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과 류희림 방심위원장의 민원사주 의혹에 사실상 면죄부를 내린 국민권익위원회의 권위가 추락하고, 부패 척결이라는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참여연대와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사회민주당의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16명은 19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권익위원회 독립성,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지난 8일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 실무 총괄을 맡은 김 모 권익위 부패방지국장이 사망한 가운데, 권익위가 김건희 여사 사건과 류희림 방심위원장 민원사주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다.
김준희 지부장은 “적반하장 류희림만큼이나 권익위도 망가졌다”고 비판했다. 지난 1월 방심위 직원 149명은 류희림 위원장이 이해충돌방지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신고서를 제출했으나, 권익위는 지난달 8일 이 사건을 방심위로 송부했다. 민원사주 의혹에 대한 판단은 없었다.
김준희 지부장은 “내부에서 나름대로 저항의 몸부림을 쳤지만, 지난달 23일 류희림 위원장이 연임했다. 만약 권익위가 류 위원장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았다면 류 위원장이 연임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지부장은 권익위가 민원사주 사건을 신고한 제보자를 민원인 개인정보 유출 혐의로 경찰에 이첩한 것에 대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꾼 행태”라며 “공익신고자 보호가 사명인 권익위가 공익신고자를 처벌해 달라고 수사의뢰를 하는 기괴한 광경이 현실인지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이상희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소장은 “권익위가 제보자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수사기관에 이첩한 사례는 본 적이 없다”며 “권익위의 조사는 미온적이었고, 제보자를 처리하는 과정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19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권익위원회 관련 토론회 참가자들이 최근 사망한 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장의 명복을 빌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권익위의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사건 종결 처리에 반발해 사퇴한 최정묵 전 권익위 비상임위원은 부패방지국장 사망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김 국장은 사망 전 김 여사 사건이 종결 처리되자 지인들에게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해 괴롭다’는 취지로 하소연을 했다. 유철환 권익위원장은 19일 “신고 사건 처리에 관련된 외압은 없었다”고 밝혔다.
최정묵 전 위원은 “고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권익위 사태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며 “명품백 수수사건 종결은 일반적인 법률위반을 넘어서는 일이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국민 신뢰는 추락했다”고 지적했다. 최 전 위원은 권익위 내부에 ‘공론화센터’를 설치해 독립성·중립성이 필요한 안건의 경우 일반 시민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권익위 결정의 책임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재근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권익위가 추락하고 있다. 야권 인사를 몰아내는 사건은 득달같이 판단하는데, 정부와 관련된 사건은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있다”며 “결국 양심적 공직자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 처장은 권익위 독립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권익위원장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하고, 위원 결격 사유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부패방지국장 사망 이틀 전까지 연락을 주고받은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이사장은 “권익위의 위상 정립과 정치적 중립성, 독립성 확보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며 권익위에 조사권을 부여하고 대통령 직속 독립기관으로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 윤수현 기자 >
경제학자와 정치 철학자들의 사상은 옳을 때나 틀릴 때나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 사상들이다.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이기 쉽다. … 나는 기득권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 침투에 비한다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 선용되건 악용되건 궁극적으로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이 아니다.
윤석열 친일 정책 앞뒤서 반일종족주의그룹 활개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 M. Keynes, 1883~1946)가 불후의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의 말미에 남긴 말이다. 1930년대에 케인스의 경제사상은 일거에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무너뜨리며 전 세계 경제학계와 정부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1919년에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예견하여 예언가의 자질을 보였던 케인스는 자신의 경제사상이 겪을 운명에 대해서도 정확히 예언한 셈이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약 40년에 걸쳐 세계 경제학계를 석권하며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했던 케인스 이론도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국면에도 물가가 상승하는 상태)이 발발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대신 등장한 것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다. 이 경제학은 신신고전학파 또는 새고전학파로 불린다. 과거 신고전학파의 이론을 더욱 시장 중심으로 극단화한 경제학으로 오늘날 세계 경제학계는 이 학파가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아는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출발은 케인스주의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던 1947년, 하이에크가 스위스 몽펠르랭에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모아서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을. 그러니 위에서 소개한 케인스의 예언은 케인스주의의 승리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승리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뉴라이트의 득세는 오랜 사상투쟁의 결과
▲ 2020년 5월 11일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발간 기자회견에서 대표저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 연합
최근 한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뉴라이트로 지목한 인사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과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케인스의 예언을 떠올렸다. 8월 13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역사·역사교육 관련 기관 임원 중 최소 25개 자리를 뉴라이트 혹은 극우 성향 인사들이 차지했다고 한다. 실로 '역사전쟁'을 방불케 하는 전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과 광복회 및 독립운동 단체, 역사 관련 학회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친일적 행태를 중단할 것을 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윤석열 정부가 돌발적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행태의 배경에 뉴라이트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이는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불장난이 아니라 한 사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해 추진하는 전략적 행위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지금까지 출몰한 뉴라이트 계열 단체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뉴라이트재단, 자유주의재단, 뉴라이트싱크넷, 한국현대사학회 등 다양하고 관련 인사들도 여럿이지만, 사상 면에서 핵심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필두로 한 '반일종족주의그룹'이다(<반일종족주의>는 이영훈, 김낙년, 주익종 등 6인이 2019년에 간행한 책으로, 국내에서 10만 권 이상, 일본어 번역서가 일본에서 4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듬해에 그들은 후속 작업으로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을 펴냈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 교과서포럼을 만들어 역사 교과서 개정 운동을 벌였고, 안병직, 이대근 등 그들의 스승 격인 인사들은 뉴라이트재단을 결성해 극우 성향의 정치 운동을 펼치면서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반일종족주의그룹의 중심은 이영훈, 김낙년, 주익종 3인이다. 이들은 모두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제자로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오랫동안 함께 뉴라이트 사상을 연마했고, 특히 이영훈은 2016년 이승만학당을 설립하여 뉴라이트 사상 대중화와 이승만 띄우기에 몰두해 왔다. 주익종은 이승만학당 이사로서 이영훈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승만학당은 설립 후 올해까지 매년 두 차례씩 3개월간 계속되는 오프라인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금까지 21기 교육을 마침으로써 최소 600명에게 면대면 뉴라이트 교육을 실시했다. 또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를 개설해 온라인 교육에도 열을 올렸는데 현재 구독자 수는 10만 5000명으로 적지 않은 숫자이고, 업로드한 동영상 수도 약 800개에 달한다.
케인스가 말한 '사상의 점진적 침투'를 위해 이보다 더 나은 전략이 있을까. 뉴라이트가 역사 관련 단체를 장악한 것은 물론이고 정권의 정책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이처럼 끈질긴 사상투쟁의 결과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과거 행적과 언행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실 그는 뉴라이트 본류에 속한 인물이 아니며 그가 하는 말 또한 독창적인 언사라고 보기 어렵다. 예컨대 그가 작년 12월에 했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진정한 광복"이라는 말은 이영훈의 오래된 건국절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가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해 제3자 변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강제동원이 명기되지 않음에도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허용한 것 등도 반일종족주의그룹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윤 정부는 식민지기의 강제동원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자에게 변제책임을 지우면서 1965년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반일종족주의> 10장에서 주익종이 주장한 내용 그대로다. 사도광산 문제를 처리하면서 강제동원 명기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반일종족주의> 5~7장과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7, 8장의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다.
김형석보다 김낙년이 더 문제일 수도
▲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지난 12일 오후 세종시 국립세종도서관에서 열린 근현대 인쇄출판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 '깁더: 우리책, 깁고 더하다' 전시 개막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
7월 30일 윤석열 정부는 반일종족주의그룹의 핵심 인물인 김낙년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에 임명했다. 임명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에게 주의가 집중되고 있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김낙년의 임명인지도 모른다. 김낙년은 <반일종족주의>와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양쪽 모두에 공저자로 참여했는데, 그의 역할은 일제강점기에 쌀 수탈은 없었고 조선 농민은 일제의 농업정책 덕분에 소득이 크게 증가했음을 논증하는 것이었다.
김낙년은 '수탈이란 대가 없이 강제로 빼앗는 것'이라고 정의한 다음, 1920~34년 산미증식계획 시기에 조선 농민은 대가를 받고 쌀을 팔았기 때문에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수출'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대규모 수출시장이 열렸으므로 조선 농민은 쌀 수출을 통해 소득을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김낙년의 견해는 눈을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일제 말기의 공출제도와 산미증식계획 시기의 권력적 강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한계가 있다. 특히 수탈·강제동원의 개념을 협의로 정의한 다음 그에 꼭 들어맞는 사례가 없으므로 수탈·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의 오래된 논법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보통 심각하지 않다.
게다가 김낙년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농민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원인을 조선 전통사회에서 찾는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주 중심적 농정과 지주의 소작료 수탈 등 분명한 사회적 원인이 존재함에도 그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일제강점기의 소득증가와 생활수준 향상 등 긍정적인 현상은 모두 일제의 정책에서 비롯됐고, 가난과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조선 전통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식민사관 그 자체가 아닌가. 학자로서 이런 견해를 갖는 것은 그의 자유일지 모르지만, 이런 사관을 가진 사람을 "한국학의 진흥과 민족문화의 창달을 목표"로 삼는 기관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3년간 김낙년이 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떤 기괴한 한국학이 만들어질지 심히 걱정스럽다.
뉴라이트 인사 임명 논란이 한창인 와중에 서울 지하철 역사에 설치되어 있던 독도 조형물이 철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교통공사는 안전을 위한 선제적 대책이라고 설명했지만, 시민들은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논란이 일자, 서울교통공사는 하루 만에 사과하고, 새로운 독도 조형물을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일 이 조치가 최근 윤석열 정부의 행태와 무관치 않다면, 여기서도 반일종족주의그룹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종족주의그룹은 앞서 언급한 두 책에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없다며, '독도는 우리 땅'을 노래하는 국민 정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바 있으니 말이다. 또 윤 정부가 이승만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는 배경에도 이승만 띄우기에 몰두해온 반일종족주의그룹과 이승만학당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위안부 문제도 그들의 주장대로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
▲ 지난 5월 29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헤결을 위한 부산여성행동 주최로 101차 부산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 김보성
반일종족주의그룹이 주장한 내용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본격 거론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반일종족주의그룹이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일환으로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이 민간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책임으로 돌릴 수가 없다.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 위안부 모집은 민간 주선업자와 보호자 간의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 위안부는 끌려가서 속박당하고 착취당한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며 인생을 개척했고 돈도 꽤 잘 벌어서 고향에 송금하고 저축도 했다. 위안소는 위안부들에게 수요가 확보된 고수익 시장이었다.'
나는 <<반일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한겨레출판)이라는 책에서 반일종족주의그룹이 이용한 사료와 구사한 방법을 일일이 검토해서 위의 주장이 몽땅 거짓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 반일종족주의그룹 가운데 위안부 관련 서술을 주로 담당한 이영훈은,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일부러 부각하거나 과장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부정하는 부조적(浮彫的) 수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영훈의 주장은 기존 연구를 모조리 뒤집는 전복적 견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지만, 내용은 하나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진 폭발성을 느꼈는지 아직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극우 민간단체에서는 이미 곳곳에서 소녀상을 모독하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으니, 조만간 이 문제도 역사전쟁의 일환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면 윤석열 정부의 역사 관련 정책과 대일본정책의 지휘부는 반일종족주의그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들은 오랜 세월 함께 뉴라이트 사상을 연마해 왔고, 사료와 통계를 다루는 능력과 사상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선전·선동 역량이 뛰어나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의 역사전쟁은 만만히 보고 대처해서는 안 된다. 그 중심에 '고수'가 똬리를 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애국적 역사학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 전강수 기자 >
왜곡된 역사관 아닌, 역사관 없는 안보기술자 자인 친일 비난에 종주먹 들이대며 '친일 본색' 드러내
범죄자서 윤석열 정부 실세 변신…나름 성과만 강조 "일본, 마음으로 반성 안 할 테니 강요 말자는" 요설
"과거사 문제에 일본이 또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서 엄중하게 따지고 변화를 시도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것이 과연 진정한가. 또 한일관계에 도움이 되는가." (김태효, 16일 KBS 인터뷰)
"우리가 말할 것은 말하고 일본 측이 해야 될 행동을 촉구하되, 한일 간 협력으로 우리가 얻어낸 성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보를 하고 우리가 리더십을 행사하겠다." (김태효, 16일 자 조선일보 인터뷰)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최종 조율을 위해 1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김 1차장은 이날 출국 전 기자들과 만나 "오늘 아침에 양국 국방장관이 통화를 했고 양국 견해가 일치한다”고 말했다. 2023.4.11. 연합
두 전과자의 '의리'
그래도 '의리'는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4번이나 바뀌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실세,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범죄 행위를 반성하고 묵묵히 국가를 위해 일했으면 굳이 헤집을 필요가 없었을 게다. 하지만 관대하게 보아주기엔 왜곡된 역사관에서 비롯된, 아니 역사관이 없는 안보기술자의 손때가 도처에 묻어난다.
대법원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건 2022년 10월 27일. 정확히 두 달 뒤인 12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사면했다. 이미 외교안보 정책과 관련, 대통령의 귀를 붙잡고 있는 실세를 신년 사면·복권 대상에 보란 듯이 포함했다. 군사기밀법은 '군사기밀을 보호하여 국가안보보장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시절 획득한 기밀을 갖고 나온 혐의가 인정됐다. 기밀을 다룰 권한이 해제된 뒤에도 기밀을 점유한 점이 처벌대상이 됐고, 고의성도 인정된 것.
그나마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국가정보원 생산 문건 2건과 국군기무사(현 방첩사) 작성 문건 1건을 외부로 반출한 혐의(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는 2심과 확정판결에서 제외됐다. 본인만 빠져나온 후안무치는 아니었다. 주군으로 모시던 이명박 전대통령(MB)에겐 같은 날 더 큰 은사(恩赦)가 베풀어졌다. 뇌물 및 횡령이라는 파렴치 혐의로 2020년 징역 17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던 그는 남은 징역 형기 14년 6개월을 면제받았다. 덕분에 MB 부부는 지난 12일 대통령 관저에 초대받아 저녁을 얻어먹었다. 게다가 국정 훈수까지 뒀다. 김 차장의 의리가 작용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미담 아닌 미담은 여기까지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12일 대통령 관저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부부, 정진석 비서실장 부부와 만찬에 앞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2024.8.12. [대통령실 누리집]
'MB의 남자'에서 '윤석열의 남자'로
전과자에서 대통령의 존경과 총애를 받는 주인공으로 변신한 건 MB뿐이 아니다. 'MB의 남자'도 범죄자에서 국가안보의 실체로 날씬하게 변신했다. 대통령이 광복절에 발표한 통일 독트린을 작성하고, 16일에는 조선일보와 KBS 뉴스라인에 잇달아 얼굴을 내밀며 국정 설명을 주도했다. 지난 12일 안보라인 인사에서 국가안보실장으로 영전한 신원식 국방장관이 버젓이 있음에도 일개 차장이 국가 대사를 도맡은 것. 하다못해 통일부는 장관이 브리핑을 했다. 지난 4월과 6월, 잇달아 KBS에 출연해 현정부의 국가안보정책을 설명한 주체는 실장(장호진)이었다. 정권 출범 2년여 동안 김성한-조태용-장호진-신원식으로 실장 4명이 교체됐지만, 끄떡없던 '외교안보 사령탑'의 위세가 대단함을 새삼 일깨웠다.
그는 KBS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에 쏟아지는 '친일' '매국' 비판에 종주먹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내놓은 게 모두에 소개한 '마음론'이다. 조선일보 인터뷰에선 '친일 비판'이 분한 듯 성과론을 내놓았다. 한미일 협력으로 얻은 안보, 경제적 이익과 혜택을 함께 보아달라는 주문이다. 마음론과 성과론은 그의 오랜 주장이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 문제에 대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엄중하게 따지고 변화를 시도했으며, 그리하여 변화를 이뤄낸 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죄진 이가 먼저 실토하는 경우를 보았는가. 다그치고, 억지로라도 단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억지로 받아낸 사과는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내놓은 마음론도 '일본의 마음'론이다. 일본이 진정한 마음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으니, 굳이 사과를 구하느니 현실적 성과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고다.
'일본의 마음'이 피곤하다?
죄수가 죄를 인정할 마음이 없으니, 다그치지 말고 그냥 넘어가자는 말과 다름없다. 피해자의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해자의 마음을 챙겨주는 게 바로 친일이자 매국이다. 발언 내용이 물의를 빚자 18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가 나서 "1965년 한일 국교수립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기에 피로감이 많이 쌓여 있다"고 두둔한 것 역시 '일본의 마음'만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친일이라는 비판에는 그게 아니라며 종주먹을 들이댄다. 일제가 한반도 거주민에 범한 죄는 그와 MB가 저지른 일반 범죄가 아니다. 시효가 없는 반인도적 범죄다. 이러니 "용산에 일제 밀정 같은 존재의 그림자가 있다(이종찬 광복회장)"는 말이 나오지 않겠나. 이 회장의 아들이자, 대통령의 죽마고우인 이철우 연세대 교수는 "대통령 주위에서 이상한 역사의식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19일 자 동아일보 인터뷰)
'일본의 마음'을 챙기는 그의 생각은 고질적이다. "한국인의 감정은 몇 년을 주기로 커다란 변화를 보이는 반면, 일본인의 마음은 한번 바뀌면 몇십 년을 간다"라면서 사과받을 한국인이 화가 나 있는 것은 알겠는데, 사과해야 할 일본이 화가 나 있는 이유를 더 무겁게 봤다. 그가 성균관대 교수로 '자연인'이던 2015년 8월 쓴 조선일보 칼럼 '사과받는 나라와 사과하는 나라'의 한 대목이다. 요설일수록 디테일에 코를 박는다. 한일이 강제징용자 표기를 '강요된 노동(forced to work)'이라고 합의했는데 한국이 회의장에서 '강제노동(forced labor)'이라고 썼다고 질타했다. '강요된 노동'이건, '강제노동'이건 그 피해자의 마음에 대한 배려는 밤톨만큼도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을 닷새 앞둔 10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대형 태극기가 새겨진 조형물을 살펴보고 있다. 2012.8.10. 연합
돌변한 MB, 외길 가는 윤석열 정부
그는 윤석열 정부에서 '지체된 성과'를 마음껏 달성하고 있다. 작년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는 북한 미사일 정보를 즉시 제공키로 문서화했다. 내년 6월 22일 한일 수교 60주년에 즈음해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ACSA)과 한반도 돌발상황 공동대처 방안도 마련, 한일 관계를 사실상의 동맹으로 만들려는 게 최종 목표일 것.
나란히 전과자가 됐다는 점에서 동지애가 있을지 모르지만, MB와 김 차장이 늘 동지였던 건 아니다. 그가 이명박 정부에서 한일 정보보호협정(GISOMIA) 밀실 추진이 탄로나 사직하자마자 MB는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독도를 방문하면서 역진을 시작했다. 그의 친일도, MB의 반일도 모두 한일관계에 악재가 됐다.
과거사 극복을 하지 않는 한 진정한 파트너는 되기 어렵다. 특정 정권이 진도를 나가봐야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한반도와 일본의 마음과 만나기 전에 한일관계의 진정한 발전은 한낱 꿈에 불과할 것이다. < 김진호 민들레 기자 >
일본, 사과는 했지만 반쪽짜리 사과 ‘고노 담화’, 한국사회 민주화가 만들어낸 변화 ‘고노 담화’ 뒤집고 거꾸로 내달린 일본 우익
적반하장의 일본 우익, 정말 피곤한 건 한국 오히려 일본정부 편을 드는 한국 친일정부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1주년 한미일 협력 성과 등 현안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2024.8.18. 연합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지난 16일 한국방송(KBS) ‘뉴스라인 더블유’에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 발언은 사실과 어긋난다. 사실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엉뚱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는 관련 질문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엄중하게 따지고 변화를 시도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며 “(사과할)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게 과연 진정한가”라고 대답했다.
그의 발언 중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이라는 구절도 그 맥락으로 보건대, ‘일본이 과거사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필요한 말을 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가 지난해 3월에 “우리 외교부가 집계한 일본의 공식 사과가 20차례가 넘는다”고 말했다가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의 발언이 논란을 빚자,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나서서 “한·일 국교 수립 이후 수십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공식적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가 있었고, 그러한 사과가 피로감이 많이 쌓였다”며 김 차장의 말을 변호했다.
사과는 했지만 반쪽짜리 사과
일본이 여러차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사과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정부는 1990년대 초에,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들이 일본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 운영된 위안소들에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 등의 형태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강제로 성폭행을 당하는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했다. 일본정부는 약 2년에 걸친 자체 조사를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 수많은 고통을 당하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고 문서로 작성해 공식적으로 발표까지 했다.
‘고노 담화’도 자발적 발표 아니야
그것이 1993년 8월 4일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고노 담화’다. ‘위안부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아래에 번역해서 붙임)가 정식 명칭인 그 담화 뒤에도 유사한 내용의 일본정부 담화들이나 총리의 발언들이 발표됐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1993년 8월~1994년 4월) 때도 그랬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1994년 6월!1995년 8월) 때도 그랬으며(‘무라야마 담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2009년 9월~2010년 6월)과 간 나오토 내각(2010년 6월~2011년 9월)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일본정부의 사죄와 반성은 거기까지였다.
‘고노 담화’도 일본이 자발적으로 먼저 발표한 게 아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했고, 그것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전에도 그런 증언의 단편적인 조각들이 드물게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김학순 할머니처럼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실명을 드러내면서 그 치욕스런 과거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사실에 대해 공개 증언하는 피해자 김학순 학머니.
한국사회 민주화가 만들어낸 변화
그때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1989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냉전 또한 무너져 내린 시기다. 베를린 장벽 붕괴 한 해 전인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치러졌다. 그 한 해 전인 1987년에는 일반시민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학생시위에 가담했던 ‘6월 항쟁’이 일어났다. 5공 군부독재체제가 ‘ 6.29선언’을 통해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 민주화’의 1단계가 성취됐다.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그런 시대변화 속에서 이뤄졌다. 그 전까지 군부독재 체제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런 말을 꺼내지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게 억압했다.
그 증언으로 일본사회가 뒤집혔고, 그 소식은 세계로 전파돼 필리핀, 네덜란드, 중국 등 곳곳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공개 증언에 나서고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민주화가 세상을 그렇게 바꿨다고도 할 수 있다.
‘고노 담화’ 뒤집고 거꾸로 내닫기 시작한 일본 우익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당 등 이른바 전후 ‘리버럴’ 세력이 살아 있던 일본의 자민당 미야자와 내각은 김학순 할머니 증언에 놀라고 ‘평화 인권국가 일본’ 이미지가 국제적으로 위태롭게 되자 사실 조사에 들어갔다. 장기간의 조사 끝에 1993년 8월 4일에 ‘고노 담화’가 발표됐다. 담화는 조사해 보니 김 할머니 증언이 사실이더라는 것, 일본군 당국이 주도한 그 일로 고통을 당한 분들에게 사죄하고 반성한다는 것을 최대한 표현을 절제해가며 간결하게 기술했다. 그 뒤에 일본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담화들과 발언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김학순 쇼크’에 망연자실했던 일본 우익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의 과오를 부정하고, 과거사 반성을 자학이라 몰아가는 ‘자유주의 사관’이 등장하고 이른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등의 우익세력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국회 내에도 그런 움직임이 퍼졌으며, 그런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아베 신조 전 총리다.
아베 신조
그 최전선에 섰던 아베 신조
과거사 반성 언설들이 자학사관이라는 우익 바람 속에 제국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영광의 과거’로 기억하도록 학습받은 전후 세대 정치인인 그는 일본군 위안부 등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의사로 동원에 응했고,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고노 담화 내용의 핵심을 뒤집어버렸다. 2006년 9월에 총리가 된 아베는 2012년 12월의 2차 내각 이후 2020년 9월까지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를 기록하면서 줄기차게 고노 담화 내용을 부정했다. 핵심은 일제 강제동원은 강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베 이후 진정한 사죄 단 한 번도 없었다
김태효 1차장이 일본이 수십 번 과거사를 반성했다는 것은 아베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다. 그러나 아베 집권 이후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과거사를 제대로 인정하고 사죄한 뒤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베 내각 뒤의 스가 요시히데 내각도, 지금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도 그 점은 아베 내각을 철저히 계승했다. 그들은 아직도 공개적으로 안중근과 김구를 일본 근대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죽인 “테러리스트”라 주장한다.
적반하장의 일본 우익, 정말 피곤한 건 한국
그러니 수십 번을 사죄하느라 일본이 피로해졌을 것이라는 김 차장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피곤하고 성가신 쪽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다. 일본이 고노 담화의 조사결과와 취지를 인정하고 수용한 호소카와, 무라야마, 하토야마, 간 내각 때처럼만 대응했어도 피해자들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그렇게까지 “과거사를 인정하고, 반성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인들 중에 그토록 피곤하고 지겨운 일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아베 신조 이후, 그 전 정권들이 그나마 털어놓았던 사실조차 다시 부정하고 오히려 한국인들을 ‘아무 잘못 없는 일본’한테서 돈이나 뜯어내려는 파렴치한 ‘반일 쟁이’로 몰아가는 일본 우익들이야말로 한국인들을 정말 화나고 피곤하게 만든다.
오히려 일본정부 편을 드는 한국정부
최근의 군함도와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도 한국인들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들었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조선인들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당한 사실”을 전시실(산업유산정보센터)에 사실대로 기록해서 관람자들이 볼 수 있게 하라고 여러 차례 지적당하고 경고를 받았음에도 일본정부와 지자체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군함도에선 전시물에 강제동원 사실을 적시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강제동원이 아니라는 증언들만 모아 전시했다고 <아사히신문> 등은 보도했다. 사도광산은 아예 강제동원 사실 자체를 거론도 하지 않았으며, 그런 일본정부 방침에 윤석열 정부는 아무 문제제기도 하지 않은 채 동의해줬다.
그런 잘못을 지적하면 ‘반일’로 몰아간다. 정말 피곤하고 지겨운 일이다.
1993년 8월 4일 미야자와 내각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다.
고노 담화. 일본 외무성 온라인 사이트
위안부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
1993년 8월 4일
이른바 종군위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는데,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됐기에 발표하게 됐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걸쳐, 또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돼 있었고, 수많은 위안부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 요청으로 설치 운영(設營)됐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대해서는 구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로 그 일을 담당했지만, 그럴 경우에도 감언과 탄압을 통해서 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당한 사례가 수다하고, 게다가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고통스런 것이었다.
그리고 전지(전장)로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당시 조선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탄압을 통해 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서 이뤄졌다.
어쨌든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안긴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한번 그 출신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 수많은 고통을 당하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해 드린다. 또한 그런 마음을 우리나라가 어떻게 표시할지에 대해서는 유식자들의 의견 등도 요청해서 앞으로 진지하게 검토해 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고자 한다. 우리는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 기억에 담아두고 같은 과오를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한번 표명한다.
또한 본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소송이 제기돼 있고, 또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쏠리고 있어서, 정부도 앞으로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서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 한승동 민들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