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
 퇴임 이후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2월 노벨평화상 상패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100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카터는 2023년 2월 이후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온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고 그의 가족이 밝혔다. 아들 칩 카터는 “아버지는 나뿐 아니라 평화, 인권, 사심 없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 모두의 영웅이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카터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했다. 정치적으로는 4년 단임(1977~1981년)에 그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악관을 나온 이후 중동과 한반도 등의 평화 문제에 적극 나섰다. 자원봉사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세계 평화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고 퇴임 이후가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카터는 1924년 조지아주의 시골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뒤 당시 개발이 본격화된 핵잠수함 분야에 배치돼 촉망 받는 장교였다. 그러나 1953년 땅콩 농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군복을 벗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카터는 1960년대에 들어 조지아주 등 남부를 중심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한 민권운동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흑백 통합을 주장하며 1962년에 조지아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당선됐다. 이어 전국적 지명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해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해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선거 상대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것도 그의 승리에 기여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포드는 닉슨이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는데, 이후 닉슨을 사면해준 게 여론의 반발을 불렀다.

카터는 재임기에 높은 물가와 이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 등의 탓에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인 1980년에 발생한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 실패 사건이 결정적으로 재선 행보의 발목을 잡았다. 이란 학생들은 1979년 11월에 미국대사관에서 직원들과 그 가족 등 90명을 인질로 잡았는데, 1980년 4월에 이들을 구출하려는 ‘독수리 발톱 작전’ 과정에서 헬리콥터와 수송기가 충돌해 미군 특공대원 8명이 숨졌다.

카터는 같은 해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외교에서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카터는 재임 때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는 등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차 북핵 위기 때인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있다.
 

카터는 퇴임 뒤 아내 로잘린과 함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 참여하는 등 봉사와 평화 정착 활동에 나섰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1994년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와 김 주석은 미국이 제재 추진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합의를 했고, 전쟁 발발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이던 한반도 긴장이 완화됐다. 이는 그해 10월 북·미가 제네바합의에 이르는 데도 기여했다. 또 카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2개 국가 해법’ 실현을 위해 나서는 등 중동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카터는 재임 때인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정(캠프데이비드협정)을 중재하고 퇴임 뒤에도 세계 곳곳의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카터는 말년에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걱정하기도 했다. 10월1일에 만 100살이 된 그는 8월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손자를 통해 밝혔다. 그는 생일 직후 사전투표를 했지만 해리스는 낙선했다.

카터의 동향인으로 그와 77년간 결혼 생활을 한 아내 로잘린은 지난해 11월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

‘별세’ 지미 카터 전 대통령…냉전 승리와 미국 혁신 기반 만들어

퇴임 뒤 빛을 발한 전직 대통령 롤 모델
‘유약해 보였으나 가장 강한 대통령’
진보적 가치와 독실한 기독교 신념이 대중에 호소
퇴임 뒤에는 평화봉사로 존경받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21년 7월10일 결혼 75돌 축하연에서 아내 로잘린의 발언을 듣고 있다. AP 연합
 

‘재임 때보다는 퇴임 뒤에 빛을 발한 대통령’

29일 100살을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흔히 퇴임 대통령의 ‘롤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가 퇴임 뒤 펼친 분쟁 해소를 위한 평화 활동 및 지역 봉사 때문만은 아니다. 혹평을 받았던 재임 시절의 정책도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81년까지 카터의 재임 동안 경제불황, 석유 위기,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 등으로 미국의 위상과 지위는 바닥을 쳤다. 이런 ‘미국의 위기’시기에 카터는 인권 외교와 도덕 정치만을 앞세운 ‘유약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정책과 대응은 미국을 혁신하고, 소련 붕괴의 씨를 뿌려 냉전에서 미국을 승자로 만든 기반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뒤늦게 받고 있다. 이는 퇴임 뒤 그가 펼친 헌신적인 평화 및 봉사 활동과 맞물려, 가장 성공적인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지아 플레인즈의 땅콩 농장 집안에서 1924년에 태어난 카터는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복음교단인 남침례교의 독실한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부친이 숨지자 퇴역해 가업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빚과 형제 사이의 재산분할로 카터는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었지만 땅콩 농장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고향에서 땅콩 농장을 경영하던 1950~60년대, 미국 남부에는 민권운동이 몰아쳤다. 보수적인 고향 분위기에도 그의 양심적인 기독교 신앙은 흑백분리 반대와 민권운동 찬성으로 그를 이끌었고, 이는 그가 정계로 나가는 동기가 됐다.

1979년 3월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따라 맺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 평화조약 체결식 때 미국 백악관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당시 대통령(왼쪽부터)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악수를 하고 있다. 카터 센터
 

그는 1963년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1970년에는 주지사로도 선출됐다. 카터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소수인종을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배려 정책)에 기반한 흑백분리 반대를 내걸고, 현직 주지사를 물리쳤다. 그가 주지사로 재직하던 1970년대 전반은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실망이 절정에 오를 때였다.

무명의 시골 주지사였던 카터는 1975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 출사표를 던지며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그는 참신했고 신뢰할 수 있는 경력이 있었고 그가 내세운 ‘인권과 도덕’은 좌우를 넘어 호소력을 발휘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해군 장교, 땅콩 농장 경영주, 민권운동 정치인이란 경력을 가진 카터는 도덕성이 실추한 기존 정치권을 질타하는 ‘도덕과 인권’ 가치를 내세워, 진보와 보수 양 진영 유권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진보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 카터는 기독교 우파 세력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이에 힘입어 카터는 닉슨 사임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1976년 당선됐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8월 애틀랜타주 조지아에 있는 카터센터에서 자신의 암 투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카터 센터
 

취임 뒤 그는 대외정책에서 인권 외교 및 분쟁 해소를 내세웠다. 친미 동맹국들의 인권탄압에도 강경하게 대처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압력을 가했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 공약까지 내걸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미 군부 내의 강경한 반대로 백지화됐으나, 카터의 압박은 유신체제 붕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중동에서 최대 친미 동맹국이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체제에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 세력이 활성화됐다. 이는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과격파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해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는 사태로 이어져 카터의 재선을 무산시킨 부메랑이 되기도 했다.

1994년 6월17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일성(오른쪽) 북한 주석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두번째 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재임 시절 카터는 대외정책에서 굴직한 치적들을 남겼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적인 평화조약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했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인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으며,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2(SALT2)를 타결지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에 이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다가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1979년 이란이슬람혁명으로 2차 오일쇼크가 엄습했다.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이 겹치며 지지율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와 구출작전의 실패는 재선을 앞둔 카터에게 치명적 타격이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강한 미국을 주장한 공화당의 보수파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해, 압도적인 선거인단 표차로 참패했다. 공화당과 보수파들은 인권과 도덕이라는 이상주의만 내세운 카터가 소련 등 경쟁국에 무른 대응을 해서 미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공격했고, 이런 평가는 공식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국내외 정책은 미국을 혁신하고 냉전에서 승리하게 한 원동력으로 재평가받는다.

우선, 그는 소련의 인권문제와 관련해,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반체제 세력을 후원하는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여 1980년대 후반 소련 및 사회주의권 붕괴의 씨앗을 뿌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하고, 소련을 아프간 수렁에 빠뜨린 무자헤딘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보수파 및 군비확산론자들이 반대하던 전략무기제한협상2를 타결해, 방만한 미 국방비를 줄이면서도 군비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는 미국이 1980년대 레이건 시절 소련을 압도하는 군사력 우위를 구축하는 바탕이 됐다.

1960년대부터 미국 대통령과 대외정책을 지켜보며 중앙정보국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한 공화당 계열의 로버트 게이츠는 가장 유약하다고 평가받은 카터가 사실은 소련 붕괴의 씨앗을 뿌린 가장 강경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카터 행정부의 선전과 비밀공작이 궁극적으로 소련 붕괴를 가져온 체제 균열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또, 게이츠는 카터 시절에 린든 존슨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국방 현대화와 전략무기 세대교체가 본격적 결실을 맺었다고 강조했다. 오일 쇼크에 대처하기 위한 연비 효율화 및 대체에너지 개발 등도 카터 때 시작됐다. 이 모든 정책은 소련을 압도하는 미국의 경쟁력으로 나타났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례없는 참패로 재선에 실패한 카터는 대중들에게 잊혔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력적인 사회활동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 카터센터를 세워 인권 신장에 나섰고, 세계 각국을 돌면서 평화협상, 선거감시, 질병퇴치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현재 활발한 국제적인 선거감시 활동도 그에 힘입었다.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폭격을 을러대던 1차 한반도 북핵위기 때 대담하게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통해 북-미 협상과 남북정상회담을 중재한 것도 퇴임 뒤 그의 대표적인 평화협상 행보로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 보장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의 평화협상 파기를 일관되게 비난해, 미국 보수파들의 공적이 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2002년 그는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숙인들과 무주택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은 그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80살이 넘은 그가 망치를 잡고 집을 짓는 모습은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다. 그는 집짓기 노동으로 몇번이나 낙상해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 한겨레 정의길 기자 >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스탠필드 국제공항 착륙 여객기 랜딩기어 이상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멈춰 선 캐나다 PAL항공 여객기 [핼리팩스 AP=연합]
 

캐나다에서도 랜딩기어 이상으로 여객기가 착륙 도중 위험한 상황을 맞았으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AP통신과 CNN 방송이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캐나다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에서 73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한 PAL 항공 AC2259편 여객기가 전날 밤 9시30분께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스탠필드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랜딩기어 이상으로 추정되는 기체 결함으로 기체에서 불꽃이 발생하는 위험한 상황을 맞았다.

사고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멈춰 섰으며 73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곧바로 버스를 이용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이번 사고로 인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PAL 항공 제휴사인 에어 캐나다는 사고 기종이 쌍발기인 드 해빌랜드 DHC-8-402(봉바르디에 Q400)이며 착륙 도중 랜딩기어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스탠필드 국제공항은 사고 직후 일시적으로 항공기 이착륙을 중단시켰으나 90여분 만에 1개 활주로의 운영을 재개했다.

캐나다 교통안전위원회(TSB)는 이번 사건을 조사할 예정이다.

사고기 승객인 니키 발렌타인은 착륙 도중 비행기가 상당히 흔들렸다면서 기체 왼쪽에서 불이 났으며 창문으로 연기가 들어왔다고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연합 김계환 기자 > 

'비상행동' 1549개 단체 "참담…생존 귀환 간절"


참여연대 "최상목 대행, 컨트롤타워 역할 제대로"
촛불행동, 송년 콘서트 연기…"비통함 금치 못해"

민주, 대책위 구성…상황본부와 유족 지원단 설치
이재명 곧장 무안행…"일분일초 시급 위기 상황"

국힘, TF 구성…권성동‧권영세 등 30일 현장 방문
랜딩기어 전부 미작동 왜? 사고 원인 해석 분분

 

29일 오후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도중 충돌 후 폭발한 항공기의 잔해. 2024.12.29. 연합
 

총 181명이 탑승한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항공기가 무안국제공항 활주로로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일제히 애도와 추모 메시지를 내고 정부 당국의 총력 대응을 당부했다.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노총,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전국 154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29일 입장문을 통해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 참담함을 느낀다"며 "여객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생존자들의 귀환을 간절히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구조 과정도 안전하게 이뤄지길 바란다. 이번 참사로 고인이 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면서 "정부 당국의 대응 및 수습 전 과정에서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에 대한 소통 체계 마련, 공간 확보, 의료·심리 지원 등 보호와 지원이 체계적으로, 최우선적으로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참여연대는 별도의 입장문을 내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도 진심 어린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면서 "최상목 권한대행과 정부는 참사를 대응하고 수습하는 데에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또 "생존자 구조와 부상자 치료, 희생자 수습 등 피해자 지원 전반의 과정에 역량을 쏟아야 한다.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필요한 보호와 지원에 정부 당국과 항공사 측은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다시 한번 이번 추락사고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부상자들의 쾌유를 기원한다"고 했다.

촛불행동은 이번 참사에 따라 오는 31일 열기로 했던 송년 콘서트를 잠정 연기했다. 다만 매일 저녁 7시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개최하는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산' 촛불문화제는 계속 이어가기로 하고, 깃발을 들고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검은 리본을 깃발에 달아줄 것을 요청했다. 촛불행동은 추모 성명에서 "아직 사고 수습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탑승객과 승무원 다수가 희생되었다는 소식에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면서 "부상자분들의 쾌유를 빌며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빈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29일 오후 전남 무안군 무안국제공항에서 제주항공 여객기 폭발사고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2024.12.29. 연합
 

정치권도 즉각 회의를 소집하는 등 기민하게 움직였다.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내란 진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지만 이재명 대표 주재로 국회에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사고 대책위원회 구성을 결정하고 참사 수습에 당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위원장은 전남 여수에 지역구를 둔 주철현 최고위원이 맡았으며 상황본부와 사고 수습 지원단, 유족 지원단 등 3개의 기구를 설치했다. 상황본부장은 맹성규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사고 수습 지원단장은 신정훈 행정안전위원장, 유족 지원단장은 서삼석 의원이 각각 맡았다.

이재명 대표는 회의 뒤 곧바로 무안에 있는 민주당 전남도당에 마련된 상황본부로 이동해 직접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정부 지원 방안을 챙기기로 했다. 다만 사고 수습을 고려해 무안공항 현장을 당장 방문하지는 않고 추후 상황을 봐서 판단하기로 했다. 이 대표는 월요일인 30일에는 전남도당 상황본부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 계획이다. 그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일분일초가 시급한 위기 상황이다. 당국은 행정력과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조속히 사고를 수습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해달라"며 "구조대원의 안전에도 각별히 유의해 주길 당부드린다. 국회와 민주당도 사고 수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9일 오후 국회에서 전남 무안공항 항공기 활주로 이탈 사고와 관련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 수습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실로 이동하고 있다. 2024.12.29. 연합
 

여당인 국민의힘은 '무안공항 여객기 사고 수습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권성동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행정안전위, 국토교통위 소속 의원들과 만나 비공개 회의를 열고 TF에서 사고 수습과 진상 규명, 유가족 지원 등 종합적인 수습 대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TF 위원장은 국토교통위 국민의힘 간사인 권영진 의원이 맡았다. 권성동 권한대행은 이날 오후 TF 위원들과 함께 광화문에 있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사태 수습과 대책 마련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했다.

권 대행과 TF 위원들은 30일 오전 무안의 사고 현장을 방문해 사고 수습 및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 방문할 예정이다.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지명자도 30일 비대위원장으로 정식 취임한 뒤 현장 방문에 합류하기로 했다. TF 위원장인 권영진 의원은 지도부보다 하루 먼저인 이날 무안 현장을 방문해 사고 수습 상황을 파악할 예정이다.

정부는 무안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상태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고 현장을 들른 뒤 무안군청에서 2차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모든 관계기관이 협력해 구조와 피해 수습에 총력을 다할 것"이라며 "현장에 설치된 통합지원본부를 통해 피해 수습과 지원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고 유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참사의 원인을 두고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문제의 제주항공 여객기가 착륙하는 과정에서 엔진에 새가 들어가 고장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버드 스트라이크' 가능성이 우선 제기되고 있지만, 조류 충돌만으로 랜딩기어 3개가 전부 내려오지 않았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반론도 적지 않아 정확한 원인 분석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 민들레 김호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