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소년은 어느 날 느닷없는 살인범이 되었다. 그는 사건현장 부근을 지나다 누군가 도주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을 경찰에 알린 것뿐이었다. 다른 아무런 살인의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목격자에서 돌연 살인용의자로, 그 며칠 후에는 실컷 얻어맞은 몰꼴로 구속돼 살인범이 되었다. 검사 앞에서, 그리고 판사 앞에서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절규했지만, 절벽에 대고 외치는 반향없는 신음소리였을 뿐이다. 오히려 반성할 줄도 모르는 나쁜 녀석이라는 미운털까지 박혀서, 소년범으로는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받았고, 상급심에서 감형받아 10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 사이 진범일 듯한 용의자가 붙잡혔는데도, 검찰은 경찰의 구속을 막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인 즉, 이미 형이 확정된 범인 말고 다른 범인이 나왔다간 수사했던 경찰이며 지휘한 검사, 재판에서 무죄 외침을 묵살한 판사까지 모두가 개망신이니, 적당히 덮어버려야 한다고 했단다. 결국 살인용의자는 무죄 방면되고 말았다.
악운으로 인생행로가 뒤틀려 버린 청년은 출소 후 살인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당시의 사건 담당자들에게 묻는다. 경찰이 조작한 앞뒤가 맞지않는 증거들을 알고서도 어찌 살인범으로 기소했는가?, 진범으로 보이는 용의자를 외면한 것은 정말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나? 엉터리 수사와 누명에 양심의 가책은 없었는지? 과연 사회정의 수호의 파수꾼으로, 진실과 정의를 위해 봉직한 검사요 판사였다고 자부하는가?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는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묻자 기억이 없다고 했다. 수많은 사건을 지휘했는데 어찌 기억하겠냐는 것이다. 검사시절이나 변호사가 된 지금이나, 그는 그저 말썽없이 실적이나 올리면 그만이지, 어떤 젊은이의 유무죄와 망가진 인생이야 관심도, 기억도 필요없다는 이야기다. 그에게 사법정의나 진실규명이라는 가치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어젠다인 것이다.
그나마 목숨은 살아있고, 살아서 ‘억울’과 ‘원한’을 해소할 기회를 얻은 이들은 행운이다.
널리 알려진 인혁당 ‘사법살인’ 사건은 아무 죄없는 이들을 아예 명줄까지 끊어버린 대표적인 독재의 만행이다. 1975년 4월9일, 박정희 철권통치의 청소부 노릇을 하던 대법원이 사형확정 판결을 내린지 18시간 만에 2차 인혁당 관련자 8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원혼들이 지난 5월29일 전원 무죄를 확정받았다.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정짓는 데 40년이 걸린 것이다. 당사자들은 죽었고, 남은 가족은 피눈물의 세월을 살았지만, 생명을 거둬 간 악의 세력들은 사죄 한마디 없이 지금도 고개를 쳐들고 살아간다.
당시 대법원장 민복기는 2000년 자랑스런 서울대인 상까지 탔다는데, 지금도 대형 법무법인의 고문으로 지낸다. 대법관 민문기(사망)와 양병호는 11년이나 그 자리를 지켰고, 안병수는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장이라는 격에 동떨어진 자리를 4년이나, 주재황은 과분하게도 민주적 선거를 지휘하는 중앙선관위원장을 지냈다. 누구하나 판결을 잘못했다고 반성하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심장과 철면피로 90줄 인생을 살고있다.
어디 이들 사법의 비양심 세력들 뿐인가.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제 주구들이 대한민국을 주무르고, 조작과 고문을 일삼던 자들이 정계를 휘젓는다. 국민은 안중에 없는 해바라기들이 고관대작 지위에 오른다. 내용이나 경중의 차이는 있어도 양심과 정의를 외면한 사악한 권력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사람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악행으로 더 잘 출세하는 마당에 선행으로 고생하며 정의를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 과연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가치는 살아있나. 그러면 그 댓가는 무엇인가. 인간의 양심과 권선징악이란 꿈속에 그려보는 미사여구일 뿐이 아니랴?
최근의 공직자 청문회를 지켜보면 바야흐로 그 의문들이 현실이 돼, 처세와 출세의 비결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부정이든 비리든 권모와 술수로, 특히 정권의 앞잡이로 악행도 일단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통념이 일반화됐다는 사실. 사람들은 곧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그 망각의 뒤안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한 세상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이제 마냥 팔자좋게 살지만은 못할 것 같다. ‘친일인명사전’이 각고의 결실을 이룬 것처럼, 가칭 ‘반헌법행위자 열전’을 편찬한다는 경고가 나왔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의 가치를 뭉갠 불의한 자들을 낱낱이 기록해 역사에 남기겠다는 것이다. 충절의 사육신을 기리고 부관참시 당한 한명회의 모략과 악행을 까발렸듯이,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의 기록도 반드시 남겨야 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 사회와 공직에 경종을 울리고, 후세에 본이 되며, 정의 추구의 명분도 된다. 역사는 살아있고, 진실은 밝혀지며 정의가 승리한다는 꺼져가는 진리의 빛을 살려야 한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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