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택용 <부산일보> 기자가 1979년 10월18~21일 취재
언론통제에 싣지 못했지만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해 눈길
18일 오전 경남대 도서관에서 50여명이 구호 외치며 시작
파출소 등은 파손했지만 시민 피해 줄이려고 질서 유지

 

1979년 10월 마산시내에 출동한 군인들이 거리행진을 하며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박정희 유신독재의 몰락에 불을 댕겼던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마산시위 현장을 취재한 기자의 원고가 42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부산일보> 마산 담당 기자였던 고 김택용씨가 서슬 퍼렇던 당국의 언론통제를 뚫고 1979년 10월18~21일 시위 현장과 경찰서, 기자회견장 등을 오가며 기록한 원고지 100장 분량 기록물이다. 하지만 이 취재 내용은 당시 당국의 삼엄한 언론통제 속에서 빛을 보지 못했고, 군·경찰이 제공한 자료만 신문과 방송 등을 탔을 뿐이다.

 

김택용씨는 1983년 태풍 현장 취재를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고인이 됐다. 김씨의 아들 김재준(53)씨는 최근 이 원고를 발견해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에 기증했다. 재단 학술·기념사업팀 조영숙 담당은 “김씨 원고에는 나흘 동안의 마산 시위 상황이 시간대별로 잘 적혀 있고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당시 상황과 지명 등이 있어서 마산 시위 참가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씨 원고 속에 담긴 나흘 동안의 기록을 소개한다.

 

1979년 10월18일 경남대 시위 학생들의 시내 진출로.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18일 목요일

 

마산 시위가 처음 시작된 곳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경남대다. 오전 10시 중간고사를 앞두고 학생들이 한창 공부 중이던 도서관 열람실에서 한 학생이 “부산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방관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의혈 마산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자”고 외쳤다. 이에 50여명의 학생이 일어나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자 어용 학생회라 불리던 학도호국단 간부 1명이 열람실로 뛰어들어와 “오늘 아침부터 학생들의 동요를 느낀 학교 당국이 휴교에 들어갈 것 같다. 그러니 학생들은 자숙해 달라”고 말했다. 이에 학생들이 “우리가 중간고사가 싫어서 이러느냐”며 학도호국단 간부를 두들겨 내쫓았다.

학생들의 움직임에 놀란 학교 당국은 긴급 교수회의를 열어 휴강 문제를 논의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도서관 앞에 모여들었다.

 

오후 2시. 2천여명 학생이 “학도여, 우리 모두 정의를 위해 총궐기하자”라고 외치며 교문을 나서려고 했다. 오전 11시께부터 교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 100여명이 학생들을 저지했고, 학교 당국은 20일까지 휴교를 결정하고 학생들의 귀가를 재촉했다.

 

경찰의 저지로 교문을 나서지 못한 학생들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마산 시민들이 궐기했던 3·15의거를 기념한 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학교 담을 넘어 시내 쪽으로 빠져나갔다.

경남대 근처 창원군청 앞에 모인 학생 100여명은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돌을 던지며 투석전을 벌였다. 3·15의거탑 주변을 에워싼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밀린 학생들은 남성동파출소 등 관공서에도 돌을 던졌다. 시위대 400여명이 오후 6시51분 남성동파출소를 공격하자 경찰은 처음으로 최루탄을 발사했다.

 

흩어졌던 학생들은 저녁부터 번화가인 불종거리·오동동·창동 쪽으로 이동하며 “독재 타도”를 외쳤다. 길가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고, 퇴근길의 공단 노동자와 회사원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오동다리 위에 세워진 경찰 트럭 1대를 밀어 하천에 빠뜨렸고 민주공화당 사무실에 들어가 기물을 부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오후 6시30분과 8시40분께 불종거리 희다방 앞 네거리에서 경찰과 시위대는 100m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학생들은 ‘나의 조국’을, 경찰은 ‘무찌르자 오랑캐’를 불렀다. 시위대가 돌팔매질하면 경찰은 최루탄으로 응사했다.

 

밤 9시5분. 시위대는 남성동파출소를 다시 습격해 경찰에 붙잡혀 있던 시위대 20여명을 구출했다. 시내 곳곳에서 경찰 저지선이 무너졌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흥분한 시위 참가자들이 통행하는 차량과 상점에 돌을 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하자 학생 대표들은 “시민보호”, “질서유지” 등 구호를 외쳤다.

 

밤 9시40분. 시위대가 중앙동 마산시청으로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철문으로 굳게 닫힌 시청 정문을 밀고 들어갔고, 박정수 부시장 등 마산시 간부 4명은 옥상으로 피신했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시청 뒷마당에까지 들어갔으나 누군가 “마산시청은 우리 시민들의 호적·주민·재산관계 서류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시위대는 조용히 물러나 마산경찰서로 향했다.

 

밤 10시. 탱크 3대를 동원한 1개 대대가 진압에 나섰다.

첫날 경찰이 검거한 인원은 296명이었다. 공무원 3명, 대학생 57명, 고교생 3명, 노동자 등 시민 226명, 구두닦이 10명이다. 마산이 지역구인 청와대 경호실장 출신 박종규 민주공화당 의원이 이튿날 새벽 2시 서울에서 내려왔다.

 

1979년 10월18일 마산 시내 시위 상황.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19일 금요일

 

아침부터 낮까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오후 6시부터 불종거리·오동동·창동·부림시장 주변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고 거리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저녁 8시. “어이~”라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엿샤, 엿샤” 하며 300여명이 모였다. 시위대는 불종거리를 지나 마산호텔에 도착했다. 누군가 “오동동파출소로 가자”고 외쳤다. 5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150m가량 떨어진 오동동파출소로 몰려갔다. 누군가 종이에 휘발유를 뿌려 리어카에 담아 싣고 불을 지펴 파출소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구경하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성을 질렀다. 오동동파출소에서 남경다방까지 150m 거리가 시위대 1500여명으로 가득 찼다.

 

8시57분. 시위대가 문화방송 앞에 도착하자 육군 1개 대대가 지키고 있었다. 청년 1명이 착검을 하고 경비하는 군인 앞에 다가가서는 “죽이고 싶으면 죽여봐라”며 윗도리 단추를 풀고 가슴을 내밀었지만 군인은 손으로 청년을 밀어냈다.

 

산호동 가야백화점 앞에서는 시위대와 군인들 사이 충돌이 아주 심했는데 간선도로 바닥에는 유리병과 돌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양쪽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군인 1명이 돌에 맞아 이가 부러지자 지휘관이 소탕을 지시했다. 산으로 도망한 시위대를 향해서도 경찰이 최루탄을 쏴 주민들까지 눈이 따가워 밤잠을 설쳤다. 시위대는 새벽 1시가 넘도록 산에서 시위했다. 또 다른 시위대 200~300여명은 밤 10시께 국제주유소 앞에서 ‘언론자유’를 외치며 투석전을 벌이다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애꿎게 군인과 경찰관들에게 마구 끌려가거나 폭행을 당했다. 저녁 8시께 목공소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대포 한잔씩 나누고 창동 쪽으로 가던 김아무개(30)씨는 시위대로 오인당하여 경찰서에 연행됐다. 그는 구둣발에 왼쪽 눈을 심하게 다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다음날 집에 돌아갔다. 신포동 골목 주점에서 청년 4명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순찰하던 군인 3명이 들어와서는 술상을 뒤집고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청년들은 쫓겨나고 술집 아주머니는 술값을 받지 못해 울상이 되었다.

 

밤 9시께 불종거리 앞에 있던 청년 4명이 순찰하는 군인 9명에게 붙잡혀 가면서 항의하자 군인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허리 쪽을 갈겨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갔다. 9시50분께는 시위에 참여했던 청년 3명이 경찰에 쫓겨 달아나다 회원동 이아무개씨 집의 문을 두드렸다. 이씨가 대문을 열어 2층 옥상에 숨겨주었는데 10분 뒤 경찰이 찾아와서는 이씨와 술을 마시던 친구 4명, 2층 방에서 잠옷을 입고 공부하던 이씨 아들까지 경찰서로 끌고 갔다.

 

둘째 날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187명이다. 고교생 11명, 대학생 12명, 공단 노동자 25명, 회사원 15명, 상업 26명 등이었다.

 

1979년 10월19일 마산 시내 시위 상황.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20일 토요일

 

낮 12시15분께 지역방송국에서 위수령(군대가 한 지역에 주둔해 그 지역의 경비와 시설물 보호를 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이 발령됐다고 보도했다. 국방부는 위수령을 부인했다. 오후 6시. 마산지역작전사령부 39사단 소령이 기자실을 찾아와 “지방 라디오에만 위수령 발령을 살짝 보도하려고 했는데 전국에 알려져 상부로부터 심한 기합을 받았다”고 했다.

 

오후 3시. 부산에 배치돼 있던 공수특전부대 5천여명 가운데 1700여명(5공수특전여단)이 군용 트럭 47대에 나눠 타고 마산에 들어와 뱀 꼬리처럼 기다랗게 줄을 이으며 시가행진을 했다. 오후 3시40분엔 해병대 400여명도 군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진입했다. 5공수여단은 경남대에 본부를 설치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캠퍼스는 하룻밤 사이 군화에 짓밟히고 말았다.

 

오후 4시40분께 최창림 마산경찰서장은 내외신 기자 20여명 앞에 만년필만 한 것을 놓고 “이게 시위대 속에서 발견한 사제 총기다. 사정거리가 30~50m로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고 했다.

 

군과 경찰이 철통 경계를 서고 통행금지 시간이 자정에서 밤 10시로 앞당겨져서 그런지 저녁 오동동·창동 거리에는 인적이 뜸했고 시위는 없었다. 이아무개 월영초등학교 교사는 집으로 가다가 군인들이 한 남성을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넘어진 어린 아들을 일으켜 세웠는데 돌을 줍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시민들은 “이날 시위가 벌어졌다면 피비린내 나는 험한 꼴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셋째 날 시위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한명도 검거하지 못했고 야간통행금지 위반자 324명만 붙잡았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제공

1979년 10월18일 경남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사복 차림의 형사들이 해산을 종용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10월21일 일요일

 

군인들이 시내를 완전히 장악했다. 번화가인 오동동·창동·부림동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갑자기 기온도 떨어져서 그런지 행인들도 뜸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시민들은 폭력시위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붙잡혀 간 청년들이 경찰한테 살인적인 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경찰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다.

 

중앙동의 약국 주인 구아무개(당시 39살)씨는 “학생시위 진압 방법이 아주 잘못됐다. 총칼 앞에 청년들이 지금은 후퇴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언론자유’, ‘유신철폐’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시위 방법이) 도시 게릴라 방식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했다. 검거된 이들의 얼굴을 보려는 가족들이 마산경찰서 옆 마당에 모여들었으나 경찰이 면회를 시켜주지 않아 마당에서 발을 구르며 애태웠다.

 

그 이후 군과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불과 닷새 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다.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강경대응이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김씨의 아들 재준씨는 “평소 강골이신 아버지께서는 당시 보도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억척같이 현장 취재를 해서 기록을 남겼다. 늦었지만 아버지의 원고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마민주항쟁의 진실 규명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광수 기자

 

정의용 “좋은 대화 나눴다”…미국에 등 떠밀린 일본은 ‘냉랭’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5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5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지난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상 판결 뒤 더욱 악화한 양국 관계가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성사된 고위급 회담이어서 주목된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은 이날 아침 런던 그로스베너 호텔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를 마친 뒤 열렸다. 한·일 양국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3개국 회담이 50분 정도 진행됐고, 이후 자리를 옮겨 양자 회담이 20분 이어졌다. 지난 2월 초 취임한 정 장관은 한-일 관계가 악화된 탓에 모테기 외무상과 석달 동안 전화 통화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두 나라 외교장관이 얼굴을 마주한 것은 지난해 2월15일 뮌헨 안보회의 참석을 계기로 만난 지 1년3개월 만이다.

 

회담 직후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내어 두 장관이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긴밀히 협력할 필요성에 공감”했고,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핵심 현안인 북한·북핵 문제 관련해선 “한·일 양국 및 한·미·일 3국이 긴밀히 소통해온 점을 평가”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에 실질적 진전을 가져오기 위해 지속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양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일본군 위안부 판결 △후쿠시마 오염수 등 주요 현안을 놓고는 여전히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정 장관은 이날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결정과 관련해 “주변국과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이루어진 데 대해 깊은 우려와 함께 반대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고, 일본은 자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반면 모테기 외무상은 위안부 배상 판결과 대법원의 강제동원 노동자 배상 판결 문제에 대한 일본 쪽 기본 입장을 반복했다. 일본 정부는 두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정부간 합의로 해결되어 두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면서 한국 정부에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외교부는 이에 정 장관이 “일 측의 올바른 역사 인식 없이는 과거사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위안부 및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우리 입장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만남 시간이 짧아 속 깊은 얘기는 나누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양쪽 모두 기본 입장을 되풀이한 셈이다.

이날 두 장관의 만남이 향후 한-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주요 현안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차가 쉽게 좁혀지기 어려운데다 일본 국내 정치 상황을 핑계 삼아 막판까지 회동 성사 여부를 놓고 일본 정부가 줄다리기를 한 정황을 보면 한-일 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대중·대북 정책 추진을 위해 한·미·일의 긴밀한 협력을 중시하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응답하는 모양새로 한·일이 마주 앉은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두 장관 모두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은 꽉 막힌 양국 관계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회동이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진행됐으며 양국 간 의사소통을 본격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해 눈길을 끈다. 일본 정부는 그간 “한국이 먼저 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며 고위급 소통을 거부하는 등 경직된 자세를 풀지 않았다. 이에 지난 1월 부임한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뿐 아니라 모테기 외무상과 여태 만나지도 못하고, 일본 국왕에게 신임장 제정도 하지 못한 상태다. 이번 회동을 시작으로 양국 고위급 간 소통이 재개될지 여부가 향후 한-일 관계의 방향을 가늠하는 데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앞서 미국 쪽 주선으로 성사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에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의 실질적 진전을 위해 공조를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3일(현지시각)에 이어 두 장관에게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를 설명하고, 세 장관은 향후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도 3국 간 계속 긴밀히 소통·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외교부는 이 자리에서 세 장관이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언론이 전하는 일본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했다. <아사히신문>은 모테기 외상이 위안부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의 적절한 조처를 요구했으며,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과 관련해선 현금화는 “절대 피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한국이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일본의 기본 입장을 되풀이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당국자도 이번 회담이 성사된 것도 미국의 의향에 따른 것이라며 “모테기 외상이 미국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지은 길윤형 기자

추미애, 유시민 기소에 "검찰 제 식구 위한 기소"

● COREA 2021. 5. 5. 04:3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신임 검찰총장 지명 이뤄지자 전격 기소"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4일 검찰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한동훈 검사장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것에 대해 "검찰권 남용"이라고 비판했다.

추 전 장관은 페이스북에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처럼 어제 신임 검찰총장 지명이 이뤄지자 대검은 유 이사장을 전격 기소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추 전 장관은 한동훈 검사장과 채널A 기자 간 공모 정황, 유 이사장 관련 언급을 다룬 언론보도를 거론하며 "당시 (검찰이 자신을 사찰한다는) 유 이사장의 의심과 공포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옹호했다.

 

그러면서 "검찰은 조직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이런 중범죄에 대해 엄정한 수사를 통해 명명백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며 "한 검사장의 스마트폰 포렌식으로 국민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개인정보보호에 불안을 느낀 한 시민(유 이사장)이 공개적으로 사과까지 한 마당에 검사장은 무려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식구를 위한 기소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유 이사장은 2019년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대검 반부패강력부가 본인과 노무현재단의 계좌를 불법 추적했다'고 주장했다가 법치주의바로세우기행동연대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유 이사장은 지난 1월 사과문에서 본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한 검사장 측은 추 전 장관 글에 대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강욱, 윤석열 겨냥 “정치검찰 민낯 드러나”

● COREA 2021. 5. 5. 04:1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검찰, ‘허위사실 공표’ 최 대표에 벌금 300만원 구형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에게 검찰이 당선무효형을 구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2부(부장판사 김상연 장용범 마성영) 심리로 4일 열린 최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최 대표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해달라”고 구형했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을 확정받으면 국회의원 당선은 무효가 된다.

 

최 대표는 제21대 총선을 앞둔 지난해 4월1일, 한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아들이 자신이 일한 법무법인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인턴을) 했다”고 말한 혐의로 지난해 10월 기소됐다. 최 대표가 법무법인 청맥 변호사였던 2017년 10월, 조 전 장관의 아들 조아무개씨에게 허위의 확인서를 발급해줬는데도 방송에서 허위사실을 공표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날 재판에서 “인턴은 회사나 기관의 정식 구성원이 되기 전에 하는 것으로, 체험형 인턴이라도 해당 기관에 적을 두고 근무하는 게 통상적”이라며 ‘9개월간 총 16시간’ 일했다는 조씨의 경우는 “체험형 인턴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어 “(최 대표의 혐의는) 대의민주주의 본질을 훼손하는 중대 범죄인 점, 선거가 임박해 허위사실을 공표한 점 등을 고려하면 그에 상응하는 중형이 필요하다”며 “벌금 300만원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최 대표 쪽은 “검사의 주장과 달리, 조 전 장관 아들이 했다는 정도의 활동도 인턴으로 칭해지고 있다”며 “전형적인 인턴이 아닌 이런 인턴도 입시 관행에 비춰볼 때 문제가 없겠다는 의미에서 인턴 확인서에 날인을 해준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 대표도 최후 진술에서 “동일한 사안을 두고, 한번은 업무방해로 또 한번은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이 이 사건에 왜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가졌는지, 그 이면에 담긴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치적 기소’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는 재판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서도 “이 사건을 시작한 당사자 검찰총장 윤석열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반문한 뒤 “말 같지 않은 사건을 통해 정치검찰의 민낯이 드러난 점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점에서 윤석열이라는 분을 검찰개혁에 큰 공로가 있는 분이라고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앞서 최 대표는 허위 인턴 확인서 발급으로 대학원 입시 업무를 방해한 혐의(업무방해)로도 기소돼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한 바 있다. 이날 변론을 마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의 선고 공판은 다음 달 8일에 열린다. 신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