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할 만하지만 보도 안 했던 인물 시리즈

1997년 김 할머니 숨진 지 24년 만에 소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가 숨진 지 24년 만에 <뉴욕 타임스>가 지면에 실은 김 할머니 부음 기사.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부음 기사가 미국 유력지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

 

<뉴욕 타임스>는 25일(현지시각) 부음 지면의 절반에 걸쳐 ‘간과된 사람들’(Overlooked)이라는 연재의 하나로 김 할머니의 삶과 증언의 의미를 소개했다. 이 연재는 이 매체가 1851년 이래 보도하지 않은 주목할 만한 인물들의 부음을 다루는 것으로, 김 할머니 기사는 지난 21일 온라인에 공개된 데 이어 이날 지면에 실렸다. 김 할머니가 1997년 12월 폐 질환으로 숨진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이 매체는 2018년 3월에는 이 연재에 유관순 열사를 소개했었다.

 

서울 주재 특파원인 최상훈 기자가 작성한 이 기사는 김 할머니가 1991년 8월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하던 장면부터 시작한다. 김 할머니의 강력한 증언이 일본의 많은 정치인들이 지금까지도 부정하고 있는 역사를 현실로 바라보게 해줬다고 짚었다.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 이후 북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도 역사의 전면에 나서 자신의 피해를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외면 받아온 ‘전시하 여성의 인권’이라는 문제가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인권 현안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기사는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반인류 범죄로 규정한 1998년 유엔 보고서를 작성한 게이 맥두걸 전 유엔 특별보고관이 올해 한 콘퍼런스에서 “내가 보고서에 쓴 어떤 것도 김 할머니의 30년 전 직접 증언이 미친 영향력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고 평가한 사실도 담았다. 역사학자인 알렉시스 더든 미 코네티컷대 교수도 “김 할머니는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라며 김 할머니의 초기 증언이 학자들의 연구를 촉진시켰다고 말했다.

 

1924년 10월 중국 지린 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양부의 손에 끌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위안부로 고초를 겪다가 조선인 남성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기사는 남편과 자식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뒤 궂은 일을 하며 살다가 1991년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을 부인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공개 증언을 결심했다는 점도 소개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 이후 1992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이 중심이 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시작했다. 또 1993년에는 고노 요헤이 일본 관방장관이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나왔다. 한국 정부 역시 김 할머니의 첫 회견 날짜인 8월14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해 2018년부터 기념하고 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기사종합]

● COREA 2021. 10. 27. 01:1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27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 마련

 

전두환(90)씨와 함께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13대)이 26일 숨졌다. 향년 89.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등으로 10여년간 투병 생활을 이어온 노씨는 이날 오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며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병원 도착 1시간 뒤인 오후 1시46분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노씨가 세상을 떠난 이날은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된 10·26 42주년이 되는 날이다.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현 대구)에서 태어난 노씨는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씨와 함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세력을 키우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자 그해 12월12일 전씨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았다. 이후 2인자로 군림하며 보안사령관, 체육부·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1987년 6월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민주항쟁이 계속되자, 민정당 대선 후보로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양김 분열 속에 치러진 그해 12월 대선에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하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관여하면서 ‘전두환의 후계자’로 대통령에 오른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갑다. 다만 대통령 재임 시절 추진한 북방외교 및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 퇴임 뒤인 1995년 11월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노씨는 전씨와 함께 재판에 넘겨졌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내란죄 등으로 징역 17년, 추징금 2688억원이 확정됐다. 그해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처로 복권됐다. 노씨는 전씨와 달리 2013년 추징금 전액을 납부했다.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은 병상에 누운 노씨를 대신해 2019년부터 올해까지 다섯 차례 광주를 찾아 5·18 유혈 진압에 사과하고 5·18 민주묘역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씨와 딸 소영, 아들 재헌씨가 있다. 빈소는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이승준 기자

 

노태우, 응급실에서 임종…서울대병원장 “다계통 위축증 등 투병”

 

서울대학교병원은 26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인에 대해 “장기간 와상 상태에 동반된 폐색전증 혹은 패혈증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27일 오전 10시에 마련될 예정이다.

 

김연수 서울대학교병원장은 이날 저녁 6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 전 대통령이 다계통 위축증으로 투병하며 반복적인 폐렴,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며 심부정맥혈전증으로 치료를 지속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 병원장은 “최근에는 와상 상태로 서울대병원 재택의료팀 돌봄 아래 자택에서 지냈다”고 설명했다.

 

김 병원장은 “노 전 대통령이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 저혈압을 보여 이날 낮 12시45분께 응급실을 방문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해 오후 1시46분에 서거했다”고 말했다. 노씨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통증에는 반응했으나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가족 중 1명이 노씨의 임종을 지켰다.

 

노씨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빈소가 미처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도 서울대병원은 취재진들로 붐볐다. 빈소는 27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층에 차려질 예정이다. 2015년 11월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장 큰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하지만 현재 1호실에 다른 고인의 빈소가 마련돼 있어 노씨의 빈소는 다른 호실에 마련될 예정이다. 딸 노소영 아트센트 나비 관장 등 유족은 이날 오후 장례식장을 찾아 병원과 장례 절차를 논의했다.

 

한편, 노씨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전두환(90)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조문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전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이순자 여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전 전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어 “눈물만 지으시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씨의 빈소 방문 계획을 묻는 말에 “못 가실 것 같다. 거동도 불편하시다. 빈소에 사람들도 많은 것 아닌가. 가서 앉아 계실 수도 없다”고 했다. 이주빈 김윤주 박지영 기자

 

노태우 유언 “제 과오들에 깊은 용서 바란다”

유족 “장지는 정부와 파주 통일동산 협의중”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7월7일 민족 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 선언(7·7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26일 숨진 노태우 전 대통령 유족들이 노씨가 사망하기 전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노씨 유족들은 이날 저녁 성명을 내어 “많은 분들의 애도와 조의에 감사드리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기신 말씀을 전해드린다”며 노씨 유언을 공개했다. 이들은 노씨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어 유족들은 노씨가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했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노씨가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기 바랐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장례 절차는 정부와 협의 중이다. 장지는 이런 뜻을 받들어 (대통령) 재임 시 조성한 통일동산이 있는 파주로 모시는 것을 협의 중”이라고 했다. 이주빈 기자

 

허탈한 5·18단체들 “노태우씨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

 

노씨, 5·18 자위권 발동 건의 회의 동석

보안사령관 취임 이후 유족 분열 유도

노씨 가족, 광주 6차례 방문해 사죄 표명

광주시민 “5·18 왜곡한 회고록 수정 먼저”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이 전두환씨 등과 함께 1995년 12·12 군사반란, 내란 등의 혐의로 1심 법정에 선 모습.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광주 5·18단체와 시민사회는 “광주학살의 진상을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났다”며 허탈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5·18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와 5·18기념재단은 이날 오후 성명을 내어 “노태우는 죽더라도 5·18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죄와 고백, 5·18을 왜곡한 회고록을 교정하지 않은 노씨는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재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노씨는 5·18 진상규명에 비협조적이었고 공개적인 정식 사죄가 없었다. 전두환씨 등 나머지 신군부 세력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진정성 있게 사죄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씨와 전씨 등 직접조사를 추진했던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당황스럽다는 분위기다. 조사위는 성명에서 “고인은 지난 41년간 피해자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무런 언급없이 떠났다. 나머지 핵심인물 35명 등은 지속적이고 엄정하게 조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노씨와 광주의 악연은 5·18 당시부터 시작됐다. 1980년 5월21일 새벽 발포를 의미하는 계엄군의 자위권(자기보호) 발동이 결정됐던 회의 자리에 노씨는 전씨 등과 함께 참석했다. 1980년 8월 전씨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노씨는 희생자 유족 사찰과 분열유도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노씨는 생전 광주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저항했다”며 책임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5·18단체는 회고록 정정을 촉구했지만 노씨 쪽은 반응이 없었다.

 

노씨 가족은 그동안 여러차례 광주를 방문해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광주 시민사회는 회고록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8년 2월25일 부인 김옥숙씨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아 이한열 열사 묘를 참배한 이후 2019년 8월 장남 재헌씨가 31년 만에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노씨 대신 사죄했다. 재헌씨는 같은 해 12월, 지난해 5월, 올해 4월과 5월 광주를 찾았다. 딸 소영씨도 2019년 12월 전남대병원 어린이병원에 1천만원을 기부하며 광주와 인연을 이어갔다.

 

일각에서는 ‘반성 않는 전두환에 비하면 낫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노씨의 국립묘지 안장을 위한 행보’라는 시선을 받았다. 김용희 기자

 

전두환, 노태우 사망에 말 없이 ‘눈물’ …빈소 방문은 어려울 듯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에 전두환(90)씨가 눈물을 보였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막역한 친구사이였던 두 사람은 12·12 군사쿠데타를 함께 주도했다.

 

전두환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이순자 여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전 전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어 “눈물만 지으시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씨의 빈소 방문 계획을 묻는 질문에 “못 가실 것 같다. 거동도 불편하시다. 빈소에 사람들도 많은 것 아닌가. 가서 앉아 계실 수도 없다”고 했다.

  

전·노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노씨는 전두환 정권에서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지내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는 등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노씨가 대통령이 된 뒤 ‘5공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 관계는 멀어졌다. 두 사람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나란히 구속돼 법정에서 손을 잡은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경욱 기자

 

전두환 친구에서 후계자까지…‘2인자’ 노태우의 일생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씨가 26일 사망했다.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탓에 대외 활동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이어간 지 10여년 만이다. 향년 89. 노태우씨는 전두환씨와 함께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관여하면서 신군부의 핵심으로 급부상했고 전씨의 후계자로서 대통령까지 올랐다.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시절 ‘6·29 선언’과 대통령 재임 시절 북방·통일정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긍정 평가할 부분이 있지만, 군사반란과 민중학살의 주범이기도 하다. 퇴임 뒤 비자금으로 옥살이를 하고 서훈도 박탈되는 등 말로는 편치 않았다.

 

전두환 잇는 ‘2인자’로 승승장구

 

노태우씨는 1932년 12월4일 팔공산 근처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서 노병수와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통사고로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일찍 잃은 노씨는 숙부(노병상)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구 공산국민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11기)에 진학해 그곳에서 동기인 전두환, 정호용을 만났다. 1955년 2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미국에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육사 11기가 주축인 ‘하나회’에 가입했다. 이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대 정보장교, 방첩부 방첩과장을 거쳤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했다. 이어 수도사단 대대장, 보병 연대장, 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서울에 인접한 고양에 위치한 육군 9사단장이던 그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체포하고, 무단으로 군을 서울로 진입시키는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 이튿날 9사단장에서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노씨는 1980년 5월17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군부의 정치 개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해 8월 전씨가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노씨는 국군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이어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정당 대표에 임명되는 등 5공화국의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후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6·29 선언’ 뒤 대통령 당선…‘북방외교’ 성과

 

19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씨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씨는 신군부 세력 ‘2인자’의 이미지를 씻고, 전씨와 차별화하면서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으나, 이마저도 전두환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씨는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였다.

 

그러나 노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해인 1988년 치러진 4·26 총선에서 집권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다. 전두환씨는 당시 국회에 나와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씨는 1989년 12월31일 전씨의 국회 답변을 끝으로 ‘5공 청산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1990년 1월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의 ‘3당 합당’을 이끌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해 정치적 위기를 모면했다.

 

노씨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튼 뒤,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구권과 수교를 넓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런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구권의 몰락, 미국의 세계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씨는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를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중평이다. 노씨는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한 비밀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씨는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국민 의료보험도 1989년부터 실시됐다. 그러나 노씨가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들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씨는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씨는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퇴임 뒤 비자금, 군사반란 혐의로 단죄…오랜 투병 끝 사망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노씨는 퇴임 2년8개월 만인 1995년 10월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은행 잔고조회표를 흔들면서 촉발한 ‘노태우 비자금’으로 완전히 몰락한다. 당시 신한은행 이사가 서소문지점장 재직 때 300억원이 입금된 차명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하고, 노씨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씨가 검찰에 자진 출석해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통치자금”이라고 실토하면서 노씨를 향한 국민적 비난이 빗발쳤다. 파장이 커지자 노씨는 그해 10월27일 “재임 중 약 5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비자금 실체를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노씨를 소환조사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36명을 불러 조사했다.

 

노씨는 그해 11월16일 뇌물수수 혐의로 헌정사상 처음 구속되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이어 12월3일엔 전두환씨가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따른 신군부 세력 단죄였다. 대법원은 뇌물 수수, 군사반란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해 노씨에게 1997년 4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확정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를 두달 남겨둔 그해 12월22일 “국민 대화합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며 노씨와 전씨를 특별사면했다. 그해 12월18일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씨와 전씨 사면에 동의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6년 3월 참여정부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관련자 176명의 서훈과 훈장을 모두 박탈했는데, 노씨는 이때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 각종 서훈을 박탈당했다.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 파란만장한 삶을 끝마친 노씨는 천식 등 지병이 악화돼 최근까지 10년 이상 대외 노출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했다. 2011년에는 기관지에서 한방 침이 발견되기도 했고, 올해 4월9일에는 호흡곤란을 겪어 119구급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노현웅 기자

 

‘내란죄’ 노태우, 현충원 안장되나…국민 정서가 관건

내란죄 특별사면 실효 논란 .. 국가장 여부도 ‘정무적 판단’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 26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내 전시관에 노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26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관련 법률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국립묘지법상 전직 대통령은 국립현충원 안장 대상자이지만 노태우씨는 1997년 내란과 군사 반란 등의 죄명으로 대법원에서 17년형을 선고받았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는 내란죄를 지은 사람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노씨는 복역 중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특별사면 대상자의 국립현충원 안장자격에 대해서는 별도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노씨와 전두환씨가 고령이 되자 이들이 숨진 뒤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느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립현충원 담당 부서인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6일 노씨의 국립현충원 안장과 관련해 “내란죄 유죄 선고 뒤 사면을 받았지만 내란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립묘지법상으로 안장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앞서 2019년 1월 보훈처는 전두환씨 경우에도 “내란죄 사면 복권자는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보훈처의 이런 입장은 국립묘지 관장부서의 행정해석이란 한계가 있다. 앞서 ‘5공 비리’ 수사로 뇌물죄가 확정됐던 안현태 전 경호실장은 사면·복권됐다는 이유로 5·18 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2011년 국립묘지에 묻혔다. 당시 안씨 쪽은 “형 선고의 효력으로 인하여 상실되거나 정지된 자격을 회복한다”는 사면법의 내용을 근거로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잃었더라도 사면·복권으로 그 자격을 다시 얻었다고 주장했고, 이명박 정부 보훈처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 규정의 모호성과 규정 간 충돌로 결국 노씨의 국립현충원 매장을 결정할 잣대는 국민 정서와 이를 고려한 정부의 정무적 판단이다. 국가장 여부도 마찬가지다. 국가장법에서는 △전·현직 대통령 △대통령 당선인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에 한해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예우가 박탈된 전직 대통령의 국가장 여부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노씨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과 관련해 “국민들의 수용성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정무적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절차가 필요하다. 내부 절차에 따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윤영덕·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5월 학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역사적 단죄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노태우씨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장 예우를, 국립묘지에 안장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5월 단체는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처벌까지 받은 사람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면 후세 가치관의 혼란을 줄 수 있다”며 반대했다. 권혁철 김양진 기자

이낙연, 선대위 상임고문 수락…이재명, '신복지 공약' 직접 챙기기로

문 대통령 - 이재명 회동은 27일 할듯… 당내 화학적 결합은 숙제

 

포옹하는 민주당 이재명-이낙연=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동 한 찻집에서 회동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와 이낙연 전 대표가 24일 회동하고 내년 3월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경선 뒤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회동은 지난 10일 경선 결과 발표 기준으로는 14일, 이 전 대표의 승복 선언(13일) 기준으로는 11일만에 이뤄졌다. 이로써 이 후보는 경선 후유증을 어느정도 털고 원팀 기조로 본선 행보에 속도를 높이게 됐다.

유튜브로 보기

 

두 사람은 이날 오후 이 전 대표의 지역구였던 서울 종로의 한 찻집에서 30여분간 만나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고 회동에 배석한 이 후보측 박찬대 의원과 이 전 대표 측 오영훈 의원이 브리핑에서 밝혔다.

 

이 전 대표는 회동에서 이 후보의 요청을 받고 당 선대위 상임고문을 맡기로 했다.

 

두 사람은 또 이 전 대표 경선 캠프에 참여했던 의원들의 선대위 참여 방안도 추후 참모 간에 논의하는 데 합의했다.

 

이 후보는 이낙연 전 대표의 핵심 공약인 신복지정책을 자신의 선거공약으로 챙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선대위에 후보 직속의 제1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후보가 직접 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경선 이후 첫 만남 가진 민주당 이재명-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가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동 한 찻집에서 이재명 대선 후보와 회동에 앞서 발언하고 있다.

 

이 전 대표는 회동 모두에서 미리 준비한 인사말을 꺼내 "저는 문재인 정부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면서 "당원과 지지자께서는 여러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민주당의 정신과 가치를 지키고 이어가야 한다는 대의를 버리지 말길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도록,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도록 당 지도자가 앞서서 노력했으면 한다"면서 "경선에서 승리한 이재명 후보에게 축하의 말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이 전 대표에게 "인생으로나 당 활동 이력, 삶의 경륜이나 역량이나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대표님"이라면서 "앞으로 민주당뿐 아니고 이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서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고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민주당이라고 하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같은 DNA를 가진 팀원"이라면서 "제가 부족한 부분을 대표로부터 채우고 수시로 조언을 얻고 함께 정권을 재창출해서 국가와 미래를 지금보다 훨씬 더 밝게 여는 길을 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회동하는 민주당 이재명-이낙연

 

이 후보는 이 전 대표에 이어 경선에서 경쟁했던 정세균 전 총리,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등과도 각각 회동할 예정이다.

 

또 25일 지사직에서 사퇴한 뒤 문재인 대통령과도 문 대통령 순방(28일 출발) 전에 회동할 예정이다. 문 대통령과의 회동 날짜는 여러 일정을 고려할 때 27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회동은 2012년과 2017년 각각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경선이 끝난 지 일주일 이내에 경쟁 후보와 만난 것을 고려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원팀 선거 대응'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다만 이 후보는 경기도지사로 18일과 20일 이른바 '대장동 국정감사'를 했다는 점에서 단순 비교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회동하는 민주당 이재명-이낙연

 

이날 회동장 밖에서는 시작 전부터 이낙연 전 대표 지지자 100여명이 모여 "원팀 안해"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후보가 회동 장소에 들어갈 때 거칠게 항의했으며 "후보 사퇴하라"면서 욕설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 후보와 이 전 대표간 이른바 '원팀 회동'에도 불구하고 당이 화학적 결합을 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날 회동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박찬대 의원은 전했다.

 

박 의원은 "이 후보도 지난 대선 경선 때 승복하고 난 이후에 지지자들 마음의 상처가 짧은 시간 내에 회복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서 "두 분이 지지자들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 함께하고 안아주는 부분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나눴다"고 말했다.

 

김어준 "이재명, 돈 · 줄 · 백 없이 혼자서 여기까지…도와줘야"

 

여권 성향 방송인 김어준 씨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해 "지금부터는 당신들이 좀 도와줘야 한다"며 사실상 지지 선언을 했다.

 

김씨는 24일 유튜브 '딴지 방송국' 채널에 올라온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서 "이재명은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돈, 줄, 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실력으로 돌파하는 길로 가는 사람은 어렵고 외롭다. 그 길로 대선 후보까지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며 "그래서 이재명이 우리 사회 플랫폼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TBS 라디오의 간판 시사 대담 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등을 진행하면서 여권 핵심 지지층에 영향력을 지닌 방송인으로 평가받는다.

 

야당은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는 TBS에서 김씨가 여권 편향적인 방송을 하고 있다면서 공세를 펴왔다.

23일 당원 전체 문자 메시지 보내

“걱정과 심려 끼쳐드려 송구하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경선 후보가 23일 오후 울산시당 이전 개소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국민의힘 당원들에게 자신의 ‘전두환 옹호’ 발언 관련 논란을 암시하며 “어떤 것도 저들의 공격거리가 될 수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전두환 발언을 사과하고 ‘개 사과 사진’이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한 직후의 글이어서 ‘본인은 잘못한 게 없다는 윤 전 총장 본심이 드러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윤 전 총장은 지난 23일 당원들에게 보낸 단체 문자메시지에서 “최근에 걱정과 심려를 끼쳐 드린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어떤 것도 저들의 공격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더 경계하고 더 단련하겠다”고 밝혔다. ‘전두환 옹호’ 발언에 대한 비판을 ‘부당한 공격’으로 규정한 것으로, “호남인들을 화내게 하려고 한 얘기도 아닌데 내 발언을 곡해한다”는 초기 반응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에 유승민 캠프는 “윤석열 후보가 본심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유승민 캠프의 이수희 대변인은 24일 “결국 ‘전두환 정치 잘했다’ 발언은 잘못한 게 아니고, 본인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공격거리로 트집잡은 것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용빈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도 논평을 내어 “공식적으론 ‘송구하다’며 잘못을 구하는 척 하다가, 자기 편 앞에서는 ‘저들의 공격거리’라며 마치 희생양이 된 듯 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자신이 자초한 ‘전두환 망언’에 대해, ‘개 사과’에 대해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여전히 모르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홍준표 캠프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실언·망언 25개 항목’을 정리·발표하며 ‘윤석열 발언 리스크’를 부각했다. 홍준표 캠프는 최근 ‘전두환 옹호 발언’을 비롯해 △청약통장 모르면 치매환자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페미니즘이 악용돼 건전한 이성교제 막아 △일주일 120시간 바짝 일할 수 있어야 △코로나19 확산, 대구 아니었으면 민란 났을 것 등의 윤 전 총장 발언을 상기시키며 “만일 윤 후보가 본선 후보가 된다면,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우리 국민들은 4개월 간 또 어떤 실·망언이 터질까 가슴 졸이는 자세로 윤 후보의 입만 처다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 의원은 이날 서울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가 호남에 공을 들인 지가 30년이 넘는다. 엉뚱하게 날아들어온 후보가 30년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그런 짓을 했다. 해당행위다. 국민을 개처럼 여기고 조롱감으로 만들었다. 후보 자격이 있냐”며 윤 전 총장을 직격했다.

 

지난 19일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윤 전 총장은 ‘돌잡이 사과 사진’으로 논란을 키우고 21일에야 “송구하다”며 사과한 뒤에도 ‘개 사과 사진’과 “공격거리“ 발언으로 비판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윤석열 캠프 관계자는 “일일이 문제삼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당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의) 전체적 취지는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하겠다는 뜻”이라며 “단순한 적들의 공격거리로만 생각하고 반성을 안 한다는 분석은 조금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오연서 기자

 

 민주 "윤석열, 천공스님도 패밀리 비즈니스도...  '최순실식 사고' 연상“

"신성한 주권행사 폄하"…전두환 발언·개 사과 논란에 "광주 방문이 면죄부?"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은 24일 '전두환 옹호' 발언과 '개 사과 SNS 사진' 등으로 논란을 빚은 국민의힘 대권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비판 공세를 이어갔다.

 

특히 최근 한 언론 보도를 통해 윤 전 총장이 책임 당원들에게 '어떤 것도 저들의 공격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더 경계하고 더 단련하겠다'는 취지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알려지자 "겉과 속이 다른 가식적인 태도"라고 질타했다.

 

이용빈 대변인은 이날 서면 브리핑에서 해당 보도 내용을 거론하며 "윤 전 총장의 진짜 속내가 어떤 것인지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송구하다'며 잘못을 구하는 척하다가 자기 편 앞에서는 마치 희생양이 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여전히 모르는 태도"라고 쏘아붙였다.

 

윤 전 총장이 관련 논란이 불거진 이후 광주를 찾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면죄부를 주겠다는 계산이었다면, 결과적으로 광주 시민과 대한민국 국민을 우습게 본 것"이라며 "광주 방문을 자신의 죗값에 대한 알리바이로 삼지 말라. 뻔뻔함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이날 윤 전 총장이 '개 사과' 사진에 부인 김건희 씨가 관여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선거가 원래 패밀리 비즈니스'라는 취지로 답한 것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청래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국민들의 신성한 주권 행사를 패밀리 비즈니스로 폄하했다"며 "이는 선거 모독이고 국민 모독"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선거가 가족 사업이면 대통령은 가족회사 사장이냐. 정권 잡아서 장모와 부인의 가족회사를 차리겠다는 거냐"며 "국민은 패밀리 비즈니스의 사업 대상이나 가족회사 종업원쯤으로 보이느냐. 국민 한 사람으로서 정말 불쾌하다"고 했다.

 

이재명 대선후보 대변인인 박찬대 의원도 논평을 내 "어안이 벙벙하다"며 "천공 스님도, 패밀리 비즈니스도 모두 '최순실식 사고'를 연상케 한다. 대선이 패밀리 비즈니스여서 부인 김건희 씨가 데려온 무당과 천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손바닥 왕 놀음'을 하는 거냐"고 비꼬았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SNS에 올려 논란이 된 '개 사과' 사진 [윤 전 총장 반려견 SNS '토리스타그램' 캡처]

 

여권은 윤 전 총장이 SNS에서 대장동 의혹과 관련해 '부패의 구더기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도 맹공했다.

 

한준호 원내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에서 "저급한 단어와 비유"라며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윤 전 총장"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대장동 비리의 근본은 2011년 대검 중앙수사부의 부산저축은행 사건 부실 수사에 있고, 당시 해당 수사의 주임 검사가 윤석열 중수2과장이었다"며 "대장동 투기의 원천 자금을 윤 전 총장이 대준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구석에 몰린 범죄자의 초조함이야 이해한다만, 거짓으로 일관하는 욕망의 구더기가 할 말은 아니다"라고 직격했다.

 

윤석열의 ‘치명적 망언들’…이재명이 집중 공격하는 까닭은

    ‘천박한 역사의식’에 ‘정치 무지’

    ‘호남 편견’과 ‘공감능력 부족’도

    국민의힘 경선 유 · 불리 엇갈려

 

이재명 경기지사, 윤석열 전 검찰총장, 홍준표 의원.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잘 몰라서 실수로 그랬을까요? 표를 얻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을까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전두환 전 대통령 발언과 그 이후 ‘개 사과’ 이야기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전두환 발언과 ‘개 사과’ 내용을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자체가 짜증 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윤석열 전 총장 발언 배경에 어떤 인식이 깔렸는지에 대해서는 좀 자세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윤석열 전 총장의 전두환 발언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닙니다. 그 세대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박정희나 전두환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최고 권력에 대한 맹목적 동경입니다. 둘째,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종한 사람들의 자기합리화 기제입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 잡고 독재를 했지만, 정치는 잘했지. 정치가 뭐 별거 있어? 국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게 정치지.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전두환이 광주에서 사람 죽였지만, 정치는 잘했지. 아랫사람들한테 다 믿고 맡겼다니까? 청와대 경제수석한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지. 그래서 5공 때 우리나라가 호황을 누린 거야. 대통령은 그렇게 하는 거야. 알아?”

 

60~70대 ‘아재’들의 술주정 가운데 단골 메뉴입니다. 여기에 호남에 대한 비난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사실 전라도 사람들 문제가 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김대중한테 90%를 몰아줘? 여기가 뭐 공산당인가? 호남은 그렇다고 치고, 노무현하고 문재인한테 표를 더 몰아주는 건 또 뭐야? 결국 호남은 종북인 거야.”

 

이 사람들 도대체 왜 그럴까요?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호남을 타자화하고 소외시켰습니다. 절대 권력을 동경하고 불의에 저항하지 못한 비겁한 사람들이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호남 차별에 슬며시 올라타려는 것입니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독일이 안고 있는 문제를 몽땅 뒤집어씌우고, 다른 종족들이 그 흐름에 동조한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10월19일 부산 해운대갑 당원협의회 사무실에서 한 첫 번째 발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였습니다. 그는 여기에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바로 “호남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는 대목입니다.

 

저는 앞부분보다 뒷부분에서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이 굳이 호남을 끌어들인 것은 ‘전두환의 피해자인 호남에서도 전두환의 리더십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호남 사람이 아닙니다. 전두환 쿠데타의 피해자인 호남의 아픔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 서울대 법대 시절 모의재판에서 12·12를 일으킨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으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취득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호남에서도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한다고요? 세상에! 한국 사회에서 호남과 5·18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윤석열 전 총장의 이번 발언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지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폭력을 낳습니다. 극우 세력과 태극기 부대의 호남과 5·18에 대한 공격도 처음에는 무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극우 세력의 호남과 5·18에 대한 공격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 글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전라도 사람들, 호남인 아니면 높은 자리에 오르기는 하늘의 별 따기로 변해버렸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 중심에 광주 5·18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렇다. 5·18 사건은 철저한 베일에 가려져 있고, 5·18 유공자들은 기막힌 우대와 상상할 수 없는 귀족들로 변모해 있다. 어떻게 5·18 유공자가 되었는지조차 비밀에 감추어진 게 우리 국민에겐 통탄스런 현실이다. 5·18 유공자가 누구인지를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의 진짜 금수저는 바로 이들이다.

 

(중략)

 

출신지가 전라도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은 열심히 벌어서 5·18 유공자를 섬기는 나라가 될 것이다. 도대체 유력층 금수저 재벌가, 황금 수저 넘어 초특권 다이아몬드 수저 같은 5·18 유공자 혜택과 가산점이 뭐란 말인가? 5·18 유공자 가산점 때문에 5·18 유공자와 그 자녀들은 금수저를 넘어 황금 수저가 되어 취업과 시험 전선에서 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다.

 

(중략)

 

또한 호남에서는 5·18 유공자가 많아 그들(5·18 유공자)만의 경쟁이 워낙 심하여 이제는 같은 전라도 사람도 다른 지방으로 가서 시험을 본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서 이 나라 방방곡곡에는 호남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금도 극우 성향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런 종류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무지막지한 호남 혐오의 토양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 일각의 호남 차별 의식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장삼이사’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검찰총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매우 중요한 공인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발언과 인식은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이번 발언은 ‘천박한 역사의식’, ‘정치에 대한 무지’, ‘호남에 대한 편견’, ‘부족한 공감 능력’을 한꺼번에 보여준 것입니다. 파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보수 신문에서도 사설로 윤석열 전 총장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 부적절한 ‘전두환 옹호’ 발언, 윤석열 실언 몇 번째인가(10월 21일, 중앙일보)

☞ 윤석열의 전두환 관련 발언, 화법 아닌 소양의 문제다(10월 21일, 동아일보)

☞ ‘왕(王)자 무속’ 이어 ‘개 사과’ 윤석열의 이해 못 할 행태(10월 23일, 조선일보)

☞ 윤석열의 괴이한 ‘개 사과’ 사진은 “상식 초월” 그 이상이다(10월 23일, 동아일보)

그렇다면 이제 윤석열 전 총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른바 보수 성향 신문들이 일제히 윤석열 전 총장을 비판하고 있으니 대선주자 지지도가 떨어질까요? 당내 경선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요?

 

알 수 없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전두환 관련 첫 발언은 10월19일 화요일에 나왔습니다. ‘개 사과’는 21일 밤, 정확히는 22일 금요일부터 화제가 됐습니다. 전두환 발언 및 ‘개 사과’의 영향은 이번 주 월요일, 10월25일 이후 나오는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봐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엠브레인 퍼블릭, 케이스탯리서치, 코리아리서치, 한국리서치 등 4개 여론조사회사에서 매주 발표하는 전국지표조사가 있습니다. 그동안 ‘보수 진영 대통령 후보 적합도’를 매주 내놓았습니다. 오랫동안 윤석열 후보가 홍준표 후보를 앞서 있었는데, 9월 둘째 주에 역전된 뒤 10월 둘째 주까지 홍준표가 앞섰습니다.

 

그런데 10월 셋째 주에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적합도’를 물었더니, 윤석열 후보가 ‘25% 대 22%’로 홍준표 후보를 다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차범위 이내에서 윤석열 후보와 홍준표 후보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발표한 10월 셋째 주 조사 기간은 10월18일부터 20일까지였습니다. 전두환 발언 및 개 사과가 반영되지 않은 수치입니다.

 

10월 넷째 주는 10월25일부터 27일까지 조사해서 10월28일에 발표할 것입니다. 전두환 발언 및 개 사과의 여파가 반영될 것입니다.

 

10월28일 발표되는 전국지표조사 결과는 국민의힘 경선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합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민심 형성에 거꾸로 영향을 미치는 밴드왜건 효과 때문입니다.

 

국민의힘 경선은 책임당원 투표 50%, 여론조사 50%입니다. 책임당원 투표는 11월1일부터 2일까지 모바일 투표로, 11월3일부터 4일까지 자동응답 전화로 합니다. 여론조사는 11월3일과 4일 양일간 실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윤석열 전 총장의 전두환 발언 및 ‘개 사과’로 윤석열 전 총장이 경선에서 홍준표 후보에게 크게 밀릴 것으로 전망하십니까?

 

저는 “영향은 있겠지만, 그 정도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도층이나 합리적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민심은 악화하겠지만, 극우 성향의 유권자들이 윤석열 전 총장 지지로 몰리면서 지지도 하락을 상쇄하거나, 오히려 유리해질 수도 있습니다. 민심이나 당심은 가끔 비합리적이고 무척 변덕스럽습니다.

 

조대원 전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이 지난 10월19일 홍준표-유승민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성명을 냈습니다. 경선 판세에 대해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 전국 당협위원장 70%가 직·간접적으로 윤석열 캠프에 줄을 선 이상 당원투표 비중이 50%로 확대되는 최종 투표에서 홍준표 후보가 윤석열 후보를 따라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상승세를 타던 홍준표 후보의 일반 여론조사 수치가 더는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일반 여론조사 상승세의 정체는 당원들로부터 더 이상의 지지 후보 변경을 이끌어내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들은 대체로 윤석열 전 총장이 결국 경선에서 이길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국민의힘 의원들이나 당협위원장 다수가 윤석열 전 총장에게 줄을 섰기 때문입니다. 둘째, 홍준표 의원의 본선 경쟁력에 대해 아직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권의 시각입니다. 청와대나 민주당 사람들에게 ‘누가 야당 후보가 돼야 이재명 지사가 이길 수 있겠냐’고 물어보면 답변이 엇갈립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윤석열이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근거는 “윤석열이 후보가 되면 홍준표 지지층의 일부는 투표를 하지 않겠지만, 홍준표가 후보가 되면 윤석열 지지층을 100% 흡수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재명 지사가 최근 들어 윤석열 전 총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대목도 눈여겨볼 지점입니다. 이재명 지사가 윤석열 전 총장을 공격하면 윤석열 전 총장 지지가 올라갈까요, 떨어질까요? 대통령 선거 본선에서는 몰라도 당내 경선에서는 올라갈 가능성이 큽니다. 이재명 지사의 ‘맞수’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이재명 지사는 최근 홍준표 의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철저히 무시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홍준표 의원은 10월23일 ‘경선 결선 투표에 임하는 입장문’에서 “지금 민주당이 유독 윤석열 후보만 공격하는 것은 비리 후보끼리 대선 구도를 만들어 ‘이재명 물타기 대선’을 획책하려는 의도”라고 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하지만 여권이 윤석열 후보를 좀 더 쉬운 상대로 여기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결과는 11월5일에 나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습니다. 옛날 표현으로 개봉박두(開封迫頭)입니다. 성한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