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00만 난민을 받는 나라의 교육

● 칼럼 2016. 1. 22. 17:36 Posted by SisaHan

독일에서 가장 부러운 것을 하나만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시위하는 초등학생’을 꼽겠다. 잘 달리는 메르세데스 벤츠나, 볼 잘 차는 축구대표팀도 부럽긴 하다. 하지만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진 못한다.
유학 시절, “아마존을 살려내라”, “아웅산 수치를 석방하라”고 외쳐대는 초딩들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재작년 베를린에서 그런 초딩 데모대와 마주쳤다. 훔볼트 대학과 브란덴부르크 문 사이 운터덴린덴 거리에서 차선 두 개를 차지하고 이삼백명쯤 되는 초딩들이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고 있었다. 모두 10살 전후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불법적인 인간은 없다”고 적힌 현수막이 나부꼈다. 한창 아프리카 난민의 불법체류 문제로 떠들썩하던 시절이었다. 낮은 구름이 잔뜩 낀 10월의 오후, 자못 심각한 표정의 어린이들이 세상을 향해 ‘정치적’ 의사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작년 시리아 난민 사태가 유럽 대륙을 뒤흔들던 무렵, 100만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 영국에서 수만명 난민의 수용 문제로 여론이 들끓던 시점에 독일에서 100만 난민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지난해 100만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느 나라 국민이 100만 난민을 받겠다는 정부를 용인할 수 있을까? 물론 독일에서도 메르켈의 결정에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페기다 등 극우집단의 선동이 격화되었고, 기사당 등 보수정당의 비판도 들끓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결정이 몰고 오리라던 정치적 후폭풍은 의외로 잔잔했다.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메르켈의 결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메르켈의 결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를 받아들인 독일 국민의 정치의식이다.
이 ‘독일의 기적’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교육과 이를 통해 형성된 높은 정치의식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베를린의 어린 시위대는 ‘100만 난민의 기적’을 낳은 사회적 분위기를 상징한다.


실로 독일의 교육은 나치 시대에 인류사적 죄악을 저지른 독일인을 인도적인 세계시민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 성공의 바탕엔 정치교육이 있다.
독일의 경우 16살(고1)부터 지방의회 선거와 교육감 선거, 18살부터 연방의회 선거에서 투표권을 갖는다. 선거철이면 학교 강당에서 정치 유세가 열리며, 최소 2시간의 선거 유세 참가를 의무로 규정해놓은 학교도 많다. 학생들의 정치활동도 폭넓게 보장된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학교법에 따르면, “학생은 정당이나 노동조합에서 개최하는 세미나 등에 참여하기 위해 최대 일주일간의 결석을 신청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나 14살부터는 정당에 소속된 청년회에 가입할 수 있고, 16살부터는 정식으로 정당의 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이처럼 독일은 학생들을 민주시민, 세계시민으로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장려한다. 바로 이런 정치교육 덕분에 독일은 가장 높은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을 길러낼 수 있었고, 이런 성숙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세계 최고의 경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4월이면 총선이다. 올바른 정치교육이 부재한 사회, 정치혐오를 더 세련된 정치적 취향인 양 부추기는 사회에서 성장한 우리는 절반쯤은 투표장에 가지 않을 것이고, 또 투표자의 절반쯤은 이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들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이제 우리도 체계적인 정치교육을 통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



지난 수십년 동안 이란에 가해졌던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1월16일 풀렸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대이란 경제·금융 제재를 해제한다고 밝히면서 “이란은 핵 합의 프로그램의 이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중동의 대국인 이란은 본격적인 개발과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이란의 국제사회 복귀가 앞으로 중동 정세의 안정에 기여하고 세계 경제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를 기대한다.


경제제재 해제는 지난해 7월 미국 등 주요 6개국(P5+1)과 이란이 핵 협상을 최종 타결한 데 따른 예정된 수순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란이 적극적으로 핵 합의 이행에 협조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제재 해제를 이끌어낸 점은 평가할 만하다. 이란은 핵 합의 이후, 핵연료의 98%를 러시아로 선적하고 1만2천개 이상의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를 해체했으며 플루토늄용 원자로를 봉인했다고 한다.
핵프로그램 폐기에 합의하고 그 이후 국제기구와 협력해서 이 과정을 투명하게 진행한 건 북한 핵 문제에 직면한 우리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물론 핵물질을 농축하는 수준이던 이란과 이미 4차례나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끈질긴 협상을 통해 핵과 경제를 맞바꾼 이란 사례는 북핵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금융 제재의 해제로 이란 정부는 미국 등 서방 국가에 묶여 있던 1천억달러의 자산을 당장 손에 쥘 거라고 <뉴욕 타임스>는 추산했다. 그뿐만 아니다. 이란은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각각 세계 4위, 2위인 자원 대국이다. 8천만명을 넘는 인구는 중동에서 가장 큰 내수시장을 형성한다. 이렇게 잠재력 큰 나라가 수십년 동안 제대로 개발을 하지 못했으니, 앞으로 성장과 발전 열기가 크게 분출할 게 분명하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이란의 개방과 개발에 대응하는 체제를 선제적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 증시의 급등락으로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란 진출은 시장 다변화 측면에서도 긴요하다.


강호 이란의 기지개는 한편으론 중동에 또 다른 불안 요인을 잉태한다. 중동의 또 다른 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3일 이란과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한 배경엔, 이란의 국제사회 복귀에 대한 강한 우려가 깔려 있다. 이란이 석유 수출을 본격화하면 두 나라 사이는 더욱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아랍 대립과 이슬람국가(IS) 문제에 더해 두 나라 간 갈등은 중동뿐 아니라 세계정세에도 암운을 드리울 수 있다. 중동 정세를 평화롭게 관리하는 데 국제사회가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19일 노사정 합의 파기와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9·15 노사정 합의’는 넉 달 만에 효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갈라선 정부와 노동계는 저마다 제 갈 길을 가겠노라 공언하고 있어 앞으로 노정 갈등의 골은 한층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대화의 뿌리가 얕은 우리 사회에서 어렵사리 이룬 노사정 합의의 자산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노사정 합의 파탄의 씨앗은 원칙과 목적이 불분명한 박근혜 정부 ‘노동개혁’의 태생적 한계에서 이미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편과 일자리 대책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뒤섞어 놨으나, 이는 애초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2014년 말부터 정부가 군불을 땐 ‘정규직 과보호론’은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 안정이라는 핵심과제를 노동계 내부의 제로섬 게임으로 몰고가 버렸다. 특히 임금피크제를 청년실업의 주된 해법인 양 내세운 건 거듭 비판받아 마땅하다. 현실에선 법정 정년을 다 채우는 경우가 많지 않을뿐더러, 일자리 창출의 근간인 민간부문의 임금피크제 도입을 강제할 마땅한 수단도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별도의 해법으로 풀어야 할 청년실업을 임금피크제 도입과 패키지로 밀어붙이다 보니 혼란과 불신이 따른 건 당연지사다.


합의 정신을 거듭 짓밟은 정부의 행태도 문제다. 박 대통령은 13일 새해 대국민담화를 통해 쟁점 현안인 노동 5법 가운데 기간제법 처리는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사자 간 이견이 워낙 커 추후 논의과제로 남겨뒀음에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다가 마지못해 한 발짝 ‘양보’하는 듯한 태도는 결코 온당치 못하다. 노사간 충분한 협의를 거치기로 한 약속을 깨고 정부가 양대 지침 정부안을 지난 연말 전격 공개한 것도, 자신들을 들러리 세웠다는 노동계의 불신을 정부 스스로 확인해준 꼴이다.


노사정 합의와 파탄 과정에서 드러난 노동계의 책임과 한계도 부인하긴 힘들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올라선 한국노총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해도, 대기업 사무직 중심의 상급단체가 비정규직, 청년세대 등 조직되지 않은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는 처음부터 한계가 뚜렷했다. 애초 노사정 합의가 진정한 사회적 해법의 공감대를 얻는 데 실패했던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