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수고 하세요

● 교회소식 2015. 2. 16. 12:56 Posted by SisaHan

캐나다에서 20년째 살지만, 아직도 영어로 생각이 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게 된다. 그래서 종종 “이 표현은 영어로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말 중에서 어떤 표현은 영어로 번역하기 힘든 말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수고 하세요’이다. 한국에서는 아주 자주 쓰는 표현인데, 영어로 번역하기가 참 힘이 든다. 굳이 영어로 직역하면, ‘take pain’ (고통을 감당하세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까? 영어에는 이런 인사도 없을 뿐 아니라, 이렇게 인사를 한다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게 만들 것이다. 가만히 보니깐 영어 인사 중에서 ‘수고 하세요’라는 인사와 제일 가까운 인사는 ‘take care’(잘 돌보세요) 또는 ‘take it easy.’(쉬엄쉬엄 하세요)와 같은 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헤어질 때에 우리는 ‘take pain’(고생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데, 캐나다 사람들은 ‘너무 고생하지 마세요!(take care, take it easy)라고 인사를 한다. 인사의 정서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실제로 내가 자주 가는 은행 직원은 헤어질 때에 나에게 ‘Don’t work too hard.’(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세요) 라고 인사를 자주 한다.

인사말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정서가 담겨져 있다. 전쟁이 많았던 유대인들이 ‘샬롬’(평화)이라고 인사를 한 것이나, 날씨가 안 좋은 영국인들이 ‘Good Morning’이라고 인사를 한 것이 그런 예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왜 헤어질 때에 ‘수고 하세요’라는 인사를 했을까? 고통스러운 우리의 역사 현실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고, 노력을 중시하는 유교의 문화, 인생을 고통으로 보는 불교의 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째든 배경에 상관없이 우리는 ‘수고 하세요’라는 인사를 계속 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사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담아서 써야 할까?

나는 나름 이런 의미를 담아 보았다. 인생은 고(苦)이다. 그래서 인생은 고생(苦生)이다. 고통 없이 살 수 도 없을 뿐 아니라, 고생이 없이 사는 것이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생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차피 고생할 바에는 의미 있는 고생을 하자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 없는 고생을 하면 불행해지지만, 사랑 있는 고생을 하면 행복해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해서 고생을 하면 인생이 위대해 진다. 사실 우리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고생한 분들이다. 예수님이 위대한 이유는 온 인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고생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고생의 철학을 담아서 ‘수고 하세요’라고 인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당신이 남아서 수고를 하는 것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하는 위대한 고생입니다. 누군가 대신해서 수고하는 당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새해부터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수고 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면 어떨까?

< 고영민 목사 - 이글스필드 한인교회 담임목사 >




분쟁지역 참상·어린이고통 알린 기독 언론인

IS(이슬람국가)에 의해 억류되어 있다 참혹하게 숨진 일본인 인질 고토 켄지(後藤健二) 씨는 기독교인으로 일본기독교단 덴엔쵸후(田園調布) 카나자와교회 교인이다. 일본 교단은 그의 무사 석방과 시리아의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을 갖기도 했다. 덴엔쵸후교회는 고토 씨가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전 교인이 모여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지난 2월 1일 아침, IS가 억류하고 있던 고토 켄지 씨를 참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토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전 세계 분쟁 지역을 돌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취재해 왔다. 반복된 IS의 참수에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분노하며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고토는 언론인의 꿈을 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일본으로 돌아와 다큐멘터리 등의 TV 프로그램 제작자로 활동하다 독립 통신사인 ‘인디펜던트프레스’를 세웠다. 그는 홀로 시에라리온·르완다·시리아·아프가니스탄 등을 누비며 분쟁 지역의 아이들 이야기를 주로 보도했다. 찍은 영상과 사진들을 NHK 등 주요 방송사에 제공했다.
고토의 눈길을 끈 이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전 세계의 아이들이었다.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는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 4년 전부터 내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리아를 오가며, 아이들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힘써 왔다.
영상뿐만 아니라 틈틈이 책도 집필했다. <다이아몬드보다 평화를 원한다 ― 어린 병사 무리아의 고백>은 서아프리카의 오랜 내전 국가 시에라리온에서 소년병으로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소녀들의 이야기는 <혹시 학교에 갈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고토는 기독교인이지만 이슬람 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도쿄신문>은 고토가 일본에 머물 때, 평화와 아동 인권 중요성을 강연하러 다녔다고 전했다. 2005년부터 매년 5월에는, 도쿄 기독교 학교 타마가와성학원에서 중학교 3학년에게 평화를 주제로 수업했다. 고토가 IS에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이 학교의 학생 700명은 매일 아침 그를 위해 기도했다. 참수 소식이 전해진 후 학교는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기며 그를 추모했다.“고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비참한 현실에 있다 해도 분노와 증오를 부풀릴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로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린 이제 그 의미를 되묻고 싶습니다.”


참수 소식이 전해진 2월 1일, 고토의 아내 린코는 프리랜서 언론인 지원 단체인 Rory Peck Trust에 다시 한 번 글을 올렸다. “가족들의 슬픔이 크다. 우리는, 두 딸의 아버지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부모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잃었다. 분쟁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전하기 위해 힘쓴 남편의 삶이 자랑스럽다” 슿픔에 젖은 어머니 이시도 준코도 “아들 켄지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꿨고 분쟁과 가난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일했다”며 “슬픔이 증오의 사슬을 만들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고토를 위해 기도한 가나자와 교인들과 이노카와 목사는 “IS는 고토를 통제하려 했지만 그의 영혼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2월4일은 입춘(立春)입니다. 24절기 중 첫째 절기로 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캐나다는 아직 한겨울이지만, 대한민국의 산하는 입춘이 되면 겨울바람이 약해지면서, 봄기운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이 날에는 마을 집안마다 어른들이 먹을 갈아 붓으로 화선지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써서 대문에 붙이며, 새로 오는 봄을 희망으로 맞이했습니다. 이날에 햇살이 화창하게 내리면 얼어있는 땅을 뚫고 새싹이 금방 돋아날 것 같은 온기를 느끼며 아이들은 뛰어 놀았습니다.
아직은 겨울 추위가 끝나지 않았지만, 입춘은 이제 곧 봄이 오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 희망의 의지는 입춘의 뜻에서 잘 나타납니다. 입춘의 립(立)의 뜻은 ‘똑바로 서다, 확고히 세우다’ 입니다. 지금은 겨울의 차가운 땅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이제 곧 그 동토를 뚫고 일어설 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입춘은 봄이 일어서는 날입니다. 겨울 추위가 아무리 혹독하더라도, 그 겨울의 터널 끝에 봄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음을 입춘은 알려줍니다.


인생에도 겨울이 있습니다. 청년층이든, 중장년층이든, 노년층이든 누구나 겨울을 맞습니다. 취업 실패, 가정의 위기, 육체와 마음의 병 등 여러 가지 찬바람이 우리 인생에 겨울을 불러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꽁꽁 얼어붙은 땅 같은 그 혹독함에 괴로워하며 절망합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자연의 이치는 알고 있지만, 인생의 겨울 한가운데에도 그 동토 아래에서 봄이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수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는 인생의 겨울을 맞은 사람들의 막막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요한복음 5장에 38년간 병을 앓고 있던 한 병자가 치유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었지만, 오랜 기간 병을 앓아 이젠 일어날 기운도 없었고, 기어갈 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38년간 인생의 겨울을 겪어 이제는 아무런 희망 없이 누워있던 그를 만난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다리에 힘을 주었을 때, 놀랍게도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 얼었던 땅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듯이, 그의 육체가 일어났고, 그의 인생이 일어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경에는 이 복음의 힘으로 인생이 절망에서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 복음의 힘은 겨울을 만난 우리들의 인생을 봄의 새싹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는 인생의 겨울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마칩니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예수님의 복음은 38년된 병자를 일으키셨듯이, 겨울 추위 같은 막막하고 혹독함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며 그들의 인생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 이진우 목사 - 낙원장로교회 담임목사 >



[기쁨과 소망] 기회 있을 때에

● 교회소식 2015. 1. 30. 20:19 Posted by SisaHan

혹시 미국의 20대 대통령인 제임스 가필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마도 없을 겁니다. 취임한 지 불과 몇 달만에 괴한의 총격을 받아 서거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길 시간이 없었으니 우리에겐 생소한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평가하는 바는, 가장 복음주의적인 대통령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유일한 목회자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 분이 젊었을 때 방황을 하였었나 봅니다. 소매치기를 하면서 살았던 거에요. 그런데 하루는 단짝처럼 붙어다니는 다른 소매치기 청년과 함께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됩니다.
그 때 가필드는 갑자기 마음이 찔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교회에 들어가서 회개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단짝 친구에게 교회에 같이 들어가자고 말을 건넵니다. 하지만 단짝 친구는 거절을 하고 교회를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래서 가필드만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 후로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곳에 서 있게 됩니다. 교회에 같이 들어가자는 가필드의 요청을 뿌리쳤던 청년은 소매치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고 그로 인해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감옥 안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 막심할 수 밖에 없는 뉴스를 듣게 됩니다. 신임 대통령이 취임한다는 뉴스가 감옥 안에도 전해졌는데, 그 대통령이 다름 아닌 20년 전에 함께 소매치기하던 가필드였던 겁니다.


한순간 찾아온 기회를 붙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가필드는 교회를 그냥 지나쳐도 될 법한데, 마음이 찔리는 그 느낌을 소중히 여겨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대통령이 됩니다.
이와 반면에,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이를 차 버리고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계속 살았던 가필드의 예전 소매치기 동료는 철장에 갇혀서 황금같이 귀한 젊은 날을 허비하고 맙니다.
주님은 우리를 늘 부르시는 것 같지만, 사실 그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인 즉슨, 기회가 있을 때에 붙잡지 않으면 그 기회가 가져다 줄 길에서 더욱 더 멀어져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직 코에 호흡이 붙어있는 지금, 주님을 영접할 기회가 주여졌다면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또한 지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20년 후 우리가 어디에 서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기회를 사라 그 날들이 악하니라” (엡 5:16)

< 송만빈 목사 - 노스욕한인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