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에 걸렸다고 고른 식단에 의한 영양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필요 영양분 되레 늘어‥ 신맛나는 식품 식욕 도움

한국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암을 치료하고 있거나 치료 뒤에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약 100만명으로 추정된다.  2008년 말 70만 명에서 3년 만에 100만 명으로 늘어 암 환자 및 생존자는 앞으로 빠르게 늘 전망이다. 하지만 암 환자 및 생존자들 건강을 위한 행동 요령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의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고 값도 비싼 방법에 의존하는 이들도 많다. 이에 <한겨레>는 국립암센터, 서울대병원과 공동으로 암 환자 및 생존자가 암 재발과 2차 암 발병을 예방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2차 암 검진, 피로 및 통증 관리, 식이 및 운동 요령 등에 대해 시리즈 기획을 마련했다.

암 환자 및 생존자는 암 자체로도 입맛이나 소화기능, 영양 흡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게다가 이들은 암 치료 과정에서 받는 수술, 항암요법, 방사선 치료 등을 통해서도 신체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특히 소화와 관련된 장기에 암이 생기면 수술로 장기가 손상되므로 정상적인 영양 공급에 장애를 겪는다. 이 때문에 식욕부진이나 영양실조를 겪는 암 환자 및 생존자도 많다.
 
■ 암 환자 61% 영양결핍= 국립암센터가 조사결과를 보면 암 환자의 61%가 영양결핍 상태에 빠져 있다. 특히 30%는 영양결핍 상태가 심각했다. 소화기 계통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많은 환자들이 ‘잘 먹으면 암을 더 키운다’거나 ‘고기를 먹으면 재발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영양결핍과 불균형을 더욱 키우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암을 앓거나 암 수술을 받은 경우에는 몸속 단백질을 비롯해 영양분 필요량이 오히려 늘어난다. 암이나 암 치료 과정에서는 몸무게 감소, 체지방 소실, 근육 위축을 겪을 수 있고, 이에 따라 피로, 잦은 감염, 어지럼증, 상처 회복 지연, 피부 궤양 등 고통을 받을 수 있다.
 
■ 조금씩 자주 먹어 식욕부진 극복= 암을 앓거나 암 치료 과정 중에 항암제를 쓰면 식욕부진을 겪기 쉽다. 또 암 자체나 재발에 대한 공포, 암 치료 뒤의 우울한 기분도 식욕부진을 악화시킨다. 이럴 때에는 조금씩 자주 먹도록 하고 간식을 가까이 둬 먹고 싶을 때 쉽게 먹도록 해야 한다. 굳이 식사 시간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며, 몸 상태가 좋을 때 많이 먹도록 권장 한다. 일반적으로 충분히 잠을 자고 난 아침에 많이 먹는 것이 좋다. 간식으로는 죽, 미음, 주스, 우유 및 유제품이 좋다. 주의할 점은 밥을 먹을 때 물을 많이 마시면 쉽게 포만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물은 조금만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목이 마르다면 식후 30분에서 1시간이 지난 뒤 마시는 것이 좋고 아예 식전에 조금 마시는 것도 권장된다. 식사 전에 가벼운 산책 등과 같은 운동을 하면 입맛을 좋게 할 수 있고, 식사 전후에 입안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먹기 싫다고 할 때 억지로 먹이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 입맛엔 신맛 나는 음식좋아= 암 치료, 특히 항암 치료 뒤에 입맛이 변한 경우가 많다. 고기나 생선을 먹으면서 쓴맛이나 금속 맛이 난다고 말하는 환자들도 많다. 이 때는 보기도 좋고 냄새도 좋은 음식을 권하는 것이 좋다. 만약 고기가 싫다면 두부, 달걀, 콩, 우유나 유제품이 권장된다. 고기나 생선 요리에는 와인이나 레몬즙 등 향이 좋은 양념류를 첨가하는 것이 좋다. 신맛이 금속성 맛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과 목에 통증이 있다면 신맛 나는 식품들이 염증을 자극하거나 불편하게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충치 등 치과 질환이 있어도 입맛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 암 치료 뒤 흔한 설사 대처법= 암 치료 뒤 항암제의 영향, 음식과민반응, 불쾌감 등으로 설사가 생길 수 있다. 설사가 생기면 우선 물을 충분히 마셔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 대장 기능 소실이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식사는 조금씩 자주 하고, 스포츠 음료•바나나•삶거나 으깬 감자•복숭아•토마토 등 염분과 칼륨이 적절하게 든 음식을 챙겨 먹는 것이 좋다. 소화가 잘 되는 죽이나 미음류도 도움이 되며, 고기류를 먹을 때에는 기름기를 제거하고 난 뒤 섭취하는 것이 권장된다. 과일은 생과일보다는 주스가 좋고, 섬유소 함량이 적을수록 설사 예방에 낫다. 브로콜리나 옥수수, 말린 콩은 피하고, 너무 뜨겁거나 찬 음료보다는 상온의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설사가 이틀 이상 지속되면 의료진과 상의한다.



위암은 식사때 물 먹지 말고, 대장암은 고기 줄여야
소화기계 암환자의 식사요법

암 가운데에서도 소화기계 암의 경우 수술 뒤 영양섭취에 심각한 문제를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입안에 생기는 구강암의 경우 암 치료 뒤에도 대부분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어렵다. 죽과 같은 유동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방법으로는 영양부족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때는 소위 ‘콧줄’이라 부르는 얇은 관으로 위장에 직접 음식을 공급하는 방법을 쓴다. 구강암은 방사선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치료 시작부터 2주 뒤에 구내염, 음식을 삼킬 때 통증, 구강건조증, 미각 이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때는 손상된 점막에 자극을 줄 수 있는 맵고 짠 음식은 피해야 한다. 대신 밀크셰이크나 아이스크림과 같은 부드러운 음식이 좋다.
 
식도암은 식도를 잘라내는 수술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식도의 기능 상실로 위로 내려간 음식물이 역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누울 때에는 항상 어깨가 배꼽보다 높은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또 잠들기 전 2~3시간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위암도 수술로 위를 절제하는 경우가 많다. 위장이 있었을 때처럼 음식을 먹으면 대변이 자주 나오고 설사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음식을 조금씩 여러 차례 나눠서 먹어야 한다. 물이나 국도 식사 중에 먹으면 음식물이 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지므로, 식사 뒤 30분~1시간 뒤에 조금씩 마시는 것이 좋다.
대장암의 경우 위험 요인 가운데 하나가 육류의 과다섭취다.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육류 섭취는 줄이고,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많이 먹는 식생활로 교정할 필요가 있다. 항문 근처에 대장암이 생긴 경우 항문을 제거하게 돼 배변주머니를 달 수 있는데, 이때는 먹는 물의 양에 주의해야 한다. 너무 많이 마시면 배변주머니를 자주 갈아야 하는 불편이 있고, 적게 마시면 탈수가 되거나 소변량이 적어지면서 결석이 생길 수 있다.



청년연합 3차 기도회

27개 교회 240여명 참가 뜨거운 열기

토론토 지역 청년연합 제3차 기도회가 2일 저녁 염광교회(담임 이요환 목사)에서 27개 교회 240여명의 청년이 모인 가운데 뜨거운 분위기 속에 열렸다. 
‘영적 기드온의 3백 용사여 일어나라’(삿7:7)는 주제로 열린 이날 기도회는 안형준 목사(염광교회)가 인도한 13인 청년연합 찬양팀이 1시간 동안 찬양과 경배로 집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이어 교회협의회 서인구 회장(소망교회 담임목사)이 ‘실제적인 오순절의 성령충만을 받으라’(행 2:1~4)는 제목으로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서 목사는 1904년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서 일어 났던 영적 대각성 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 그리고 최근의 남미 과테말라 한 작은 지방의 부흥을 예로 들며 “오순절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이루어지는 현재의 역사”라고 강조,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찾으시는 주인공이 여러분이 되기를 원하며,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찾으시는 그 땅이 이 땅이 되기를 원한다”고 도전을 주었다. 서 목사는 또 “오늘 이 자리, 이 곳, 이 시간에 여러분이 있기에 토론토에 소망이 있고, 우리 민족이 이 시대의 소망을 보게 된다”면서 “사도행전 1장에 머물러 있는 성도가 아니라 사도행전 2장을 경험하고, 3장 4장으로 넘어가는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 되자”고 독려했다.

이어 참석자들은 세 교역자의 인도로 각자 속한 공동체와 토론토 및 캐나다, 조국을 위한 합심 통성기도로 열기를 높였다.
황수연 목사(하늘비전교회)는 한인 디아스포라 젊은이들과 가정·교회·학교·직장 등 소속된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인도했다. 참석자들은 각 교회의 March Break 수련회와 집회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모두가 깨어지고 상하고 찢기고 상처 난 가정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하나님의 만지심을 간구하는 시간이 됐다.
우리 조국과 이 땅 토론토 및 캐나다, 그리고 열방을 위한 기도는 전경택 전도사(한마음교회) 인도로 진행했다. 특히 중국의 북한 탈북자 강제 북송에 관한 동영상을 보며 동족을 위한 중보와 회개의 기도를 하고, 조국 한국을 위해 교회들과, 공교육 정상화 및 다가온 총선과 대선을 위해 뜻을 모아 부르짖었다. 온타리오의 동성애 관련 법안에 관한 안타까움과 점점 타락하고 있는 토론토, 특히 동성애자들이 횡행하는 도시로 ‘소돔’처럼 되고있는 이 땅을 위해 기도했다. 이어 열방을 위해 재난과 박해 지역, 각지 선교사들과 그 땅의 크리스천들을 위해 열정을 쏟아 기도했다.
 
곽근우 전도사(밀알교회)가 인도한 기도는 참석자 개개인과 서로를 위해 중보하고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결단과 파송의 시간이 됐다. 참석 청년들은 복음의 능력을 삶의 현장 속에서 드러내며 나타나기 위해 함께 기도로 간구, 대부분의 청년들이 앞에 나와 무릅을 꿇고 기도하며 헌신하는 가운데 지역교회 사역자들이 한명 한명 다가가 축복하고 감동을 나누었다.
젊은이들의 소망과 간구, 열정이 어우러진 기도회는 3시간 30여분이나 이어진 뒤 밤 11시 서인구 목사의 축도로 마무리했다.
청년들이 모여 시대적 사명을 일깨우고 토론토와 캐나다, 조국과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비전으로 열린 이번 기도회는 지난해 5월 토론토 영락교회에서 열린 첫 기도회와 11월 큰빛교회에서 가진 2차례 청년연합 기도회에 이어 3번째로 열렸다. 앞으로 제4차 기도회는 5월25일(금) 오후7시30분에 열릴 예정이다.

< 문의: 647-800-0481 >


▶교협 주최 3.1절 연합예배 참석자들이 삼일절 노래를 제창하고있다.


“영적 자유 얻어야 진정한 자유인”


온타리오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서인구 소망교회 담임목사)는 1일 오후7시 소망교회에서 제93주년 3.1절 기념 연합예배를 드렸다. 
서인구 목사 인도로 드린 예배는 교협 총무 박종민 목사(샬롬장로교회 담임)가 대표기도하고 부서기인 박인기 목사(21세기 희망의 교회 담임)가 성경봉독(갈 5:1~6, 13~15)을 한 뒤 김요환 목사(토론토 한인성결교회 담임)가 ‘자유인으로 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참 자유는 영적 자유이며 이는 죄의 속박과 사망의 권세 및 사탄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며 “아울러 피와 땀으로 얻은 자유는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 하고, 자유에 수반되는 의무와 책임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배는 교협회계 정진오 장로(염광교회)의 봉헌기도에 이어 참석자 모두 기립해 3.1절 노래를 제창한 후 서기 윤철현 목사(한인침례교회 담임)의 광고, 주권태 목사(수정교회 담임)의 축도로 마쳤다.
이 자리에서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만행을 담은 동영상이 상영됐으며, 석동기 목사(한인감리교회 담임)는 ‘기독교와 3.1운동’이라는 발제로 기독교가 독립운동과 근대화에 중추적으로 기여한 사실을 되새겨 주었다.
이날 예배에서 기독여성성가단과 소망교회 성가대는 특별찬양을 했다.

< 문의: 647-204-5380 >



독립-구국운동 양생, 민족종교로
‘기독교회와 3.1운동’ … 석동기 목사 발제 요지

다음은 온주 교협 주최 3.1절 연합예배에서 석동기 목사(사진)가 발제를 통해 발표한‘기독교회와 3.1운동’의 주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 - - - - - - - - - - - - - - - -

우리 역사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민족운동의 근간에 한국기독교가 있었다. 3.1운동에 기독교계 및 기독교인들이 대거 주동세력으로 참여, 신앙운동이라기 보다 민족운동이지만 신앙적 동기에 의한 현실 참여임은 취조문이나 판결문을 보면 명확해진다.
 
민족이란 창조의 질서에 속하며 그 민족을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이고, 기독교가 민족을 향하여 있으며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억압과 수탈에 맞서서 민족의 자기실현을 성취하도록 격려 하였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정당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구 한말 한국기독교인들의 독립구국운동의 역량은 1905~1910년 사이에 애국계몽운동, 부정부패 추방운동, 경제, 정치, 종교적 항일운동을 통하여 놀랄만하게 성장하였다. 1901년부터 배출된 목회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1903년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을 거쳐 1912년에 이르러서 총회설립 등. 기독교계는 민족운동을 가능케 한 전국적인 조직과 지도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기독교가 전래 되면서 선교의 저변을 확대해 나갔으나 처음부터 우호적이거나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차소동(전차가 개통된지 5일만에 5세 아이가 치어 죽는 사고로 1900년 12월 1일을 기해 기독교 학살 비밀지령이 계획됐던 일)과 105인 사건 등을 겪었고, 3.1운동 이후에야 비로소 기독교는 민족적 종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3.1운동은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도 그 선교적 신앙적 변화를 가져온 운동이기도 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거두고 존중하며 서로 협력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는 3.1운동의 준비, 점화 단계만이 아니고 전국화 단계에서도 기여가 컸다. 
전국 각지에 세워진 기독교 사학(배재, 이화, 경신, 평양숭실…)은 애국 계몽운동으로 인재양성과 민족의식 교육에 선구적 역할로 훗날 3.1운동을 민족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 통상조약 체결로 3.1운동 직후까지 입국한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경우 한국에 파견한 선교사가 미국이 전세계에 파견한 선교사 총수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교회의 매일학교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후 더욱 왕성해져 민족구국과 애국신앙고취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국에 퍼져 나가 한일합방 이후에는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교육사업 이외에 기독청년회(YMCA)를 결성하여 청년활동을 복돋웠고 최초의 출판사인 감리교 삼문출판사와 예수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한국의 출판문화에 이바지했다. 또한 청년교육에 열심을 더해 1897년 5월 5일 정동교회에서 최초의 청년회 ‘엡윗청년회’가 생겼고, 1904년 최병헌목사(애국가 작사자)는 엡웟청년회를 확장하고 학교를 설립했다. 최 목사가 세운 민족구국을 위한 야간학교에 1906년에만 1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공부했다.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과 구국기도회 등으로 엡웟청년회가 해산 당하자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 수준으로 교육과정을 정해 애국애족의 국어교육과 국사교육, 체육과 군사훈련으로 무장 항일운동의 기틀을 마련했고, 주시경은 국어교육을, 최남선은 국사교육을 나머지는 남궁억, 또 구 한국군 출신 이필주 목사의 군사훈련은 훗날 간도에서 무관학교의 원류가 되었다.
 
특히 신민회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의 모임에서 시작돼 본격적으로 조직된 것은 미국에 있던 안창호의 귀국으로 서울중심 애국지사들과 서북지방의 기독교 애국지사들의 비밀단체로 출발해 양기탁, 이동녕, 전덕기, 이승훈, 김구 ,임휘정, 이동휘, 안창호 등이 참여했고 비밀 모임장소는 상동교회였다. 신용하 교수는 ‘3.1독립운동 발발 경위’라는 논문에서 초기 조직화 7개의 계통 중 기독교가 6개 조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최초의 독립선언인 2.8독립선언을 후원하였으며 3.1독립선언의 이념에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기록하고 있다. 
3.1운동으로 감옥에서 취조 중에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대답은 “하나님의 가르치는 바가 있으니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병합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였으랴” 하였다.  그 해 장로교 총회장으로 있던 김선두 목사는 운동에 앞장 서다가 많은 교역자들과 함께 투옥되어 총회장으로서 사회를 보지 못할 형편에 이른 사례까지 확인된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기독교 지도자들은 감옥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체험을 한 것을 적고 있다. 신앙체험은 성경통독과 성서연구와 함께 이루어졌다. 길선주 목사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요한계시록만 800독 하였다고 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의 기획은 상당수가 신민회 출신의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상해 신한청년당이었는 데 이 청년당의 당원들이 국내로 들어와 기독교지도자들에게 운동을 종용하였다. 또 3.1운동 후 입감자들의 종교별 분포를 참고하면 기독교는 3.1운동의 가장 큰 동력이 되었으며 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3.1운동의 중요한 근거였다. 1920년 4월 일제가 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가 독립운동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한 것을 보아도 교회와 기독학교가 3.1운동의 거점지로 역할 된 것을 볼 수 있다. 
간도에서의 3.1운동은 기독교 조직이 중심세력이 되어 동원되었고, 용정교회를 중심으로 북간도의 전교회가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1918년 9월부터 11월까지 함북노회 특별회가 교회에서 모일 때 마다 교회가 단결하여 독립운동에 매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9년 2월 8일 40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서 동경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김 마리아가 2.8독립선언서 원문 10여장을 가지고 2월 15일 부산에 도착, 부산에서 대구, 대전, 광주로 달려가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복사하여 사방으로 배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전체 여성의 7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 여성 민족운동에 있어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임이 밝혀졌다.
 
3.1운동 이후에 일제의 식민지 경제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는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경제력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이 목표 아래 평양의 조만식, 이승훈 등 물산장려운동, 소비절약운동 등을 5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920.8.23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 1922년 6월 26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시키고 회장에 조남식 장로를 선출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감리교, 장로교 연합저축조합을 조직하여 3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매달 25전씩 3년 동안 저축한 결과 1만 5천원의 자금이 적립되어 이 자본을 융자받아 평양 최초의 양말공장, 고무공업, 메리야스 공업들이 민족자본의 기업체로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 후 물산장려운동은 전국에 확산, 이상재를 회장으로 1920년대 민족기업활동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국산품애용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전국민의 80%가 농민인 현실에서 기독교회는 하기성경학교, 농한기 야간 성경학교 운영으로 문맹퇴치와 항일독립을 향한 민족역량 강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0~30년대에 활발했던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주일학교 진흥운동 등은 자주독립과 민족자유라는 이념과 일치하며 한국기독교가 민족종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한국기독교는 자금 세계 수위의 선교국이 되었다 세계 도처에 아직도 억압과 수탈이 일어나는 곳에 예수의 신앙으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