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철수 정치’와 이론 문제

● 칼럼 2013. 6. 16. 11:14 Posted by SisaHan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싱크탱크로 ‘정책 네트워크 내일’을 만들었다. 최장집 이사장과 장하성 연구소장을 비롯해 유력한 지식인 여럿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내일’은 안 의원이 추구하는 새 정치를 뒷받침할 정책 담론을 개발하겠다고 한다. 안 의원이 정치에 다시 뛰어들면서 정책부터 붙든 것은 좋은 일이다. 안 의원의 정치활동 무기가 될 뿐 아니라 범야권 차원에서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안 의원은 대선 국면에서 정책 준비가 부족해 좌충우돌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에 앞서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을 펴내고, 정책 분야별로 기본 착상을 선보인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그 뒤 안 의원 자신이 통일외교안보를 비롯한 일부 분야에서 <안철수의 생각>과 어감이 다르게 발언함으로써, 무엇이 진정한 안철수 생각인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대표 상품이라는 정치개혁 분야에서도 고작 국회의원 수 줄이기를 실천 수단으로 제시해 밑천이 짧다는 느낌을 줬다.
 
안 의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지난 대선에서 야권은 무엇보다 연합정치에 대한 이론적 허약성을 드러냈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 진영은 과거 DJP 연합 수준의 정책협약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공통의 정책과 우선순위, 실현 프로그램을 합의하고 시민들한테 설명하는 기본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론조사로 단일화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수준 낮은 밀고 당기기만 벌였다. 이것이 야권의 대선 패배 원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안 의원 진영이 기왕에 이론 작업에 착수한다면 연합정치 주제를 우선적으로 연구하는 게 옳다고 본다. 
‘안철수 세력’은 사실 독특하다. 기성 야당을 통해 소화되기 어려운, 새로운 정치적 취향과 참여 욕구를 품은 시민들이 주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안 의원은 국회에서 거의 단기필마 소수세력이다. 다원화된 가치를 대변하기 좋도록 다당제를 주장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다. 이와 동시에 창당도 하지 않은 ‘안철수 신당’이 여론조사 지지율로 민주당을 앞서고 있다. 안 의원 진영이 야권 재건의 동력이 되리라고 기대를 모으는 동시에, 야권 분열에 대한 걱정이 함께 나오는 이유다. 연합정치 이론을 연구하는 것은 안 의원이 정치 재수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할 듯하다.
 
연합정치는 보편성이 매우 큰 주제이기도 하다. 서양 정치사에서 소수 정치세력은 늘 연합정치를 통해 성장했다. 영국 노동당은 자유당과 연합 전략을 구사했다. 사회당과 여러 민주주의 정파들은 파시즘에 맞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진보정당은 대체로 선거연립을 잘 만들 때 집권했다. 
안 의원 진영이 해결해야 할 또 한가지 이론 문제는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구호가 무엇을 뜻하는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또한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까지 정부 정책의 진보성은 주로 외교안보, 특히 대북정책에서 나타났다. 그밖에 경제정책에서는 보수정권과 진보정권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화해협력이냐 대북 압박이냐라는 남북관계 철학이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상징언어처럼 된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진보와 보수를 고정해놓고 개별 정책을 꿰어맞춰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안보는 보수’를 표방한다면, 어떤 보수정책 묶음으로 남북관계와 분단의 모순을 해결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안보는 보수’ 구호가 단기 여론을 의식한 모호한 처방으로 비칠 여지가 있다. 
안 의원이 저명한 학자들을 삼고초려하고, 이론 연구에 착수한 점은 여러모로 방향을 잘 잡은 것이다. 좋은 결과를 일궈 야권과 지식계를 자극해주면 좋겠다.

< 박창식 - 한겨레신문 연구기획실장 겸 논설위원 >

 
남북이 12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에서 열기로 했던 고위급 당국회담이 일단 무산됐다. 이유는 수석대표의 격을 둘러싼 이견이다. 장소와 일정, 의제까지 다 합의해 놓고도 회담이 무산된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북쪽보다는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한 우리 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정부는 애초 장관급 회담을 하자고 한 직후 북쪽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해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정부는 9일 열린 실무회담에서도 김 부장의 참석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회담이 다음날 새벽까지 늦어지고, 장관급 회담이라는 이름도 당국회담으로 바뀌었다. 김 부장이 참석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정부는 어제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하는 명단을 북쪽에 전달했다.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제시한 북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논의는 더 진행되지 못했다. 6년 만에 재개될 예정이던 고위급 회담이 사실상 정부 스스로 만든 장애물에 걸려 좌초된 셈이다.
 
정부 태도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김 부장은 정부가 아니라 당에 소속된 사람이다. 정부 당국자 사이의 회담에 김 부장의 참석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 부장을 꼭 대화 상대로 하겠다면 애초부터 장관급 회담이 아니라 다른 이름의 회담을 제의했어야 한다. 과거에도 김 부장의 상대는 국정원장 등이었고, 통일부가 없는 북한은 장관급 회담에 협상 능력이 있는 ‘내각 참사’ 등을 참석시켰다. 정부가 이를 잘못된 관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전의 여러 회담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하는 일과 권력으로 볼 때 김 부장은 부총리급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부는 아마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주도한 김 부장을 참석시켜 직접 책임을 따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개성공단 문제는 누가 대표로 참석하더라도 논의할 수 있다.
 
지금 남북 관계는 수석대표 문제로 끝까지 기싸움을 벌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개성공단 정상화가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장기 폐쇄로 갈 가능성이 크다. 최근 관련국들이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노력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남북 회담에서 직접 북한 핵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비핵화 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담이 열리지 못한다면 남북 관계가 오히려 비핵화 대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과거 방식은 무조건 잘못이라고 해서는 남북 대화가 이뤄지기 어렵다. 정부가 말하는 신뢰와 원칙이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잘못 쓰여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무리한 주장을 철회하고 해법을 찾기 바란다.


국정원의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불구속 기소하기로 한 것은 청와대와 법무부의 정치논리에 검찰의 법논리가 졌다는 뜻이다. 일부에선 황교안 법무장관의 반대를 뚫고 선거법 위반죄를 관철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양이나, 그 정도 죄질의 사안에 구속영장 청구를 포기했다는 건 어떤 이유로도 이해하기 힘들다.
형사소송법 70조는 구속 여부를 판단할 때 사안의 중대성도 고려하도록 돼 있다. 정보기관을 동원해 선거에 개입하고 수사 내용을 축소·조작하려 한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제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국기문란의 중대범죄에 해당한다. 이런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면서 영장 청구를 포기해놓고, 과연 어떤 피의자에게 구속영장을 떳떳하게 청구할 수 있을지 검찰은 자문해보기 바란다.
 
검찰이 의욕적으로 벌인 수사가 용두사미로 마무리될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책임은 물론 황 장관에게 있다. 검찰 수사팀이 오랜 수사를 통해 내린 결론을 왜곡함으로써 검찰 수사의 독립성을 공개적으로 훼손한 꼴이 됐다. 엊그제 국회 대정부 질문에 나와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와 협의한 적이 없고,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를 그대로 믿어줄 국민은 없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정기적으로 해온 ‘지시’ 내용과 심리정보단을 통한 정치댓글 활동 등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음에도 선거법 적용에 반대한 황 장관의 애초 주장은 법논리에 따른 것으로 보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를 의식한 과잉충성이 결국 기괴한 수사 결론을 만들어낸 셈이다. 지휘권 발동을 둘러싸고 그가 보여온 이중적 행태는 앞으로도 검찰에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될 것이다. 수사지휘권 발동은 아니라면서 실제로는 검찰에 자기주장을 강요하는 위선적인 행동이 용인된다면 법무장관이 모든 정치적 사건에 관여할 수 있는 나쁜 관행이 만들어질 수 있다.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을 고려하더라도 검찰이 결국 불구속 기소에 동의한 것은 앞으로 ‘채동욱 체제’ 검찰의 행보에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기소 뒤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과 경찰의 공작적 행태 실상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여야가 국정조사에 이미 합의한 만큼 사건이 왜곡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법무부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도 철저히 밝혀야 한다. 국민은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누구에게도 국기문란 범죄를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한 일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