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14년 후에

● 칼럼 2014. 1. 30. 16:46 Posted by SisaHan
마쉬멜로 실험이란 것이 있다. 마쉬멜로는 서양 아이들이 캠핑을 가서 모닥불에 구워 먹기를 좋아하는 것인데 스탠포드 대학의 월터 미셀이란 학자가 마쉬멜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지금 먹어도 좋으나 15분만 참으면 하나를 더 줄게.”하고 실험을 했다. 15년이 지난 뒤 그 아이들을 조사한 결과 15분이 흐른 뒤 마쉬멜로를 하나 더 얻은 아이들의 성적이 800점 만점에 평균 125점 이상 더 높았다는 것이다.
2014년을 맞이하면서 나는 공교롭게도 14년이란 숫자가 마음에 들었다. 몇 년 전부터 수요일 저녁에 고린도 후서를 강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12장으로 들어가는 날이 바로 14년도에 처음 맞는 수요일이었다. 그런데 이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셋째 하늘(3 층천)에 다녀온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그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고 그 체험도 14년이 지난 뒤 밝히고 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이 체험을 말할 때는 이유가 있었다.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 같은 교회들이 그가 예수님에게서 직접 불림을 받지 않았다며 사도임을 거부할 때 자신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불림을 받은 자이고 자신 역시 다른 사도와 비교할 때 결코 모자람이 없는 자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니 곧 그가 당한 고난과 자신에게 주신 영적 체험이 남달랐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신중했다. 첫째는 자신이 가 본 천국에 대해 결코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러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의 신앙적인 지도를 하는 입장에서 그 내용이 필요했다면 능히 내가 본 천국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천국은 오직 우리의 소망으로 본향을 그리는 신앙의 길에 유익한 것이지 결코 염세 사상과 함께 천국만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됨을 보인다.
 
둘째 그는 자신이 본 천국에 대해 일절 언급을 않고 있다가 14년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만일 그런 체험을 가졌다면 입이 간지럽고 자랑스러워서 몇 번이고 간증 집회도 가졌지 않았겠는가? 현대에도 그런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불문에 붙이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는 함부로 이야기하고 떠벌리며 자신의 자랑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바울 사도의 그 신중한 자세를, 14년 뒤에 그 귀한 체험을 나타냈음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가 14년이 지난 뒤 밝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바울 자신에 대한 위로로 주심을 말하여 성도들에게 고난 뒤에 나타나는 위로와 영광을 말하고자 함이나 그런 언급마저도 부득이하여 할 수밖에 없음을 소개할 뿐이지 결코 자랑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귀한 간증 체험이지만 14년 뒤에 언급한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신앙생활하는 동안 개인적인 좋은 체험이나 교회를 향한 훌륭한 봉사와 섬김, 대단한 수고나 헌신들이 있다 해도 지금 당장 자랑으로 말하지 말고 14년이 지난 뒤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혹 14년 뒤에 말할 수 없어도 주님을 향한 그 섬김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또한 무슨 원망이나 불평을 늘어놓고 싶다 해도 14년쯤 기다리면 어떨까? 
당장에 터뜨리고 싶은 것이 있다 해도 마쉬멜로처럼 기다려 보자. 만사를 14년 뒤에 하면 얼마나 좋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릴 때 추억이 아련하게 밀려오기 때문이다. 
설날이 다가오면 온 동네가 왠지 들뜨고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어른들이 읍내에 장을 보러 가 평소 구경하기 힘든 조기와 갈치같은 생선꾸러미를 하나 둘씩 싸들고 온다. 없는 살림에 양말과 신발, 옷가지 등 설빔도 장만해오면 아이들은 벌써 설맞이 세배준비로 설렌다. 동네 이장 집 앞에는 틈실한 돼지 두 마리가 네 다리를 묶인 채 ‘종말’을 예감한 듯 꿀~꿀~ 신음을 내며 나뒹굴고 있다. 마침내 건장한 일꾼들 몇이 돼지를 붙잡고 예리하게 숫돌에 간 칼로 목에 구멍을 내면 그야말로 멱따는 소리와 함께 꽐꽐 쏟아지는 선지를 벌꺽벌꺽 들이마시는 징그러운 광경…. 어른들 다리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흥미 최고조로 쳐다보던 아이들은 그만 놀란 토끼눈이 되고 만다.
 
뭉턱뭉턱 인심좋게 잘라 낸 돼지고기는 집집마다 나뉘어 설날 아침 든든하게 밥상을 장식한다. 왁자지껄 이웃 아낙들이 함께 모여 지지고 볶고 메친, 전이며 한과와 떡이 집집마다 그득하니 일년 중 제일 먹거리가 풍성해질 때다. 때때옷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차려입은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이집 저집 어르신들에게 훈계와 함께 받은 세배 돈을 꼬낏꼬깃 호주머니에 모아 넣고는 “내가 더 많다“ ”아니야 내가 더~” 서로 질세라 자랑하며 기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농악단의 꽹과리 소리와 제기차기 널뛰기로 소란스런 동네 앞마당, 골목을 떠도는 구수한 음식 냄새, 웃음과 정이 오가는 사람 냄새…, 하루 해가 어떻게 지는지 몰랐던 우리네 시골의 설날-. 
구정에 즈음해 오랜만에 고국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잠시 찾아 뵈려니, 그 옛날 설맞이 세시풍속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진다.
 
세상이 너무 세련됐고 모든 게 기계화, 디지털화한 지금도 그렇게 시골스러우면서 인정 넘치고 푸짐한 고향 설날의 풍정을 찾아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깊은 산골마을에도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버려 그 토속적인 설 풍속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아마 부모찾아 설 쇠러 오는 자식들을 손꼽아 기다리는 촌로들의 체념과 한적함이 두드러지지 않은지, 불효의 큰 죄책감 속에 얼추 짐작해 볼 뿐이다. 
우리 전통 세시풍속에는 공동체의 유대와 인정이 넘쳐났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명절을 즐기며 화합을 다지고 서로 북돋우며 내일을 위한 힘을 결집하기도 했다.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미풍양속이란 거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명절은 온통 교통체증으로 도로에 정력을 쏟고, 부모와 고향을 찾아 용돈드리고 폼내고 가면 그만 인 세상이 됐다는 한탄도 들린다. 그러니 시골민속에서 보고 익히는 정감과 상생부조(相生扶助)의 전통과 미덕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상이 갈수록 갈라지고 삭막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민사회에서 전통명절은 더욱 멀어져간다. 양로원과 일부 교회에서 어른들에게 세배하고 선물드리는 정도로, 또 향우회원들이 한데 모여 저녁 한끼 먹고 즐기는 것으로 설의 명맥이 유지되는 듯 싶다. 
8년 전인 2006년 1월5일에 나온 시사 한겨레 창간호 1면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가족의 다복한 모습이 독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지난 2008년 작고한 토론토의 고 이천욱 옹 집안 식구들이 새해를 맞아 3대가 오붓하게 한자리에 어울린 아름답고 정겨운 사진이었다. 이들 가족은 새해 첫날 아침 세 자녀의 손자들까지 온 식구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세배를 드리고 훈훈한 가족애를 나눴다. 할아버지가 세 아들과 손자들에게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덕담을 건네자 자녀들은 내외의 건강 장수를 기원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고, 식구들은 며느리들이 장만한 음식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듯 했다. 신년 설이긴 했지만, 이민의 삶에서 흔치않은 우리 전통 세시(歲時)의 설을 쇠는(過歲)모습이어서 좋았던 기억이 새롭다.
 
한인 경제마저 침체 일로여서 자꾸만 위축되어 가는 동포사회와 가정마다에, 우리 고유의 방식과 풍습을 재현하고 구수한 인정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모으는 설맞이·추석맞이 행사가 되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디아스포라의 삶이기에 더더욱 집집마다, 또 우리 한인 커뮤니티에서 온가족이 모여 사랑을 나누고 함께 어울려 서로서로 용기를 북돋우는, 그렇게 피부에 와닿는 넉넉한 화합의 민족 전통으로 말이다.
 
< 김종천 발행인 겸 편집인 >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KB국민·롯데·NH농협카드 등 개인정보를 유출한 카드사들의 조회시스템을 통해 개인정보 유출 여부를 확인한 고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뿐 아니라 직장 정보와 연소득까지 사실상 모든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당 카드사들은 말뿐인 ‘고객피해 전액 보상’을 내세우고, 정작 책임을 져야 할 금융당국은 되레 카드사들만 호통치고 있다. 2차 피해 방지와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우선 해당 금융회사와 금융당국의 책임부터 확실하게 물어야 한다.
 
금융회사들의 개인정보 유출이 반복되는 것은 개인정보에 대한 금융회사와 금융당국의 안이한 인식 탓이 크다. 금융회사에 집중된 개인정보는 단순한 개인 신상 정보뿐 아니라 경제활동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이런 정보들이 유출돼 악용되면 개인의 경제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해당 금융회사 대표들은 국민 앞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시늉만 할 뿐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다. 당장 이번에 개인정보를 유출한 3개 카드사 대표들부터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
금융당국의 자세는 더 문제다. 평소에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고, 이런 사태가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를 면밀히 점검해 선제적으로 필요한 제도 개선을 해야 함에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융위원회의 보안 전문 공무원이 겨우 사무관 1명밖에 없다는 것은 금융당국이 보안 문제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금융당국 수장들도 대형 사고가 나면 책임지기는커녕 해당 금융사들만 닦달하며 면피하기 바쁘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언제 또다시 대규모 정보유출 사고가 반복될지 모른다. 금융당국부터 응분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와는 별개로 고객들의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검찰은 ‘유출된 개인정보가 외부로 판매·유통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추정된다’고 했지만 이를 100% 믿기는 어렵다. 이미 개인정보로 타인이 신분증을 위조해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등 예상할 수 있는 피해 유형은 수도 없이 많다. 개인정보가 유출된 카드를 전면 교체해 주는 등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금융회사들이 필요 이상의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할 수 없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