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이제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일상생활화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화법에 끝나지 않으니 문제다. 처음에는 남 탓을 하는 ‘화법’으로 시작했지만, 그다음에는 정말로 남 탓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유체이탈’의 단계로 한 차원 더 높게 발전해, 이제는 그의 ‘모범적 행태(?)’를 사방에서 본받아 따라하기 시작한다.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책임 회피와 궁색한 변명을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대통령으로서의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습관화되면서 이제 스스로 믿는 단계로 발전한다. 사람이 변명을 자꾸 하다 보면 자신이 변명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또 책임을 자꾸 회피하다 보면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깊이 믿게 된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다 보면 자존감이 손상되고, 자존심이 강한 박 대통령 같은 분은 초기의 자존심 손상을 보상하려는 심리로 더욱 강하게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즉, 그냥 남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실제 ‘남 탓’이라고 굳게 믿게 된다. 이제는 책임질 일이 없으니 책임을 회피한다는 불편한 생각을 안 해도 되게 된다. 박 대통령이 ‘유체이탈’의 경지에 들어서신 것이다.


그런 조짐은 진즉에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축출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박 대통령이 자주 쓰던 어휘 중에 “원칙, 신뢰, 소통”이 사라지고 대신 “국민”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런 연유라고 생각된다. 박근혜는 이제 인간 박근혜가 아니라 국가이고 국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국민의 대변자이니 이제 자신이 “원칙, 신뢰, 소통”이다. 자신에게 반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국민에게 반하는 것이고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도전이고, 그리고 국민의 유일한 수호자인 대통령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일 정치권을 비난하고 있다. 자신이 정치의 핵심이면서 자신은 정치를 이탈한 것으로 생각한다.


국회법 개정안도 야당 의원일 때 한 것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었고, 자신이 대통령일 때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국회선진화법도 자신이 야당이 되리라 믿고 만들 때는 좋은 것인데, 대통령이 되고 계속 여당이 되니 다시 나쁜 것이 됐다. 당시 박근혜와 지금의 박근혜는 다른 사람이다. 지금은 스스로 유체이탈을 해서 국가에 빙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새누리당은 자기에게 시중드는 시(侍)누리당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이를 단죄하는 것은 국민 심판이 된다.
대통령을 본받아 우리 사회 곳곳에 유체이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사태가 정부 탓이라고 했다. 문형표는 역병에 사람들이 죽는 것이니 그 정도면 선방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정종섭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교수 시절 자신의 생각과 장관인 지금 생각이 다른 것은 이론과 현실 차이라고 했다. 유체이탈 수준이다.


압권은 K대학이다. 최근 문제가 된 폭행·인분교수를 소속 대학인 수도권 K대학이 학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K대학은 엽기교수의 사용자로서 공동의 책임이 있고 따라서 우선 자신들의 잘못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학생과 국민들에게 백배사죄해야 하거늘, 자기들도 피해자라고 한다. 유체이탈의 극치다.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이 이렇게 점점 더 강고해지고 사회로 퍼지면서 진화하는 이유는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의 ‘동반 유체이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사회가 더 퇴화하지 않게 하려면 이것을 깨야 한다. 양식 있는 국민들이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한다. “네가 잘못이고 네 책임이다”라고.
< 이동걸 - 동국대학교 경영대 초빙교수 >



[1500자 칼럼] Pan-Am and Pyung Chang

● 칼럼 2015. 7. 17. 18:52 Posted by SisaHan

지금 토론토는 Pan-Am 경기의 열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북미와 중남미의 올림픽 같은 대규모의 행사지만 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외면할 수가 없다. 이민자로 이루어진 이민도시여서 그런지, 주말이면 버스나 지하철에서 중남미의 국기가 새겨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또는 가족단위로 몰려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캐나다의 국기가 새겨진 옷이나, 아예 빨간 단풍잎이 그려진 대형 캐나다 기를 망또처럼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개막일 날 마침 나는 시청에 갈 일이 있었다. 시청앞 광장에는 나름대로 시청 앞에서 하는 개막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른 금요일 오후였는데, 남미에서 온 관광객임직한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바빴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무대에서 추는 춤을 구경했다. 리허설 임에도 불구하고, 춤이 간단하면서도 구경하는 사람들을 따라 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무관심한 탓이기도 했지만 언제 준비들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평창이 생각났다.


이제 곧 동계 올림픽을 하게 될텐 데, 제대로 준비가 되고 있는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번에 있었던 인천 아시안게임이 엄청난 적자를 남겼고,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용없는 전시성 행사였다는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어찌보면 지금의 한국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 중 두가지만 말하자면, 문학경기장이라는 월드컵 축구장을 놔두고, 새로 주경기장을 지었다는 점이다. 정말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표가 매진 된 경기인데 막상 가보면 자리가 비었다는 점이다. 조직위원회에서 돌린 공짜표가 오지 않은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샀다면, 정말 경기가 보고싶어 샀다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것은 정말로 게임을 보고 싶어도 못본 사람에 대한 그리고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평창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해법은 간단하다. 요즘 같이 전산망이 발달된 시대에 표를 가지고도 못오는 사람은 전화를 걸면, 그 표를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Pan-Am의 준비 과정을 보며 평창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토론토는 새로 지은 시설이 별로 없고, 거의가 있는 시설들을 개보수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토론토 시내에 있는 3개의 대학(토론토, 욕, 라이어슨)의 시설들을 주로 사용한다. 그렇다고 우습게 보지못하는 것이 욕 대학의 테니스장은 전국 최고를 자랑하며, 라이어슨 대학의 실내 경기장은 그 유명한 토론토 메이플 리프 가든을 개보수한 것이다. 선수촌마저 시내 중심지와 가까운 호숫가에 위치해 경기가 끝나면 콘도로 변경 분양하기에 쉽게 팔릴 것이다.


IOC에서 여러 가지 사정을 우려하여 일본과 분산 개최를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안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아이스하키장을 서울에 있는 목동 경기장을 개보수하고, 스키경기장은 무주 스키장을 개보수하는 데는 절대 찬성한다. 그런데 이 안조차 무시되고, 원목들을 잘라내고 산을 깎아내 스키장을 짓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지방이라고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하키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그리고 경기장을 관리 보존하는데도 돈이 많이 든다. 서울의 큰 대학이라면 모를까 강원도의 한 대학으로는 팀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평창 올림픽이라고 모든 경기가 강원도에서만 있어야 하고, 그것이 강원도만의 행사여야 하는가? 한국은 비교적 작은 나라다. 많은 시설들이 끝나고 무용지물이 된다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대형 경기장 일수록 관리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지금은 너무 늦었을까? 만약에 늦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마음 간절하다.
Pan-Am을 보며 Pyung Chang을 생각한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빅 브라더’를 꿈꾸나

● 칼럼 2015. 7. 17. 18:49 Posted by SisaHan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거대한 3개 국가가 세계를 분할 통치하는 시대. 이들 3개 강국은 화평이 아닌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평화를 유지한다. 안보장사로 정권을 유지하는 독재의 모델이다. 특히 초강대국 오세아니아는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국가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위협하는 대형 포스터가 거리마다, 건물마다 내걸려 총구처럼 노려본다. 사람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이 장치돼 개개인의 내밀한 삶을 24시간 샅샅이 감시한다. 심지어 인적이 드문 숲속이나 들판에도 마이크로폰이 숨겨져 있다. 공중에는 수시로 헬리콥터가 배회하며 건물 안까지 들여다 본다.


거리마다 사상경찰이 돌아다니고, 반체제 인사는 고문을 통해 새로운 순응인간으로 개조해 버린다. 사람들의 본능인 성욕까지도 국가가 통제한다. 결혼과 섹스의 단 한가지 목적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일 뿐이다. 당의 우두머리인 ‘빅 브라더’의 뜻에 맞지 않으면 문서나 신문, 녹음, 영화 등 과거의 모든 기록을 수시로 삭제하고 조작한다. ‘진리부’‘평화부’‘애정부’‘풍부부’ 등 4개의 정부 부서는 그 반대의 일을 하는 기관들이다. 진리부는 과거를 조작하는 일을 맡고, 평화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부서다. 애정부는 사랑과는 상관없는 법과 질서를 규제한다. 풍부부는 경제를 담당하지만, 허황된 수치로 경제성과를 떠들면서도 백성을 굶주림으로 내몬다.
이쯤 서술을 들으면 대개 짐작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이야기다. ‘빅 브라더’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감시하며 조종하는 유리알 세상. 참으로 숨이 막히고 끔찍한 인간 말살의 감옥이고 지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쯤 거론하면 또 웬만큼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흔히 인터넷 감시나 전화도청이 횡행하고 거리마다 CCTV가 설치 돼 개인 사생활 보호가 위협받는 현실이라는 일반론적인 추세의 상황묘사에 그치는 말이 아니다. 한국의 거대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온 국민의 사이버와 모바일 생활을 전방위로 구석구석 훔쳐보고 있다는 무서운 정황이 폭로된 것이다. 이탈리아 해킹프로그램 개발업체가 최근 되레 해킹을 당해 유출된 ‘고객’정보들로 인해 국정원의 ‘빅 브라더’ 유령이 양파껍질처럼 땅 위에 그 음험한 꼬리가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이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는 ‘육군 5163부대’라는 위장명칭으로 해킹업체와 거래한 내역들을 보면, 구입의혹이 있는 ‘리모트 컨트롤 시스템(RCS)’은 그 위력이 공포 그 자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한 모든 인터넷 활동은 운영체제나 플랫폼, 암호화 등 어느 방호시스템에도 전혀 지장없이 실시간 들여다 보고 원격조종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종류는 달라도 셀폰, 즉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 역시 드물다. 앉으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걸어 가면서나 버스 지하철에서도 휴대전화나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바야흐로 만능기기 그 자체가 돼버린 내부에 온갖 정보가 담겨있고, 개인과 개인의 소통과 관계, 그들만의 속삭임과 은밀한 거래들까지, 사람들의 언행과 성향과 그가 가진 모든 정보들이 담겨 오고가는 통로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보기관이 이 통로를 당사자도 모르게 장악하고 세세하게 감시를 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문을 걸어 잠근 자기 집 안방에 앉아 옷을 입고 있어도 알몸을 투시당하고, 사진 찍히고 손가락질의 표적이 되는, 한마디로 광장에 발가벗겨진 원숭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것도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니, “바로 나” 라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정원은 더구나 2012 대선 당시 야당후보를 댓글 비방하는 선거공작으로 지탄을 받고 원장이 사법처리 당한 순간에도 해킹업체와 접촉해 스마트폰 도청용 불법 해킹 프로그램 구입을 추진했다니, 그 저의와 철면피가 놀라울 뿐이다. “해외·대북 정보용”이라고 변명하지만, ‘국내용’이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국가와 국민 안보에 진력하기는 고사하고 국민을 감시하는 데 거의 ‘무데뽀’ 수준이라면, 과연 누구를 위해 왜 존재하는 기관인지, ‘빅 브라더’를 꿈꾸는 독재정권의 앞잡이를 추구하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국정원 말고도 경찰과 군기관 등의 수상한 사이버 감시장비 확충이 잇달고 있다니, 이들 기관들이 국가나 국민을 받드는 게 아닌 정권을 위한 공작기관이라면, 정권과 함께 하루속히 사라져야만 국민들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 김종천 편집인 >



감사원이 14일 발표한 ‘해외자원개발사업 성과분석’ 성과감사 결과로 이명박 정부가 자랑하던 ‘자원외교’의 생생한 민낯을 거듭 확인한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1984년 이후 해외자원 개발을 위해 투자한 돈은 모두 169개 사업 35조8천억원에 이른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만 28조원이 투자됐다. 투자 규모에 비해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석유의 경우 실제 도입 실적은 우리가 손에 쥔 지분의 0.4%(220만 배럴)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대부분 3차례 시범 도입한 물량일 뿐이다. 더욱 심각한 건 해외자원개발 사업은 설령 사업성이 떨어져 손실을 입었더라도 마음대로 중단할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감사원은 앞으로도 46개 사업에 46조6천억원이 추가로 투자돼야 한다고 진단했다. 4월 예상했던 추가 투자금액 34조3천억원보다 12조원이나 늘어난 수치다. 당장 2019년까지 필요한 추가 투자규모만 22조원이 넘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말이 이보다 더 딱 들어맞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


나랏돈을 생짜로 허공에 날려버린 것도 원통한 마당에,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들 어깨로 옮겨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추가 투자액 대부분을 부채로 메워야 할뿐더러 사업을 진행한 자원 공기업의 재무위험 증가는 결국 미래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지난해 기준 각각 221%와 220%인 석유공사와 광물자원공사의 부채비율은 2019년 320%, 692%로 늘어날 전망이다. 사정이 이 지경까지 이른 데는 특히 이명박 정부가 철저한 준비나 투명한 절차 없이 실적 보여주기식 국책사업으로 해외자원 개발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탓이 제일 크다. 부실투성이 사업을 4조5천억원을 들여 덜컥 인수했다가 손실 확정액만 이미 1조5천억원을 넘긴 석유공사의 캐나다 하베스트 인수가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겉으로는 자원 공기업의 의사결정이라는 모양새를 띠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와 정권 실세가 모든 과정을 쥐락펴락한 정황은 충분히 드러난 상태다.


한때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무상급식 재정은 연간 2조원 남짓이다. 무책임한 정권이 날려버린 나랏돈 수십조원에 견줄 때 새발의 피에 불과한 액수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는 단순한 정책 실패 사례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책임자를 반드시 가려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