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나의 건강 비법

● 교회소식 2013. 8. 26. 13:05 Posted by SisaHan
칼럼의 제목을 쓰면서 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왜 이런 제목을 정했는지 스스로 의아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건강의 비결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건강의 비법도 없고, 저도 혈압이 높은 편이고, 유별나게 운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건강을 자신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스스로를 봐도 저는 비행기를 타고 날짜 변경선을 수없이 지나다녀도 시차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일 새벽에 도착해서 저녁까지 설교해도 특별한 피로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아니고, 새벽기도 후에 쉬는 것도 아니고, 낮잠도 거의 자지 않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한가지 생각은 일을 시키는 소를 먹이고 돌보는 책임이 주인에게 있듯이 주님이 저를 책임져 주신다는 단순한 믿음 외에는 가진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저는 신유를 믿습니다.
 
(출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라….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건강한 삶을 살려면 항상 기쁘게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적인 기쁨을 기도로 유지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보다 좋은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살진 소를 먹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복수심과 미움과 악의를 버리고 축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가능하면 매일 운동하고 성경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 입니다. 평소 생활에 사용하는 말의 빈도가 곧 지금의 자기 상태입니다. 힘들다, 죽겠다, 아프다 라는 말 대신에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또 그것이 마땅합니다. 열심히 일한 후에 잘 쉬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노동 없는 안식은 고통입니다.
보람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개인 전도는 최고의 건강을 선물로 줍니다.
 
선행, 구제, 봉사 활동, 건강한 취미 생활도 개발해야 합니다. 지난 20여 년간 저는 나름대로 운동을 했고, 지난 6년간 flax seed 와 hemp seed를 꾸준히 섭취(면역력 강화)했고, 잠자는 시간은 짧지만 깊이 자는 습관을 기른 것이 시차를 극복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건강의 비결은 저를 위해 중보 기도해 주시는 성도님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일 뿐 입니다.
그리고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건강법 가운데 하나는 모세 운동법입니다. 모세는 평생 걷기와 등산(4번이나 시내산 2285m 등반)을 했고 출애굽하면서 광야를 행군했습니다. 그래서 하체가 단단해졌을 것 입니다. 거기다가 레위기 건강법을 지켰으니 120세까지 무병했습니다. 
예수님도 전도하시면서 많이 걸으신 것이 기본 건강법이었습니다. 새벽 기도 후 함께 걸으면 좋겠습니다.

< 임현수 목사 - 큰빛교회 담임목사, 한인교회협의회장 >


[1500자 칼럼] 34년만의 공개

● 칼럼 2013. 8. 26. 12:20 Posted by SisaHan
‘一心(일심)’이 처음 내 마음을 끌었던 건 대략 여섯 살쯤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우리 집은 제법 큰 ㄷ자 형으로, 대문을 들어서면 세 들어 살던 마부 아저씨의 마구간이 있었고, 마당 가운데는 큰 우물이 있었다. 
여름날 저녁이면 마부 아저씨는 웃통을 벗고 말없이 그러나 힘차게 몸을 씻었다. 그때마다 울퉁불퉁 어깨 위에서 움직이던 一心이란 푸른 표식이 참 묘했다.

입대 후 1년이 조금 지난 연말에 카드를 1장 받았다. 엽서 크기의 화포(畵布)에 담긴 묵화와 一心이란 단어. 화가인 자형의 그림 뒷면엔 시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담은 작은 누나의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원입대를 했던 그 시절, 여러 구차한 사정들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 속의 一心을 꺼내 보았다. 그래 할 수 있다면 이걸 삶의 방향으로 삼자. 1979년이 저물어 가던 겨울, 혼자만의 어설픈 다짐을 새겨 보았다.

“아빠, 우리 집 가훈이 뭐야?”. 
“一心”.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의 학교 과제물 덕분에 엉겁결에 가훈이 생긴 셈이었지만, 단번에 그렇듯 고전적인 가훈을 일러줄 수 있는 가장이 된 자신이 마냥 대견했다.
“아니, 그게 무슨 조폭 문신 같은 소리예요. 좀 뼈대 있는 집안처럼 일러주지 못하고!”.
이후로 가훈 얘기만 꺼내면 여지없이 아내의 핀잔을 들어야 했지만, 
어쨌거나 그 엽서 그림이 까만 테두리 액자에 담겨 슬그머니 가훈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그 날이 시작이었다.

‘지어진 대로/ 온 힘을 다해 몸짓하는/ 바람 들녘의 야생화.// 한 떨기 엉김 속에 이는/ 참, 아름다운 거/ 참, 자유로운 거.// 평생을 바라며/ 매일을 새기는/ 한마음 한목숨.’
가족을 한국에 두고 먼저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를 때 그 까만 액자도 함께 품었다. 지금은 친척처럼 지내는 매카트니 아저씨 댁에서 몇 달을 머물던 어느 날, 엽서 그림 뒤에 눌러 쓴 다짐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그 자녀나 제매에게 주는 교훈’, 내가 사용하는 민중서림 국어사전에 나오는 정의다. 인터넷 다음사전을 열어보니 ‘법도 있는 집안에는 자손 대대로 물리는 가훈이 있다’는 예문도 보인다. 
그랬다. 이게 우리 가훈이요 자신 있게 내세우지 못했던 것은 아내의 핀잔 탓이 아니었다. 후대 교훈은커녕 서툰 삶의 몽상이 될 공산이 크니, 사전적 정의에도 안 맞고 예문에 비춰 보긴 더욱 어림없는 노릇인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느닷없이 아내와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34년 된 엽서 그림의 뒤를 내보여 주며 장광설을 늘어놓게 된 까닭은, 며칠 전 만났던 닥터 로이트만의 미소 띤 얘기에 힘입어서다.
“오래 잘 참았다. 수고했다. 6년이 넘도록 아무런 이상 없이 모든 게 좋으니 더는 올 필요가 없다.”
캔서 서바이벌을 선언하는 의사의 음성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이제 살아라, 마음 품은 대로 힘껏 살아서, 사랑할 것들을 더욱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 같아서.

34년만의 공개와 함께 시작된 우리 집 가훈의 전설 따라 삼천리. 얘길 듣던 아내의 눈에 살짝 물기가 어리고, 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하지만 비로소 가훈이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김준태 - 시인. ‘시.6.토론토’동인 / ‘시와 시론’으로 등단 >
펜클럽 회원,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칼럼] 르완다에서 생각하는 남북관계

● 칼럼 2013. 8. 26. 12:17 Posted by SisaHan
외교부 프로그램으로 르완다에 다녀왔다. 1994년의 잔혹한 제노사이드를 극복하고 최근엔 높은 경제성장률과 1등급의 원조 효과성을 자랑하며 ‘아프리카의 스위스’를 목표로 삼아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수도 키갈리는 깨끗하고 질서정연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르완다는 개발독재하의 나라이기도 하다. 대통령 선거 득표율이 95%인 나라, 재임에 성공한 폴 카가메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위해 2017년 임기 만료를 앞두고 벌써부터 삼선개헌이 거론되는 나라다. 헬멧 착용 지시 한마디에 모든 오토바이 운전자가 예외 없이 헬멧을 쓰는 나라다. 공공기관과 민간 건물에도 어김없이 대통령 공식 사진이 걸려 있다. 야당의 존재와 활동이 사실상 제한되어 있기도 하다. 신속한 경제발전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뒤로 미룬 전형적인 개발독재 상황은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르완다에서 박정희 시대를 연상하는 한편으로 필자는 북한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르완다가 우리와 연관된 코드는 두 가지다. 첫째는 대거 몰려드는 한국의 봉사단원들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이 100명 가까이 활동하고 있고, 특히 경상북도가 지원하는 새마을 봉사단원들도 지방에 내려가 지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찾은 교외 무심바 마을에도 새마을회관과 학교를 세워주고 젊은 새마을 봉사단원들이 최장 2년씩 같이 살면서 주민들에게 위생교육과 벼농사 및 유치원 운영 등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역만리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한국식 새마을 운동이 전수되고 우리 정부가 적잖은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는 것을 보면서 남북관계 경색으로 대북 지원과 협력이 중단된 한반도 현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오버랩되었다. 머나먼 아프리카 땅까지 지원과 협력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우리가 왜 가장 가까운 북에 대해서는 아직도 퍼주기 논란과 감정싸움과 상호 비난 속에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불가능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가메 대통령이 독재를 한다고 해서, 르완다 정부가 민주주의를 억압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우리는 르완다에 지원을 중단하지 않는다.
 
르완다 시골에까지 우리의 지원과 협력이 가능함을 보면서 대북 지원도 실패국가에 대한 국제 지원과 공적개발원조 방식으로 쿨하게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피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에 대해서는 유독 분단체제와 남북관계 그리고 개혁개방 요구와 버릇 고치기 등을 내세운 채 인도적 지원과 개발협력마저 시작하지 못하는 본말전도의 현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르완다 시골에도 마을회관과 유치원을 지어주고 벼농사를 도와주는데 같은 동포 북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갖가지 이유를 들어 지원을 막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르완다에서 우리가 꼭 새겨야 할 둘째 코드는 제노사이드의 역사적 상처다. 20년 전 100일 동안 100만명이 학살당하는 상상 못 할 끔찍한 일을 겪은 르완다다. 소수 부유한 지배 종족과 다수 가난한 피지배 종족 사이의 오랜 적대와 갈등은 순간의 자극에 의해서 종족 학살의 만행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국가통합화해위원회 활동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하나의 르완다인이라는 단일의식을 심어주고 있지만 민심의 밑바닥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여전히 소수 종족이 정치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또다시 종족 간 피를 말리는 싸움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의 역사적 상처를 여전히 안고 있는 우리가 통일의 과정에서 한쪽이 다른 쪽을 무참히 탄압하고 처벌하고 살상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아직 내게는 없다. 키갈리 거리에서 대화와 관용이 불가능한 우리네 남남갈등의 폭력적 심화 과정을 떠올리면서 향후 우리의 통일 과정이 비평화적 유혈 사태로 변질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 단지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 김근식 - 경남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