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화의 선각자

● 교회소식 2014. 7. 14. 17:04 Posted by SisaHan
한국 속속들이 알고, 보듬어 안고 산 ‘착한 목자’
게일 선교사 한국선교 125주년 기념 선교대회

온타리오 출신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한국명 기일: 奇一) 선교사의 한국선교 125주년을 기념하는 선교 대회가 지난 6월28일(토)부터 30일(월)까지 서부장로교회(담임 박헌승 목사)와 토론토 영락교회(담임 송민호 목사), 게일 선교사의 고향인 온주 앨마(Alma)에서 차례로 세미나와 출판감사예배, 생가탐방 등 프로그램으로 열렸다.
40년간을 한국에서 헌신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림은 물론 성경과 고전번역 등 문화적 기여, 개화기 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등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게일 선교사의 사역과 삶, 그리고 그의 한국선교 공헌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번 선교대회는 서부장로교회와 영락교회가 마련하고 온주교회협의회가 주관해 석동기 회장(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 사회로 진행됐다.
 
세미나는 28일 오전부터 서부장로교회에서 임희국 교수(장신대 교회사:Dr.Th)의 ‘한글 성경번역과 하나님 용어선택에 대한 게일의 공헌’,탁지일 교수(부산 장신대 교회사: Ph.D)의 ‘게일의 초기선교에 나타난 선교 패러다임-부산설교와 대중설교를 중심으로’, 송민호 목사(영락교회: Ph.D)가 ‘게일이 살았던 토론토’, 유영식 교수(전 토론토대: Ph.D)는 ‘게일의 체현화(體現化)와 조선 기독교화(基督敎化)에 대한 소고’를 주제로 강연하고 세미나에 이어 유 교수가 게일의 삶과 선교를 폭넓게 조명해 쓴 책 ‘착한 목자 게일’ 출판 감사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책을 펴낸 도서출판 진흥의 박경진 장로가 기도하고 박헌승 목사가 “착한 목자 저술은 하나님의 사람 게일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착한 성도, 착한 남편과 아내,착한 자녀로 살도록 감동을 준다”는 말씀을 전하고 민경하 선생의 “선교사 지망생들의 필독서”라는 서평에 이어 유영식 교수가 인사와 함께 책을 박헌승·송민호 목사 등에게 증정하고 박태겸 목사(동신교회 담임)가 축도했다. 29일 저녁에는 영락교회에서 임희국 교수가 ‘19세기말 한국의 현대화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발견한 한글의 가치와 한글연구’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30일 생가방문은 1백여명의 성도들이 참가해 앨마에 있는 게일의 생가와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 그의 삶을 되새겼다.

 
임희국 교수는 세미나에서 성경번역과 하나님 이름에 대한 게일의 공헌에 대해 “1890년대 성경이 한글로 번역·개정되는 과정에서 하나님 이름 채택과 그 표기에 대해 교사들과 나중 국어학자들도 참여한 논쟁이 일어나, “중국의 상제(上帝), 한국의 하느님/하나님, 천주(天主), 여호와, 참신 등이 거론되는 가운데 게일은 한글학자 주시경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하나는 일(一)을 뜻하고, 님은 주인·임금을 뜻하는, 즉 한 분이시며 크고 영원하신 창조주 조화옹(造化翁)’이라고 풀이, 명칭논쟁이 마무리 되는데 크게 기여해 복음의 씨앗이 한국 토양에 싹을 틔워 한국적 기독교신앙고백이 창출되게 했다”고 전했다.
 
탁지일 교수는 게일의 선교 패러다임에 대해 “문학을 전공했고 언어적 달란트도 탁월했던 게일은 특히 ‘선교를 위해선 언어를 효과적으로 알아야 한다’면서 언어와 문화를 통해 사역에 접근했다”고 전했다. 탁 교수는 “게일은 그렇게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깊이 접하고 이해하며 고린도전서 9장 22절 이후에 기록된 바울의 선교모토를 소신으로 삼아 한국적인 사역, 한국인 눈높이로 복음을 전하는데 힘써, 가령 대중선교에 나서며 ‘사랑방’선교를 했고, 서양에 흔했으나 한국실정에 맞지않은 노상설교와 서양식 장의자를 배제했다. 또 간략한 전도지를 뿌렸던 당시에 ‘난봉 자식이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이라고 이해하기 쉽게 만든 전도지 한 장으로 인생을 바뀌게 만들 정도로 한국인을 최대한 배려한 선교방식 등 “게일은 복음을 전하는 게 그 어떤 것보다 한국을 잘되게 하는 것이라며 한국을 사랑한 신앙인이요, ‘근대를 산 탈근대적인 선교사’였으며 시대를 초월해 살았던 선각자였다”고 평가했다. 

송민호 목사는 게일의 시대 토론토를 소개했다. 게일이 1888년, 2년 뒤 로버트 하디,또 1892년에 올리버 에비슨 등 토론토대 출신으로 조선에 복음을 전한 3명의 위대한 선교사가 배출된 1800년대 토론토는 산업화 영향으로 전기와 기차등이 등장했다. 1851년 인구는 영국계가 97%인 3만명이었는데 73%가 개신교, 25%가 카톨릭이었다. 미국의 D.L.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학생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번졌고,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토론토에서 4년을 공부한 게일에게 당시는 변화의 심장으로 작용했고, 다문화사회의 경험을 얻게 했으며 대형교회들이 신앙열정을 안겼다. 그때 Church Street에는 앵글리칸의 St.James 교회를 비롯해 뱁티스트였던 Metropolitan United Church, 가톨릭인 St.Michel 교회 등 대형교회의 첨탑들이 즐비했다. 건물도 컸지만 성도들이 수천명씩 예배를 드리는 영적 부흥기였다. 그런데 지금은그 교회들이 박물관화 하고 있다.특히 Metropolitan교회는 정부가 합법화 하기 이전부터 동성애를 지지했고, 지금도 담임목사가 동성애자다.

유영식 교수는 게일의 조선화와 조선기독교화를 소개한 강연에서 “게일은 숫가락과 젓가락, 베개 등을 늘 지니고 각지 선교를 다닐 정도로 한국적 삶을 파고들며 어떻게 스스로 한국화하고 한국적 기독교가 되게 할지를 고민했다”고 전했다. 성경과 고전 등 번역은 물론 찬송가를 우리 곡조에 맞춰 작사하기도 해 양산도 아리랑 곡의 ‘꽃과 새를 보라’를 짓기도 했던 게일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는다는 성경말씀으로 인해 ‘인육을 먹는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자,‘인자(人子)’가 ‘Son of God’이 아닌‘Son of Man’의 오역이었음을 발견해 내는 등 한자에도 능통했다고 유 교수는 전했다.
한국사를 꿰뚫어 이율곡 선생과 충신 포은 정몸주를 잘 알고 존경하며 영정까지 모셨던 게일은 일제의 침략을 보며 “정몽주의 단심가만 기억하고 있으면 한국은 일본화, 또 좌경화도 안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고 소개했다. “고종과 순종이 서거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던 게일은 아무리 외국인이 한국을 안다 해도 그 처럼 속속들이 알고 마음에 보듬어 안고 산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 유 교수는 “‘내 평생 조선과 같이 울고 웃었습니다’라고 회상한 그가 소천에 앞서 말했다는 ‘How Wonderful, How beautiful!’은 바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게일의 말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준 천국일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 문의: 905-803-8800, 416-494-0191 >

 

올해 GKYM 토론토에서

● 교회소식 2014. 7. 14. 16:46 Posted by SisaHan

12월 28~31일 Congress Centre

2세 청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전세계 미전도 종족 사역자로 헌신을 결단케 하는 젊은이들의 복음잔치인 세계 청년 선교축제(GKYM: Global Kingdom Young-adults Missions Festival) 제9회 2014년 대회가 토론토에서 열린다. 지난 해에는 미국 로체스터와 한국의 서울에서 동시에 열렸었다.
지난 2008년 캐나다 나이아가라에서 첫 집회를 가진 뒤 다시 캐나다에서 열리는 것은 6년만의 일로 토론토에서 다시 청년선교의 부흥을 기약하게 된다. 2014 GKYM대회는 토론토 콩그레스 센터(Toronto Congress Centre)에서 12월28일 주일부터 31일(수)까지 3박4일간 열린다. 올해 대회에는 청년과 함께 2012 시카고 대회부터 시작된 GKYM 청소년대회도 열리게 된다.
 
GKYM대회를 개최하는 GAP(Global Assistance partners)은 6월24일 낮 교계 목회자들을 Toronto Congress Centre로 초청, 올해 대회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GAP 대표인 임현수 목사(큰빛교회 담임)는 “GKYM 대회는 지난 2008년 처음으로 캐나다에서 개최된 후, 현재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 각지와 서울에서 대회가 열림으로써 많은 세계 한인청년들이 선교의 비젼을 알게 되는 귀한 선교축제로 성장하고 있다.”면서 “2014년 GKYM 대회가 다시 한번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다는 것을 기쁨으로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인 사역자 외에도 ‘월드비젼 캐나다’, 현재 Korean Christian Fellowship과 동역하고 있는 ‘Inter Varsity Christian Fellowship’, ‘The Canadian Bible Society’, ‘The peoples Church’ 사역자 등도 참석해, 2013년 ‘Korean’을 ’Kingdom’으로 발전적 변경해 글로벌화 한 GKYM의 비전 확장을 보여주었다.
 
< 문의: 905-677-7729, 647-969-7729 >


사실 설교는 성경 말씀과 회중, 그리고 한 주간 말씀을 묵상하며 차곡 차곡 준비하며 기도로 써내려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한 말씀이 얼마나 성경과 하나님이 원하는 말씀일까? 고민하며 씨름을 합니다. 행여 지식 전달이 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 반추된 말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그런데 칼럼은 다릅니다. 다양한 독자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주제가 좋을까? 고민하였습니다. 아무튼 사람이 살아가는데 친구가 필요함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요사인 한국과 캐나다가 아니, 전 세계가 한 공간 안에 있는 느낌입니다. 매일 저녁이 되면 아내의 친구가 어김없이 보이스톡으로 연락을 해 옵니다. 사실 카톡오는 소리는 들어도 어떤 내용인지 여자들만의 공간 이야기입니다. 나눔의 삶이 행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연히 아내가 둔 전화기 액정에 뭔가 글이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다름 아닌 문학의 대가 톨스토이의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10가지 지혜의 글이었습니다. 1.일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성공의 댓가입니다. 2.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능력의 근원입니다. 3.운동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4.독서를 위해서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지혜의 원천입니다. 5.친절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6.꿈을 꾸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대망을 품는 것입니다. 7.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구원받은 자의 특권입니다. 8.주위를 살피는데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이기적으로 살기에는 너무 짧은 하루입니다. 9.웃기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영혼의 음악입니다. 10.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이는 인생의 영혼의 투자입니다.…그렇습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려고 시간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주를 둔 할머니들의 글을 읽어보면서 참으로 아름다고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넉넉한 마음이 서로를 격려하며 비록 멀리 있지만 가까이서 숨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요.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누는 넉넉한 글들이 더욱 삶을 풍요하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친구가 전해주는 고국의 소식과 삶에 대한 애환들을 읽으면서 아내가 흐뭇해 하는 모습은 더불어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내심 이와 같은 좋은 친구가 있는가? 친구가 많다기 보다는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 단 한명이도 있는가? 곰 새겨 봅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마치 황량한 광야 길을 걷는 동반자와 같습니다. 그래요. 외로움과 눈물도 함께 나누면 반으로 줄고, 또한 기쁨을 함께 나누면 배로 늘어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 말 할 수 있습니다. 태평양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은 자신의 곁에 좋은 친구가 없다고 탓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도록 시간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손 내밀어 일으켜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 말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친구는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가리켜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이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믿는 자들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당신들은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의 삶은 무엇보다도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의 개념을 다시금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진정한 친구가 없다고 탓하기 보다는 나 자신만이라도 좋은 친구가 되길 다짐하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시간을 한번 내어 봅시다.

< 안상호 목사 - 동산장로교회 담임목사 >


복음서 누가복음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라는 예수님의 수사학적인 의문문을 접하면서 이번에는 특별히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황당하기도 하고 절망감마저 들게 했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재림에 앞서 세상의 영적 상태가 일반적으로 개선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식어져 희박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재림 시에 진실한 믿음의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탄식의 말씀이기도 하다. 주님은 창세 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계시면서 몸소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이 시간에도 한치의 착오도 없이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은 틀림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 나셔서 갖은 박해와 고통과 질고 속에서도 세상에서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위해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기적으로 사역하셨으나 주님의 임재와 권능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점점 식어져 가는 것을 보시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 영적인 면에서 믿음이 부족한 여섯가지의 비유를 직접 말씀하신 누가복음 18장 전내용을 분석해 보면 먼저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여기서 재판장은 로마인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판사로 유추되며 유대인 소송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유대인 과부는 불신자이면서 이민족 재판장에게 까지 원한을 풀어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하면 들어주리라는 믿음에 기어코 해결을 보았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믿는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뜻은 끈질기게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 보다는 하나님에의 믿음이 연약하여, 다시 말해 반신반의로 하나님께 요구조차도 하지않는 부족한 믿음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비유에서도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 믿고 세리를 멸시하는 부족한 믿음을 보였고 세리는 자기가 죄지은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 죄인임을 인정하여 의롭다고 간주는 되었지만 죄를 짓는 세리에서 떠날 수 있는 큰 믿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린 아이들과의 믿음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부르실 때 아이들은 가식과 두려움 없이 다가왔다. 아이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용납하시고 친절하게 대우한다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완전한 믿음이 없이 부족한 믿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는 어른들의 부족한 믿음을 지적한 것이다. 부자관리의 비유에서 관리는 예수님께 내가 어찌 하여야 영생을 얻겠나이까? 물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으며 구제도 하고 선행도 많이 하였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니 관리는 돈을 더 믿고 영생의 믿음을 경시하는 부족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다른 한 비유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방인들에 넘겨져 죽음을 당하고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 하셨으나 제자들은 이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얼마나 부족 한가를 알 수가 있다. 마지막 비유로 어느 맹인은 예수님이 많은 불구자와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은 나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받는 믿음에는 이르지 못한 믿음으로 그나마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8장을 부족한 믿음의 장으로 부르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한 점의 죄도 없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온 생애를 보내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계속 증거하고 계신데도 오늘날 믿음의 우리들조차 아직도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니?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 중보기도 하시면서 재림하시는 그때에도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겠으니 참으로 우리 믿는 자들이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어떻게 맞이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의 믿음이 의심많은 ‘도마’와 무엇이 다른가? 오늘날에도 믿음이 점점 식어져 가고 있으며 실족까지 하고 있으니 믿는 자들에게는 가슴 아픈 한탄 뿐이고 전도의 대상인 불신자들에게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있으니 어찌 몸에 전율을 느끼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갖지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멀어지며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은혜는 오직 사랑으로 역사 하시는 믿음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 이승고 - 토론토영락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