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는 살아 있는 현대사다. 지구상의 많은 영토 분쟁은 그 뿌리를 고대사에 두고 있다. 고대사의 영토 논란은 현실 세계에서 외교 분쟁, 나아가 물리적 충돌로 재현된다.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중국과 필리핀의 남사군도, 베트남과 중국의 황사 분쟁도 여기에 포함된다. 불행하게도 한반도에는 이런 뇌관이 여럿 존재한다. 동쪽으로는 독도를 둘러싼 갈등이 있고, 북쪽으로는 간도와 백두산 그리고 대동강 이북 지역을 둘러싸고 소리없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 지역은 남과 북은 물론 한-일, 한-중 사이의 핵심적 국가 이익이 충돌하는 뇌관들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병탄하고는 이를 합리화하는 논거로 고대사의 임나일본부설을 앞세웠다. 한반도 남쪽에 신라와 백제 이전부터 야마토왜의 식민정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방은 강탈이 아니라 역사의 복구라는 것이다. 정유재침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충청, 전라, 경상 등 3도 분할을 조선에 요구했다. 무턱대고 무력만 앞세워 윽박지른 게 아니라, 온갖 조작된 역사적 파편을 들고 정당성을 주장했다.


영토에 관한 한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중국은 2001년부터 동북공정을 통해 고대사 공작을 해왔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부였으며, 역사시대 이후 대동강 이북은 중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영토였다는 게 그 결과였다. 역사적으로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강토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역사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자명하다. 한반도 유사사태 때 중국이 개입해 해당 지역을 점유하는 핑계가 될 수 있다.
정부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온 나라를 태극기로 도배하고 있다. 연등을 본뜬 태극등이 거리에 등장했고, 공직자 가슴에도 태극기가 꽂혔다. 광복일 전야인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면제했다. 애국주의가 이처럼 창궐한 적은 일찍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드러나는 그 속살이 참담하다. 동북아역사재단 등 이 정권의 역사기구나 관변학자들은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지난 4월 국회 동북아특위에 제출된 동북아역사지도를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어져 있고, 한사군이 한반도 중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에 걸쳐 있으며, 신라와 백제는 서기 300년대까지 한반도에 등장하지 않았고, 근세까지 독도는 우리 영토에 존재하지 않았다. 실수였다느니, 수정 중이라느니 변명을 하긴 했지만, 47억원의 혈세를 들여 8년 동안 60여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만든 것을 그렇게 허투루 만들 리 없다.

게다가 재단 이사장과 주요 이사들은 평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논거가 허술하다’ ‘4세기까지 야마토왜의 지방관이 전라도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느니 주장해왔다. 심지어 ‘독도는 우리 땅 식의 경직되고 배타적인 인식에서 유연하고 개방된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충고하는 이사도 있었다. 1877년 일본 총리실에 해당하는 태정관이 내무성에 내린 “독도는 일본의 영토와는 관계가 없다”는 ‘태정관 지령’은 인정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때부터 국내에서 역사전쟁을 벌였다. 좌파 사관 혹은 자학 사관 제거라는 기치 아래 이승만 정권, 5.16 쿠데타, 유신체제를 미화하려 했다. 나아가 식민지 근대화론 등 일제가 병탄을 합리화한 주장을 한국 공식 입장으로 세우려 했다. 대다수 학자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예 역사교과서를 국정체제로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래야만 친일 전위에 섰던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선친들 행적을 가릴 수 있었던 것일까.


국내에서 이런 자중지란을 벌이는 사이 일본과 중국은 한반도를 겨냥한 역사전쟁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맞서기 위해 세운 동북아재단은 중국과 일본이 제멋대로 재구성한 고대사를 슬금슬금 베끼거나 수용하며, 세작 노릇을 했다. 사실을 발굴하는 데는 게으르고, 이론을 세우는 데는 무능하며, 학문적으로 불성실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이 정부는 안팎의 역사전쟁에서 대한민국 가슴에 총구를 겨눈 셈이었다. 안으로 우리 역사학계를 적으로 삼고, 밖으로는 중국과 일본 주장이 뿌리를 내리도록 도왔다. 그 결과 분쟁은 현실이 되고 있다. 독도는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영토가 아니라 분쟁지역이 돼버렸다. 한국 정부 산하 역사재단이 만든 지도에서 제외되기도 했는데 무슨 수로 분쟁지역화를 막을 수 있을까. 역사시대 이래 대동강 이북을 중국 강토로 표기하는데, 유사시 중국이 들고 나서면 그 또한 분쟁지역화되는 걸 어떻게 막을까. 광복 70년을 맞아, 정부는 무슨 생각으로 역사를 70년 전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걸까.
< 곽병찬 - 한겨레신문 대기자 >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며 참으로 씁쓸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부가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병기를 포함시키려 하자, 한글·교육단체 등이 격렬한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13일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진 서울 광화문 등지에서 ‘한글 교과서 장례식’까지 했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한글 전용 정책을 바꾸려면 이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만한 폐해가 입증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를 비롯해 한자 병기를 지지하는 쪽은 전혀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한자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들의 뜻 이해가 부족해 독해력이 떨어진다는 정도다. 그런데 국제학업성취도 평가 등을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성인의 독해력은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한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은 본말이 뒤바뀌었다. 한자 어원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을 살리고 다듬어 한자 어원에서 자유로운 어휘를 살찌우는 일이다. 정부가 이런 노력은 하지 않고 한글을 반쪽짜리 문자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영어권 나라에서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라틴어를 병기하자고 하면 얼마나 우습게 들리겠는가.


더욱이 디지털 혁명을 거치면서 한글은 서구의 알파벳과 어깨를 견주는 우수한 문자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반대로 한자는 중국에서조차 버림받고 최대한 단순화한 간체자로 대체된 상황이다. 창조경제를 소리 높여 외치는 이 정부에서 디지털 시대를 거스르는 문자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한자가 우리 전통문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외국어로서 배울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중등 과정에서 교양 차원으로 가르치면 충분하다. 한자 병기는 가뜩이나 학습 부담에 찌든 초등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는 일이다. 이미 한 해 수십만명의 초등학생이 한자자격시험을 보는 상황에서 교과서 한자 병기가 불러올 사교육 급증도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광복 70년을 맞아 민족 자긍심을 한껏 고취해야 할 시점에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글이 이처럼 수모를 당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승만·박정희 정부에서 시작됐고 ‘건국 이래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는 한글 전용을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은 이 정부의 혼란스런 역사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남북관계가 출렁이고 있다. 호재는 없고 또 다른 돌발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분위기다.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으면서 관계 개선의 전기를 찾아 나가야 한다.
17일부터 28일까지 계속되는 한-미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은 남북관계에서 악재임이 분명하다. 연례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지뢰 폭발 사건’ 등으로 남북 사이 긴장이 높아진 시기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이 모두 참여하는 나흘 동안의 민-관-군 합동 을지연습을 포함하는 대규모 훈련이기도 하다. 이 훈련의 취소를 요구해온 북한은 ‘군사적으로 최대한 거세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올봄 한-미 키리졸브 훈련 때처럼 동해 쪽으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이 적잖다. 정부는 전시에 대비하자는 훈련이 실제 충돌을 부르는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위기관리를 강화하기 바란다.


북쪽이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 70돌 경축사를 거칠게 비난한 것은 유감스럽다. 경축사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김정은 정권의) 숙청 강행’ 등 북쪽을 자극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사실이다. 남북 협력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면서도 북쪽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제안은 부족했다. 하지만 경색된 태도는 남북이 다를 바 없다. 앞서 북쪽은 지뢰 폭발 사건에 대해 ‘(남쪽이) 조작한 모략극’이라고 강변했다. 북쪽은 이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재개된 대북 확성기 방송에 대해서도 “중단하지 않으면 무차별 타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좋았던 적은 별로 없다. 지금은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계기가 고갈돼 간다는 점에서 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북쪽은 내부 단합을 위해서라도 노동당 창건 70돌 기념일인 10월10일까지 외부 위협을 부각시킬 가능성이 크다. 또 내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남북관계를 전환시키고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할 이른바 골든타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다음달 미국 의회에서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북한 관련 문제를 풀기 위한 동력은 더 떨어지기 쉽다.


북쪽의 말과 행동에 따라 좌우되는 남북관계는 생명력이 약하기 마련이다. 북쪽이 경색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비슷하게 대응해서는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른 시일 안에 남북관계 개선의 전환점을 찾아야 한다. 돌발변수가 남북관계를 좌우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1500자 칼럼] 나의 소울 푸드 (soul food)

● 칼럼 2015. 8. 16. 17:34 Posted by SisaHan

허기진 마음을 채워 줄 음식이 어디 없을까. 단비 끝에 묻어 온 소슬바람 탓인지 아침 내내 온 정성으로 만든 건강주스를 앞에 놓고도 머릿속은 다른 먹을거리를 찾느라 분주하다.
삼복중엔 그래도 보양식인데, 아니면 평소 좋아하는 면류, 혹은 나물류, 갖가지 음식들을 쭉 나열해 보아도 특별히 당기는 게 없어 씁쓰름할 즈음,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김치 국밥 한 그릇이 오롯이 떠오른다.


어린 날 우리 형제들이 아플 때면 어머니가 속성으로 끓여 주신 처방식이다. 그 시절 이후론 내 기억 속에서 까맣게 사라졌던 음식이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심한 몸살감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불현듯이 떠올라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오늘 또 다시 허한 속을 데우라 한다.
나는 단숨에 필요한 재료들을 냉장고에서 꺼내고 스토브를 켜며 준비를 서두른다. 갑자기 바빠진 마음에 부합이라도 하는 듯 부엌의 집기들도 덩달아 달캉거린다.
국밥 한 그릇 준비하면서 이렇게 신바람을 날리다니, 아마도 내 몸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음식물이 아니었던 게다. 음식을 통해 그 맛을 풍미했던 언저리를 돌며 마음의 평온 내지는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라는 의미이리라.
나는 스테인리스 냄비를 꺼내다말고 주춤한다. 무엇이든 원하는 시간 안에 끓여내는 편리한 전기스토브 대신 바쁠 땐 더 애간장 녹이는 연탄불 위에 알루미늄 냄비 올려놓고 조바심 태웠을 어머니 모습이 아른거린 탓이다.


조그마한 옻칠 소반에 조선간장 종지와 국밥이 전부였던 조촐한 어머니의 상은 온몸의 열꽃을 순식간에 잠재웠던 명약이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녹아있던 그 국밥을 재현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멸치 다시마 육수에 포기김치를 숭숭 썰어 넣고 한소끔 끓인 다음 콩나물, 달걀 등 약간의 부재료들을 넣어가며 끓이다 보면 솔솔 풍겨나는 익숙한 냄새가 회를 동하게 한다.
꼭 같은 음식을 먹어도 옛날 그 맛이 아니라며 투정부리기 일쑤지만 이 냄새만큼은 절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집집마다 손 맛 장 맛 모두 틀려도 하나로 통일시키고야 마는 김치의 우월성 덕에 어머니의 김치 국밥은 어렵지 않게 재현할 수 있다.
뚝배기에 밥을 담고 그 위에 국을 몇 국자 끼얹으면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은 나만의 소울 푸드가 완성 된다. 평소엔 소식을 운운하면서도 이 국밥만큼은 뚝배기 위로 큰 산 하나가 더 솟아있기를 원한다. 건강한 육체를 위해 옥죄고 산 세월에 반항하듯 원 없이 풀어놓고 마음껏 흘려 넣어도 큰 무리가 없다.


휘파람 불 듯 휘휘 불어가며 한 그릇 뚝딱 비울 즈음이면 헛헛한 마음에 훈기가 돌고 기운이 솟는다. 그 시절 주위를 맴돌던 미풍이 비로소 내 안에서 꼬물거리기 시작한다.
허기지고 힘들 때, 불안하고 답답할 때 간간이 찾게 될 나의 비밀 병기, 어디 이것뿐이랴. 무쇠 밥솥에서 쪄낸 할머니의 명란 알 찜, 온 식구가 두레상에 둘러앉아 호호거리며 퍼 먹던 띄운 비지찌개, 식사 후 돌아오는 특별한 후식 쌀뜨물 숭늉 등 하나씩 꺼낼 때마다 삶이 풍요로워질 테다.
열거한 소찬들을 굳이 영혼의 음식이라고 이름 붙이긴 뭣하지만, 옛 맛을 추억한다 함은 생애 가장 평온했던 시기로 회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거하다고 볼 수 없다.
세상의 흐름이 힘에 부칠 때를 대비해서 소울 푸드 몇 개 쯤 품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