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자전거

● 칼럼 2012. 6. 9. 16:52 Posted by SisaHan
지난 주말(6월2일)에는 볼일이 있어 퀸스 파크(Queen’s Park) 앞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있었다. 나는 또 무슨 단체에서 데모를 하는 줄 알고 당연히 그 앞을 지나 지하철을 향해 갔다. 갑자기 수 십대 아니 수백 대는 아니지만 엄청난 숫자의 자전거가 나타났다. 당연히 자전거 경주는 아니었다. 떼를 지어 나타난 무리들 중에는 어린 아이들의 작은 자전거도 보였다. 그러자 미리 와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전거 벨소리를 울렸다. 왠지 장엄한 풍경이었다. 수백 대의 자전거 바퀴와 그리고 일제히 울리는 벨소리…

마침 볼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므로 호기심에 그들을 따라 퀸스 파크에 갔다. 그들은 블루어(Bloor St)와 그 연장선이나 다름 없는 댄포스(Danforth St) 거리에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어달라는 모임이었다.  다운타운이나 다름없는 교통량이 많은 그 좁은 거리에 어떻게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이용할 수 있지만, 시로서는 엄청난 수입을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고, 주변 상인들의 반발도 무시 못할 일이었다.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마이크를 이용해 외쳐대는 여느 항의 데모와는 달리 조용한 모임이었다. 그리고 정말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가 모인 모임이었다. 한 가족 정도가 아니라 온 세대가 참여한 집도 있었다. 자전거 한 대에 9명이 탄 자전거를 보았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아이들 넷, 그리고 맨 뒤에 캐리어에 어린 아이. 8명이 호흡을 맞춘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초대형 자전거는 따로 주문해서 만들었을 것 같았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왜 자전거 전용도로를 그 거리에 만들어야 하는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야하는지, 그리고 친환경적인지를 앞에 나와서 말을 했다.

자전거!  사실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물론 누구나 그러하듯 어렸을 때는 나도 세발 자전거를 탔다. 친구를 통해 자전거를 배우기는 했지만 서울 도심지에 살았고, 유독 겁이 많았던 나는 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차도로 나가기 무서워 일찌감치 자전거 타기를 포기했다. 모임이 인상적인 것은 거의 70이 넘은 할머니가 자전거 헬멧을 쓰고 나와 왜 사람들이 차대신 자전거를 타야하는 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친환경이라든지, 공해방지,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그리고 건강과 의료보험의 절약이란 단어를 자전거와 결부시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시내를 다닐 때, 차 대신 자전거를 타야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 할머니는 휘발유세를 올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주유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운전자들이 들으면 큰 일 날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기름값 때문에 운전자들은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북미문화 또는 생활이라는 것이 사실상 차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사랄들은 말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 모든 역사는 차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일 년에 몇 명의 사람이 차에 치어 죽는지 아느냐고 수치를 말하기도 했다. 내게 가장 감동적인 연설은 6살쯤 되는 꼬마애가 한 말이었다. 그 애는 자기들이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했다. 연설이 진행되는 중, 한 할아버지가 박스에 사과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과는 참 맛있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나온 경찰들도 시위대처럼 자전거를 타고 나온 자전거 경찰이었다. 그들은 시위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 이런 경우 위압감을 주기 위해 말을 탄 기마경찰들이 출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모임은 별다른 사고없이, 참석자들이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났다. 혼자 지하철을 향해 걸으며 나도 자전거가 타고 싶어졌다. 그리고 오래 전에 잊어버린 노래가 생각났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릉….”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박근혜 의원이 지난 1일 “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고 한 발언은 여러모로 짚어볼 대목이 많다. 이석기·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이 스스로 사퇴하지 않으면 국회가 제명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한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박 의원의 첫 언급이니 심사숙고 끝에 나온 발언일 것이다.
 
두 의원이 즉각 사퇴하는 게 맞다고 본다. 여기까지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비례대표 경선 과정의 하자가 아니라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어선 곤란하다. 의심스러운 국가관을 이유로 국회의원 자격을 심사해 제명하기로 치면 남아날 의원이 별로 없을 것이다. 
박근혜 의원의 이날 발언 시점은 새누리당이 친박계 강창희 의원을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한 의원총회장을 나오면서였다. 강 의원은 육사 25기 시절 축구부 주장을 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깊은 친분을 맺었고, 신군부의 비밀결사인 하나회 멤버로 활동했다.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해 내란죄를 선고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 덕택에 국회에 입성한 사람이다.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시킬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죄(형법 87조)가 내란죄다. 야당이 강 의원의 국가관이 의심스러우니 국회의원 자격을 심사하자고 나서면 어쩔 것인가.
 
‘국가관’은 말 그대로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국회의원 머릿속의 관점을 문제 삼아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권 유력 대통령 후보의 ‘민주주의관’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의심받는’이란 단어도 너무 주관적이고 모호하다. 낙인찍기엔 편리하지만 법치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 북한과 내통해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면 법대로 처벌하면 될 일이다. 
박근혜 의원은 ‘종북세력’이란 용어를 직접 사용한 적이 없다. 지난 4월 총선 때도 핵심 참모들에게 야권을 공격하더라도 종북세력이란 용어는 쓰지 말라고 특별히 지시했다고 한다. 높게 평가할 대목이다. 종북세력이란 단어에 내포돼 있는 일방적인 낙인찍기의 폭력성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권이 ‘친박계’라는 용어 대신 ‘박근혜 추종세력’이란 의미로 ‘종박계’라고 부른다면 새누리당 사람들이 기분 좋을 리 없지 않은가. 
국회의원에게 제명이란 사형선고와 같다. 명백하고도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며,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끝난 경우에나 검토해볼 문제다.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9년 10월4일 ‘반국가적 언동으로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고, 이는 부마항쟁과 유신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치하던 1979년의 ‘반국가적 언동’과 박근혜 의원이 여권 유력 대선후보인 2012년의 ‘의심스러운 국가관’은 얼마나 다른가.
 
이명박 대통령도 최근 “북한의 주장도 문제지만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우리 내부의 종북세력은 더 큰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민간인 사찰의 몸통으로 지목받는 와중에 주변의 핵심 인물들이 차례로 구속된 이 대통령은 누구보다 곤궁하고 옹색한 처지다. 도덕적 정당성이 무너진 채 황혼기 권력의 무상함을 곱씹고 있을 임기 말의 대통령에게 통합진보당 사태가 느닷없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모양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을 가장 반길 사람은 이석기·김재연 의원일지 모른다.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국회가 제명을 시도하거나 검찰이 당원명부를 통째로 압수하는 무리수가 결과적으로 이들의 입지를 도와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사태의 본질인 비례대표 경선 부정 문제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 임석규 - 한겨레 신문 정치부장 >


2007년 대선 직전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전 새누리당 의원)이 공개한 이른바 ‘비비케이(BBK) 가짜편지’는 당시 BBK팀장을 맡았던 은진수 전 감사위원이 전해준 것이라고 홍 전 위원장이 검찰에서 밝혔다고 한다. 그동안 홍 전 위원장은 “클린정치위 사무실 책상에 놓여 있던 편지였고 누가 보낸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으나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은 전 감사위원 혼자 가짜편지 사건을 기획·실행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만큼 당시 이명박 후보 대선 캠프에서 조직적으로 이를 기획·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이 사건을 배후에서 총지휘한 몸통이 누구인지 밝혀내야 한다.
 
이명박 후보와 동업했던 김경준씨가 2007년 11월 미국에서 국내로 송환된 뒤 홍 전 위원장은 대선 직전인 12월13일 참여정부가 BBK의혹을 부풀리기 위해 김씨를 입국시켰다며 문제의 편지를 그 물증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편지는 김씨와 미국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하던 신경화씨가 작성한 것이라고 했다. “자네가 ‘큰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란다”는 내용으로, 당시 한나라당은 큰집이 청와대를 상징한다며 참여정부의 ‘기획입국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편지의 작성자가 신경화씨가 아니라 동생인 신명씨라는 사실이 필적 조사 등을 통해 확인됐다. 신명씨는 지난 3월 중국에서 특파원들에게 “대학 때부터 절친한 관계였던 경희대 교직원 양아무개씨가 2007년 11월9일 밤 ‘이대로 쓰라’고 해 베껴 쓴 것”이고, “(김)경준이 오지 말”도록 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양씨가 말했다고 한다. 신씨는 양씨가 “이 모든 것을 이상득과 최시중이 핸들링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형을 미국에 보내 원상복귀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신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 쪽은 BBK사건의 파문을 줄이기 위해 김씨의 국내 송환을 저지하고, 참여정부가 김씨를 기획입국시킨 것처럼 날조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꾸민 것이 된다. 이 사건은 지금도 의혹으로 남아 있는 BBK사건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결돼 있다. 대국민 사기극에 가까운 가짜편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BBK사건의 실체도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가증스럽게도 신씨를 거짓말쟁이로 몰았던 자들이 죄상을 스스로 고백할 리 없다. 검찰은 철저한 수사로 몸통을 밝혀내고 다시는 이런 공작정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