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혐의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탈북자가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가 유출돼 보도되는 바람에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연락이 끊어졌다’며 이를 유출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는 고소장을 7일 검찰에 냈다. 이 탈북자는 국가정보원이 탄원서를 특정 신문사에 제공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쳤다.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증거조작 논란을 물타기 하려고 탈북자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 된다.
 
이 탈북자가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는 지난해 12월6일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유우성씨 사건 비공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1월6일, 그는 북한에 있는 딸로부터 “아빠 때문에 국가안전보위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거짓말로 겨우 수습하고 나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1월14일 이런 사실과 함께 “유출자를 찾고 싶지만 자식들 때문에 그렇게 못 한다. 이런 일 다시 없게 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냈다. 그때까지는 증인 출석 사실 정도만 유출된 것 같았는데, 4월1일 탄원서 내용이 사진과 함께 <문화일보>에 보도된 뒤에는 가족과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한다. 비공개 재판 내용이 북한에 넘어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재판부에 낸 탄원서가 통째로 유출된 경위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 탈북자는 유출 경위에 대해 “심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탄원서를 낸 뒤인 2월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탄원서 내용대로 <동아일보> 등과 인터뷰를 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인터뷰를 요청한 시점은 국정원이 유씨의 재판에서 낸 증거서류가 위조된 것이라는 중국 정부의 회신으로 증거조작 논란이 불붙은 때다. 국정원이 곤경에 처하자 유씨에 대한 의혹을 부풀려 조작 논란을 물타기 하려고 언론 인터뷰를 주선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탄원서 내용이 보도된 4월1일도 증거조작의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 국정원 ‘윗선’에 대한 수사 요구가 거세던 즈음이다. 이 탈북자는 당시 자신이 기사가 보도되는 것을 승인했다고 알려준 사람이 있다는 <문화일보> 담당 간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의 의심대로 국정원이 그런 말을 한 유출 당사자라면, 우리 정부가 세심하게 보호해온 중요 정보원을 당장 이해에 필요하다고 국정원 스스로 내친 셈이 된다. 그 경위와 책임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
몇몇 신문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탈북자의 증언대로라면 이들 신문은 국정원의 주선과 정보 제공에 기대, 국정원 주문에 맞춰 기사를 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당원투표와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해 기초선거 무공천 철회 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 결과를 확실히 점치기는 어렵지만 당원들 사이의 압도적인 무공천 철회 여론을 고려하면 결국 공천을 하는 쪽으로 최종결론이 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그동안의 무공천 강행 소신을 꺾고 출구전략을 마련한 셈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회군’은 어느 면에서는 늦은 감이 있다. 한 선거에서 어느 당은 공천을 하고 어떤 당은 공천을 하지 않는 것은 정당 간의 유불리를 떠나 유권자들을 모독하는 일이다. 정치권 한쪽이 선거 규칙 개정을 완강히 반대할 경우 현행 방식대로 가는 게 당연한 상식이기도 하다. 어느 면에서 이 사안은 굳이 여론조사 방식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번 결정으로 새정치 의지가 훼손됐다고 비판할 사람도 있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애초부터 기초선거 정당공천 배제는 새정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기초선거 공천·무공천은 각기 장단점이 있을 뿐 ‘선과 악’이나 ‘새정치-헌정치’ 따위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게다가 ‘한 선거 두 규칙’으로 정치가 난장판이 되는 상황에서 새정치 타령이나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안철수 대표로서는 ‘약속 파기’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킬 수도 없고 지키는 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닌 약속에 매달리는 것이 꼭 ‘신뢰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안 대표는 야당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다. 당이 처한 극심한 혼란과 불협화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약속 준수만을 외치는 것은 정당 지도자의 자격이 의심스러운 치명적인 직무유기다.
 
새누리당은 새정치민주연합 결정에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전혀 없다. 자신들은 약속 파기로 이득을 보면서 상대편은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치는 뻔뻔한 모습을 더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동안 기초선거 무공천 문제를 놓고 너무나 오랫동안 소모적 논쟁을 벌여 왔다. 하루빨리 이런 혼란상에 마침표를 찍고 각 정당이 정책과 인물로 정정당당히 유권자 심판을 받기 위해 진력하길 바란다.


[한마당] 메르켈 총리의 충고

● 칼럼 2014. 4. 15. 20:37 Posted by SisaHan
최근 독일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통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조언했고, 이에 박 대통령은 “독일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모델”이라며 “통일 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통일 한국의 비전을 세우겠다”고 화답했단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주문한 메르켈 총리의 충고는 평범한 듯하지만 사태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의 통일정책에서 가장 결여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통일 독일’과 ‘분단 한반도’의 차이는 상호존중과 상호신뢰의 유무에 있다. 독일은 존중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분단의 장벽을 허문 반면, 우리는 적대와 불신 속에서 분단의 성채를 쌓아왔다.
독일 통일의 길을 연 ‘동방정책’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도 동독에 대한 섬세한 배려에 있었다.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최대한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용어 하나하나까지도 신경을 썼다. 브란트의 통일정책이 ‘동방정책’으로, 통일 담당 행정부서가 ‘내독성’(內獨省)으로 불린 까닭이다. 서독에 ‘흡수’될 것을 두려워하는 동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통일’이라는 말 자체를 스스로 삼갔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통일문제에 있어 가장 전향적이고 유화적이던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마저 ‘햇볕정책’이었다. 이 말은 이미 북을 -물론 ‘삭풍’은 아니지만- ‘햇볕’으로 ‘벗겨야 할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은 그 천박함과 오만함이 도를 넘어섰다. 통일을 일확천금의 도박에 비유하는 반지성과 몰역사성은 차치하고라도, 상대방을 오직 경제적 약탈의 대상으로 얕잡아보는 오만함은 또 어찌할 것인가.
서독 정부의 통 큰 지원도 동서독 간 신뢰 구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동독을 대하는 서독의 태도에는 맞수를 대하는 경쟁자라기보다는 아우를 대하는 형님의 너그러움과 여유가 있었다. 동독 마르크에 대한 신용 문제로 동독의 대서방 무역이 어려움에 처하자 스윙(Swing)이라는 무이자 장기차관을 제공한다거나, 재정 지원을 통해 동독 내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유도하는 등 서독은 동독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선의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독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퍼붓던 당시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3배 정도였지만, 오늘날 남북간의 경제적 격차는 대략 40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의 태도에서 형님다운 의연함은커녕,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의 몸짓도 찾아보기 어렵다. 보이는 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시대착오적 대결의식과 북의 위협을 과장하여 현실정치에 활용하려는 낡은 매카시즘의 욕망뿐이다.
통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있다. 우리의 상대는 불행히도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3대 세습의 봉건적 사회주의 전제국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해야 한다면 예의 옹졸한 적대적 자세부터 벗어던져야 한다. 북한은 이미 경쟁 상대가 아니라 포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 대박론’으로 어설프게 발톱을 드러내면서 입으로만 ‘평화통일’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경험에서 진정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의 경제력에 걸맞게 대북 지원과 경제협력을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망설일 것도 없다. 박근혜 정부는 이전의 어느 정부도 누리지 못한 이점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누구도 ‘퍼주기’라 비난하지 않을 테니까.
<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