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그린피스 반원전 캠페인이 그렇게 두렵나

● 칼럼 2012. 4. 7. 14:4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계적인 환경단체 그린피스 간부 3명이 엊그제 ‘밝힐 수 없는 관계기관’의 요청에 따라 인천공항에서 쫓겨났다. 국익유해자로 분류됐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이달 중순 희망에너지 선박 투어를 통해 원전 반대 운동을 할 계획이었다. 결국 이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을 둘러싼 논란을 억제하려는 것이었으니, 원전 마피아의 이익과 독선 앞에선 국민의 체면도 국가의 품격도 없다.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국익 판단은 뿌리째 흔들렸다. 현재 우리 국민이 동의하는 수준은 원전의 안전성과 효율성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증이다. 원전 확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쪽에 가깝다. 따라서 국민을 어렵게 생각하고 그 뜻을 존중하는 정부라면 기존의 정책을 밀어붙일 순 없다. 당대와 미래세대의 안전을 고려해 지속가능한 에너지 대책을 새로이 수립해야 한다. 불과 60년 안에 초대형 원전사고가 3건이나 터졌는데, 원전의 안전 신화를 맹신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지금까지 숨겨왔거나 누락시켰던 사회적 비용 혹은 폐로 및 폐기물 처리 비용까지 합친다면 원전의 저비용 신화 역시 의심받아 마땅하다.
 
그린피스는 이번 희망에너지 투어를 통해 ‘에너지 혁명’ 한국판 보고서인 한국의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망을 발표할 계획이다. 원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한국적 에너지 대안을 제시한다니, 정부로서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린피스의 제안이 오히려 원전 마피아의 독선적인 확대 정책보다 국익에 더 부합할 수 있다. 그럼에도 훼방만 놓고 있으니 이보다 더 국익에 반할 순 없다. 캠페인을 위한 에스페란사호의 입항을 허가해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이번 입국 봉쇄는 탈원전 논란을 떠나 국가의 품격을 현저히 훼손하는 짓이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입국 금지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다.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두고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장의 입국을 불허했을 때처럼 사실상 막무가내로 입국을 거부했다.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이런 한국은 열린 사회도, 민주국가도 아니다.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소되어 국제적 망신을 사도 할 말이 없다.
 
한국은 올해 열릴 리우+20회의 등 각종 환경회의의 의장국을 수임했다. 지속가능한 개발과 보존의 의제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상황에서 합법적 캠페인조차 봉쇄한다면 지도력은 커녕 조롱거리만 될 수 있다. 당장 입국 금지부터 풀고 캠페인을 방해하지 말기 바란다.


[사설] 몰염치로 똘똘 뭉친 집권세력

● 칼럼 2012. 4. 7. 14:4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중 나라를 톡톡히 망신시킨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국무총리실 불법 민간인 사찰 사건을 두고 외국 언론들이 “한국판 워터게이트가 터졌다”고 대서특필할 정도이니 나라 망신은 제대로 시킨 셈이다. 입만 열면 ‘국격’ 타령이더니 막상 자신이 국격을 떨어뜨린 일등공신이 됐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조그마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이 대통령은 어제 열린 국무회의에서 “선거를 앞두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국정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며 “공직자들이 중심을 잡고 중요한 국정과제가 흔들림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민간인 사찰 사건으로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도 스스럼없이 ‘나라 걱정’을 입에 올리는 낯두꺼운 모습에 할 말을 잃는다.
 
그 상관 밑에 그 부하라고 권재진 법무부 장관도 이에 못지않다. 그는 엊그제 열린 신임 검사 임관식에서 “누가 보더라도 공정한 검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좌고우면하지 말고 원칙을 지켜 직무를 수행하라”고 말했다. 민간인 사찰 사건의 핵심 인물인 그는 신임 검사들에게 귀감이 되기는커녕 그들 앞에 설 자격도 없는 인물이다. ‘공정’ ‘원칙’ 따위의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기에 앞서 ‘좌고우면하지 말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사람은 권 장관 자신이다. 
청와대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로부터 사찰 내용을 수시로 보고받은 정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 등 불법사찰 관련자 4명은 2008~2010년 사이에 195차례나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한다. 당시 민정수석이던 권 장관은 전임 정동기 수석과는 달리 이 전 지원관으로부터 독대 보고를 포함해 6차례나 보고를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2009년 9월 경찰에 ‘특정 연예인 명단’을 제시하며 내사를 지시했다는 경찰 내부 문건도 공개됐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침묵과 방관, 물귀신 작전 따위의 꼼수로 일관하고 있다. 권 장관 본인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청와대라도 나서서 장관을 경질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본 척 만 척 한다. 권 장관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한 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기야 청와대에 그런 상식을 기대하는 것조차 무리일지 모른다. 털끝만한 양식이라도 있는 정권이라면 불법사찰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전 정권 탓이나 하는 몰염치와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겠는가.


[한마당] 호통치는 철학의 빈곤

● 칼럼 2012. 4. 7. 14:0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새누리당 박근혜 선대위원장이 이념을 좇는 세력에게는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한다.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 대한민국 국회가 민생을 돌볼 생각은 않고 잘못된 이념이나 좇고 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간곡한 우국충정처럼 들리는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객관적인 통계가 필요하다. 기왕이면 한-미 동맹을 더 다진다는 의미에서 미국과 비교하는 것이 좋겠다.
한국인들 중에서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사람은 60%를 넘는다.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든 보수라고 생각하든 정치 무관심만큼은 똑같다. 미국의 진보나 보수 중에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사람은 15%밖에 안 된다. 이들의 투표 행위는 어떨까. 미국은 진보나 보수라는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투표율이 높고 중도의 투표율은 이들보다 20%쯤 낮다. 한국은 보수의 투표율이 가장 높고 그다음이 중도, 제일 끝자리가 진보이다. 역시 20%쯤 차이난다.

투표한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함께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투표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후보에 대한 정보와 나름의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고 하는 투표이고, 다른 하나는 관심도 정보도 없지만 ‘묻지마 투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을 함께 선택하는 것이니만큼 묻지마 투표보다는 정보와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고 투표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이런 바람과는 좀 거리가 있다. 한국인 중에서 묻지마 투표 했다는 응답은 45%쯤 되고, 관심을 가지고 투표했다는 응답은 35%선에 머문다. 우리의 운명을 함께 선택하는데, 생각이 같고 다르고를 떠나서 ‘아무 생각 없이’ 투표했다는 사람들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투표했다는 사람이 55%, 묻지마 투표가 25%이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투표는 새누리당에 하겠다는 사람이 3분의 1쯤 되고, 거꾸로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하지만 투표는 야당에 하겠다는 사람이 5분의 1쯤 된다. 미국에서는 진보의 80%는 민주당, 보수의 80%는 공화당에 투표한다. 이런 뚜렷한 표 갈림 현상이 미국에서 나타나면 양당제가 정착되었다고 하고, 한국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이념을 좇는다고 몰아붙인다.

정리해보면,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미국의 유권자는 정치에 관심이 많고, 분명한 이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투표하고, 자신의 이념에 충실하게 투표한다. 한국의 유권자는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혐오하고, 계몽된 유권자로서 투표하는 사람보다는 묻지마 투표 하는 사람이 더 많고,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막상 투표는 이념과 무관하게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87년 체제가 지속되어온 지난 25년 동안 많은 한국인 유권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투표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발등을 찍어왔다. 그리고 이 혼란스런 정치적 선택은 새누리당과 그 뿌리에 해당하는 세력의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이념 좇는 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은 이 혼란스런 정치적 선택을, 따라서 자신들의 지배를, 한번 더 연장해달라는 주문이다. 투표는 하되, 아무 생각 없이 묻지마 투표 해달라는 뜻이다. 정치적 가치 따윈 상관없이 오직 지배할 뿐인 자신들에게 맡겨달란 뜻이다. 이념이란 다른 말로 철학인데, 이념 없이 어떻게 정치적 선택을 하란 말인가. 이념도 철학도 없다고 자백하면서 어떻게 감히 나라를 맡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철학의 빈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타인의 가치를 향해 호통까지 치다니‥.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1500자 칼럼] 민들레 나물 그리고 시아버님

● 칼럼 2012. 3. 31. 16:4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철 이른 봄을 맞았다. 지난 해 까지만 해도 긴 겨울 끝에서 아주 더디게 오던 봄이었는데 올해는 어느 날 갑자기 곤두박질치듯 달려왔다. 혹시 잘못 온 건 아닌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어리둥절하기는 사람뿐 만이 아닌가 보다. 삼월에 튜울립, 개나리, 목련, 과실수 등이 만개하여 온 동네에 꽃 잔치가 벌어졌다. 따뜻한 햇살 받으며 꽃구경을 하면서도 염려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틀 후면 다시 영하권이라는 일기예보에 뒤뜰을 한 바퀴 돌아본다. 우리 집 자두나무는 꽃봉오리를 송송 물었고 이웃집 도화는 연분홍 미소를 흘리고 있다. 거기다 지난 주 까지도 꽁꽁 얼었었던 대지는 언제 그런 날이 있기나 했냐는 듯 푸석하게 풀려서 갖가지 잡초를 밀어올리고 있다. 야들야들한 잡초 속에 성큼 자라난 민들레 무리에 눈총을 쏘다말고 가만히 다가가 손을 내 민다. 민들레 나물 그리고 시아버님, 늘 이맘때면 싸아하게 일어나는 그리움이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시아버님은 여든을 목전에 둔 어느 해 봄에 손주들이 눈에 밟힌다며 다니려 오셨다. 워낙 부지런한 성품이어서 한 순간도 가만히 계시질 못하고 잔디 관리하며 나무손질이며 늘 바쁘게 움직이셨다. 우리 내외는 그런 아버님이 염려되어 수 없이 말리기도 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간밤에 내린 봄비로 촉촉하게 젖은 뒤뜰을 보면서 나는 시아버님께 민들레 좀 뽑아주시라고 말씀드렸다. ‘민들레 나물이 몸에도 좋고 맛도 좋다’는 부연 설명으로 소일 삼아 조금만 뽑으시기를 염원하면서 말이다.
그날 퇴근해서 부엌에 들어서니 큼지막한 플라스틱 봉지 두개가 싱크대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뿌리째 뽑힌 민들레가 말끔하게 씻긴 채로. 그것을 본 순간 또 불효를 하고야 말았다는 자괴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아버님은 숙제를 잘해온 어린아이마냥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의 얼굴과 민들레 봉지를 번갈아 보며 그날 하루 일과를 눈빛으로 보고하셨다. 나는 뜻한 의도와는 다르지만 행복한 모습을 뵈니 괜찮았던 묘안이라 위안하며 안쓰러운 마음을 삭였다. 하루 종일 그 질긴 놈들과 고투하셨을 아버님을 생각하니 민들레 봉지가 사랑 봉지로 화하여 둘, 넷, 여덟… 제곱으로 늘어나 보였다.
 
그날 저녁엔 민들레 나물을 만들었다. 경험은 전무했지만 ‘참기름 한 병 손에 쥐고 봄 산에 오르면 나물 아닌 게 없다’는 한국 아낙네의 솜씨를 한껏 발휘하였다. 우선 치아가 성치 않은 아버님을 생각해서 푹 삶았더니 냄새가 좀 묘했다. 조짐이 심상치 않았지만 어쩌랴, 갖가지 양념과 정성으로 조물거려 상에 올렸다. 온 식구들이 반겨서 한 저분씩 집어가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난 동조를 구하듯 아버님을 쳐다보니 ‘음, 맛이 특이하긴 해도 나쁘지 않구나, 잘 물러서 좋다.’고 위로 해 주셨다. 하지만 말씀과는 달리 다시는 그쪽으로 눈길마저 주지 않으셨다. 
나는 인기 없는 나물접시를 슬며시 상 아래로 내리며 속으로 이렇게 용서를 구했다. ‘아버님! 올해는 민들레가 우리 속을 썩이는 일이 없을 겁니다, 아버님 자식사랑에 기죽어서 말입니다.’ 
넓은 가계를 이끄시느라 민들레 같은 삶을 사셨지만 늘 따뜻하고 인자하셨던 시아버님, 이맘쯤이면 그분의 넓고 깊었던 사랑이 더욱 그립다.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