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끝날지 모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불과 작년 말까지만 해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중국 우한에서는 서서히 이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있었지요.
옛날 같으면 지구 반대쪽 일이니까, 모르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문명은 지구촌 한구석의 문제를 전 세계로 신속히 퍼뜨렸습니다. 두 달 반이 지난 지금, 코로나 19는 말 그대로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갔습니다. 놀랍기도 하지만 솔직히 무서운 일입니다. 바이러스가 사람 몸에 무임승차해서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휩쓸고 다녔습니다. 이제는 비행기를 중단했지만, 이미 전파는 다 해 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못된 바이러스는 이렇게 빨리 전파되는데, 그 좋은 복음은 왜 이렇게 퍼지기가 힘든지요.

불과 두 달 사이에 우리의 삶은 정말 많이 바뀌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도 접촉을 피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화상 채팅을 할 수 있으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경제가 문제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변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듭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는 세상에 소망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더 찾고, 찬양으로 하나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갔을 때 넬슨 만델라가 살았던 감방을 가보았습니다. 정치범으로 27년을 복역했는데 그중 첫 18년을 로빈 섬에 있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방이 엄청 작았습니다. 제대로 눕기도 힘든 방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델라는 늘 창밖을 내다보며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석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그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19는 분명히 지나갈 것입니다. 물론 상흔을 남기며 가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성경 구절을 묵상하며 기도하십시오. 세월을 아끼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엡 5:15-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힘을 냅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코로나 19를 통해 분명히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읍시다.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목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송민호 목사 -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목사 >


지난해 6회 영상제 참여자들.

기독청년들 「There Movement」, 단편 응모작 상영

‘메마른 마음에 십자가의 감동을 전하는 영상운동’을 기치로 젊은이들이 모인 기독영상물 제작 및 보급운동 단체 ‘There Movement’가 제7회 ’떡과 물고기 영상제‘를 오는 10월20일(토) 오후 3시 노스욕 Fairview 도서관 극장(35 Fairview Mall Dr,. M2J 4S4)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2012년부터 시작된 ‘떡과 물고기 영상제’는 매년 한인들이 만든 영상작품 가운데 상업적 영상물을 제외한 단편작품들을 상영하고 제작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등의 이벤트를 진행한다. 올해도 크리스천 영상물을 비롯한 감동적인 단편작품 8~10편을 상영하고 객석과 감독이 대화를 갖는 시간도 마련한다. 또 영상작품 상영 외에 테마에 맞춰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와 선물도 준비한다고 There Movement가 밝혔다.


주최측은 아울러 이번 영상제 작품의 절반 가량은 토론토 지역 제작자들의 작품이며, 그 중에는 고등학생이 제작한 작품도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꿈과 신앙의 신념을 따라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기독영상물 제작 및 보급활동을 위한 비영리단체로 출범한 ‘There Movement’는, 7년 전부터 “화려하거나 세련됨보다는 서툴고 투박해 보이지만 꿈을 쫓아 계속 영상을 만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영상제가 되어 ‘오병이어’가 예수님의 축도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인 양식이 된 것과 같은” 비전을 이루어간다는 취지로 ‘떡과 물고기 영상제‘를 해마다 열고 있다.


< 문의: theremovement.toronto@gmail.com >


우리는 ‘모든 이방인’가운데 “믿어 순종”을 낳게된 기독교 신앙고백자 들이다. 곧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그리고 오직 이 사람들만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롬1:5). 바로 <복음>의 역사성은 의의 태양을 맞아들이는, 아침 햇살이 되는 ‘복음’을 두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주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열려져 있으나, 곧 <복음>안에서 “율법 외에 주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칭의’를 얻을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곧 이것을 가리켜 “주하나님의 의” 바로 예정 하시고 공급하시며 영접해 주시는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크리스쳔의 갑옷을 가르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0) 라고 하는 말씀과 같다. 곧 ‘칭의’는 모두에게 곧 전체 일반에게 제공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주하나님을 구주로 섬기는 것이니, 그를 의지하고 영접하여 매달리는 면에 있어서 모두 그러해야만 한다. “신앙은 우슬초 다발이요, 그리스도의 보혈은 흩어 뿌리는 피다”. 우리가 죄악의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주하나님의 인내의 덕분이다. 즉 주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인해, 집행유예가 바로 <속죄>함 받은 우리 들이다.


열매 못맺는 포도나무가 포도원에 남겨진 이유는 그 주인의 인자함과 정원사의 조정 때문이다. 중재자와 속재물이 없이는 용서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한 시도 참으실 수 없다는 점에서 볼때 이 양자에 있어서 밝히 들어나는 것은 ‘주하나님의’ <의>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는 뜻은 율법의 지위와 기초를 확고하게 하고, 율법은 아직도 우리의 과거를 확신 시켜주고, 미래를 향하게 하는데 효용가치가 있다는 말 이다. 물론 <율법>이 직접 우리를 구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율법을 <중보자(주하나님)>의 손에 들린것으로 알고 그걸 소유하고 거기에 복종하며 “은혜의 율법(사랑)”에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폐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오히려 이 ‘율법’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서로가 도덕률의 이행을 부정하거나 부정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된다. ‘칭의의 열매’ 즉 우리가 의롭게 됨이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주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의지 때문이요, 이것을 조건으로 우리의 무죄와 구원에 대한 원리를 주장 할 수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은혜와 타락의 갈등’에서 머뭇 거리지 말자! 즉 주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걸 행하지 않는 영혼이요, 보다 더 탁월한 것이 된 줄 인정하며 주님의 교훈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이 그걸 어기며 사는 영혼들이다 (롬2:17-23). 즉 자신의 욕정의 지배에 짓눌려 사는 노예로 머무는 자들인 것이다. 율법에 의해서 확신은 되었으나 <복음>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은 그런 자들이다. 더러움을 지적은 하면서도 씻어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다. 곧 일반적인 확신으로 머리가 깨어 있으면서도 자책하는 양심을 가지고 악마를 섬기는 것이다. 즉 주하나님의 법도 알기를 즐거워하기도 하고, 마음 속의 죄를 반대하고 성결의 편을 드는게 있으면서도, 죄에 대한 지배적인 애착에 이 모든 것이 압도 되고 마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이러한 죄와 타락을 상대로 투쟁하지, 그것을 허용치 않으며 그걸 증오하며 슬퍼하고, 짐 같이 여기며 꿍꿍대고 있다는 사실 또한 확실한 말씀이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7). 이 말씀이 바로 <성화의 특성>이고 <성화의 목적>이 되는 것이며, 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 기도는 소망과 인내의 친구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주님을 섬겨야 한다. 즉 <기도>의 열정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도>임무에 냉담하거나 싫증 내어도 안되고 ‘기도’는 주하나님을 중히 여기는 우리의 임무다. <기도>를 등한히 하는 것은 게으름이요 교만이고, 교만이란 우리 모두가 천성으로 타고난 ‘죄’이다. 진지한 기도로 더 없이 귀한 영적 은사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이 온전하고 겸손한 배려를 우리는 본 받아야 겠다.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롬12:16절 하반). 우리 주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즐겨하신다. ‘자비’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자기 죄를 먼저 회개(자백)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주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선하심 그리고 그의 존엄과 자비를 결합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개개의 신자들에게 선행이 풍부하며 주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 하며 온갖 선한 은사가 늘어날 때는 그들의 가지가 퍼진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때는 속 사람이 날로 새롭게 된다. 선한 일을 할 수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서성대는 마음씨야 말로 고결한 <마음>이 아닐수 없다. “주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시21:4).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복음>은 우리를 주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이끌어주고 즉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면케 하며, 우리의 마음이 주하나님을 향해 고양되고 개방될 수있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복음>은 주하나님을 창조주로, 섭리자로, 통치자로, 그리고 은혜를 베푸시는 자로 경외하는 경건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영혼에 등불을 켜주는 <빛>이 되신다. <복음>은 위대하고 뛰어난 진리와 선과 악에 관한 율례(법칙)가 쓰여진 말씀이고, 또한 ‘복음’은 우리 모두가 기쁨의 우물을 길을 수 있는 풍성한 우물인 것이다. 만일 크리스천들이 먼저 주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던져 버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악인’이 되는 것이고, 더욱이 믿음의 봉사를 젖혀 놓을때 그들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태만은 범죄의 길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므로 태만으로 인해 마음이 매우 경화 되어서 마침내 그들은 ‘오만한 자’가 된다.

그런고로 어떤 확실한 규범에 의해 행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정욕의 지배와 유혹에 따라 행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정의 할수있다. 또한 ‘죄인’이라는 단어는 죄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여 그것을 그들의 업으로 삼고 있는 자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오만한 자’란 ‘하늘을 대적하여 입을 벌리는’ 자들이다. 주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모두 주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계시, 그리고 주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인도해 주는 <성서-복음>가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지혜롭고 선한 자가 될 가능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생각(숙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깊이 반성함으로써 오류를 잘 살피고 알아서 고치도록 하여야 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묵상에 잠기도록 하자! 선한 것에 나의 생각들을 고정시키고 그것을 견실히 지키도록 하자!

밤에 잠들기 전에 그날 우리가 향한 것에 관해, 특히 잘못 행한 것에 관해 우리 양심을 살펴 그것에 대해 회개(자복)할 수 있도록 하자! 우리가 밤 중에 깨어 있을 때 주하나님께 대해 그리고 우리를 화평케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묵상하며 살아가자. 소란한 때일지라도 우리 심령을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키도록 하자! 크리스천들은 인도와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끈질기게 드려야 되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주하나님께 깊숙히 다가가자. 주하나님을 의지하고 주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느끼는 생을 사는 것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우리 자신을 주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 아래 두어야 한다. 주하나님의 약속을 부여받은 모든 신자들이 우리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도록 하자. 그리하면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 모두에게 주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긍휼과 은혜 속에서 기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하나님께 늘 진지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그것은 거짓 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온것”이어야 되고 우리의 감정은 입에서 나온 표현과 일치하는 <기도>이어야 됩니다. 거짓된 기도는 효과가 없고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면 주하나님은 은총으로써 <기도>를 맞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소망의 기도’를 간절히 드려야 한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시27:7),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다면 주하나님은 은혜롭게 들어 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가장 훌륭한 성도들까지도 그들의 고통이 심하고 괴로울 때는 쓰러지기 쉬울 것이며, 그들의 영은 압도되고 몸과 마음은 지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는 <믿음>이 특효 있는 활력제가 된다. 그러므로 계속 소망을 갖고 기도하고 기다리게 해 주며, 주하나님께 대해 선한 생각을 유지하고, 스스로 편안한 즐거움을 갖도록 해준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주하나님과의 우리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고, 주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주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담대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뢰하는 주하나님께서 그 <신뢰>에 의하며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하나님께 희망을 거는 자들은 강하고 담대할 만한 이유를 가지며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되도록 할 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누가 우리에게 상을 찡그리든지 간에 우리 자신과 아울러 서로 서로를 격려하여 그리스도의 여정을 계속해 나가고 그 걸음을 굽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기 ‘죄악’이 사해짐으로써 위로를 받고자 원하는 이들은 그 죄악을 뉘우쳐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수치감과 성스러운 부끄러움을 가지고 죄를 고백하여야 하며, 두려움과 성스러운 떨림으로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회심한 즉시의 ‘사도 바울’을 바라보자! 우리는 기도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보다는 호흡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발견 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