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우울한 당신에게

● 칼럼 2013. 7. 1. 13:15 Posted by SisaHan
현대인은 옛 사람들에 비하여 물질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산다. 여름이 되면 오늘날 가난한 서민들도 손쉽게 냉장고에서 얼려 즐길 수 있는 얼음도 천오백년 전 신라시대에는 임금을 비롯한 최고권력층만이 석빙고에 저장하였던 그것을 맛 볼 수 있었던 특별한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즈음 우리가 누리는 온갖 가전제품들, 기성복 등 온갖 재화들,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다채로운 음식들은 18세기 세계를 거의 다 식민지로 집어 삼킨 영국의 여왕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스러운 것들 일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사회의 가장 하층계급 이었던 농노들 조차 중노동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삶의 여유를 즐기게 된 오늘날,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정신질환은 더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의료기술의 발달로 그 동안 진단치 못하였던 질병들을 이제야 제대로 진단하게 되어 그렇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물질적 풍요와 넘치는 시간적 여유가 오히려 우리에게 독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요즈음 한국에서 매일 신문을 도배하는 자살에 관한 뉴스를 읽다보면 유행처럼 번져가는 생명경시 현상, 반복되는 자살의 뉴스에 면역이 되어 이러한 심각한 현상에조차 무관심해져 가는 사회 풍조가 느껴져 더욱 안타깝고 안스럽다. 정신과 통계에 의하면 우울증의 평생 유발율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한번이라도 우울증에 걸릴 확율)은 약 20% 라고 한다. 즉 다섯 사람 중 한사람이 우울증에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스트레스가 없는, 완전히 행복한 삶이란 지리하고 무기력한 삶이 되기 쉽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사람들에게 긴장과 자극을 주어 그것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동기부여가 되므로 오히려 정신건강에 유익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약간의 스트레스도 못견뎌하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쉽게 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 까닭은 이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적은 스트레스에도 뇌에서 감정을 제어하는데 관여하는 신경전달 물질들인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 -아드레날린 등의 균형이 깨져 우울증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프로작, 졸로후트, 쎌렉사 등의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 등의 약물로 치료하면 70% 이상이 2개월 이내에 완치된다. (재발 방지를 위하여 최소한 1년 이상 이들 약물들을 복용하여야 한다) . 즉 우울증은 불치의 병이 아니며 정확한 진단과 올바른 치료로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한 병이다. 나는 주위에서 캐나다로 이민 온 한인들 중에도 사회적, 경제적, 언어적인 면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 또는 가족들이 자신이 무기력하거나 의지가 약하고 성격이 괴퍅하여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착각하여 치료 받기를 주저하는데 있다. 우울증은 당뇨병이나 다른 질환들과 마찬 가지로 환자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걸리게되는 병으로 치료시기를 놓치면 자기 자신도 통제가 불가능하고 병이 더 깊어져 자살하게 되는 무서운 병이다. 한 예로 10년전 이곳 토론토에서 젊은 정신과 여의사가 산후 우울증에 걸려 아기를 안고 달리는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우울증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이는 정신과 의사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아 자신의 자살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죽고만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가정의를 찾아가도 우울증의 진단을 받지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까닭은 이들이 호소하는 주 증상이 “슬프다, 자주 운다, 우울한 느낌이나 자살의 충동이 든다” 가 아니라 “입맛이 없다, 체중이 빠졌다, 정력이 떨어졌다, 기운이 없다, 온몸이 나른하고 아프다, 늘 피곤하다, 잠이 잘 안 온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다, 평상시에 즐기던 일들이 다 귀찮다,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다, 죄책감이 든다, 주의가 산만하고 학교성적이 떨어진다 “등의 우리들이 흔히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는 주증상들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청소년들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생기면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 자가치료를 한다고 마리화나를 피거나 마약에 손을 댈 수도 있으므로 올바른 상담과 치료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주위에서 앞서 말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올바른 일상을 되찾아주고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빨리 가정의나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하고 치료하도록 권고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 김영제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한마당] 이민자의 양심은 두개?

● 칼럼 2013. 7. 1. 13:12 Posted by SisaHan
초기 이민자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은 언어장벽과 함께 문화적인 이질감이다. 비싼 세금에 꼬박꼬박 팁을 더해 음식값의 4분의 1이 넘는 부담이라든가, 생활화 된 더치 페이, 어린 자식과도 분명히 선을 긋는 재산문제. 자기들이 알아서 해치우는 결혼식, 너무 편하고 쉽게 치르는 장례, 거기에 선거문화와 내각제 정치체제의 유연성 등등, 과거 살아 온 고향 나라 관행이나 습속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생활문화의 차이가 한 둘이 아니다.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적응되어 있고,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어색함이 편함으로 바뀐 것들이 많아진다. 수십년 만에 모국을 다녀 온 이들의 입에서는 이제 여기가 더 편하고 살기좋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오는 걸 본다. 오랜만에 가보니 어색하더라는 것부터, 모든 게 번잡하고 정신이 없더라, 너무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더라, 왜 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며 사는지 모르겠다는 탄식까지… 상황판단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무리 세월이 가도 변치않는 고정관념이 있으니, 바로 모국 정치에 대한 감정적 판단이다.
 

최근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사건을 ‘국기문란, 민주주의 파괴범죄’로 규정한 시민단체와 대학생, 종교인들의 시위가 번지면서 미국의 한인동포들이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다. ‘워터게이트’의 본고장에 사는 까닭에 ‘국정원 게이트’를 보는 시각이 남다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선 먼 산의 불처럼, “또 웬 시비냐”는 비뚤어진 애국심의 발로들도 접한다. 국가기관이 위법적인 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뜻인지, 원래 정보기관이 그런 짓을 해오지 않았느냐는 무뎌진 인식 때문인지, 아니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 듣기 싫다는 것인지, 도통 납득이 안되는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호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워터게이트 보다 한 술 더 떠 엄연히 국가기관이 해선 안되는 민의 왜곡과 선거에 영향을 줄 불법 범죄혐의를 검찰이 밝혀냈는데도 말이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유명한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에는 주인공 걸리버 보다 작거나 크고, 사람을 말이 지배하는 등 상상 이상의 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인들의 나라에 간 걸리버는 고국 영국에서 일어나는 집회라든가 변호사들, 전쟁 등에 대해 설명했다가 왕에게서 “그대의 민족은 세상 표면에 기어다니게 된 생물들 가운데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라는 비참한 평가를 듣는다. 하늘을 나는 섬나라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학설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그 일에 중독되게 만드는 허풍나라를 경험한다. 또 마지막엔 사람들을 마치 종처럼 부리고 사는 말들의 세계를 간다. 그 곳에서 인간은 냄새나고 거칠며 포악한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들에 증오감과 자책감을 가졌던 걸리버는 고국에 돌아와선 가족과도 식사와 대화조차 못하는 병증으로 고통을 겪는다. 이질감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허상과 실상 사이의 동질감을 비꼬는 작가의 신랄한 감정 표현일 것이다. 물론 풍자 소설일 뿐이며 경우는 다르지만, 이민자들 처지에서 고국과 이민지에서 접하는, 다른 상황과 관습 속의 이성적인 가치평가, 더 넓게는 사회정의 판단 등의 일관성 측면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 없지않다.
 
오래 산 이민자들은 거의 모국과 이민 삶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 비단 혼례나 장례문화의 그 것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여러 문제들의 좋고 나쁨, 정의와 불의, 선함과 악함의 정도와 수준에 대한 판단들은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실제에 있어 우리들 주변을 보면 이중적인 이질감의 세계에 살고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걸리버와 같은 고뇌조차도 없이-. 쉽게 말하면 이민 땅에서의 정의와 모국에 대한 정의 개념, 그 잣대와 평가 기준이 너무 다름에 놀라는 것이다. 일례로 사상적인 트라우마나, 지역·혈연에 대한 유대 혹은 소원함, 독재에 대한 무딘 감정 등의 불변 혹은 고착개념이 바로 그 것이다. 
이민자는 정의가 두 종류고 양심도 둘일까? 마치 걸리버가 여행한 거인국에 우리가 살고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김종천 편집인 >


지금의 국가정보원은 한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요, 흉기를 들고 설치는 위험한 망나니와 같다. 국민 통제라는 마구간을 뛰쳐나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풀밭을 마구 짓밟았다. 국가 기밀사항을 꺼내들고 칼춤을 추어 나라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런 국정원을 과연 이대로 두어도 좋을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에 묻고 싶다.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자기네 대통령이 참석한 정상회담에서 은밀히 오간 대화를 ‘2급 비밀’로 분류한다는 말인가. 국제 정보기관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될 이야기요, 우리 정보기관 역사에 두고두고 오점으로 기록될 일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그 비밀분류마저 해제해 ‘일반문서’로 강등시켜 버렸다. 기밀이 무엇이고 정보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인식도 돼 있지 않은 엉터리 조직이다. 이제 국정원은 비밀이고 보안이고 하는 따위의 말을 꺼낼 자격조차 없다.
 
국정원의 판단 능력과 정신 상태는 참으로 위험한 수준이다. 국정원은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이유에 대해 “현시점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며 “회담 내용 진위 여부에 대한 국론분열이 심화하고 국가안보에 악영향이 초래됨을 우려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대화록 공개 이후 벌어진 분열과 갈등 상황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다.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어떤 정치·사회적 파장을 불러올지 예견하지 못했다면 국정원의 판단 능력에 심각한 이상이 있는 것이요, 이런 국론분열 현상을 예상하고서도 공개를 강행했다면 천인공노할 행동이다.
국가안보 역시 마찬가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 내용이 마구잡이로 유출된 것에 북한이 기뻐서 손뼉을 칠 리도 만무하고, 이번 사건이 남북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국익이며 안보 등에 대해 거꾸로 말한다. 이런 국정원에 남북관계며 안보를 맡길 수는 없다.
국정원한테 결국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조직의 이해관계요 정권의 안위였다. 북한 이슈로 불을 지른 것부터가 조직 보호를 위한 국정원의 자작극이었다. 정상회담 발언록 내용을 비밀리에 흘려놓고 “내용이 공개돼 비밀 가치가 없다”는 따위로 둘러댔다. 심지어 남재준 국정원장은 어제 국회에서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공개했다”는 답변까지 했다. 스스로 불법행위를 저질러놓고 ‘명예’ 운운한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국가 이익이나 법질서보다 국정원의 명예를 앞세우는 발상도 놀라울 뿐이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조직의 탄생 시절부터 디엔에이에 깊이 각인돼 있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이 서둘러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목적도 이른바 ‘반혁명세력’의 저지에 있었다. 잠재해 있던 이 나쁜 본성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완전히 되살아났다. 그리고 ‘남재준 국정원’은 ‘원세훈 국정원’보다 한술 더 뜨고 있다. 국가 정보기관은 결국 대통령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부리느냐에 달려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가진 철학은 국민의 여망과는 동떨어져 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단호히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정권보위 세력으로서 국정원을 활용하고 나선 형국이다. 이대로 가면 국정원이 얼마나 더 위험한 짓을 저지를지 예측하기 힘들다. 
결국 고삐 풀린 망아지에게 고삐를 단단히 채우는 일은 국민의 몫이 됐다. 이 어려운 일에 대한 국민적 지혜를 짜내는 첫걸음은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다. 야당의 어깨가 막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