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역사 이야기

● 칼럼 2015. 10. 2. 16:5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나는 아직도 캐나다에 와서, 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본 시험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 와서 처음 본 시험이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면 보다 그 내용에 있어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시험은 고등학교 세계사 시험이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역사과목이 제일 좋았다. 이곳에 이민을 와서도 영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겁도 없이 세계사 과목을 택했다. 사실 이미 다 배운 것이었기에 수업을 따라가는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이 칠판에 적고 우리는 받아쓰기에 바빴던 한국과는 달리 거의 토론식으로 진행되거나,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흘러가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처음 시험을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였다.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지명을 외우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년도를 외웠다. 일곱 장 정도 되는 시험 문제지를 받고 처음부터 차분히 적어 나가는데, 문제가 의외로 쉬었다. 사지선다형이거나 한 단어를 적어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종이가 백지였다. 다음도, 그 다음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하며 다시 보니. 맨 위에 글씨가 몇 줄 적혀있는데, ‘로마가 왜 망했는지 분석하라’는 질문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에세이 문제였고 그 한 문제의 비중이 거의 50%를 넘고 있었다. 처음 대해 보는 문제에 가슴이 콱 막혀왔다. 그런 문제가 나오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문제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겨우 서너 줄 썼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운동장 같은 백지를 채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시험지를 돌려주며 해석해 줄 때, 선생은 최소한 12가지 이상의 이유를 들어 설명해 줄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국내외적인 상황, 경제적인, 사회적인…. 그 모든 이유가 합쳐져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그는 우리가 보는 관점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가지고 우리 나름대로 분석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다시 배웠지만 그 점이 역사에서는 중요했다. 역사관이랄까? 역사를 보는 눈…. 애초에 그렇게 분명히 배웠음에도 대학에 가서 역사를 공부하며 에세이를 썼을 때, 나는 “Where is your idea?”라는 지적을 자주 들었다. 나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왠지 학생에 불과한 내가 단정을 내리기에 자신이 없어 남이 한 말을 자주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한국에서 역사를 배울 때는 한가지 역사만을 배운 것 같다. 그리고 누가 한 말을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여기서 동양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역사가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서양에 알려진 우리 역사가 일본학자에 의해서인 경우가 많았고, 영어로 된 동양사 책은 일본학자가 쓴 것이 많고, 일본에서 공부한 서양학자가 많다는 점이다.


그는 당연히 일본학자가 쓴 책을 보고 공부했을 터이다. 문제는 그뿐 아니라 우리 학자라도 민족사관에 의해 역사를 보는 사람보다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 역사를 본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다고 치더라도,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역사를 바로 배우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역사를 보는 눈을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숫자와 이름을 외우는 것이 역사교육이 아니다. 관리들이 입었던 옷의 색깔을 외우는 것이 역사교육이 아니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스승이 한 말을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해 그대로 제자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료를 가지고 분석하는 태도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역사는 불변의 사실이라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경제학자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른 점으로 해석할 수가 있고, 민중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국정교과서로 주입식 역사교육을 받았지만,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은 제대로 역사교육을 받았으면 참 좋겠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나 아베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칼럼 2015. 9. 25. 14:2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본은 천재지변의 나라다. 지진과 화산은 환태평양 ‘불의 고리’에 속해 있으니 말할 것도 없고, 해마다 대형 태풍이 적어도 한 두번씩은 휩쓸고 지나간다. 태평양의 격랑을 마치 병풍처럼 3천km 길이로 길게 막아주고 있어서 한반도에는 방파제 구실을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육지와 바다 모두의 재해가 끊이지 않는 불안의 연속이다.
일본이 역사상 단 한번의 본토 침공을 당했다는 13세기 원나라의 공세를 무위로 돌린 것은 태풍이었다. 그래서 ‘신풍’(神風: 카미가제)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아마 그 때의 태풍이 나라에 덕이 된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는 그 신풍이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자살폭탄으로 돌변해 버렸지만….


일본의 침략근성은 그처럼 불안한 국토를 벗어나 안전지대를 갈망하는 심리와 생태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고려조 당시만 515번이나 침입해 온 것을 비롯해 삼국시대 이후 714번이나 한반도를 침략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외지선망과 팽창습벽이 습관화, 체질화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빈번한 침략을 조선 사람들은 용케도 막아내고 견디면서도 고려 말과 조선 초 3차례의 대마도 정벌 외에는 일본 본토에 대한 공략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참으로 평화민족이요 영토에 대한 욕심도 없는 선량한 족속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평화와 선량에만 머물다 결국은 714번째 침략에 나라와 민족이 절단나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여지껏 독도를 지키기에 애를 먹고 있고-.


그런 체질적 침략근성과 ‘팽창 DNA’를 지닌 일본이 전쟁을 포기한 평화헌법의 금지선을 넘어서고 있어서 주변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A급 전범의 후손답게, 극우성향의 아베가 총리가 된 뒤 일본을 ‘전쟁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에 전력질주 하고 있다. 마침내 지난 19일 새벽, 반대함성에 귀를 막은 아베가 밀어부친 소위 ‘안보법제’관련 11개 법률 제·개정안이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함으로써 자위대의 해외진출에 제동장치가 풀려버렸다. 이제 ‘자위대’가 아닌 ‘일본군대’로 불러야 할 판이다. 아베는 내친 김에 평화헌법 마저 뜯어고치려 한다. ‘팽창’의 법적인 제약을 모두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아베에게 DNA를 물려준 조상들은 어떤 인물들인가. 그의 할아버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조선 땅에서 인적·물적 전쟁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이다 미군에 항복문서를 건네고 일본으로 패퇴해 갔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사라지지 않고 이런 무서운 악담을 늘어놓았다 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컨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의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래서 나 아베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만주국에 봉직했고 전시내각 장·차관을 지낸 A급 전범이었다. 그러나 전범재판을 피해 살아남아 나중 총리가 된다. 그가 남긴 업적은 당시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냉전체제에 편입하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을 강행처리, 그 여파로 물러나게 된다. 그는 특히 재임 중 평화헌법 조항을 확대 해석해 자위대의 군비를 확충, 전쟁 잠재력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듣는다.
결국 지금의 아베 총리를 보면 친조부와 외조부 모두의 피가 절절히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그가 절대 사죄하지 않는 이유도 자명해진다. 그리고 ‘나 아베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조부의 호언이 결코 헛된 장담이 아니었음을 이번 안보관련법 강행처리로 손자 아베가 되살려 주었다.


유사시 자위대 투입은 한반도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문제다. 자위대가 한국 땅을 밟을려면 한국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한국정부는 주장하지만, 그 것은 아전인수의 해석일 뿐이다. 한국군은 전시작전통제권이 없다. 유사시 미군 장성이 한국군을 통솔하는데, 왜 일본이 한국정부의 동의를 받는가. 미국은 일본군의 해외진출을 가장 적극 환영하는 나라다. 미국이 묵인하면,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것은 ‘누워 떡먹기’다. 이미 6.25동란 때 일본 자위대는 한반도에 진출한 적이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재무장의 빌미로 삼아 온 일본이다.
한국이 우습게 보일 것이다. 천황에게 충성 맹세한 만주국 장교출신에 이어 그 딸이 대통령이 된 나라, 일제 식민통치가 근대화의 초석이었다고 외치는 친일파와 뉴라이트 학자들이 활개치는 식민교육의 나라 한국을 아베가 깔보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사·군대위안부 문제 사과요구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현재의 일본이다.


< 김종천 편집인 >



[한마당] 전철밟기의 어리석음

● 칼럼 2015. 9. 18. 18:1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집대성한 ‘전쟁백서’다. 당시 재상이었던 서애 유성룡이 전쟁의 참화 속에 국정을 지휘하며 직접 체험하고 깨달은 바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후세에 교훈을 삼도록 기록한 귀중한 역사서다. ‘징비’란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시경(詩經)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한마디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이다. 저자 유성룡은 거기에 이렇게 경고했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한다.”
그러나 불과 30년도 안돼 정묘호란, 38년 후에는 병자호란 등 조선은 다시 외침을 당해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권이 무참히 유린을 당했으니, 징비록의 교훈을 깊이 새겨 국난을 방비하지 못하고 똑같은 참상을 다시 겪은 것이다.


명군 세종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해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쐐기를 박은 지혜로운 군주였다. 상습적으로 반복되는 왜적의 출몰을 면밀히 분석한 토대위에 근거지를 제압함으로써 근본적인 대책을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국정 주도권을 쥔 세력들은 임시방편의 대처에 그쳤을 뿐, 왜구의 뿌리부터 차단하는 철저한 방비책은 외면했다.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보내느냐 마느냐는 논란으로 허송세월한 것처럼, 백성과 국가의 안위는 제쳐놓고 오로지 어느 편이 유리하고 목소리가 크냐는 국정 주도권 싸움의 갑론을박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음의 반복 끝에 결국은 하찮게 여기던 왜(倭)의 한 입 먹잇감으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적 치욕의 시대를 맞는다, 징비록이 상세하게 지적하고 가르친 경고를 뼛속깊이 새겨 실천하지 못한 까닭이다. 역사의 교훈을 잊으면 참화는 반복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이치다.


1970년 12월 서귀포발 부산행 남영호 침몰로 326명이 숨진 뒤에도 크고작은 해상사고가 났다. 20여년 전(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때는 귀중한 인명 292명이 수장됐다. 이같은 대규모 해난사고를 당했으면, 철저하고 근본적인 분석과 안전대책을 세웠어야 함에도 지난해 4월에는 세월호 참사가 났다. 선박 안전과 운항관리, 선원과 승객의 해난사고 대비태세, 그리고 구난시스템과 원활한 작동, 그 위에 관련분야 행정과 업계의 얽히고 설킨 공생 부패구조 척결 등이 이뤄졌다면 또 다시 3백명이 넘는 귀한 생명을 잃고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참사가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진상규명 조차 외면하더니 이번에 다시 낚싯배 돌고래호 침몰사고가 터졌다. 그야말로 알고도 당하는 어리석음의 되풀이요. 전철 밟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무려 852명이 발트해에 수장된 스웨덴 여객선 에스토니아호 침몰 참사는 다시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스웨덴 정부는 사건이 나자 조사위원회를 꾸려 사고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규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재발방지 대책 가운데는 여객선의 구조를 바꾸는 설계혁신부터 어린이를 위한 안전교육까지 새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 재발 방지책들은 하나씩 철저히 적용해 시행에 들어갔고, 그 이후로 대형 선박사고는 사라졌다.
넓고 거대한 바다에서의 사고를 인간의 힘으로 백% 막을 수는 없다. 천재지변과 불의의 사고란 항상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항상 예비하며 대책을 세워두고, 위기에 처했을 때 대처방안을 주도면밀하게 마련해 숙지한다면, 대형 참사를 줄일 수 있고 단 한명의 인명이라도 살려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앞서의 잘못을 통해 깨닫고 배워 발전해 나가는 학습효과로 인류역사의 발전에 초석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역사의 교훈을 잊고 전철을 밟아 후회한다. 학습은 잠시의 소나기성 외침일 뿐, 금세 망각의 늪에 빠져들곤 한다. 특히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철저한 반성은 없이 축소와 덮기, 면피와 남 탓에만 열을 올려 흐지부지 넘어가는 바람에 다시 재발되곤 하는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암함이 침몰했으면 그 원인을 과학적이고 철저하게 분석해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했어야 함에도, 여지껏 북한은 오리발을 내밀고 있고, 국민들은 의혹의 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북한 병사가 넘어와 문을 두드렸다는 3년 전의 이른바 ‘노크귀순’과 올해 6월 ‘대기귀순’ 등 DMZ에서 북의 침투사례가 빈번했지만, 그 역시 ‘덮기’에 급급하다 보니 ‘지뢰폭발’ 사건이 터졌는데 이번에도 철저한 대안이나 책임자 규명 없이 북한규탄만 하다 “확성기에 북이 굴복했다”며 대북정책을 잘해 인기가 오른다고 희희락락이다. 북은 이번에도 여전히 근거를 대라며 오리발인데….


김대중 정부시절 드러난 도청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국정원이, 여전히 그 교훈을 망각하고 민간인 사찰과 해킹의혹의 중심에 선 것을 본다. 댓글사건으로 선거민의를 왜곡하고 국헌을 문란시킨 잘못을 범하고도 어영부영 뭉개기와 꼬리자르기로 넘어간 것이나, 불법적인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파문을 일으키고도 조직방어와 물타기, ‘아니면 말고’식 여론호도로 넘어가는 악습도 발본색원이 없으니 언제든 재발의 여지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렇듯 정보기관의 정치습벽과 검찰·경찰 등 수사·권력기관, 심지어 엄정 중립이 요구되는 군과 감사기관에 언론과 사법부까지도 정권 호위무사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전철을 되풀이하는 한국사회의 고질병이요 어리석음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 김종천 편집인 >



[사설] 시리아 난민 문제, 적극 손을 내밀자

● 칼럼 2015. 9. 18. 18:1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난민 문제가 국제사회의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 내전이 격화된 시리아 국민들을 비롯해 중동, 북아프리카 출신의 수많은 난민들이 안전을 찾고자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세살배기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가 터키의 한 휴양지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돼 난민들의 참상을 생생히 알리기도 했다. 난민 사태는 사람이 사람의 비극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차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 인류의 기본적인 인도주의 문제다.


국제사회는 난민 구호를 위해 나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일은 난민이 처음 도착한 나라가 어디였는지에 관계없이 모두 수용하겠다고 앞장서서 선언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도 난민 수용 규모를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는 난민 의무할당제를 논의중이다. 미국도 애초 시리아 난민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수용 규모를 늘리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남미에서도 베네수엘라가 시리아 난민 2만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섰으며 브라질, 칠레도 긍정적 태도를 밝혔다. 애초 유럽의 문제로 치부되던 난민 사태가 이제 세계 모든 나라의 공동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다소 늦었지만 바람직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시리아 난민만 40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까닭에 국제사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할 필요성은 여전하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법무부 자료를 보면 시리아 내전이 터진 뒤로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한 시리아인은 2012년 146명, 2013년 295명, 2014년 204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나머지는 난민보다 보호와 권리 보장 수준이 떨어지는 ‘인도적 체류’ 허가에 그쳤다. 그 배경은 난민 신청자가 본국 내전에 따른 신변 위협을 사유로 제시해도 법무부가 인정해주지 않아서라고 한다. 대신에 정치적 이유로 박해받고 있음을 입증할 것을 엄격하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숨진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외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폐쇄적 기준을 고집하는 것으로, 실상이 알려질까 봐 부끄러울 정도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2013년 7월 아시아에서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실제로 난민 신청자를 대하는 정부와 시민의 인식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최소한의 양심과 인류애를 발휘하는 데 이렇게 인색해서야 제대로 된 인권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