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3.1독립만세운동 재현 체험 행사 참가 시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명칭살리기 추진위 결성

1938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절 기념식에서 “3.1운동은 프랑스 대혁명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민족운동”이라며 3.1운동의 ‘혁명성’을 강조했다. 일제 식민지배에 대항한 독립운동이자 군주제에 반대하며 ‘민주공화국’ 이념의 씨앗이 된 반봉건 혁명이라는 규정이었다. 이후 3.1운동은 해방 뒤까지 ‘3.1혁명’으로 불렸다. 제헌헌법 초안에도 ‘3.1혁명’으로 표현됐다. 하지만 제헌헌법에는 결국 ‘3.1운동’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반봉건 투쟁의 의미가 축소된 것이다.
‘3.1혁명’이란 이름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시민·사회·종교단체 회원들이 나섰다. 강만길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 김우전 전 광복회장 등 70여명은 26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3.1혁명추진위) 결성식을 가졌다.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재정립하고 이름을 ‘3.1혁명’으로 바꾸려는 모임이다. 학계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논한 적은 있지만 3.1운동을 혁명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본격적인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3.1운동은 2019년 100주년을 맞는다.
 
3.1혁명추진위는 제헌헌법에서 ‘3.1운동’이라는 명칭이 확정되며 ‘군주제와의 혁명적 단절과 민주공화국 지향’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빠진 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독립운동’으로 한정됐다고 지적했다. 이준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3.1혁명 당시 각계각층은 독립과 함께 군주제가 아닌 근대국가를 만드는 미래를 꿈꿨고, 이 정신을 임시정부가 이어받으면서 민주공화국 정치체제를 만들게 됐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3.1혁명을 민주와 평등이라는 근대국가의 가치를 추구한 민주혁명으로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제정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민주공화제’ 정체를 확실히 했다. 이후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헌법, 1927년 대한민국임시약헌, 1944년 대한민국임시헌장 등에서도 민주공화국 이념은 유지됐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는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야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가 헌법에 들어간 유럽보다도 이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결국 ‘운동’으로 규정된 데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제헌헌법 초안과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 등에선 ‘3.1혁명’으로 표현됐지만, 1948년 7월 속기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혁명은 우리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일제)에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은 혁명이 아닌 항쟁”이라며 ‘혁명’ 규정을 반대했다. 여기에 일부 의원들도 힘을 보태면서 ‘운동’으로 정리됐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기미년 사건을 3.1혁명으로 파악했고, 해방 뒤에도 3.1혁명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사용됐다”고 말했다.
< 박승헌 기자 >


애끓는 사연들
 
아버지 대신 의용군 끌려간 동생 60여년 만에 만난 남쪽 형 금영씨
“다시 만나 이렇게 기쁠수가 없어”
 
북쪽 형 이정우씨 만난 영우씨
“그동안 상봉신청 뽑히지 못했는데 이번에 형님이 나를 찾았다”


“6·25 때 언니가 의용군에 끌려간 약혼자를 따라 북에 갔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남쪽의 가족 홍명자(65)씨는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언니 석순(80)씨를 껴안고는 눈물을 쏟았다. 홍씨는 “부모님이 말렸는데 따라가서 엄마가 늘 마음 아파했다. 나중에 무당들에게 물어보니 다 죽었다고 해서 언니와 약혼자의 영혼 결혼까지 시켰다”고 말했다. 언니 석순씨는 보청기를 끼고도 잘 알아듣지 못했으나, 고모 홍장한(87)씨 손을 놓지 못하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남북 이산가족 2차 상봉이 23일 금강산에서 열렸다. 1차 상봉과는 반대로 북쪽 이산가족이 남쪽 가족을 찾은 이번 상봉에서는 북쪽 신청자 88명과 남쪽 가족 357명이 만났다. 이들은 이날 단체 상봉과 만찬을 함께하며 지난 60여년 동안 꽁꽁 묶어놨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이번 상봉에 참가한 북쪽 신청자 가운데는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연락이 끊긴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의용군’은 6·25 전쟁 당시 북한 조선인민군이 민간인을 강제로 징집한 군대를 말한다. 남쪽의 신수석(79)씨는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북쪽의 오빠 신덕균(86)씨를 만나자 “왜 여태 있다가 이제사 연락을 했느냐”며 눈물을 훔쳤다. 오빠 신씨는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은 사진을 보여주며 “일하면서 공로를 세워 받은 상”이라고 자랑했다.


북쪽의 동생 림선영(83)씨를 만난 남쪽의 형 금영(86)씨도 “6·25 때 서울 신내동에 살았는데 동생이 당시 18살이었고, 아버지 대신 의용군에 끌려갔다”며 “죽은 줄 알고 제사까지 지냈는데 만나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감격했다. 북쪽의 오빠 류근철(81)씨를 만난 정희(79)씨는 “오빠가 의용군 끌려갔는데 소식이 없으니 어머니가 무당한테 점도 봤다. 결국 찾는 걸 포기하고 사망 신고를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연락이 왔다”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앞서 지난 1차 상봉 때는 북쪽의 조선인민군으로 참가했다가 포로가 돼 남쪽에 남은 이들이 북쪽의 가족과 재회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친북 신문 <조선신보>는 북한에 있는 아들, 며느리와 상봉한 남한 가족 조기덕(92)씨와 북한의 이복동생과 손자를 만난 남한 가족 백관수(90)씨의 사연을 22일 소개했다. 원래 북쪽에서 월남자나 6·25 때 반공 포로의 가족들은 ‘배신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차별을 받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전쟁 당시 전사자로 처리돼 그 가족들이 유공자 가족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 가족들은 1차 상봉 때와 마찬가지로 전날 강원도 속초 한화콘도에 모여 이날 아침 8시20분께 금강산으로 향했다. 낮 1시께 도착한 뒤 오후 3시 ‘단체 상봉’으로 60여년 만에 북쪽 가족과 눈물의 재회를 했고, 오후 7시에는 만찬을 함께했다. 이번 2차 상봉도 25일까지 2박3일 동안 진행된다.

< 금강산/공동취재단, 박병수 선임기자 >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노동자는 적이 아니라,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지주입니다
국민을 향해 폭주하지 말고 ‘인간의 노래’를 듣기 바랍니다

1987년 4월 일본 국철의 분할 민영화를 전후해 국철 노조원 200여명이 자살합니다. 사업장에서 목을 맨 젊은 노동자들이 줄을 잇는 등 노동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그때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살아서 싸우자며 간절히 염원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깊은 상처 안고 사는 지친 어깨에/ 작은 눈길 건네는 친구는 있는가/ 고통 속에 누워 서러웁게 식어가는/ 차가운 손 잡아줄 동지는 있는가// ~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나는 부르리 자유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지난 11월 말 ‘한겨레 평화의 나무 합창단’ 정기공연에서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인간의 노래’는, 과장된 비장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부터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폭력이 저질러지고, 비슷한 불행이 예고되면서, 나의 소견이 얼마나 짧았는지 절감했습니다. 일본 국철 민영화 전후해 발생한 비극은 그야말로 인간의 비극이었습니다. 그 비극을 극복하려는 처절한 안간힘, 눈물겨운 몸부림이 그 노래엔 스며 있었습니다.
 
국철 민영화의 희생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만이 아닙니다. 민영화 1년 전까지만 해도 국철노조 소속 조합원은 16만여 명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와 국철이 민영화를 선포하고 나서, 조합에서 탈퇴하지 않으면 민영화 이후 재고용 하지 않겠다고 압박했습니다. 전원 해고 후 선별 재고용이란 악랄하게 폭력적인 방식을 강행했습니다. 맞서 싸운 조합 집행부와 조합원 1047명은 해고됐습니다. 불과 1년 만에 12만명이 조합에서 이탈했습니다. 조합은 소수자로 전락하고, 민영화를 막을 힘을 상실했습니다. 그때 이탈한 사람들조차 평생 배반자라는 자책감 속에 살아가야 했으니, 그들 또한 희생자였습니다.
민영화 이후 철도 노동자는 27만명에서 21만명으로 줄었습니다. 무려 6만여 명이 생업을 잃어버렸습니다. 정도의 차는 있었지만 남은 자의 비참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회사쪽은 업무를 분할해 하청 재하청, 위장도급 등으로 쪼갰습니다. 그리고 한때 정규직이었던 이들을 모두 업무에 따라 자회사 협력회사 혹은 파견회사로 쪼갰습니다. 20만여 명이 비정규직으로 떨어졌습니다. 쫓겨난 이건 남은 이건 안녕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노래’가 될 수밖에 없었고 또 비장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면 정권의 ‘장밋빛 약속’처럼 민영화 이후 국민은 비용도 덜고 또 편해졌을까요. 일본 신칸센 가운데 가장 느린 고다마의 경우 우리 케이티엑스(KTX)보다 3.5배 정도 비쌉니다. 민영화된 영국의 기차 요금(5배 수준)보다는 조금 저렴하지만, 비싸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칸센은 사고가 없지만, 다른 저속 기차들이나 저속 노선의 경우 ‘사고철’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철도는 안전이 생명이지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력을 대거 감축했으니 안전은 희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도 민영화가 일본 국민에게 준 것은 안녕과 저비용이 아니라, 불안과 고비용입니다. 국철이 가장 먼저 민영화된 영국은 사고가 빈발하자, 시설 부문을 다시 공영화했습니다. 애초 민영 사업으로 출발한 미국의 철도는 아예 사업성을 잃어 국가에 의해 공영화됐습니다. 뉴질랜드는 민영화했다가 두 배의 비용을 들여 다시 공영화했습니다.
 
오비이락인지는 몰라도 철도 민영화 이후 1990년대부터 일본의 경제는 장기 침체에 빠집니다. ‘잃어버린 10년’ 혹은 ‘잃어버린 20년’이라고들 했습니다. 지금도 그 악몽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철도 민영화와 국철 노조 붕괴 이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는 해산되고, 노동권은 현저히 약화됐습니다. 자민당 정권의 ‘정경 복합체’는 더욱 강고해지고 부자가 됐지만, 국민은 가난해졌습니다. ‘평생 직장’ 개념은 허물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는 대거 사라졌고, 사회는 활력을 잃어갔습니다. 뒤이어 자산 가치가 폭락하고, 금융 부실은 커졌습니다. 정부가 돈을 주면서 쓰라고 해도, 국민들은 쓰지 않습니다. 쓸 수가 없습니다. 국민을 가난하게 했으니, 국가가 편할 리 없습니다. 자민당 정권도 결국 흔들리고 야당에 정권을 내줍니다. 장기불황의 출발점에 있던 것이 국철 민영화였습니다.
 
여야가 철도산업 발전 방안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오늘 노조가 파업을 풀기로 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번 합의가 또 다른 ‘사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노동자는 적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자, 우리 경제 체제를 지탱하는 지주입니다.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며 자본의 횡포를 견제하는 주체입니다.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지키는 힘입니다. 그들을 버리지 말기 바랍니다. 더 이상 국민을 향해 폭주하지 말고, 인간의 노래를 짓밟지 말기 바랍니다. 부당한 권력이 기대는 것은 폭력입니다. 반대로 오로지 폭력에 기대다 부당한 권력으로 축출되기도 합니다.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 염원을 음미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중에 음반이 없으면, 한겨레 평화의나무합창단에 문의하십시요.)
 
“깊은 상처 안고 사는 지친 어깨에/ 작은 눈길 건네는 친구는 있는가/ 고통 속에 누워 서러웁게 식어가는/ 차가운 손 잡아줄 동지는 있는가
희망의 날개 아래 어둔 슬픔 가두고/ 잊혀진 우리들의 기쁨을 노래하리/ 나는 부르리, 희망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고단한 삶의 아픔 미소 뒤에 감추며/ 함께하는 동지들을 믿고 있는가/ 앞서 스러져간 소중한 벗들을/ 가슴 뜨겁게 기억하며 싸우고 있는가
모두가 미소짓고 노래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을 이 땅에서 이루자/ 아픔을 함께하고 기쁨을 나누며/ 한 걸음씩 나아가자 인간의 길로
삶의 괴로움을 날개로 바꾸어/ 생명의 숭고함을 노래에 가득 실어/ 나는 부르리 평화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나는 부르리 자유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나는 부르리 인생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곽병찬 대기자>


철도노조 파업 20일째인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 참가자들이 청와대 방향으로 나가다 세종로 사거리에서 1차 경찰 차벽을 뚫고 도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철도 민영화 방지’ 숙제는 남았다

국회 중재로 ‘노·정 파국’ 진화
여야, 철도산업발전소위 구성
노조, 22일만에 파업철회 합의

소위, 구체적 의제는 안 정해
향후 논의과정 험난 할듯

국회가 모처럼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 구실을 해냈다.
철도노조 파업 22일째를 맞은 30일 국회는 국토교통위원회에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철도소위)를 설치하고, 철도노조는 파업을 철회한다는 합의를 이뤄냈다. 수서발 케이티엑스(KTX) 자회사 설립을 둘러싼 민영화 우려 등을 놓고 노사와 정치권, 정부,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댈 공론장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자회사 면허 취소나 명시적인 민영화 금지 여부 등을 둘러싼 노-정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여야 중진인 김무성 새누리당, 박기춘 민주당 의원과 국토위 여야 간사인 강석호 새누리당, 이윤석 민주당 의원은 29일 밤늦게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을 만나 국회가 국토위에 철도산업발전 등 현안을 다룰 소위를 만드는 대신 철도노조는 파업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또 소위 활동에 필요할 경우 여야와 국토교통부, 철도공사, 철도노조, 민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정책자문협의체도 구성하기로 했다. 이 합의문은 30일 오전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각각 추인됐다.
 
이어 국토위는 오후에 회의를 열어 철도소위 설치를 의결했다. 철도소위 위원장은 새누리당 몫으로 강석호 의원이 맡고, 새누리당에선 박상은·안효대·이이재 의원이, 야당에선 이윤석·윤후덕·민홍철 민주당 의원과 오병윤 통합진보당 의원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소위는 31일 오전 10시 첫 회의를 열어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철도노조도 31일 오전 11시부터 파업을 풀고 현장에 복귀하겠다고 발표했다.
국회의 소위 구성 합의는 정부가 수서발 케이티엑스 자회사 설립 면허를 기습 발급하면서 입지가 크게 좁아진 철도노조에 파업 철회의 ‘출구’를 열어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철도소위는 구성과 가동에만 합의했을 뿐 구체적인 의제가 정해지지 않아 향후 논의 과정이 험난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당장 민주당은 철도 민영화 방지법안과 파업 참가자 징계 철회 문제도 소위에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새누리당은 “합의문에 그런 말은 전혀 없다”(김무성 의원)며 선을 긋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위가 민영화 논란과 징계 철회 등을 모두 다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파업 철회로 일단 노사분규는 정리됐다고 볼 수 있으나 이제 민영화와 노동탄압이라는 국정 운영의 새로운 변곡점이 등장했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그동안의 강경 일변도 노동정책의 방향을 돌아봐야 한다”며 “소위를 통해 오히려 민영화를 추진하고 노조를 누르려는 움직임이 나온다면 사회 전반의 갈등은 더욱 커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은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정부의 대량 징계 방침이 나오면서 조합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사회적 논의를 하자면서 다른 한쪽으로 징계나 처벌의 칼을 휘두른다면 제대로 된 대화가 될 수 없다”며 “소위에서는 정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철도 파업에 따른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도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조혜정, 이정국 기자>



[철도파업 철회] 여-야-노조 타협안 어떻게 이뤄졌나

민주당사에 피신했던 노조간부 
29일 저녁 박기춘 의원한테 초안 받고 
노조위원장과 통화하며 절충 거쳐

김무성 의원은 청와대 동의 받아
자정께 3자 만나 합의문 서명

파국으로 치닫던 철도 파업 사태를 해결하는 물꼬는 정치권이 텄다. 청와대와 정부는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지만, 여야 정치인이 장기투쟁 채비를 하던 노조와 막후 협상에 나서 마침내 타협안을 끌어냈다.
지난 27일 철도노조 최은철 사무처장 겸 대변인 등 간부 2명이 경찰을 피해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 피신하면서 역설적으로 정치권이 본격적으로 나서는 단초가 마련됐다. 민주당이 먼저 움직였다. 박기춘 민주당 의원은 30일 기자간담회에서 “김한길 대표가 28일 나를 불러 당사에 들어온 노조간부의 신변 보호뿐 아니라 철도 파업 사태를 적극적으로 풀어달라고 주문했다”며 “그래서 29일 최 사무처장을 만나 여러 조건들을 협의했다.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요구하지 않기로 서로 얘기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민주노총 사무실에 머물고 있는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과도 파업을 풀기 위한 방안을 전화로 협의했다.
 
노조의 뜻을 확인한 박 의원은 원내수석부대표 시절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호흡을 맞췄던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에게 연락했다. 김 의원은 마침 박 의원과 같은 국토위 소속이었다. 지역구가 있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김 의원은 협상으로 문제를 풀자는 데 즉각 동의했다. 그는 급히 상경해 국회에서 박 의원과 만나 합의문을 조율하는 한편 황우여 대표와 최경환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 청와대 쪽과 협상안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김 의원은 30일 기자들을 만나 “박 의원과는 오랜 신뢰관계가 있었기에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며 “청와대 쪽에는 철도 파업을 방치해서는 새해 예산안을 처리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여야 중진의원이 적극 나서자, 협상은 빠르게 진전됐다. 최 사무처장은 이와 관련해 “29일 저녁 7시께 박기춘 의원이 합의서 초안을 들고 왔다. 그 내용을 갖고 중간에서 (민주노총에 머물던) 김명환 위원장과 계속 통화하며 절충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최 사무처장은 “초안 자체가 철도노조가 갖고 있던 (사회적 대화기구 마련 등) 생각과 비슷해서 합의안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박 의원과 김 의원이 합의안을 들고 29일 밤늦게 김명환 위원장이 머물고 있던 민주노총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사실상 합의가 끝난 상태였다. 김 위원장은 국회 국토위에 철도발전소위원회를 구성하고, 노조는 파업을 중단한다는 전화 절충 합의문 내용을 서면으로 확인한 뒤 곧바로 서명했다.
이 합의안은 30일 오전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았다.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도 이날 오후 파업 철회를 선언했다.
<김종철, 이정국 기자>



[민주노총 사무실에 사상 첫 경찰 투입]

경찰, 철도노조 지도부 9명 체포 이유로 강제 진입
지도부 이미 피신… 저항하던 노조원 등 136명 연행

‘자랑스러운 불통’을 내건 박근혜 정부가 ‘대화’보다는 ‘힘’을 기반으로 한 정치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철도파업 14일째인 22일, 1999년 합법화 뒤 한번도 공권력이 투입된 적 없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본부 사무실에 경찰이 강제진입했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전국철도노조 파업 지도부 9명을 체포한다는 이유였으나, 체포 대상자들은 이미 피한 뒤였다. 대신 강제진입에 저항하던 민주노총 간부와 노조원 138명이 연행됐다. 민주노총은 비상 중앙집행위원회를 연 뒤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 돌입하겠다”며 오는 28일 총파업 투쟁을 선언했다.
 
정부의 민주노총 강제진입에는 역대 최장기에 접어든 철도노조 파업을 우선 잠재워야 한다는 조급함이 배어 있다. 철도 민영화 저지를 명분으로 한 파업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수그러들지 않는 상황에서 의료·교육 등의 민영화(영리화) 논란으로 불이 옮겨붙을 참인 탓이다. 철로 위에 민영화 저지 대치전선이 그어진 상황에서 이를 조속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앞서 이번 파업을 “민영화 않겠다는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명분 없는 파업”으로 내몰고, 검경은 “철저한 법 집행”으로 호응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는 “청와대 강경 관료의 전략적 판단으로 보인다. 민영화 파업을 눌러야 노조를 제압하고, 다음 단계의 정책도 관철할 수 있다는, 말하자면 좋은 기회로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노조는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세력으로서 가장 잘 조직된 단체 가운데 하나다.
 
철도노조를 넘어 정권에 호의적이지 않은 노동계 전체와 확실한 선을 긋고 가겠다는 의지도 읽힌다. 민주노총과 철도노조, 시민사회는 민영화 논란의 핵심인 코레일 자회사 설립 문제와 관련해 꾸준히 ‘사회적 대화기구’를 제의해 왔으나, 정권은 보란듯이 강제진입으로 응답했다. 결국 앞으로도 대화보다는 물리적인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정권의 의지를 보여준 셈이다. 철도노조 관계자는 “대화를 추동해야 할 정부가 결국 최고의 노조 대표성을 갖는 기구조차 인정 않고 적으로 삼아 선전포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이날의 강경한 조처는 결국 정권의 정당성이 공격당하는 시국에 대한 역공이란 진단이 나온다. 정권 출범 1년이 다 되도록 답보만 거듭하고 있는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의혹으로 정권의 정통성에 시비가 이는 상황에서 기초연금 공약 파기, 민영화 논란, 정권 차원의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 의혹 등 악재가 꼬리를 무는 상황이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정권이 만들어진 선거 과정이 불공정한 사실이 드러나 정당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공약 파기 등으로 민심의 이반이 이는 상황에서 나온 조처다. 철도파업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높은데,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 추구를 억압하고 되레 민주노총이 이를 대변해주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나온 오늘 일은 정권의 정당성이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이 ‘정권 퇴진’ 구호를 들고나온 것은 새누리당이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강행처리한 2011년 11월 이후 2년1개월 만이다. 이제 힘과 힘이 맞부딪는 일만 남은 셈이다.
<전종휘, 임인택, 이정국 기자>