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자·모더나보다 낮은 효과에도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
옥스퍼드대와 아스트라제네카의 코로나19 백신 시약. 옥스퍼드대 제공
영국의 옥스퍼드대와 제약업체 아스트라제네카가 함께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이 화이자, 모더나에 비해 낮은 효과에도 불구하고 팬데믹(세계적 대유행병)과의 전쟁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 전문가 사이에선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는 후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임상3상 초기 결과이긴 하지만 95% 예방 효과를 발표한 두 회사의 백신에 비해 평균 70% 효과에 그친 옥스퍼드-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관심이 더 쏠리는 이유는 뭘까?
아데노바이러스 벡터 모형도. 아스트라제네카 제공
수십년 전부터 활용한 백신 유형…안전성 입증
첫째 안전성이 좋다.
옥스퍼드-아스트라제네카 백신(AZD1222)은 침팬지에게 감기를 일으키는 아데노 바이러스를 약물 운반체(벡터)로 사용하는 `아데노 바이러스 벡터 백신'이다.
아데노 바이러스가 인체 내에서는 복제를 하지 못하도록 유전자 일부를 변형한 뒤, 여기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돌기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집어넣는다. 돌기단백질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세포 침투에 사용하는 도구로 쓰는 핵심 물질이다. 이렇게 만든 백신을 인체에 주입하면 백신이 세포 안에서 돌기단백질을 만들어 면역반응을 유도한다. 즉 체내 면역세포가 이를 진짜 바이러스로 인식해 돌기단백질을 공격하는 항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백신은 이미 수십년 전 개발돼 그동안 10여가지 질환에서 사용된 것이어서 안전성이 확인된 방식이다. 말라리아, 결핵에 이어 에볼라와 2015년 한국에서 유행했던 또다른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질환 `메르스' 백신이 이 방식으로 개발됐다.
반면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은 전령RNA를 이용해 만든 백신으로, 유전공학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이번에 처음 개발됐다. 실제 사용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직 안전성을 검증받지 못한 상태다. 전령RNA란 바이러스의 돌기단백질을 만드는 지침을 지닌 유전 물질을 말한다. 지방 입자가 보호하고 있기는 하지만 체내 효소, 온도 등 외부환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옥스퍼드-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기존 의료시설을 그대로 이용해 보관하면 된다. 옥스퍼드대 제공
별도 장비 필요없이 기존 시설 이용해 보관
둘째 보관 및 운송이 쉽다.
변형이 쉬운 RNA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영하 70~80도, 영하 20도를 유지해줘야 하는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에 비해 옥스퍼드백신은 가정용 냉장고에 보관할 수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보도자료를 통해 “섭씨 2~8도에서 최소 6개월 동안 보관, 운송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기존 의료 시설을 이용해 쉽게 배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백신이 정식으로 승인되면 사람들이 아주 빠르게 접종 받을 수 있다는 걸 뜻한다.
반면 화이자 백신은 백신 생산에서부터 환자 접종 직전까지 초저온을 계속해서 유지해줘야 한다. 예컨대 RNA 백신은 각종 효소에 쉽게 파괴되는데 이를 막으려면 효소가 활동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기존 의료 시설에는 초저온 냉동고가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냉동고 가격이 수백만원에 이른다. 자금력이 떨어지고 의료 유통 시스템이 열악한 곳에서는 백신을 확보하더라도 원활하게 백신을 배포하기 어렵다. 최근 누적 환자 수 50만을 넘어선 인도네시아 정부는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처럼 초저온 보관이 필요한 백신은 자국의 의약품 유통 시스템에 맞지 않아 구매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아스트라제네카의 백신 제조 시설.
비영리 생산·배포 원칙…원가 공급에 저개발국 배려
셋째 값이 저렴하다.
화이자는 약 20달러에, 모더나는 15~25달러에 미국 정부와 백신 공급 계약을 맺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영국 정부, 국제 보건관련 기구 등과 2.5달러에 백신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유럽연합 국가들에는 1회당 3달러에 공급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옥스퍼드대와 개발 계약을 하면서 이미 ‘비영리 서약’을 한 바 있다. 개발도상국에는 원가로 판매한다는 게 아스트라제네카의 방침이다.
넷째 공평 배분 원칙에 가장 충실하다.
아스트라제네카는 공평 배분 시스템을 이끌고 있는 지난 6월 감염병대비혁신연합(CEPI), 세계백신면역연합(Gavi)과 7억5천만달러에 3억회 분량의 백신을 제조해 납품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또 세계 1위 백신 제조업체인 인도혈청연구소(SII)와 중·저소득 국가용으로 10억회 접종 분량을 공급하기로 하고 1차로 연말까지 4억회 분량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반면 화이자와 모더나는 대부분 선진국과 개별적으로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내년까지 모더나와 화이자 백신 10억회 분량을 확보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공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개발을 주도한 기관이 기업이 아닌 대학 연구기관이라는 배경이 있다. 초기 개발을 주도한 옥스퍼드대 제너연구소는 누구에게도 독점권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제약사들과 백신 제조 협력에 나섰다.
영국 사우샘프턴대 마이클 헤드 글로벌 보건 선임연구원은 온라인 과학미디어 `더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세계 인구의 약 9%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의료 시스템 환경도 취약하다”며 “옥스퍼드대와 아스트라제네카의 공평한 백신 배포 약속은 전 세계 빈곤층이 잊혀진 존재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고 평가했다.
전 세계 10여곳에 생산기지 마련…내년까지 30억회 분량 공급
다섯째 생산 준비가 가장 잘 돼 있다.
영국의 과학정보분석업체 에어피니티(Airfinity) 집계를 보면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정된 공급량의 3분의1(32억회 접종분)이 옥스퍼드-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다. 약정을 맺은 50여개국이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및 동유럽의 중·저소득 국가다. 옥스퍼드대는 “백신을 전 세계에 공평하게 공급하기 위해 10개국 이상에서 백신을 제조한다”고 밝혔다. 지난 7월 한국 SK바이오사이언스와의 위탁생산 계약도 이런 방침 아래 이뤄졌다.
아스트라제네카의 운영·정보기술 담당 부사장 팜 청(Pam Cheng)은 2020년 말까지 전 세계적으로 2억회 분량을 공급할 준비를 마칠 수 있으며, 생산시설을 늘리고 나면 2021년까지 30억회 용량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럼에도 인도혈청연구소 아다르 푸나왈라 최고경영자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을 때까지 4~5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비해 화이자는 올해 말까지 최대 5천만회 분량, 내년까지 13억회 분량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90%는 이미 선진국을 중심으로 선구매 계약을 마쳤다. 모더나는 올해 2천만회, 내년 5~10억회 분량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숨은 복병’ 무증상 감염자 발생 차단 효과에도 주목
여섯째 무증상 감염을 낮춘다.
임상3상 중간 결과이긴 하지만 옥스퍼드-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무증상 감염자를 통한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옥스퍼드대는 임상3상 중간결과를 발표하는 보도자료에서 “처음엔 절반 용량을 투여하고 2회째엔 표준 용량을 투여한 경우에 접종자 중 무증상 감염 사례가 낮았다”고 밝혔다. 이는 무증상 감염자를 통한 확산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미있는 효과로 평가된다. 화이자, 모더나 등 다른 백신에서는 보고되지 않은 사례다. 두 회사는 증상이 발현된 임상시험 참가자만을 대상으로 효과를 확인했다.
생명과학 기술의 발전과 긴급사용 승인 제도 등 정책적 뒷받침에 힘입어 코로나19에서는 백신 개발 기간이 무려 10분1 수준으로 단축됐다. 아직 미국 식품의약국의 긴급사용 승인 결정이 내려지진 않았지만, 그동안 개발에서 승인까지 통상 10년 걸리던 것이 이번에는 1년을 넘기지 않을 전망이다. 12월 중순에는 미국을 시작으로 의료진 등 우선 접종 대상자를 대상으로 한 백신 접종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보고된 대로 백신이 높은 효과를 보인다면, 실제 백신 공급이 본격화할 경우 코로나19 상황은 빠르게 좋아질 수도 있다. 영국의 매트 핸콕 보건부장관은 최근 ‘비비시’에 출연해 “뭔가 정상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백신이 나올 때까지는 우리 모두 서로를 보살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곽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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