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금년에도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묵상 한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시기에 수천 년 전부터 아니 창세전부터 오늘날까지 앞으로도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그분에 관해서 관심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성경은 구약 신약을 통틀어 온통 이 분에 관한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분 없이는 세상 만물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시고 이 분만을 통해서만이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리라.
 
하나님께서 영혼을 우리 속에 지어주신 것이다.(슥12: 1). 따라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전12:7). 죽음에는 육체적인 사망과 영적 사망이 있다. 육체적인 사망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영적 사망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이다.
영원한 영을 받은 인간에게 왜 사망이 왔는가? 이는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생긴 것이다. 만일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아니하였더면 사망도 없었을 것이다. 로마서 6장23절을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의 사망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반드시 겪어야 하지만 영적 사망은 인간만이 맞이하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차마 보시지도 못하는 거룩하신 분이시며 죄를 발견하시면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자비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한하신 지혜로 공의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죄인들에게 값없이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길을 고안하여 내셨다. 이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무한 광활하신 사랑과 그의 영원 불변하신 공의와 전지전능하신 능력이 연합하여 믿는 자의 구원을 가능케 한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올해도 사순절 그리고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원계획을 완료하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법도(율법)에 따라 인간이 죄를 지으면 수명이 제한되어 있고 영이 없는 육만의 동물을 화목 제물로 삼아 회개하며 속죄의 번제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일시적이나마 하나님과 교제는 할 수 있으나 계속 할 수가 없고 죄를 지을 때마다 매번 반복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영이 본체이신 예수님을 독생자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육과 영을 겸비한 성육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삼아 십자가 상에서 단 한번의 영적 제사를 드리고 완전히 모든 죄를 사함받게 하셨다. 따라서 영원한 영적제사로 죄 사함 받고 영적 영생의 생명을 다시 찾게 하셨던 것이다. 따리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죄 사함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육과 영이 함께 동시에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칼과 기근과 온역으로 심판하시면서 인도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랑의 은혜로써 오래 참으시다가 마지막 백보좌 심판대에서 모든 인간들을 심판 하시고 죄인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못 속에서 영원히 벌을 받게한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법에 따라 사형 또는 징역 등의 죄과를 지불하게 되는데 하물며 죄를 제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에서의 죄의 대가는 죽지않는 상태에서 영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천년 만년을 묵상해도 끝이 없으리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눅24: 5-7).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


과일 진열대 앞을 지나다 고향 석류를 만났다. 굳이 생산지가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주먹만 한 크기에 볼품없는 모양새가 어릴 때 자주 보던 놈들과 흡사하게 닮았다. 빛깔 좋은 수입 농산물에 치여 존재 자체도 불분명한 그 놈들이 이곳 캐나다까지 상륙했을 리 만무하고, 세상 어딘가에 고향 통영 빛, 통영 바람을 닮은 곳이 있어 이렇게 흡사하게 지어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큼직한 석류가 검붉은 빛으로 유혹해도 곁눈질만 했는데 뒤늦게 잔챙이들 앞에서 마음이 멎어버렸다. 여성의 인체에 석류가 그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듯, 좀 더 나은 알맹이를 고르느라 열성인 여인들 옆에 나도 슬며시 끼어들어 이것저것 들었다가 놓는다. 여느 과일들처럼 쉽게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석류, 해풍과 태풍을 견뎌내며 아버지의 눈길 안에서 소담하게 익어가던 열매를 찾던 나는 이미 어린 날 그 언저리를 돌고 있었다. 히말라야 그 주변이 본향이라는 석류가 오랜 세월동안 사방팔방으로 세를 뻗어 우리 집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나는 석류는 우리 집만의 전유물인줄 알았던 시절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옛집엔 해묵은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직한 언덕을 받치고 섰던 나무는 자태도 고왔지만 주홍색 꽃눈이 열리는 봄부터 속내를 내비치는 가을까지 동네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울창한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자란 고목의 허리는 여섯 아이들의 발바닥을 받아내느라 늘 반질반질했다. 게다가 대여섯 평 되는 나무 밑은 언제나 넉넉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우리 형제들의 놀이마당으로는 그만이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성정 탓에 동네 마실 이라고는 꿈도 못 꾸시던 어머니까지 가세한 그곳은 늘 아늑했으며 놀 거리가 매일 샘솟듯이 솟아나는 곳이었다. 어쩌다 태풍이라도 다녀간 날 아침이면 마당 곳곳에 빨갛게 떨어진 석류꽃을 치마폭이 미어지도록 주워 담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선연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 유월 태풍은 우리들의 소꿉놀이를 풍성하게 했지만 칠 팔월 태풍은 아버지의 마음을 썰렁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아버지는 통영 나전칠기 장인이셨다. 한옥을 개조하여 조그만 공장을 들여 놓고 몇 안 되는 직공들과 밤낮으로 일에 파묻혀 사셨다. 젊은 나이에 아홉 식구의 생계를 혼자 감당한 아버지는 석류나무 밑에서 뛰고 솟는 자식들을 보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지 싶다. 그 낙이 힘겨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도 되고 때론 당신의 어깨를 더 떨어뜨리게 하는 짐도 되었을 테다. 
‘숙이야!’ 하는 아버지의 부름에 동생들과 함께 툇마루로 달려가면 당신은 가을 햇살에 한껏 벌어진 석류를 까고 계셨다. 입안에 고이는 침을 꼴깍이며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가면 불그레한 알갱이가 반짝이며 튀어나왔다. 섬세한 감각이 주 무기였던 당신의 손에서는 알맹이가 터지는 법이 없었으며 한 입 가득 넣어주시는 손맛에는 고소함과 짭조름함이 섞여 있었다. 그때는 신맛, 단맛에 자동으로 가미되는 간기가 신기했는데 나중에야 바다에서 올려 진 갖가지 조개껍질을 타느라 자연히 녹아든 삶의 녹이었음을 알았다.
 
요즘 따라 작은 아이의 얼굴에서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오버 랩 된다. 자신의 일신만을 생각하며 뜬구름 쫓던 아이가 결혼을 하고 식구가 불어나니 한결 진중해진 이면에 불안함과 초조함 깃들어 있다. 늘 부모의 보호 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딸린 가족을 책임져야 하니 그 짓눌림은 상상 이상이리라. 아버지는 완고한 성정으로 가장의 힘겨움을 위장하셨지만 아이는 그 경지까지 아직 미치지 못했나보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심정을 이해한다더니 아이가 일가를 이루고 나니 이제야 대가족을 이끄느라 노심초사 하신 아버지의 고뇌가 가슴에 와 닿는다. 
시인 서정주님은 그의 시 ‘석류꽃’에서 ‘다홍치마 입고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이라 했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시 ‘석류’에서 ‘영혼의 숨겨진 비밀을 보았노라’고 했다. 거장들의 시선에서는 아름다움의 극치, 내밀함의 극치로 비춰진 석류가 젊은 가장의 손에서는 생활고를 해결하는 고마운 소재로 자주 애용되었으며 나에게는 소박한 동심과 젊은 아버지를 만나는 산물이기도 하다. 
석류나무 사이사이로 송골송골 매달린 아이들의 모습이 어제처럼 가깝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감자를 고를 때와 사람을 쓸 때

● 칼럼 2013. 3. 30. 21:32 Posted by SisaHan
배우 김혜수씨가 석사학위를 반납했다. 석사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쿨하게 반납 결정을 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혜수씨가 석사학위를 가진 배우인지 몰랐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나 섹시함에 매력을 느꼈었다. 두말없이 사과하고 석사학위를 내던진 김혜수씨는 역시 멋있는 점이 있구나 싶었다.
표절 논문으로 학위를 주는 것과 관련해 제일 부끄러워할 사람은 김혜수씨보다는 그의 지도교수이고 그가 다녔던 대학이다. 오래된 일이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전인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화가의 작품이 표절로 드러나면서 제일 먼저 나온 이야기는 심사위원의 자질 문제였다. 여러 가지 변명과 불가피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망신을 당했고 다시는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국전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 글 쓰는 사람이나 학자, 예술가들은 표절을 도둑질보다 더 창피한 일로 여긴다. 심사를 잘못했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대학의 박사논문이나 석사논문이 철저한 검증을 받지 않고 있다는 시비가 인 것은 오래되었다. 표절 시비가 나오면 본인의 잘못으로 돌릴 뿐 어느 대학도 어느 지도교수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일 부끄러워해야 할 집단이면서도 학위 반납을 받고 조용히 입 닫고 있는 게 대학이다. 실제로는 논문이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논문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았는지 모른다. 논문 심사가 까다로운 교수는 학생들이 기피하니까 대학 쪽이 적당히 심사하라고 지도교수에게 종용했을 수도 있다.
대학은 이제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학문적 권위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학진학률이 80%를 넘는 시대에 대학 장사는 한계에 이르렀다. 지금은 석사, 박사 장사를 한다. 유명인사를 장학금을 주어 유치하고 대학 홍보에 이용한다. 대중의 스타인 운동선수나 연예인 유치에 사활을 건다. 전문적 식견과 경험이 필요한 학문이나 대중문화 종사자들에게 학위의 급에 따라 강사료를 책정하는 것도 대학의 또 다른 학위 장사라 볼 수 있다.
 
줄줄이 낙마하는 대통령의 첫 인사를 보면서 국민들은 정신줄을 놓을 지경이다. 낙마 이유도 가지가지다. 측근에선 특별히 지금 정권에 들어서 유난히 까다롭게 검증한다는 원망의 말도 나온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란 생각인지 자체 인사 시스템을 바꿀 생각은 없고 검증을 강화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 모든 낙마와 자진사퇴 사태에 대해 정작 제일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다. 수첩에 꼬박꼬박 필요한 인사를 적어놓았다는 것은 흉이 될 일은 아니다. 대통령이 될 때에 대비해 준비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수십년 동안 대통령의 꿈을 키웠으니까 적어도 섀도 캐비닛(예비내각) 정도의 구상은 그 수첩에 적혀 있을 것이고 따라서 준비된 대통령이 아닐까 하는 기대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대통령병이 있었을 뿐 대통령이 되어서 무엇을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하고 한탄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장에서 감자를 사면서 냄새를 맡는 사진이 화제에 올랐다. 생선이면 몰라도 감자를 살 때는 어느 누구도 냄새를 맡지 않는다. 싹이 나왔는지 썩었는지 햇감자인지 묵은 감자인지를 용도에 따라 살핀다. 감자를 살 때 생선을 살 때 딸기를 살 때 고기를 살 때 점검해야 할 부분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흠결은 아니다. 시장을 본 적이 없거나 음식을 해본 적이 없구나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람을 쓸 때는 다르다. 화려한 스펙 뒤에 감춰진 내용을 봐야 하는 것이다. 썩었는지 온갖 비리의 싹이 무성한지 총체적인 검증을 하게 하고 추천한 인사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주지시켰어야 한다. 낙마나 자진사퇴로 끝날 일이 아니라 사후에도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의 첫 인사가 온갖 잡음을 일으키고 국민들을 창피하게 만든 책임은 대통령이 져야 한다. 온갖 종류의 껄렁한 인생을 살아온 것으로 판명된 인사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그들을 조롱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창피하다. 국민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놓고 그 인사권자인 대통령은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부끄럽지도 않다는 게 말이 되는가. 

< 김선주 -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