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바보가 되는 질문

● 칼럼 2012. 3. 20. 17:15 Posted by SisaHan
“만일에 약사가 의사의 처방대로 조제하지 않고 무단히 약을 바꾸면 어떻게 하는가요?” 2000년 의약분업을 하기 몇 년 전에 세계보건기구 일로 영국에 갔다가 보건부 관료에게 내가 물어본 질문이다.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의약분업을 해야 하겠기에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답은 무엇이었을까?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약사가 약을 바꿀 수 있겠어요?” 나는 아차 싶어 “아, 그렇지요” 하고 말문을 닫았다.
세상에는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는 현실이다.
판사나 검사가 퇴직을 하면 그 후 2∼3년은 각종 사건을 도맡아 수십억원을 번다고 한다. ‘전관예우’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흔한 일인가 보다. 이건 ‘전관’이 맡은 사건은 질 것을 이기게 해주고 유죄를 무죄로 판결해준다는 뜻이다. 법을 지키라고 하면서 본인들은 이래도 되나? 이럴 경우 법조인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가, 파괴하는가? 정치사건이 시작되면 여야 균형을 맞추느라 두세 가지 사건을 같이 수사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균형을 왜 맞춰야 하지? 야당은 집요하게 수사하면서 여당 사건은 유야무야 지나가버린다. 여당에 강한 수사를 하면 ‘정권이 끝나가는구나’ 하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이럴 경우 검찰은 공공기관인가, 사익집단인가?
 
정부의 고위관료들이 퇴직 후 일자리를 위해 회의만 마치면 업체에 정보를 흘리고 재벌에 유리한 정책을 만든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면 관료들이 정책방향을 정반대로 바꾼다고 해서 ‘영혼이 없다’고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필요한 일이다. 집권 정당이 바뀌면 새 정당의 정책을 실행해주는 것이 관료의 중립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료가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휘어지게 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이럴 경우 관료는 ‘공무’(公務)원인가, 재벌기업의 파견 직원인가?
언론은 공정한 사실보도가 생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파의 이익을 위해 왜곡하고 날조하고 의도적인 부추김을 한다. 정론을 폈다고 해서 피디를 징계하는 방송도 있다. 어느 날의 신문은 곁다리로 들어온 광고전단보다 못하다. 그러면서 남의 잘못에는 가혹한 비난과 입바른 충고를 서슴지 않는다. 내게는 오랫동안 답이 안 나오는 의문이 있다. ‘언론을 고발하는 언론’은 어디에 있을까?
교회를 매매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신도 수를 따져서 값이 매겨진단다. 대형 교회라면 아들 목사나 제자 목사에게 물려주려고 해서 화제가 되는 일도 많다. 재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이라고는 어려서 어깨너머로 읽은 게 전부이지만 이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사고팔며 상속할 수 있단 말인가? 신도가 고객이라? 이런 목사가 천국에 간다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간 기적일 것이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인가, 목사의 사업체인가?

이런 모든 사회병리적 증상을 일으키는 공통의 원인은 ‘공공성의 결핍’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들이 사익추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공공성에 기초한 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국에 나가 무심코 물었다가는 무언의 멸시를 당할 질문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 전관예우를 없애려면, 검찰의 정치놀음을 없애려면, 관료가 나라만 위해 일하게 하려면, 언론이 참말만 하게 하려면, 교회를 사고팔지 않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나요? 그러면 그들은 되묻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나는 또 바보가 되겠지?
 
< 김용익 서울대 교수·한국미래발전연구원장 >


지난 2010년 일어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민 불법사찰의 몸통이 청와대라는 사실은 그동안 확인된 각종 정황증거가 말해준다.
여기에 또 하나의 새롭고 충격적인 내용이 추가됐다. 청와대가 총리실 지원관실의 컴퓨터 증거인멸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다.

엊그제 나온 <한겨레21> 보도 등을 보면 최종석 당시 청와대 행정관은 장진수 지원관실 주무관에게 “내일쯤 검찰에서 지원관실을 압수수색한다고 한다. 컴퓨터를 물리적으로 조처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있기 이틀 전 일이다. 그는 심지어 “하드디스크를 망치로 깨부수든지 컴퓨터를 강물에 갖다버려도 좋다. 민정수석실과 이미 얘기가 돼 있어 검찰에서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정부 관계자는 증언했다.
이 증언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청와대가 증거인멸을 지시한 정황이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난 점이다. 최종석 행정관은 ‘불법 대포폰’을 만들어 지원관실에 건넨 사실이 드러났을 때부터 증거인멸의 핵심 인물로 지목됐다. 
그런데도 검찰은 그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대포폰 정도에 머물지 않고 증거인멸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그의 직속상관이 이 사건의 윗선으로 지목돼온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이니 불법 민간인 사찰 사건의 그림이 좀더 분명해진다.

이번 증언은 검찰이 청와대 쪽에 수사 진행상황을 귀띔해주고 증거인멸을 고의적으로 유도했을 개연성도 보여준다. 이는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장진수씨가 지난해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보충서 내용과도 상통한다. 그는 “검찰은 처음부터 증거인멸을 확인하기 위해 압수수색한 것”이라며 “지원관실 직원들은 치밀하고 교활한 계략에 의해 범죄의 도구로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똥이 청와대로 튀는 것을 막는 수사였다. ‘BH(청와대) 지시사항’이라는 글이 적힌 원충연 지원관실 사무관의 수첩 메모, ‘BH 하명’이라고 적힌 사건대장 등 숱한 증거가 발견됐으나 검찰은 철저히 외면했다. 
이런 검찰에게 재수사를 촉구하기도 이제는 지쳤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민간인 불법사찰의 진실이 드러날 시기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묻혀 있던 증언들이 하나둘씩 새롭게 나오고 있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청와대와 검찰이 진실 은폐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멀지 않았다.


[기고] 정치검찰에 새 이름을

● 칼럼 2012. 3. 10. 19:30 Posted by SisaHan
노무현 정부 초기 ‘검사와의 대화’ 직후 ‘검사스럽다’는 말이 유행했다. 지금도 네이버 전자사전을 치면 ‘행동이나 성격이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논리 없이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 데가 있다’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단연 ‘정치검찰’의 활약이 눈부시다. 별명도 따로 지어줘야 한다. 뭐가 어울릴까? 
정치검찰의 특징부터 보자. 우선 ‘줄서기’에 능하다. 어디에 ‘힘’이 있는지 귀신같이 아내는 것은 필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게 몸으로 익힌 생존 철학이다. 그래서 이 정부 초기 인사권자의 의중을 헤아려 끈 떨어진 이전 정권 인사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칼질을 해댔다.

일단 가야 할 길이 보이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겁없이 덤비는 자들에 대해선 정치권이고 언론계고 영역 불문에다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안마시술소 카드사용 내역도 무기로 삼고, 사돈의 팔촌까지 친인척을 불러다 조지는 건 기본이다. 형평이고 정의고 다 부질없는 소리, 남들의 손가락질에도 눈 질끈 감고 잠시의 쪽팔림만 참아내면 된다. 몸을 던진 만큼 응분의 보상이 주어지는 ‘기브 앤 테이크’는 이 바닥 거래의 기본이기 때문. 그래서 <PD수첩> PD들을 기소한 부장검사는 서울중앙지검과 대검의 요직을 꿰찼고,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을 배임죄로 엮은 부장검사도 다음 인사에서 법무부로 영전했다. 그 위의 차장검사들 역시 법무부와 대검의 요직으로 발탁돼 갔다. 무리한 수사로 무죄가 나와도, 조직 내부에서조차 손가락질을 해도 확실하게 뒤를 보장받았다. 이보다 더 믿을만한 거래가 어디 있겠는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르다는 것도 이들의 특징. 조직이 침탈당하는데 가만있으면 칼잡이의 도리가 아니다. 이 한몸 바쳐서라도 막아야 한다. 검찰 조직 손보겠다는 야당에 적극 동조했던 여당 의원을 겨냥해 총선 코앞에 성매매 사건을 다시 들춰내는 지저분한 일에도 망설임이 없다. 비명에 간 전직 대통령 딸을 향해 욕먹을 각오 하고 다시 칼을 빼든 것도 다 조직 보호를 위한 일이다. 총선 뒤 우리 조직을 대대적으로 손보겠다는데 그런 야당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칼잡이 최고수들이 모인 대검 중수부가 총대를 메는 게 당연하다. 
자기 밥그릇, 즉 ‘나와바리’를 넘보는 자는 피를 봐서라도 보복하고, 이권 지키려 힘센 권력에 줄 대는 건 당연시하며, 큰 칼을 주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꼭 닮은 집단이 대한민국에 딱 하나 있다. 어렵다는 사법시험 패스하고, 때로는 남의 눈총을 받아가며 넉넉잖은 월급에도 밤샘을 일삼아 하는 대다수 검사들까지 매도될까 차마 그 이름은 붙여주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무모한 칼질 끝에 부엉이바위 아래 아직도 핏자국이 선연한데 3년상도 지나지 않아 그 유가족을 인질로 잡겠다고 다시 나선 정치검사들은 검사로서의 금도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염치도 상실했다고 나는 본다.
 
‘조폭 검찰’, 그들에겐 그 이름조차 아깝다. 영화 <친구>의 조폭 두목(유오성)도 “쪽팔리기 싫어서” 구차한 변명 늘어놓지 않고 중형을 감수했다. 조폭 사회에서도 선을 넘거나 의리를 저버린 삼류 조폭에겐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양아치라고. 유오성이 선생님한테 맞을 때 내뱉던 그 양아치 말이다. 
그러나 칼도 잘못 쓰면 결국 자기가 당하는 법. 양아치들이 벌건 대낮에 여의도 한복판에 뛰어들어 큰 칼을 마구 휘두르는데 가만히 두고 볼 국민이 어디 있는가. 잠시 겁먹은 것 같아도, 속은 것을 알면 그 칼이 바로 그대들을 향할 것이다.

<김이택 - 한겨레 신문사 논설위원>


[1500자 칼럼] 알을 품은 어미의 꿈

● 칼럼 2012. 3. 10. 19:26 Posted by SisaHan
어쩌면 이렇게도 클까. 특대란을 산 기억이 나서 아침에 달걀 프라이를 하려고 냉장고를 열다가 두 줄로 도열해 있는 알들에 시선이 잡히고 만다. 이 정도 크기면 아무리 몸집이 큰 암탉이 낳았다 해도 산통이 여간 크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알 하나하나에 ‘어머니’의 간절함과 소망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동료 교사가 귀농을 생각하며 양계장 체험을 써 보낸 이메일을 받고 나서부터이다. 달걀은 달걀일 뿐이지 음식 재료 이상으로는 연상하지 못했는데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산고 끝에 낳은 달걀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지금은 청년이 된 아들을 분만할 때 3.85킬로그램이 주던 산통이 아직까지 선명한 것처럼 어미 닭들에게도 생명을 품은 알을 낳기 위해서는 그만한 통증쯤은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24시간 불 밝힌 양계장의 어미 닭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다. 인간의 끝간 데 없는 탐욕과 이기심과 잔혹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알 속에 들어있을 암탉들의 불안한 정서와 누적된 피로와 인간을 향한 혐오감을 걱정했다. 나는 그 글을 쓰며 암탉과 수탉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난 달걀이 그리웠고, 그리운 만큼 닭장 속의 어미 닭이 낳은 알들이 창백해 보였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인지 잎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닭 생각이 난다. 동화책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으며 마당에 흩어져 노니는 닭들을 부러워하는 양계장 철망 속의 주인공 ‘잎싹’의 소망을 듣던 기억에 아마 그럴 것이다. 아무리 목을 길게 내밀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닭장 속의 소외된 세상. 그 안에서 내다본 마당의 햇살은 잔인하리만치 따스했고, 사랑 가득한 바깥은 철망 밖의 생명들을 위한 또 다른 세상이었다. 잎싹은 무정란인 줄도 모르는 채 제가 낳은 알을 품 안에 넣어보았다. 맨 살에 닿는 알의 촉감에 무조건적인 애정을 느끼며 껍질 속에서 조그맣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만큼 잎싹은 엄마가 되고 싶어 했다. 엄마가 되겠다는 헛된 소망에 사로잡혀 애를 쓰는 잎싹이 애처로워 “그건 아무리 품어도 부화할 수 없는 알이야”라고 소리쳐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목숨을 건 탈출 끝에 이해와 사랑으로 인연을 맺은 청둥오리의 알을 정성껏 품어 부화시키는 것으로 잎싹은 철망 안에서부터 지니고 있던 오랜 소망인 ‘어머니’의 꿈을 실현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 ‘초록머리’는 어미 닭의 지극한 돌봄 속에 자랐다. 언젠가 해야지 하고 미루던 그 많은 사랑의 말들은 가슴에서 꺼내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덧없이 흘러 초록머리를 청둥오리 무리 속으로 떠나 보낼 때가 되었다. 이별을 서운해 하며 떠나는 초록머리에게, 엄마에게는 추억이 있으니까 외롭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킨 후 잎싹은 껍데기뿐인 엄마로 주저앉았다. 자식도 떠나 보내고 홀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두려워하던 엄마 닭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간절한 또 하나의 소망이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날고 싶다는 소망, 알을 품어 산란하는 어미로서의 사랑만큼이나 소중한 제 꿈이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지금 내 앞의 이 달걀을 낳던 어미 닭도 꿈이 있었을까, 있다면 어떤 꿈이었을까. 이루지 못했을 것만 같은 꿈. 그건 어미가 닭장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의 꿈까지 가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정란처럼 부화할 희망이 없는 꿈이었기에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본능처럼 그들 핏속에 흐르는 ‘날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가두고 살 수 있었을까. 잎싹처럼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너무 강해서 본래 제가 지닌 꿈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철망 속의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것일까. 
어미 닭의 소망을 통해 내 안에 아직도 살아있을지 모를 이루지 못한 꿈의 조각들을 들춰본다. 커피를 잔에 가득 담아 아침햇살 가득한 식탁에 앉아 생각한다. 나의 꿈을,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 저 아래 깊숙이 묻혀있을 아득한 나의 꿈을.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