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방송 장악의 부메랑

● 칼럼 2012. 3. 10. 18:09 Posted by SisaHan
<문화방송>(MBC)과 <한국방송>(KBS), YTN이 한꺼번에 파업에 들어갔다. 방송사들의 동시파업은 1997년 노동악법 반대, 2009년 언론관계법 날치기처리 항의 파업에 이어 세번째다. 4.11 총선을 한달 남짓 앞두고 벌어지는 방송 대투쟁의 뿌리는 이명박 정부의 무리한 방송 장악에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 1월30일부터 시작한 문화방송 노조 파업에 이어, 한국방송 새 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는 6일 새벽 5시부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YTN 노조는 배석규 현 사장 연임을 결정하는 주주총회(9일)를 앞두고, 8일 아침 8시부터 10일까지 3일간 1단계 파업을 벌인다. 
파업 방송인들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은 ‘공정방송 복원, 낙하산사장 퇴진, 해고자 복직’이다. 사쪽의 공정방송 훼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이번 동시파업의 특징이다.
 
한국방송 기자협회는 제작거부 선언문을 통해 “정권에 예민한 뉴스를 회피하고 약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다”고 지난 4년간의 보도 현실을 반성하면서 “이젠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집요하게 방송 장악을 시도했다. 대통령의 멘토라 불린 최시중씨를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한 게 신호탄이었다. 이 대통령 선거캠프 특보였던 구본홍씨를 YTN 사장에 임명했고, 정연주 당시 한국방송 사장을 감사원, 검찰까지 동원하며 불법적으로 내쳤다. 엄기영 사장이 중도 퇴진한 문화방송 사장엔 친한나라당 성향을 보여온 김재철씨를, 한국방송 사장엔 이병순씨에 이어 이 대통령 선거참모였던 김인규씨를 앉혔다. 
이들 방송사에선 크고 작은 제작자율성 침해 논란이 끊임없이 일었다. 보도·제작 책임자들은 정권에 불리한 보도나 제작 아이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4대강 문제처럼 현 정부의 실정을 짚는 기사들을 공영방송에선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한국방송의 한 기자는 토로했다. 지난 4년은 방송 제작현장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허물어져간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게 문화방송의 국장책임제다. 경영진의 자의적인 보도·제작 관여를 막기 위한 이 제도가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경영진의 일원인 본부장이 책임지는 구조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사장의 통제 권한이 훨씬 커졌다. 공정방송을 위한 노사간 협의 통로도 유명무실해졌다.
 
취재 현장에선 방송사의 이니셜을 따서, 문화방송은 ‘엠비(MB)씨’로, 한국방송(KBS)은 ‘김 비서’로 불릴 정도였다. 방송사 파업의 구호가 경영진 퇴진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방송 독립성과 공정성 훼손을 주도하는 이가 결국 최고경영진이라고 보는 것이다. 
방송사 경영진은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엔 청와대의 상황 인식도 깔려 있다고 정치권과 방송계에선 분석한다. 임기 말에 처한 청와대로선, 어느 한곳이라도 무너지면 다른 방송사들까지 연쇄적으로 경영진을 교체해야 하는 처지에 몰릴 걸 우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방송파업은 지난 4년동안의 후유증에 다름 아니다. 이는 이명박정권이 스스로 만들어낸 부메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방송장악이 결코 정권유지나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해서도 안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미디어의 진화는 소통방법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권력의 주구(走狗)가 되는 언론은 없는 게 훨씬 낫다. 방송전파는 국민이 공유하는 재산이다. 방송의 공정성이 강조되는 이유다. 방송 총파업은 그 증거를 스스로 만들어낼 의무를 안고 있다.


[한마당] 신문의 신뢰

● 칼럼 2012. 3. 5. 20:42 Posted by SisaHan
인터넷 고발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는 지지난해 세상을 뒤흔든 대특종을 앞에 두고 <뉴욕 타임스> <르몽드> <가디언> <슈피겔> <엘 파이스> 다섯 매체에 손을 내밀었다. 독차지할 수 있는 과실을 함께 누린 것이다. 줄리언 어산지가 추려낸 다섯 매체를 꿰는 공통어는 신뢰다. 
이는 위기가 수식어가 된 지 오랜 신문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인터넷과 SNS 시대, 신문과 같은 전통매체의 고민은 깊다. 속보 경쟁도 의미를 잃어간다. 탐사보도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황색 저널리즘을 추구하기엔 온라인에 재미있는 게 너무 많다. 그나마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해법은 좀더 예민한 잣대로 사실을 준별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정보 포화에 멀미를 느끼는 이들에게 지갑을 열게 할 유용함을 신뢰 아닌 다른 것에서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신뢰는 커녕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보도들이 잇따른다. 

감사원은 지난 2월26일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 의혹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일보>는 다음날 지면에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과 통화한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제가 언론 경험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수치를 내는 어설픈 짓을 하겠느냐.” 비언론인인 박 전 차관조차 어설프다고 폄하한 그 보도자료를 중앙은 어떻게 보도했을까. 경제면 4단 크기로 후하게 대접했었다. 업체 이름도 제목에 달았다. 이 보도자료를 접했던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통상적인 외교부 보도자료와 너무 달랐다. 수치가 자세히 적시되는 등 경제부처 보도자료처럼 너무 친절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루지 않았다.” 

“그 체형에서 나오기 힘든 MRI.” “박원순 아들이 낸 MRI, 본인 것 맞다.” <동아일보>의 지난 2월22일과 23일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전날 한껏 의혹을 부풀린 뒤 바로 다음날은 강용석 의원이 ‘무리한 주장으로 자충수를 뒀다’며 한발 뺐다. 그렇게 중요하다는 박 시장 아들의 체형 확인 없이 기사를 썼다가 폭로가 엇나간 것으로 드러나자 이번에는 공격의 화살을 매몰차게 강 의원에게 돌린다. 

<조선일보>가 고침까지 낸 김정남 이메일 관련 보도(지난 1월17일치 1면 머리기사)는 어떤가. 조선은 보도 사흘 뒤 ‘<월간조선>이 요약해 본지에 전달’ 운운하며 주로 자매 월간지에 책임을 떠넘기는 정정기사를 냈다. 하지만 월간조선 기자가 쓴 허위의 텍스트만 보더라도 ‘김정남 “천안함, 북의 필요로 이뤄진 것”’이라는 조선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서는 “북조선 입장에서는 서해5도 지역이 교전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핵, 선군정치 모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라고 했다」가 김정남이 언급했다는 해당 기사 내용이다. 김정남 이메일 내용을 직접 발췌한 대목에 천안함이란 단어는 없다. 제목처럼 김정남이 북의 소행이라고 단정해 밝혔다고 해석하기도 무리해 보인다. ‘북이 했다면 그런 의도였을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인 해석일 듯하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제목은 달랐다. 사실에 대한 존중 없이 독자의 신뢰를 붙들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공들여 만들고 있는 지면이 있다. ‘신문은 선생님’이란 신문활용교육(NIE) 면이다. 그 누구도 선생님이 될 자격이 있지만, 정말 신문은 선생님이 되어야 할 이유가 많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신문에 실린 내용은 참이다. 정직은 학생뿐 아니라 선생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내가 일하는 곳을 포함해 모든 신문들이 부끄럽지 않게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길 정말 바란다.

<한겨레신문 강성만 문화부장>


미국은 물론 유럽이나 아시아에는 한국인 유학생과 연구원, 교수들이 아주 많다. 외국에서 연구하는 한인 연구자들은 한국의 과학발전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국내 과학정책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한국의 과학기술이 질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원인분석과 대안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의 대화는 한발 떨어져서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해주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랑은 짝사랑이다. 한국에선 그들이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하려고 생각조차 않고 있다. 재외 연구자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제도적인 절차도 미비하다.
우리 정부가 창피하게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냉소하는 연구자도 여럿 봤다. 어리석게도 이번 정부는 과학기술부와 정통부를 없앴다. 또 한국 대학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며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했지만, 그 돈의 대부분은 유명 대학의 외국인 교수들에게 몇달만이라도 한국에 머물러달라고 애걸해 체류비로 사용됐을 뿐이다. 더 절실한, 어린 유학생이나 젊은 연구원이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지원은 별로 없다.
 
외국에서 연구하는 유학생, 한인 연구원들이나 교수들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다. 그들이 세계의 과학무대에서 좋은 연구를 하면 그 자체로 우리나라의 과학역량이 성장한다. 그들은 기꺼이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데 좋은 다리 역할을 해줄 것이며, 우리는 그들이 이 살벌한 세계무대에서 행복하게 과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다.
국제학회에서 한국 연구자들이 더 높은 위상에서 연구 리더가 될 수 있도록 국제학회를 지원하는 일, 대규모 글로벌 연구 프로젝트에 국내외 한국 과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재외 한인 과학기술자 사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그들에게 한국에 있는 적절한 공동연구자를 찾아주는 일, 재외 한인 과학자를 국내에 알리고 국내 학자들을 재외 한인 연구자들에게 소개하는 일 등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그나마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들은 비슷한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지만, 유럽이나 아시아 연구자들은 정부의 지원정책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돼 있다. 중국이나 일본은 자국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글로벌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해 세계적 위상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형국을 지켜볼 때면, 옆집 잔칫상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이웃처럼 우리의 처지가 한없이 처량하다.
 
이제 우리 정부도 글로벌 연구계획에 연구비를 지원해 우리 과학자들이 참여케 하고, 국제학회에서 한인 과학자들이 더 높은 위상으로 학술활동을 주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이 절실하다. 일례로 신경과학 분야만 해도 거대 신경망을 공동연구하는 ‘신경정보학 글로벌 프로젝트’가 한창인데, 정부의 무관심으로 우리 과학자들은 참여할 기회를 놓쳤다. 국제학회에서 젊은 유학생들과 식사 한끼 같이 먹는 ‘한국 과학자의 밤’ 행사를 위해 교수들끼리 몇달 전부터 스폰서를 구걸하는 일을 후배들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기초과학 강국인 스위스에 ‘한국인 과학기술자협회’가 생긴다는 소식은 무척 반갑다. ‘스위스 한인 과학자 사회’는 앞으로 한국과 스위스의 과학기술 연구협력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그들의 계획, 야심찬 아이디어를 묵묵히 지원만 하면 된다. 양국 공동 심포지엄을 핑계로 방문해 축사와 식사만 하고 돌아오는 일, 과도한 보고서 작성으로 귀찮게 하는 일만 안 하면 된다.

<정재승 - KAIST 교수 / 바이오 및 뇌공학과>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이 여전히 일제하 친일·매판 세력에서 독재체제 비호 세력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치명적인 약점을 호도하기 위해 이들은 끊임없이 반공·냉전 이데올로기와 억압체제를 강화해야 했고, 역사와 사실을 조작하고 학문을 왜곡해야 했다. 어제 개관한 박정희기념관은 바로 이들의 숙원사업이었다. 기억을 왜곡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그렇게 집요했다.
현직에서 물러난 대통령을 따르는 이들이 기념관을 짓고, 각종 전시를 통해 그의 업적과 유지를 알리려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경계하고 치적은 승계하는 뜻깊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취지로 김대중도서관은 이미 문을 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념관도 추진중이다. 독재자라고 해서 박정희기념관 자체를 매도할 순 없다.
 
문제는 그곳에 전시될 기념의 내용이다. 오로지 진실의 원칙에 따라야 하지만, 최소한 일방적 미화와 찬양을 위한 왜곡은 없어야 한다. 왜곡의 전당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박정희기념관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치적만을 발췌·과장해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등을 결과적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념사업회의 말대로 1960~70년대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이 전시만 본다면, 박정희는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선구자로만 각인되기 십상이다. 올여름 개관한다는 도서관 역시 개인의 소장품이나 국무회의 안건, 친필 지시 등을 수집·정리한다고 하니, 박정희 미화에 온전히 바쳐진다. 이런 왜곡의 전당을 짓는 데 국민의 혈세와 시민의 재산이 투입됐다는 게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유산이나 추종자들의 성금으로 지은 기념관이라면 미화 혹은 칭송을 한다 해도 그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기념관엔 정부 예산이 178억원이나 투입되고, 금싸라기 터 5260㎡는 서울시가 무상 임대한 땅이다. 500억원은 전경련이 회원사로부터 기부받았다지만, 이 돈 역시 엄격히 말하면 각 기업의 수많은 주주들의 재산이다. 공공의 재산인 것이다. 기념사업회가 서울시에 기부채납하기로 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을 게다. 그렇다면 전시 내용은 바로 그런 공공성에 걸맞아야 한다.
시민은 혈세가 독재자의 망령을 되살리는 데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친일매판·독재 추종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이용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정부나 서울시는 기념관이 왜곡의 전당이 되지 않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