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사랑하는 사람이여!

● 교회소식 2014. 10. 13. 17:07 Posted by SisaHan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사람의 위로를 너무 구하지 마세요. 물론 사람이 살아가면서 위로가 늘 필요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위로가 필요하지만, 사람의 위로를 너무 찾지 마세요. 대신 성령의 위로를 더 구하세요. 왜냐하면 성령의 위로는 사람의 위로와 비교가 안 되지요. 사람의 위로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성령의 위로는 근본적이며, 지속적입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의 위로가 있을 때에는 사람의 위로가 없어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위로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위로가 없을 때에는 사람들은 거지처럼 사람의 위로를 찾아다닌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만난 사람의 위로는 상처로 변하기가 쉽지요. 왜냐하면 기대를 너무 가졌기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서,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는 항상 기대에서 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종종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그냥 기분 나쁜 일이 아닙니다. 절대 재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성령의 위로를 더 간절하게 찾으라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위로가 없을 때에,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에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성령의 위로가 부어지는 시간이 바로 이 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때는 성령의 위로도 사람의 위로도 없는 때가 있습니다. 저도 종종 이런 때를 영적인 삶에서 경험합니다. 이 때는 정말 힘이 들지요. 그런데 이 때야 말로 진짜 나와 하나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감각과 감정을 넘어서 깊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위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떤 무드(mood)에 있느냐가 아닙니다. 너무 무드에 예민해지지 마십시오. 무드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나를 찾아오는 것이고, 언제나 바뀔 수 있고, 또 쉽게 나를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떤 무드(mood)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모드(mode)에 있느냐 입니다. 지금 내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가는 모드를 유지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령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유지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의 모드를 유지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무드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영향과 지배를 받아서,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삶의 모드를 말합니다. 감정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을 통해서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여러분이 도달해야 할 특정한 감정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가 늘 유지해야할 기본 모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맞추어 놓으신 기본 설정(default setting)이 성령충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너무 무드를 타지 마세요. 항상 모드를 유지하세요. 성령충만의 모드를 유지하세요. 그러면 내가 틀을 정해놓고서 만들어 가는 거북한 거룩함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놓고서 빚어 가시는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거룩함이 내 삶과 인격에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격 안에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성실, 부드러움, 자기 절제.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 가을에 여러분의 삶에 거룩함의 열매들이 맺혀지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 고영민 목사 - 이글스필드 한인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완벽한 시대

● 교회소식 2014. 10. 7. 08:47 Posted by SisaHan
예전에 읽은 한 작은 이야기를 더 자상하게 그리고 의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각색을 했다.

어느 나라에 한 젊은이가 완벽을 추구했다. 가장 우선 되는 것이 결혼이었기에 완벽한 아내를 찾아 나섰다.
산 넘고 물 건너 이 나라 저 나라를 헤매면서 소문에 따라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났으나 아니올시다 였다. 먼저 얼굴이 예뻐야겠다 싶어 만났지만 몸매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몸매가 좋다 해서 만났더니 이번에는 배운 게 없는 여자였다. 좀 배운 여자라 해서 만났더니 집안이 별로였다. 집안이 좋고 문벌이 좋고 인물이 좋고 성품이 좋고 그런 여자를 도무지 만날 수가 없었다. 거의 절망에 가까웠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느 동네에 진짜 인물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수소문하여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가 만났단다. 만나고 보니 정말로 완벽한 여자 같았는데 그 여자 역시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살고 있었으니 이유는 그 여자도 완벽한 남자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는데 문제는 이 남자도 자신이 찾는 완벽한 남자가 아니라며 퇴짜를 놓았단다.

여기까지가 오리지널의 이야기인데 여기서부터 각색을 한다. 두 남녀가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완벽한 배우자를 찾고 찾았는데 우리 모두 실패를 했지 않는가? 그건 막상 결혼해도 서로 완벽한 삶을 산다고 보장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성경에도 결혼을 5 번이나 한 여자가 있는 것을 보니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겠음으로 우리 둘 다 완벽한 배우자를 찾는 것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둘이 짝을 이루어 삶이 어떠리요 하고 서로를 설득하여 결혼을 했단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서로를 보완해가면서 살다 아들을 낳았다. 딸을 낳았다 해도 괜찮고. 어쨌던 아들을 낳고 길러 보니 그리 완벽한 아들도 딸도 아니었다. 한 살 먹고 두 살 먹고 어느새 장성했노라 했는데 어느 날 아들 녀석이 뜬금 없이 내뱉은 말씀이 어째서 제게는 완벽한 부모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했다. 결론을 뭐로 내릴까? 집을 나갔다? 

인간사가 그렇지 않을까? 지난 번 한국에서 총리 후보자들을 위한 청문회를 개최한다 안 한다 하면서 자격을 운운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달의 자격이라고 욕을 먹는 분들이나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나 모두가 다 안타깝기만 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이 땅에 완전 완벽이 없고 언제나 자신을 발견하고 고쳐나가는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보지않는가?
그것이 어디 청문회 뿐인가? 교회도 그렇다. 인간이 모인 교회가 완벽한 교회로 완벽한 당회 제직회로 설 수가 있겠는가? 목회자 어느 누가 완벽한 목회자로 성도를 가르치고 목자로서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 이외에는 모두 자격미달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던 다윗의 범죄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용서해야 한다고 했던 설교자와 성도들이 막상 자기 앞에 놓여진 문제와 사람을 대할 때는 그런 말들을 잊고 그렇게 정죄하고 따진다.
문제는 우리 후손들의 평가다. 내가 낳은 자녀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리고 세상은 교회를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평신도 글마당] 가을 빛

● 교회소식 2014. 10. 7. 08:32 Posted by SisaHan
가을빛은 다르다. 하늘이 파랗다 못해 투명하다. 나를 빤히 지켜 보시는 하나님의 맑은 눈동자인가 보다. 구름은 파란 하늘에서 마음껏 유영한다. 산도 그려보고,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를 그려 보이기도 한다. 저편 하늘에선 하이얀 솜사탕이 되어 두둥실 떠다니며 공짜(?)라며 맛 좀 보아 달란다. 
푸르다 못해 검푸르게 변했던 나무들이 조금씩 연해 지더니, 나무가지 끝에서부터 불그래 물들어가고 있다. 가녀린 나무 몇은 서둘러 여행이라도 떠나려는가… 붉게 단장하고 맵씨 좀 보아 달라한다. 
발코니에 심어 둔 고추가 빨갛게 익어 있다. 페이스북에 가을사진 몇장 올려 보았더니 날보고 ‘추남’이라고들 한다.
큰길 보다는 주택가 좁은 길을 택하여 운전을 하면 더 좋다. 정성껏 심어 둔 가을꽃들과 정원수의 단풍들이 아름답다. 올해는 단풍이 더 아름다울 것 같다. 여름내내 적당한 비가 내려 주어서, 지난 겨울 얼음폭풍을 맞았던 나무들을 열심히 살려 주었다. 그래서 일까, 더 푸르고 짙은 숲이 여름을 견디게 해 주었었다.
 
언젠가 이야기 하였지만, 여름에 나무가 잘 자라면 가을 단풍이 더욱 아름답다. 여명보다는 노을색상이 더 진하듯이, 새봄 여린 새순도 예쁘지만 가을의 농익은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설래게 한다. 
우리 인생도 나이가 들어 황혼이 될 때 쯤이면, 각자의 색상이 나타난다. 젊은 시절, 건강한 삶을 살았다면 늙어서 더욱 그 빛을 발한다. 마음을 한 곳에 두고 열심을 다 했던 사람들은 인격이 되어 얼굴에 나타난다. 늙음이 더 행복함은, 시간의 여유와 넉넉한 마음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권면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사랑’ 이다. 큰 사랑을 가슴에 품게 된다면, 세상이 행복해진다. 내가 행복하면 이웃도 행복해진다. 
진한 가을빛을 발하는 사람이고 싶다. 초록과 어우러진 노란 색이, 초록과 어우러진 빨간 단풍이 밖으로 나오라고 유혹한다. 나는 지금 어떤 빛을 발하고 있을까?
 
우리 모두는 지나 온 삶 만큼의 빛을 발하고 있다. 가끔은 장례식장에서 느끼는 아름다움도 있다. 연세도 적당히 드시고, 자녀들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평안한 모습의 고인을 뵈올 때 느끼는 감정이다. 늙음을 아쉬워해서는 않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여유가 있고, 더 사랑을 배풀고, 부부가 함께 여행도 즐기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웃에게 본이 되며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모습에서 우리들은 고운 ‘가을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전문 사진가는 아니지만, 사진을 자주 접하다 보니 약간의 요령(?)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침을 여는 여명의 아름다움과 저녁노을을 가장 많이 찍게 되었다.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비춰주는 노을을 볼 때마다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게 된다. 
오늘은 외출 하였다가 집에 들어오는 길에 가을빛을 사진기에 담아 보았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뒷 차를 먼저 지나가게 하면서 느긋한 가을빛에 취해 보았다. “주님! 저에게서도 저처럼 아름다운 색상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오늘을,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내가 되어 보자고 또 다짐해 본다. 
창문 밖에 비추인 가을빛이 방안에 들어 오더니, 나의 마음 한켠에 눌러 앉아 버린 오후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베들레헴 지역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그들이 살던 그곳에 큰 흉년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데리고, 지금의 요르단 지역인, 요단 강 동편 모압 지방에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남편 엘리멜렉은 죽고, 두 아들은 장성하여 그곳 여인들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두 며느리 이름은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안타깝게도 나오미의 두 아들도 그곳에서 죽게 되고, 이제 나오미와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들도 너희들의 살 길을 찾아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오미가 이렇게 한 이유는 그 당시 세 여자가 한 곳에서 생활을 유지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법에는 여인들은 남편으로부터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떠나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기로 작정 합니다. 이제 룻은 함께 하기로 한 시 어머니인 나오미와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난하고 궁핍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룻기 2장 23절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 하니라.” 
그 당시 남편을 잃어 버린 과부 룻이 살아 남은 방법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그것으로 시 어머니와 연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어떤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두 여인이 굶지않고 먹을 만큼, 즉 그들이 원하는 만큼 가져올 수 있는 이삭들이 늘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나눔의 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3장 22절에서 이렇게 이웃들과의 나눔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한, 신명기 24장 19절부터 21절에서도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추수할 곡식의 일부를, 나에게 주신 물질의 일부를, 더 구체적으로 내 삶의 일부를 나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우리가 나누고 섬기고 돌보아야 할 우리의 이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감사의 계절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너의 땅 안에 너의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저의 손을 펴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나누는 손과 나누는 발과 나누는 삶의 모습이 있을 때, 우리를 통해 이 땅에는 더 큰 감사의 찬양과 함성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을 맞이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한 톨도 남김 없이 다 우리들의 곡간에 넣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또한 이 땅의 우리들의 이웃들이 그것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주신 일부를 남겨 두는 풍성한 감사의 계절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 이충익 목사 - 시냇가에 심은 초대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