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교회의 위기 Ⅳ

● 칼럼 2015. 11. 20. 17:2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다시 한 번 더 교회의 위기를 말하려고 한다. 그만큼 위기는 닥쳤고 그런 것에 대한 내 마음이 다급했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문제는 교회가 위기를 느끼지 못한데서 그 위기성이 크지 않겠나? 만약 위기를 느꼈다면 재를 덮어쓰고 옷을 찢으며 회개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제 토론토 시내에서도 전도대가 나와 길거리에서 찬양을 인도하며 전도하는 일도 막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서서히 교회를 압박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우리 신앙의 뿌리라고 말하는 한국 교회는 어떤가? 이제는 대형 교회도 헌금난에 부닥치고 있다. 워낙 교회가 헌금을 함부로 사용하고 그에 따른 속칭 비자금의 이야기가 교회 안에서 떠돌고 있으니 아무리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라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에 인간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어떤 목사든 은퇴만 했다 하면 그 뒷자리가 너무나 어수선함은 무슨 이유인가? 세습의 이야기에서부터 지금까지 목회의 모든 행적이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는 오늘의 교회이다. 그렇게 존경했고 정말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로 믿고 살았는데 분쟁 속에 떨어질 때는 저가 진정 나의 목회자였는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함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한 뉴스가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한 교단의 총무로 일했던 목사가 그와 함께 일했던 목사를 칼로 찌르고 자해를 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것도 횟칼을 들고 찌르고 찔렸다니. 과거의 그들의 삶을 우리는 모른다 쳐도 오늘은 목사가 아닌가.
성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외쳐 왔을 목사가 과연 얼마나 자신은 변화되어 살아왔겠는가? 그것이 오늘 교회의 한 모습처럼 보이니 이것이 과연 교회라 할 수 있겠는가? 이 뉴스를 접하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슬픈 이야기들 부정적인 모습을 나누면서 우리는 괴로워한다. 그러나 거기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제 근본적인 치료와 대책을 이야기하자.
교회나 목회자는 이제 성장과 부흥을 말하던 시대에서 벗어나자. 전도해 오면(실제로 전도가 아니라 인도다) 금가락지를 주고 세탁기를 줘서 남의 교회까지도 흔들던 그런 태도를 버리고 정말 죄를 말하고 회개를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 먼저 성경도 읽고 기도도 앞장서서 하고 진정으로 목회자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 기울이자.
목회자 자신이 묵상해 온 말씀을 가르친 뒤 스스로 실천도 하고 정말 성도를 사랑하는 모습을 가지자. 그리고 성도들도 나와 생각이 같지않은 목회자라 해도 그분을 존경하면서 함께 온전한 목회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목회자나 교회에 대한 비판은 쉽다. 그러나 내가 정답은 아니지 않는가.

가끔은 그렇게 생각한다. 예전 한국교회는 경제나 문화가 그렇게 낙후되었음에도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는 그 얼마나 뜨겁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였는가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하는 아쉬움도 있으나 교회의 본질면에서 안타까워 탄식해보는 것이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악역 장로님들의 ‘모델효과’

● 칼럼 2015. 11. 20. 17:2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유명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대체로 관객이 몰린다. 사람들이 그 배우에 대한 호감과 인기도를 작품의 상품성에 그대로 투영하는 호의적 선입관 때문이다. 실제로 특출난 배우는 작품의 질과 흥행 성패를 좌우한다. 그리고 인기가 치솟는 주인공은 그의 액세서리 모방품까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본다. 사람들이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산다는, 또 살아보겠다는 착시현상과 자아실현의 동격화 선망에 빠지는 것을 입증한다.
그래서 인기배우나 유명인은 간판 광고에 많이 활용된다. 사람들은 광고에 반복해 등장하는 인기인을 통해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형성하게 되어 기업과 상품의 호감도는 덩달아 높아진다. 그런데 역으로 부도덕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전면에 등장한다면…, 그 기업의 이미지는 부정적이 되고 호감도 역시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 비슷한 ‘모델효과’는 각 분야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종교계의 경우 확인된 대표적 사례가 ‘프랜치스코 신드롬’이다.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언행일치의 선행과 인자한 풍모는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면서 가톨릭에 대한 호감도를 같이 끌어올렸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가 부쩍 늘었다는 말이 나왔다. 신부들의 성적추문이나 교황청의 재정난맥 등 부정적 일화가 끊이지 않음에도,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 한사람의 어진 품행이 사람들 눈에 호감의 안경을 씌워버린 것이다.
개신교의 한국 교회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요즘 부쩍 회자된다. 부흥의 열기가 사그러든지 오래이고 신자수가 갈수록 줄어들며, 특히 젊은 층의 이탈과 외면이 심각해 장래가 암울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안티그룹은 갈수록 늘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활개친다는 걱정이 나온다.
기독교는 한국 근대화의 기초를 닦고, 일제 항거와 독립운동에도 기여했으며,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종교로, 세계에 유례없는 양적·질적 성장을 이뤄왔다. 그런데 선교 100년, 평양대부흥 100년을 지나오며 오히려 위축과 퇴락을 염려하게 되었으니 어인 일인가.


교회와 성직자의 성장주의와 물신주의로 인한 영적 변질과 타락을 큰 원인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윤택해진 생활문화가 사람들을 형이하학적 삶에 안주하도록 만들어, 영적 평안을 향한 갈증과 전능자에게 기댈 갈망이 차츰 사라졌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모두 맞는 말일 것 같다.
하지만 그에 더해, 요즘 더욱 심화되는 듯한 ‘교회위기’의 가장 강력한 가속화 요인이야 말로 바로 앞서의 ‘모델효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간판격인 인물들의 그리스도인 답지못한 잇따른 실추와 비행, 심지어 ‘망동’수준의 모양들이 교회에 치명상을 입히고 먹칠을 해 사람들을 부정적 그룹으로 내몰고 있기에 그렇다.
법적 제재까지 받은 세계 최대 교회 설립자의 재정적·가족적 비리와 불화, 강남교회 목회자의 초대형 건축 논란과 학위논문 표절·변명 등은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키웠다. 유명 목회자의 성추문과 교회세습, 재정비리 등이 교회에 대한 지탄을 불렀다.


허나 그런 불상사들은 개교회가 가장 큰 피해를 입고, 물질적 탐욕과 육체적인 부도덕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치명적인 ‘모델효과’의 부정적 여파는 교회중직자 출신으로 나라의 통치권에 근접한 정치인들의 반 신앙적인 행태들에서 더 똑똑히 볼 수가 있다.
국토를 난도질하며 천문학적인 혈세로 건설족을 배불린 4대강 사업, 수십조의 나랏 돈을 날린 해외자원개발 등 신실한 기독교인 지도자의 발상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전직 대통령이 소위 일류교회 장로 출신이었다. 교계의 열띤 성원으로 최고권좌에 오른 그는 민주질서와 나라의 도덕 수준마저 망가뜨려 ‘안티기독교 바이러스’를 확산시킨 최고의 ‘악역’이 되어버렸다.
악역 변신의 인물이 한둘이 아니지만, 요즘 교과서 국정화 강행과 갈등 부추기기에 총대를 멘 두 지도자, 총리와 부총리 겸 교육장관도 둘 다 독실한 장로님들이다. 장로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니 아마 성경을 열심히 묵상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이 ‘올바른 역사’만을 기록했기에 최고의 기독교 경전이며 복음으로 사랑받는다는 믿음을 가진 것일까?


모세오경만을 보아도 살인과 근친상간, 타락과 불순종과 노예생활 등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정적이고 자학적인 내용 투성이인 것을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약자를 향한 사랑과 섬김의 선하고 의로운 그리스도 정신을 그들은 어디다 팽개친 것일까.
기독교출신 정치인들의 이같은 영적인 혼돈과 권력영합은 물질적 타락과는 격이 다른, 암이 번지듯 치명적인 ‘반 교회적 모델효과’의 극대화 요인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모르는지 외면하는지, 영적 무뇌(無腦)와 난청들인 것 같아 참으로 답답할 밖에….


< 김종천 편집인 >



[한마당] “캐나다가 선진국이다”

● 칼럼 2015. 11. 6. 20:4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30~40년만에 고국을 방문하는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1~2년 만에 다시 찾은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하루가 다른 발전상을 토로한다. 널찍한 새 길들이 쪽쭉 뻗어 차량들로 넘쳐난다. 시속 300Km KTX가 씽씽 내달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지 오래다. 으리으리한 빌딩 숲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화려한 점포들, 백화점과 고급 음식점엔 잘 차려입은 고객들로 넘쳐난다. 생동하는 다이내믹한 세상, 한국이 이만큼 발전했구나! 대단하다. 경제력 세계 10위권이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닌 거다. 집집마다 대형 LED로 통일한 듯한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이 또한 마냥 즐겁고 태평스럽기만 해서 부자나라 한국을 실감할 것 같다. 웃고 떠들고, 질펀한 오락 프로그램과 눈요기로 가득한 부유층 드라마들, 그리고 날마다 승부를 벌이는 프로 스포츠의 흥미진진 게임소식들,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요리와 맛집 프로들…. 잘 살게 된 나라 한국,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한국은 그렇게 휘황한 겉모습을 자랑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넘치는 차량행렬 속에서 이상한 낌새가 드러난다. 분명 정상시력을 점검하고 위법을 가르치는 시험도 거쳐 면허들을 줬을 텐데, 색깔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운전자가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빨간불 신호등인데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그냥 내달린다. 그게 돈벌이에 바쁜 택시는 물론이고, 일반 개인 차량들도 눈치껏 색맹이 되는 것이다. 끼어들기는 왜 그렇게 싫어하고 절대 불용하는지, 살벌하기 그지없다. 옆에서 끼어들려는 차를 손짓하여 허용해주니, 뒷 차가 빵빵대며 난리다. 네가 뭔데 괜시리 끼어들게 해서 자기까지 늦어지게 하느냐는 고약한 심보의 표현이다. 양보한 사람만 내가 잘못했나? 민망해지는 인정머리 없는 세태다. 다들 그렇게 운전하고 살아가는데, 나만 신호 잘 지키고 양보운전하면 공연히 머저리가 된 것 같은 이상한 세상이다.


하나 더 살펴보자. 언론은 왜 천편일률인가? 가까운 인터넷에서는 청년들의 3포시대-5포시대다 비명이 들리고, 노동개악이라는 외침이 넘쳐나고, 대통령이 독불장군이다 비판하고, 국정원이 못된 짓을 했다 바꿔라 등등 술렁대는데도, 모든 텔레비전과 주요 신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이 그저 태평성대다. 밤낮 쉴 새없이 정치해설이랍시고 노골적인 정부여당 추켜세우기와 야당 흠집내기 경쟁으로 특히 노인들의 하루를 오직 자만심으로 채워주기 바쁜-, 낯뜨거움도 미안함도 내팽개친 종편 TV들…. 공영도 마찬가지여서, 90%의 직원이 반대하는 인물을 KBS사장 후보로 강추하는 일은 왜 벌어지는가.


그렇게 한 두 가지만 정상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에 하나님 말고 완벽한 것이 어디 있나. 그런데, 따져보면 이상한 것들이 너무 많다. 아니 정상 보다 이상이 훨씬 많아서, 정상적인 것들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는데 문제가 있다.
요즘의 교과서 국정화 논란만 둘춰 봐도 비정상의 심각한 병증은 쉽게 알 수 있다. 왜, 학생들도 교사들도, 역사학자들도, 국민들도 싫다는 데, 국정교과서는 밀어 부치는 것인가. 유엔서도 하지말라 하고, 몇몇 독재국가들만 고수한다는 데도,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게 사명‘이라던 대통령이 오히려 독단과 강경일변도로 나서는 게 정상이고 선진일까. 여론을 수렴하는 행정예고 이전에 벌써 결론을 내놓고 예산을 몰래 배정하는가 하면 비밀 TF까지 가동하고는 거짓으로 둘러대는 국민무시의 눈속임은 도가 지나쳤다. 역사학자 90%가 좌파 빨갱이라며 반대 시민들을 무조건 쳐부술 적군으로 취급하는 전쟁불사의 외침은 그야말로 비정상의 극치요 독재의 폭거에 다름 아니다.


한 두 가지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비정상의 일상화, 보편화라고나 할까. 더구나 지도자, 고위직들이 자계와 근신은 커녕, 비정상을 밥 먹듯 도리어 ‘솔선’하니, 일반 국민들은 ‘나 하나 쯤’의 소극적인 수준을 넘어서 ‘다들 하는데 뭘 대수라고…’ 하는, 비정상에 대한 무감각의 동질화와 일반화가 나라 전체 곳곳에 번져버렸다. 알면서도 어기는 교통신호 위반도 그 사례요, 공무원은 공복일 뿐 국민이 주인이라는 헌법정신을 깔아뭉개는 정부고위직들의 뻔뻔한 행태가 그러하며, 나아가서는 정부 여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지지율로 받쳐주고, 선거 때면 승리를 안겨주는 국민들의 정치 안목과 수준이 그걸 입증해준다. 선진을 넘본다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겉은 화려하되, 그렇게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양복에 갓 쓰고 짚신을 신은 것처럼 기형적, 후진적 모양새를, 안타깝게도 부정할 도리가 없다.


캐나다에 사는 우리가 신호위반을 흔히 볼 수 있는가? 정부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낸다고 적군으로 때려잡으려 하던가? 스캔들 정치인이 떵떵거리며 연명하는가? 지난 10.19 연방총선은 이 나라가 선진국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보수당이 잘못하니 단번에 166석에서 99석으로 줄여버렸다. 34석이던 자유당은 무려 150석을 얹혀주어 일거에 정권을 맡겨버렸다.
정치인을 부릴 줄 알고 주인 노릇하는 깨어있는 국민과 그들에게 사심없이 헌신 봉사하는 정치인들의 나라, 그게 바로 선진국이 되는 길이다.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빗나간 확신범들에 무너지는 나라

● 칼럼 2015. 11. 6. 20:4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4대강 사업 때도 꼭 이랬다. 반대 여론이 아무리 거세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 성명을 내며 강력히 저지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4대강 사업 ‘확신범’이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한 박근혜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엊그제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역사교과서 논란의 시작과 끝에는 ‘국정화 확신범’ 박 대통령이 있다.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무지와 오만, 그리고 비뚤어진 역사관 등에 기인하는 측면이 클 것이다. 하지만 공인의식의 결핍도 이들을 빗나간 ‘확신범’으로 만드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지도자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역할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함에도 이들 두 대통령은 공공의 이익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우선시했다. 그 결과 주요 국가기관의 공적 기능은 위축되고 사회 공동체는 파괴되는 등 나라의 기본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가 권력기구와 우리 국토를 자신의 개인 소유물처럼 여겼다.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가정보원과 국군 정보기관을 ‘정권 안보’ 기관으로 전락시킨 건 전형적인 권력의 사유화였다. 이들 국가기관을 이용해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는 데 적잖은 공헌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우호적인 박근혜 정권을 출범시켰다. 결과적으로 주요 국가기관을 퇴임 뒤 자신의 사적인 안위를 위해 활용한 셈이다.
한반도의 젖줄인 4대강도 자기 앞마당을 지나는 개울물처럼 취급했다.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십조원의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 임기 안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한반도를 적시며 수만년을 유유히 흘러왔고 앞으로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줘야 할 4대강도 그의 눈에는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충족시키는 토목사업의 대상일 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자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역사관만이 정상이고, 자신과 다른 역사관은 비정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자신의 역사관에 어긋나는 지금의 역사교과서를 자신의 생각대로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역사라는 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역시 구성원의 몫이라는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전국 대학교수들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이 이어지고, 야당이 길거리 반대 시위에 나서고, 중고생들이 촛불을 들어도 박 대통령의 ‘소신’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만 간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공적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지 않은 채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그 사회는 각자도생의 전쟁터가 된다. 각 영역에서 공적 역할을 하며 사회를 지탱해줘야 할 공인들도 최고 지도자를 따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좇게 된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생명 유지에만 몰두하고, 국정원과 군대,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은 정권 안보의 첨병이 되고, 국민의 공복인 관료들은 정권의 뒤치다꺼리하기 바쁘고, 사회의 앞길을 밝혀줘야 할 언론과 학자들은 곡학아세하며 정권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나팔수로 전락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이런 아수라장이 돼 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마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려는 박 대통령의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역사관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극우보수세력을 똘똘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돼 버렸다. 구심력이 워낙 강해 이제는 물러나려야 물러날 수 없는 형국이 됐다.
결국 우리 사회를 극심한 갈등과 분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 파국에 이른 뒤에야 멈추게 될 것이다.
 공인의식이 결핍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8년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공동체는 갈래갈래 찢기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런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이런 일로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할 만큼 한가한 때인가. 국가와 역사를 개인 소유물로 생각하는 두 명의 ‘확신범’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