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교회를 노스욕으로 이전하고 창립 22돌을 맞이한 토론토 순복음 영성교회(담임 김석재 목사: 172 Drewry Ave, North York, ON M2M 1E4)가 11월30일 주일 오후 5시 많은 성도들과 축하를 위해 참석한 목회자 등이 예배당을 메운 가운데 창립22주년과 교회이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를 드렸다.
‘뿌리를 찾아 캐내라!(UpRoot It!)’는 주제로 드린 이날 예배는 할렐루야 찬양팀 찬양에 이어 김석재 목사가 예배 시작을 알리고 박세은 집사가 피아노 독주로 ‘얼마나 아프셨나’를 연주했다. 이어 기념영상 상영으로 교회 성장과 치유사역 등 활동을 담은 내용과 한국의 아주사부흥교회(경기 용인)에서 시무 중인 김 목사의 아들 저스틴 김 목사의 복음전파 및 전도사역을 전하는 영상도 소개됐다.
예배는 양경모 목사(순복음 방주교회 담임)가 대표기도를 하고 온타리오 목사사모 합창단(단장 하영기 목사)이 ‘그의 빛 안에 살면’등 3곡의 복음성가를 찬양한 후 신유은사와 치유사역에 열정을 쏟고있는 김석재 목사가 강사로 직접 나서 말씀을 전하며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는데 충성을 다해 사역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김 목사는 ‘기본으로 돌아가라’(마 4:17)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를 통한 성령 받기와 하나님 나라의 임재, 그리고 성령의 치유 능력을 알렸다. 김 목사는 “하루 일과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성령으로 인도받고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한다”면서 손흥민·황영조 선수, 젠슨 황 등을 예로들어 꾸준한 기도와 집중적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김 목사는 또 “예수님도 회개로 시작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베드로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고 사랑받는 수제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철저한 회개로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하루 24시간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신앙의 기본을 깨우쳤다.
김 목사는 이어 신명기 28장을 중심으로 불순종의 결과로 나타나는 ‘저주의 병’들을 열거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 질병들이라고 설명했다. 즉 정신병(28절), 정신분열·조현병(65절), 우울증과 자살충동(66-67절), 호흡기 질환(22절), 피부병과 치질(27절), 뇌혈관 및 심혈관 질환(35절) 등을 들고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기도하면 고쳐주신다”고 역설했다. 김 목사는 COVID-19 환자가 기도했을 때 죽은 균이 나온 사실과 결핵 흔적이 사라져 영주권을 받은 성도의 사례 등도 소개하고 파킨슨병과 중풍 환자들의 치유기록 영상도 보여주었다.
한편 설교 도중 간증에 나선 연세미 집사는 13년 전 집회에 참석한 후 자살의 영과 죽음의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던 극심한 통증이 기도를 통해 치유받는 은사를 체험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예배는 헌금과 광고 시간에 이어 주권태 목사(순복음 토론토교회 담임)의 축도로 마치고, 만찬과 친교시간이 진행됐다.
이후 김 목사는 각종 질환자들을 대상으로 직접 치유와 회복의 기도시간도 가졌다.
순복음 영성교회는 이번 감사예배 주제 ‘뿌리를 찾아 캐내라!’와 ‘모든 치유의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신명기 28장 15~68절)는 성경구절을 토대로 창립 22주년과 교회이전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성도들을 위해 치유사역에 매진해 나간다는 교회비전을 새롭게 했다.
김 목사는“마귀에게 눌리고 방황하던 영혼을 성령으로 바꿔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고 영혼구령에 앞장서게 하셨으니, 목숨 바쳐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충성하며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는 각오를 전하고 “특히 이민생활에서 의지할 곳 없고 소외되고 눌리고 잡혀있는 이들을 위한 목회사역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다짐, 관심과 기도의 성원을 당부했다.
나침반 없이 사막이나 깊은 숲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자. 분명 똑바로 걷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실상은 방향 감각을 잃고 한 지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맴도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환상방황(Ring Wanderer)’이라 부르는데, 대부분 악천후나 피로 등으로 인해 방향감각을 상실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가설이 아니다. 실제 실험 결과, 해나 달 같은 지표가 보일 때는 피실험자들이 직선으로 이동했지만, 안개나 구름이 끼거나 밤이 되어 시야가 차단되면 자신도 모르게 방향을 잃고 뱅글뱅글 돌았다. 눈을 가렸을 때는 더 심각했다. 고작 지름 20미터의 작은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기준점이 사라진 인간의 감각은 이토록 불완전하다.
이와 오버랩되는 성경의 사건이 있다. 출애굽 후 40년간 광야를 유랑했던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다. 홍해의 기적, 마라의 쓴물,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숱한 이적을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직진하지 못했다. 불신앙과 원망으로 영적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가데스 바네아 주변을 맴돌며 긴 세월을 보냈다. 만약 그 상태로 곧장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여호수아 사후 펼쳐진 사사 시대를 보면 안다. 40년의 혹독한 광야 훈련을 거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눈 가린 실험자처럼 ‘죄-심판-회개-구원’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반복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입성했다면, 더 깊은 우상숭배와 불신앙의 굴레 속에서 맴돌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유랑을 허락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는지 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걸음마를 다시 배우는 학교였다.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반석에서 터진 물은 단순한 식량 공급이 아니었다. “나는 너희를 인도하는 여호와요, 너희의 공급자다.” 척박한 땅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법을 뼛속 깊이 새기기 위한 훈련 교재였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광야와 다르지 않다. 문제와 결핍 앞에서 불평과 낙심을 반복하다 보면, 기도해도 변한 것이 없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물론 하나님은 기다려주신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 걷게 하시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게 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평생 걸음마 훈련만 받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겠는가?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나침반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말씀은 길을 비추는 등불이요, 성령은 진리로 이끄는 안내자다. 삶이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 같아도, 나침반만 확실하다면 길을 잃지 않는다. 제자리를 맴도는 환상방황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걷고 있는지 말씀과 성령 안에서 날마다 점검해야 한다. 비록 그 걸음이 조금 느릴지라도, 정확한 나침반을 손에 쥐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말씀과 성령의 나침반을 손에 쥐고, 천성을 향해 담대히 걸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국내외 동포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12·3 내란이 벌써 1년을 맞았다. 깨시민들의 응원봉 위력으로 친위쿠데타를 제압한 환희의 기억들은 생생한데, 마치 영화속 이야기처럼 박제되어 가는 착각이 들어 답답해진다. 내란척결의 준엄한 여망과 달리 적반하장으로 버티고 반격을 꾀하는 내란무리의 저항에 불안과 불만으로 잠 못이룬 날들이 많아서다. 이제 갓 시작된 주모자들의 재판은 언제 끝날지, 과연 중형처벌로 귀결될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많다. 내란일당이 아직도 “계엄이 왜 내란이냐 불법이 아니다”고 억지를 부리며 법정 안팎에서 선동을 계속하고, 재판에서 끝내 반전시키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계엄의 발동요건은 헌법(77조)에 명확히 규정돼 있다. 비상계엄·경비계엄 모두 전시나 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라는 상황적 전제조건과, 군 병력을 동원해야만 사회의 안녕과 질서유지가 가능한 때로 필요조건을 한정하고 있다. 또한 계엄 발동시는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고, 국회가 해제결의를 하면 반드시 따르도록 명시하고 있다.
윤석열 내란일당은 12.3을 전후해 전쟁이나 소요상황이 아님에도 계엄을 선포했다. 전두환 이후 45년 만의 위헌적 불법폭거다. 국회에 통고하지도 않았고, 의사당 점거와 국회의원 체포를 시도하며 시설을 부수고 부상자를 냈다. 국회가 여야 결의로 즉각 해제를 요구한 이후에도 병력 철수를 미루며 2차 계엄을 시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색이 짙자 3시간 반이 지난 뒤에야 해제를 선포했다. 발령에서 해제까지 6시간이 불법으로 점철된 일장춘몽이었다.
나라 안팎에서 내란의 불법적인 실상을 현장영상으로 지켜보았다. 헌재는 불법조치였음을 명백히 하며 만장일치로 윤석열의 탄핵을 인용했다. 이후 수사에서 반헌법적 권력 오남용이었다는 사실과, 윤건희 일가비리를 뭉개고 권력연장을 노린 셀프쿠데타 였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북한 자극을 반복한 위기일발의 전쟁망동도 드러났다. 반대그룹을 북한동조 세력이라며 “헌정질서를 짓밟는 국가기관 교란과 내란을 획책하는 반국가 세력”이라 매도하고 “국회가 범죄집단의 소굴이 됐다“는 궤변으로 합리화하려 했다.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자가 선관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믿고 주장하는 인지부조화도 내란의 이유가 됐다.
하나같이 국가와 국민과 헌법을 무시한 불법투성이였다. 나라가 무너지든 말든, 전쟁 참화가 일든 말든, 눈엣가시 반대자들을 ‘수거’해 처치하고 자기들만의 권력과 이권을 누리며 기름지게 살겠다는 미몽이 아니라면 ‘대통령의 합법적 비상대권’운운 궁색한 궤변을 읊조릴 이유가 없다.
양파겁질 비리와 부패, 권력남용으로 나라를 망치고 국민 삶을 피폐하게 만든 중범일진대, 당장 엄벌에 처해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이 마땅하련만, 재판은 하세월 질질 끌며 구속기한 만료(내년 1월18일)를 앞두고 있다. 수괴와 공범들이 또 다시 풀려나 개선 장군처럼 설치는 것은 아닌지, 다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내란일당과 국힘당 등 그 비호세력이 불법내란이 아니라고 우기며 반전을 노리는 지연책도 문제지만, 국민 대다수는 법원이 내란범을 옹호하며 신속한 단죄를 가로막는다고 의심하고 있다. 윤석열에 의해 임명된 대법원장 조희대는 대선 직전 본인이 직접 나서 대통령 후보 이재명의 무죄사건을 전례없는 속도로 유죄취지 파기환송해 후보직을 박탈하려 했다. 그가 임명한 4명의 영장전담 판사들은 한덕수와 박성재 등 특검이 청구한 내란핵심들의 영장을 줄줄이 기각해 수사의 맥을 자르며 대놓고 막았다. 내란사건을 엉뚱하게 보건전담이던 지귀연 재판부에 보내 시간계산 구속취소 법왜곡으로 수괴석방의 충격을 주고, 법정중계를 본 국민들을 분노케 한 시간끌기 놀이방 잡범재판으로 전락시켰다. 국민들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믿으며 사법부를 존중했다. 그러나 내란사태로 그 허상이 낱낱이 드러나며 신뢰도 급락에 손가락질과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재판이 진실되고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함은 인권보호와 법치실현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법 정의 구현의지가 없는 사법부는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득실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정글사회를 초래할 뿐이다. 성경을 보면 재판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라 했고 재판장은 거룩한 사명자라고 지칭했다. 솔로몬의 재판 예화도 진실과 사회정의 추구가 재판의 본령임 을 강조해준다.
공정재판의 전설적 사례 가운데 페르시아 제국의 부패판사 시삼네스 이야기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화로 회자된다. 당시 캄비세스 왕은 뇌물판결이 밝혀지자 시삼네스를 산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라고 했다. 벗겨낸 살가죽으로 의자를 만들고 시삼네스의 아들 오타네스를 후임판사로 임명해 그 의자에 앉아서 항상 부친을 잊지않고 고민하며 판결하라고 엄명했다는 것이다. 잔혹한 만큼 불편부당한 재판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강조해준다.
국가와 민주주의를 타격한 헌정파괴 내란범 재판이 난장판이 되고 판결마저 엉터리일 경우, 어떤 혼란을 부를지, 사명감 없는 무개념 판사 몇 명의 손에 국가정의가 뒤틀리는 것을 방관해선 안된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