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의 김영권(22번) 선수가 1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 전반 43분 상대의 자책골로 연결된 띄워주기를 해낸 뒤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1-0으로 이긴 한국은 4승2무1패 조 선두로 본선 티켓을 눈앞에 뒀다.


[1500자 칼럼] 왜 (Why?)

● 칼럼 2013. 6. 16. 11:21 Posted by SisaHan
얼마 전에 한국신문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어느 전문가란 사람이 교육에 관하여 쓴 글인데,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다시 말해 공부를 잘하려면, 수업시간에 질문을 많이 해야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래야 창조적인 마인드도 생긴다 했던가? 얼핏 읽었을 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어딘가 이상한 내용의 글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어 궁금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질문을 위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고, 옆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서너명의 학생이 질문을 하면 모를까? 대부분의 학생이 질문을 하면.…,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리라 생각하지만, 한국의 교육제도가 나아가서는 사회 자체가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토론문화에 익숙해져 있냐는 점이다. 어떤 상황에서 밑에서 묻고 위에서 대답해주는...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스럽게 말하고 상대방은 그것을 받아들여 주는….
 
내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한 질문은 학문과 예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창조적인 또는 생산적인 활동에도…, 그리고 질문이란 것이 꼭 누구에게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어떤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정답을 말해주어도 이해할 수 없다거나 자신의 생각과 틀리면, ‘왜?’라고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번 선생님이 말하면 그것이 절대적인 정답인양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면, 어떤 질문에도 정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면…, 그런 환경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자랄 수 있을까?

내가 학교 다닐 적은 이제는 옛날 옛 적의 이야기지만, 모든 일에 제대로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는 것을 받아 적기에 바빴고, 빠르게 나가는 진도 때문에, 멍청한 질문을 하는 녀석이 있으면 곱지않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뭐든지 물어 보면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선생님은 준비한 짧고 간단한 정답을 말했고, 그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왜? 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사회나 역사, 문학 같은 인문과목이 한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고,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우리 세대는 같은 개수의 단추가 달린 검은 교복을 입고 앉아 한 개의 정답을 외워야만 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들 이야기 한다. 한 교실에 학생 수만 해도, 70명이나 되던 우리 때보다 반도 안되는 학생들이 자유스런 복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때로는 학원수업 때문에 자고 있다거나…, 이제는 대입을 위해 논술도 공부하고, 그러나 그 준비를 위해 학원도 가고….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왜 공부하는 가에 대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아무리 제도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질문은 궁금한 것을 알고싶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성적을 올리기 위해 던져야 하듯, 공부를 배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고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는 대학 자체도 돈이 안되는 인문 학부를 폐지하기에 바쁘다면, 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공부는 왜 하는가? 요즘 어느 곳을 막론하고 컴퓨터 시대에, 또는 새로운 시대에, 경계선을 허물고 새로 창조해내는 통섭,융합,퓨전이 유행이다. 무엇을 하든 한 분야만, 한 쟝르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이제 낡은 생각이 되었다. 진정한 창조적인 마인드를 가진 새 시대의 일꾼이 되려면 마음의 문을 열고, 경계선을 지우고, 질문다운 질문을 하고 그리고 그 질문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조지 오웰이 1950년대에 쓴 소설 「1984년」의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나라 ‘오세아니아’가 도래한 것인가.
요즘 미국은 ‘빅 브라더’ 논란으로 뜨겁다. 전직 CIA직원이 폭로한 일급기밀 프로젝트 ‘프리즘(PRISM)’이라는 거대한 정보수집 흑막 때문이다. 프리즘은 CIA의 지원을 받은 실리콘 밸리 IT벤처기업이 만든 특수 정보 분석 프로그램으로, 국가안보국(NSA)과 연방수사국(FBI)이 이를 이용해 구글·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애플·야후·유튜브·스카이프·팔톡·에이오엘 등 9개 정보기술 회사의 서버에 직접 접속, 개개인의 파일 전송기록과 오디오, 이메일, 채팅 정보 등을 샅샅이 검색하고 분석하며 사실상 개인의 사생활을 실시간 감시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감시가 대테러 첩보수집을 명분으로 캐나다를 포함해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유럽 각국도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미국에 재발방지를 요구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얼마전 AP통신의 통화기록을 몰래 훑어 본 사실이 폭로돼 고역을 치른 언론자유 침해 논란에 이어 사생활 통제 확증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일이 확산되면서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 DNI가 이 사실을 시인하고 ‘폭로자’를 색출하겠다며 오히려 분노를 표하고 나왔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을 저지른 폭로자는 전직 CIA요원이던 단 29살의 젊은이 에드워드 스노든으로 밝혀졌다, 그는 연봉 20만 달러의 안정된 생활을 마다하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미국 정보기관의 추악한 비밀감청 실태를 폭로했다고 밝혔다. “미국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을 것 같아” 홍콩으로 가서 ‘거사’를 벌였다는 그는 인터넷 환경이 자유롭기로 소문난 아이슬란드로 망명을 희망했다. 하지만 그의 망명이 성사될지는 불투명하다. 미국정부가 거대한 추격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어도 “익명으로 숨을 의도가 전혀 없다. 내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두렵지도 않다.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의연한 표정을 보였다고 언론들이 전한다.
 
미국에서는 요즘 이라크 전장에서 근무하던 브래들리 매닝 일병(25)이 미국의 외교-군사 비밀문서 수십만 건을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넘겨준 ‘반역과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군 안에서 발생하는 ‘피에 굶주린’ 일부 만행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뤄진 미군의 인명 경시 풍조를 세상에 공개하고 싶었다”고 기밀 폭로가 정의감에서 비롯됐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대통령 선거 당시 이른바 ‘댓글 공작’ 등으로 선거에 개입한 국정원의 불법 정치활동 폭로가 있었다. 국정원은 당시 특별 감찰을 통해 외부에 사실을 알린 직원 색출에 나서 징계 처벌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뒤에는 수서경찰서 수사책임자였던 권은희 과장이 경찰수뇌의 수사방해와 부당한 압력에 대해 폭로하는 일도 벌어졌다. 문제는 이들 내부 고발자들이 정의로운 양심가들로 대접받기는 커녕 배신자 취급을 받는 정치·사회풍토와, 정의-불의 나아가 선-악을 모호하게 만드는 인간사회의 극한적 대결구조다.
 
미국의 젊은 양심들인 에드워드 스노든과 브래들리 매닝은 자칫 종신형까지도 살아야 할지 모른다. 삼성의 검은 거래를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여전히 영웅이 아닌 배신자처럼 인식된다. 법률을 위반한 국정원은 정치활동을 반성하기는 커녕 궤변으로 역공에 열을 올린다. 
명백한 불법과 위법을 두고 볼 수 없어 때로는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양심과 선행의 위기-. 정의롭고 용감한 고발이 국가와 회사,조직의 의리를 배반한 것으로 매도되고 지탄의 대상까지 되는 모순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가 무시되고 정의가 불의처럼 오도되는 이 세상은, 아무래도 갈수록 빅 브라더 수중에 장악되어 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