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두 개의 중국,두 개의 한국

● 칼럼 2012. 1. 30. 18:25 Posted by SisaHan
대만 총통 선거를 앞둔 지난 12일 밤, 타이베이 뒷골목의 소박한 선술집에서 친구들이 마주앉았다. 국민당 마잉주 총통과 도전자인 민진당 차이잉원 주석의 정책에 대해 열띤 토론이 오가고, 누가 이길지에 대해 장난삼아 내기를 걸기도 했다. 화제는 중국 대륙으로 옮겨가 후진타오 주석의 대만 정책에 대한 평가, 올해 말 등장할 시진핑 체제가 어떤 난제를 맞이하고 있는지에 대한 난상토론도 벌어졌다. 빈 술병과 안주 접시가 계속 늘어가고 얼굴이 붉어지면서 토론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이들 4명의 친구는 대만의 젊은 학자와 정치 평론가, 중국과 홍콩의 언론인이었다. 대만과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민진당의 경계를 모두 넘어 자유로운 말들이 오갔다.

지난주 대만 대선 취재차 간 타이베이에서 본 중국과 대만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베이징에서 비행기가 날아오른 뒤 3시간 만에 타이베이에 도착해 곧장 휴대전화를 켜니 자동 로밍으로 대만의 통신망에 접속했다. 곳곳에서 위안화를 타이베이달러로 환전할 수 있었다. 고궁박물관이나 타이베이101 빌딩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지난해 184만명의 중국 관광객이 대만을 여행했다. 
서울과 평양을 직항 항공편으로 오가고, 한국 휴대전화가 북한에서 자동 로밍되고, 한국과 북한 젊은이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자유롭게 남북한의 고민을 토론하는 날은 언제나 오게 될까? 남북한의 교류를 전면 금지한 5.24 조처만이라도 언제 풀리게 될까? 엉겁결에 양안 지식인들의 대화에 끼어 앉은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반분열법이나 미사일로 대만의 독립 움직임을 위협하던 중국은 경제 관계와 인적 교류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2008년 ‘양안 화해’를 내건 마잉주 대만 총통의 집권이 계기가 됐다. 현재 대부분의 대만인들은 중국과의 통일을 원치 않지만, 사람과 경제의 교류를 통해 양안의 동포들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서서히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하나의 중국’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두 개의 중국’도 뚜렷이 보였다. 베이징을 출발해 대만에 도착하자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이지만, 중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됐다. 
마잉주 총통은 선거 전 직접 외신기자들 앞에 나와 즉석에서 질문에 답했다. 모든 기자들이 원하는 질문을 자유롭게 던질 수 있었다. 후보들의 모든 일정은 기자들에게 20~30분 단위로 공개됐다. 중국에서 지도자들의 일정이나 가족 관련 뉴스는 ‘국가기밀’이다. 
선거 전날 밤 타이베이 교외의 체육관에서 열린 차이잉원 후보의 집회장에 들어섰을 때는 축제 같은 정치 참여 열기에 놀랐다. 길거리에선 어떤 시민에게 말을 걸어도 선거와 대만의 현실에 대한 솔직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공무원들의 겸손하고 성실한 태도는 구호가 아닌 행동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대만 민주주의 효과’는 대만해협 건너 중국인들을 술렁이게 했다. 중국 당국은 이번 선거가 중국의 대만 정책의 승리임을 강조하려 했으나, 중국 누리꾼들의 관심은 대만 동포들이 누리는 민주와 자유에 집중됐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내가 죽기 전에 지도자를 선거로 뽑을 수 있으려나’ ‘해협 저편의 열띤 총통 선거를 보니, 질투가 파도처럼 일어난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중국의 유명 부동산회사 완커의 왕스 회장은 직접 대만 선거를 지켜본 감동을 웨이보에 올렸다. 대만에 머물고 있는 중국 친구는 선거날 아침 일찍부터 투표소에 가서 난생처음 국민들이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보고 왔다고 했다. 
중국이 경제와 돈으로 대만을 바꾸고 있다면, 대만은 민주주의와 투명한 사회의 힘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 한겨레신문 박민희 베이징 특파원 >


[한마당] 망나니가 휘두른 칼

● 칼럼 2012. 1. 23. 18:19 Posted by SisaHan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간 검찰의 칼이 정연주 전 <한국방송>(KBS) 사장과 한명숙 전 총리를 찌르지는 못했다. 이번에 이 두 사람에게 무죄 선고를 내린 일을 포함하여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사건에서 검찰의 칼을 거둔 법원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상식의 최저선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애초 불법 민간인 사찰의 희생자가 되어 자신의 블로그에 촛불 동영상을 올렸다가 기소된 김종익씨는 이번에는 조전혁 의원의 막가파식의 고소를 받은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로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 낙서를 했다고 검찰에 기소된 대학강사는 유죄판결을 받은 상태다. 정연주·한명숙 두 사람과 달리 이들은 평범한 시민이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치명상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은 도대체 애초부터 사건으로 성립조차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 재판부의 권고를 받아 세금 환급을 포기한 <한국방송> 사장을 배임죄로 기소한 것이나, 기업가의 신빙성 없는 진술 한마디로 전 총리를 범죄자로 몰아가고, 100만명 이상이 본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렸다는 혐의로 사기업 사장을 기소하고, 그냥 장난 정도로 봐줄 낙서사건에까지 칼을 휘둘러댄 것이다. 이들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보인 검찰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을 글로 적으면 책 한권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근본을 뒤흔든 중요사건이라 볼 수 있는 디도스 공격, 저축은행 사건, 효성그룹 비자금 사건, 한상률 전 국세청장 사건, 그랜저 검사 사건 등에서 검찰은 칼을 꺼내는 시늉만 했다. 
사람들은 정연주·한명숙씨가 무죄가 되었으니 ‘사필귀정’ 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무죄’는 결코 원상회복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이 입은 개인적 상처도 크지만, 정 전 사장을 쫓아낸 이후 지난 3년 동안 <한국방송>이 공영방송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편파방송과 국민 바보 만들기 작업을 한 결과, 이 정권의 더 심각한 비리와 부정은 그대로 축소·은폐될 수 있었다. 미네르바 사건이나 <PD수첩> 사건이 무죄가 되었지만, 당사자들은 정신질환을 앓을 정도의 큰 상처를 입었고, 이 사건을 지켜본 국민과 언론인들의 입은 얼어붙었다.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중죄에 제대로 칼을 들이대지 않는 것은 그런 범죄의 재발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법과 정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일이었고, 과거 같으면 여러 번 탄핵을 당할 수도 있는 사안에 연루된 현 정권을 살려주는 일이었다. 

칼을 휘둘렀던 사람들은 승승장구 출세하여 아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옷을 벗은 사람은 연 수십억원의 수임료를 챙기는 잘나가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있다. 과거 검찰이 그러했듯이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 들어오면 또다시 그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며 권력 뒤에 숨을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나라 최대의 암적인 존재는 검찰이다”라고 말했다. 

망나니는 결코 스스로의 판단으로 칼을 휘두르지 않고 오직 명령에 충실하게 따를 뿐이다. 그런데 망나니의 잘못 휘두른 칼에 맞아 엉뚱한 사람이 죽거나 치명상을 입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칼을 맞지 않아야 할 사람이 맞고, 마땅히 칼을 맞아야 할 사람이 살아남아 국민이 누려야 할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시장의 공정성, 정의가 여지없이 무너진다면, 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이며, 어떻게 망가진 사회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무죄로 끝날 일이 아니다. 피해자 보상과 검찰 사과로도 충분치 않다. 국민참여 국회 청문회를 제안한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한마당] 시키는 일만 하다가는

● 칼럼 2012. 1. 14. 13:49 Posted by SisaHan
‘파블로프의 개.’ 먹이를 줄 때 종소리를 울려주면 어느 순간부터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흘리게 되는 참으로 멍청한 개다. 
파블로프는 그 개를 가지고 좀더 복잡한 실험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종소리가 아니라 원을 보여주면서 먹이를 줬다. 어느 순간부터 개는 원 모양만 보면 침을 흘리게 되었다. 이제는 훈련의 강도를 더 높여, 개가 원과 타원을 구별하도록 훈련시켰다. 원 모양을 보면 침을 흘리도록 먹이를 주고, 타원 모양을 보면 먹이를 주지 않았다. 이제 개는 원과 타원을 아주 정확하게 구별하게 되었다.
문제는 바로 그다음부터 생겼다. 짓궂은 파블로프가 타원 모양을 점점 원에 가깝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개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원과 타원의 구별이 어려워지자 아무 때나 침을 흘렸다. 그래도 실험이 계속되자, 개는 낑낑거리기 시작했고, 우리 안을 빙빙 돌아다니며 오줌을 흘렸다. 주변에 있는 물건을 물어뜯는 등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파블로프는 신경증 환자가 보여주는 행동과 유사하다고 하여 ‘실험적 신경증’(experimental neurosis)이라 불렀다. 개도 똥오줌을 가리기 힘든 상황이 지속되면 정신병에 걸린다는 이야기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개를 가지고 파블로프보다 더 못된(?) 실험을 했다. 우리에 갇힌 개에게 전기고문을 가하는 실험이다. 개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의 개는 코로 지렛대를 누르면 전기고문을 멈출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다른 집단의 개는 몸을 꽁꽁 묶어 꼼짝 못하게 했다. 한동안 전기고문을 가하니, 첫번째 집단은 고문이 시작되면 바로 코로 지렛대를 눌러 고문을 멈추게 했다. 두번째 집단은 그저 전기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두 집단의 개 모두 우리 문을 열어놓고 전기고문을 가했다. 고문이 시작되자 첫번째 집단의 개는 바로 문밖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두번째 집단의 개는 도망갈 수 있는데도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전기고문을 당했다. 이 현상을 셀리그먼은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 불렀다. 무기력도 학습된다는 이야기다. 

‘실험적 신경증’과 ‘학습된 무기력’은 개의 정신질환이 아니다. 인간의 상황을 개에게 적용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오랜 기간 처하면 누구나 이 병에 걸린다. 스스로 차를 운전하면 절대 멀미를 하지 않지만,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멀미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차가 언제 가고 언제 서는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이 그저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전 개같이 한다!’고 투덜대는 거다.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약한 정도의 ‘신경증’과 ‘학습된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더하다. 집안 문제든 사회문제든 도무지 내가 어떤 결정에 주체적으로 관여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어떻게 밀려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있는 이유는 시청자들이 더이상 무기력하게 ‘바보상자’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계속 듣고 싶은 노래, 계속 보고 싶은 사람을 결정할 수 있는 까닭에 즐거운 것이다. 그깟 티브이 출연자를 결정하는 버튼 누르기도 그렇게 즐거운데, 내 삶을 내가 결정하는 일은 얼마나 설레고 흥분될까? 

시키는 일만 하면 개도 미친다. 이제라도 뭐든 스스로 결정하며 살자는 거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일에 제발 쫄지 말자는 이야기다!

< 김정운 명지대 교수 >


[1500자 칼럼] 덜 채우는 슬기를

● 칼럼 2012. 1. 13. 16:00 Posted by SisaHan
임진년 새해 달력이 내어 걸린 지 벌써 일주일째다. 밖에서는 흑룡의 비상(飛上)을 연일 주지시키지만 내 안에선 그저 덤덤한 한 해의 시작일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무디어 가는 것 중 하나가 세월의 흐름이라더니 역시 그런가보다. 떠들썩한 망년회에서의 감흥도 희망찬 새해의 설렘도 줄어들고 시간만 급하게 내달리고 있는 듯하다. 
부엌 싱크대 앞에 섰다. 정면에 걸린 달력에 시선이 멎는다. ‘일월’이란 활자에서 풍겨오는 뉘앙스는 차가우면서도 정갈한 느낌이다. 언뜻 설원의 소나무 숲이 연상된다. 그리고 미지에 대한 경이로움과 약간의 두려움도 엄습해 온다. 올해는 어떤 일들로 저 무언의 날들이 채색되어질까. 흐린 날보다 맑은 날이 더 많았으면 하고 희구(希求) 해 본다.
 
새 달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해의 염원을 풀어내어도 ‘일월’은 여전히 냉기를 띈다. 자신의 등에 업힌 무수한 날들을 희망대로 운용하라는데도 방만한 자세로 일관하는 탓 일게다. 세제 범벅인 그릇들을 손으로 굴리며 ‘식구들의 무탈과 그들이 뜻하는 바를 이루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고 때 늦은 소망을 읊조려 본다. ‘일월’은 그런 나를 차갑게 응시하며 에둘리지 말고 너 자신의 바램을 가져보란다. 
나는 손이 큰 사람이다. 맏며느리의 건성인지는 몰라도 음식은 무조건 많이 해야 직성이 풀린다. 종종 남은 음식 때문에 곤욕을 치루기도 하지만 빠듯함보다는 넉넉함이 몸에 배어 편 한대로 한다. 오늘도 큼직한 스테인리스 용기에 만두소를 버무린다. 양을 줄인다고는 했지만 십여 가지 재료가 섞이다보니 또 만만치 않은 양이 되었다. 빠듯한 시간에 만들고 쪄야할 과정이 은근히 부담으로 다가온다.
늦은 저녁 아들내외와 만두를 빚는다. 쟁반위엔 두 가지 모양의 만두들이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간다. 속을 두둑하게 채워 오동통한 모양새를 가진 놈들은 우리 내외 솜씨이고 좀 빈약해 보이긴 해도 주름을 잡아가며 모양을 한껏 낸 놈들은 아이들 솜씨다. ‘만두 맛은 속 맛’이라며 속을 더 채우길 채근해도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저희들 뜻대로 손을 놀린다.
 
만두를 쪄낸다. 열탕 속에서 풀려난 놈들을 한 김 식히느라 쟁반마다 그득하게 담는다. 부자 부럽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하나 손질하다보니 예전에 비해 터진 놈들이 현저히 줄어든 듯하다. 
모양새나 쓰임새나 터진 만두만큼 만든 이의 정성을 무색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이번엔 특별한 비법을 차용한 것도 아닌데 좋은 결과가 나오니 흔쾌한 마음 되어 면면을 살펴본다. 근데 웬걸, 터진 놈은 전부 우리내외 솜씨이고 아이들이 만든 것은 하나같이 말짱하다. 더구나 생김새도 돼지와 사슴의 차이라고나 할까.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가 맥없이 결론이 난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맛을 내세우며 제한된 만두피를 넓혀가며 속을 가득채운 오랜 숙련자의 솜씨와 주어진 규격 하에서도 맛과 멋은 물론 효용성까지 잡은 비 숙련자들의 솜씨가 그것이었다. 옳지, 올해의 화두는 덜 채움이다.
주변을 관조한다. 수납장, 냉장고, 옷장, 등등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까지 허접한 것들로 포화상태다. ‘여백의 미학’이란 어구는 철학자의 소관으로 일관하고 채우기에만 열중했던 지난날을 반추한다. 
비우고 줄이면서 덜 채우는 해, 나의 2012년은 터지지 않는 만두를 만들어 가는 해이다.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