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6월2일)에는 볼일이 있어 퀸스 파크(Queen’s Park) 앞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있었다. 나는 또 무슨 단체에서 데모를 하는 줄 알고 당연히 그 앞을 지나 지하철을 향해 갔다. 갑자기 수 십대 아니 수백 대는 아니지만 엄청난 숫자의 자전거가 나타났다. 당연히 자전거 경주는 아니었다. 떼를 지어 나타난 무리들 중에는 어린 아이들의 작은 자전거도 보였다. 그러자 미리 와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전거 벨소리를 울렸다. 왠지 장엄한 풍경이었다. 수백 대의 자전거 바퀴와 그리고 일제히 울리는 벨소리…
마침 볼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므로 호기심에 그들을 따라 퀸스 파크에 갔다. 그들은 블루어(Bloor St)와 그 연장선이나 다름 없는 댄포스(Danforth St) 거리에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어달라는 모임이었다. 다운타운이나 다름없는 교통량이 많은 그 좁은 거리에 어떻게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이용할 수 있지만, 시로서는 엄청난 수입을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고, 주변 상인들의 반발도 무시 못할 일이었다.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마이크를 이용해 외쳐대는 여느 항의 데모와는 달리 조용한 모임이었다. 그리고 정말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가 모인 모임이었다. 한 가족 정도가 아니라 온 세대가 참여한 집도 있었다. 자전거 한 대에 9명이 탄 자전거를 보았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아이들 넷, 그리고 맨 뒤에 캐리어에 어린 아이. 8명이 호흡을 맞춘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초대형 자전거는 따로 주문해서 만들었을 것 같았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왜 자전거 전용도로를 그 거리에 만들어야 하는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야하는지, 그리고 친환경적인지를 앞에 나와서 말을 했다.
자전거! 사실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물론 누구나 그러하듯 어렸을 때는 나도 세발 자전거를 탔다. 친구를 통해 자전거를 배우기는 했지만 서울 도심지에 살았고, 유독 겁이 많았던 나는 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차도로 나가기 무서워 일찌감치 자전거 타기를 포기했다. 모임이 인상적인 것은 거의 70이 넘은 할머니가 자전거 헬멧을 쓰고 나와 왜 사람들이 차대신 자전거를 타야하는 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친환경이라든지, 공해방지,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그리고 건강과 의료보험의 절약이란 단어를 자전거와 결부시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시내를 다닐 때, 차 대신 자전거를 타야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 할머니는 휘발유세를 올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주유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운전자들이 들으면 큰 일 날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기름값 때문에 운전자들은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북미문화 또는 생활이라는 것이 사실상 차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사랄들은 말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 모든 역사는 차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일 년에 몇 명의 사람이 차에 치어 죽는지 아느냐고 수치를 말하기도 했다. 내게 가장 감동적인 연설은 6살쯤 되는 꼬마애가 한 말이었다. 그 애는 자기들이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했다. 연설이 진행되는 중, 한 할아버지가 박스에 사과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과는 참 맛있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나온 경찰들도 시위대처럼 자전거를 타고 나온 자전거 경찰이었다. 그들은 시위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 이런 경우 위압감을 주기 위해 말을 탄 기마경찰들이 출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북미문화 또는 생활이라는 것이 사실상 차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사랄들은 말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 모든 역사는 차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일 년에 몇 명의 사람이 차에 치어 죽는지 아느냐고 수치를 말하기도 했다. 내게 가장 감동적인 연설은 6살쯤 되는 꼬마애가 한 말이었다. 그 애는 자기들이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했다. 연설이 진행되는 중, 한 할아버지가 박스에 사과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과는 참 맛있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나온 경찰들도 시위대처럼 자전거를 타고 나온 자전거 경찰이었다. 그들은 시위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 이런 경우 위압감을 주기 위해 말을 탄 기마경찰들이 출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모임은 별다른 사고없이, 참석자들이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났다. 혼자 지하철을 향해 걸으며 나도 자전거가 타고 싶어졌다. 그리고 오래 전에 잊어버린 노래가 생각났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릉….”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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