다. 아이가 사라진 날에서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만하나. 그러므로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세월호 지겹다’는 말은 이미 제대로 된 말이 아니다.
아이의 마지막 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은 정황 때문에 미칠 듯 괴로워하는 부모님에게 이웃의 치유자가 울면서 말했다. ‘그 고통의 순간이 짧아지길 지금 기도해 주세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관계라서 반드시 짧아질 거예요. 엄마 아빠가 한 기도니까요.’ 공감하듯 부모님도 함께 울었다고 했다. 
지나간 시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없다. 현실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아이의 마지막 고통과 씨름 중인 부모 자식의 관계에선 예외다. 제대로 된 특별법이 제정돼 진상이 규명된다고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모들이 거기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는 것은 그래야 비로소 아이와 이별할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까지 조금만 공감해 주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세계적 공익재단의 창시자가 마지막으로 구상하는 사업은 아이들에게 공감을 체득하게 하는 ‘공감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공감은 모든 소통의 시작과 끝이다. 공감이 부재한 공동체는 사막처럼 황폐화된다. 공감은 정서적 인정이다. ‘네가 맞다고 치자’ 유의 지적인 인정과는 다르다. 상처든 의견이든 마음이든 정서적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람 마음을 여는 유일한 통로고 그 자체로 강력한 치유적 힘을 가지고 있어서 공감만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책을 스스로 내놓는다.
세월호 국면에서 막말과 폭식으로 축약되는 공감의 부재는 끔찍하다. 공감의 신경세포가 따로 존재한다면 그게 다 끊어진 듯 잔인하고 황량하다. 
무인도에 표류한 집단의 생존율을 오래 연구한 결과, 건장한 남자들끼리의 집단보다 아기와 노인, 여자가 섞여 있는 집단의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며 ‘여기서 저 아이의 삶을 마감하게 할 수는 없다’ 다짐하며 힘을 내고, 노인과 일부 여성은 아기를 돌보며, 그들은 다시 나머지 집단이 돌보는 방식으로 생존한다는 것이다. 힘만으로 위기에서 탈출할 수는 없다. 공감의 선순환만이 사람을 살린다.
 
투병 중인 가족을 오래 간병하다 보면 지칠 수도 있다. 그게 사람이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지겹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의 고통과 공포에 공감할 수 있어서다. 다시 다독이고 보살피게 된다. 그게 사람이다.
내 자식이, 내 동생이, 내 조카가, 내 선생님이 차가운 물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고 한번만 생각해 봐 달라. 그게 공감이다. 그러면 지겨울 수가 없다. 절대로.
< 이명수 심리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